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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ㅣ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평점 :
재작년 11월에 이서희 저자의 <방구석 오페라>를 리뷰했었습니다. 이 신간은 조선의 오페라라고 할 판소리가 그 주제입니다. 몇 달 전 정년이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새롭게 판소리에 관심 갖게 된 독자들도 있겠지만, 막상 접해 보면 어렵지도 않고 한국 사람이라서인지 쉽게 공감, 몰입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감정 이입, 그러면서도 직관적이고 열정적인 해설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책은 모두 다섯 파트로 나뉩니다. 1장은 현재 대본 전체가 온전히 내려오는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다섯 마당을 다뤘습니다. "조선의 오페라"라는 말처럼 대본이 온전해야 그걸 판소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판소리는 본래 열두 마당인데, 나머지 일곱 마당은 아예 실전되었거나 일부만 전하는데, 일부라도 그나마 전하는 네 마당을 이 책의 제2장에서 다룹니다. 저자께서는 제2장 제목을 "잃어버린 조선의 아리아들"이라 붙였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죠.
판소리가 본래 신명 나는 놀이와 표현의 장(場)이지만, 특히 이 책에서 저자의 해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일 만큼 흥겹고 독창적입니다. 심청가는 우리가 효녀 이야기로만 알고 밋밋한 이야기려니 생각하는데 무대가 중국 송나라까지 확대되는 등 스케일도 넓고 신분 상승의 정도도 훨씬 큽니다. 하필 송나라가 배경일까 생각도 저 개인적으로 해 봤는데, 당나라 때는 귀족 사회여서 사회적 수직 이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여진, 몽고 등이 쳐내려와도 사대부들이 송조에 충성하며 끝까지 저항한 건, 이 나라가 그만큼 사대부를 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p35에는 심청의 효가 오늘날에 어떤 의의를 갖는지 저자의 힘찬 서술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엄마의 미모를 닮아 예쁘기로 소문났던 춘향은 마침 이 고장 남원 부사로 내려와 있던 이한림 사또의 아들 이몽룡과 우연히 만나 연을 맺게 됩니다. 롱디 연애 중이면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어야 했는데 무심한 몽룡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20세기 초 김영랑 시인이 말했듯 잔인하기까지 한 모습이 보이는 것도 솔직히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 여자들 같았으면 이런 타입은 변학도보다 더한 놈이라고 맞아죽을지도 모릅니다. p60에 점고라는 뜻이 나오는데 원래 지방관이 새로 부임하면 인력과 물자가 장부상의 수치와 일치하는지 점검하게 마련이죠. 기생 점고라는 말은 듣도보도 못한 말인데 이 춘향가 때문에 현대인들은 점고를 기생 점고라고만 알게 되었습니다. 19세기 관객들은 변학도 대사로 "기생 점고"라는 말이 나왔을 때 얼마나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겠습니까.
<삼국지연의>가 조선 후기에 어지간히 인기가 있었는지 <흥보가>에도 장비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고 현전 다섯 마당 중에 아예 <적벽가>(p86 이하)가 있기까지 합니다. 저자는 이 작품을 가리켜 "바람과 불의 교향곡"이라고 합니다. 공명이 간절히 동남풍을 청하고 악의 화신(적벽가 안에서는) 조조의 진영, 이미 연환계에 넘어가 모든 전선(戰船)이 묶인 상태여서 한번 불화살이 날아오자 생지옥으로 화하는 묘사가 박진감 넘칩니다. 저자의 평가대로, 지배층의 야욕에만 기인한 동원, 착취에 신음하는 기층민중의 원한과 풍자가 곳곳에 표현되었기도 합니다.
노래와 세부 표현은 없어졌지만 줄거리라도 일부 전해오는 네 마당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하네요. 숙영낭자타렁의 줄거리가 p154 이하에 저자의 맛깔난 설명으로 이어지는데... 백선군에게 몸을 허락할지 안할지를 놓고 망설이던 숙영은 결국 그와의 사이에 동춘, 춘앵이라는 아이들까지 둡니다. 숙영 낭자 같은 훌륭한 야인에게는 비틀어진 영혼을 지닌 매월 같은 쓰레기가 옆에 들러붙어 해코지를 하려 들기 마련인데, 현실에도 나잇값도 못하는 이런 인간이 꼭 있습니다. 백공 부부도 참으로 잘못하는 게, 숙영의 죽음 경위를 저렇게 잘못 전하면 망인을 두 번 욕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미에 저자는 바리데기 설화와 이 숙영낭자타령을 대조하면서 현대에 재조명될 여지가 훨씬 큰 게 후자라고 강조합니다.
책의 3, 4, 5장은 향가(鄕歌), (후대의) 고전시가(시조, 한시, 그 외 이야기), 고전소설 등에 할애되었습니다. 역시 독창적인 시각으로, 의외로 현대인들이 잘 모르는 고전에 대해서도 그 의의를 잘 짚어 주시는데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이 읽어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