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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의 경제학
헨리 조지 지음, 전강수 옮김 / 돌베개 / 2013년 9월
평점 :
선입견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주님, 언제 대체 저희가 주님께서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게 되신 걸 보고도 주님을 돌보아 드리지 않은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잘 들어 두어라.
너희 중에 가장 힘없고, 가난하며, 미천한 자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대목은 물론 기독교 성경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이 헨리 조지의 불멸의 고전 그 맨 앞의 발문으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헨리 조지라고 하면, 과격하기 그지없는 토지 단일세의 도입으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놓으려 했던 과격분자로 당대에 매도당하곤 했으며, 심지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 "marx의 뒤에 출현했으나 만약 앞 시대의 사람이었으면 그로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자' 정도로 비판 받았을, 치밀하지 못한 문학적 성향의 이론가" 정도로 인식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이름을 처음에 접한 것이, 고등학교 때 읽은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 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 책 제목은 내용을 오도하는 면까지 있는데요. 비록 초급 단계의 경제사상사를 다루고 있어 다양한 사상가들의 주장과 이력을 소개하는 책이었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해법과 진실을 찾아 나가야 할 학문의 과제가, 얕은 상대주의의 장벽에 의해 영원한 분단이라도 겪어야 하는 것이 운명이나 되는 듯 착시를 유발하는 점에서요. 읽어 보면 내용도, 이런 예단과는 정반대의 논지에 가깝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아무튼, 이 책의 후반부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여 헨리 조지를 설 명하고는 있었으나, 당시의 저는 그다지 강렬한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토지단일세라는 한 가지 수단으로 어떻게 일거에 사회 모순과 불의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방법이 단순한 것도 문제고(복잡한 문제가 단순한 해법으로 해결되길 기대하는 건 무모하고, 요행 심리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에서요), 세제의 개편은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근본의 방책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그간의 오해를 완전히 바로잡게 된 건 신선한 쾌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른바 진보 진영의 입장에 서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때도, 계급 일반을 목적어로 들거나("자본가 타도!" 등), 주체로 띄우는 편("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등)이 부담이 덜합니다. 계층(막스 베버적 의미) 아니라 계급(marx적 의미)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 개념의 공명은 추상적입니다. 반면, 세제(tax system) 지엽 부문을 건드리는 지적이나 논변은, 이에 해당하는 직접 영향권의 이해당사자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구체적인 반발, 반격을 예상하고 전략을 짜야 하는 행동가에게 더 구체적이고 어려운 과제를 주기 마련입니다. "폼이 나"지는 않으면서도, 실천에 옮기기는 또 어려우니, 행동보다 말로 하는 선전을 좋아하는 위선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밖에요.
이 책의 소개글에 보면, "한때 Marx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고, 톨스토이로 하여금 생의 후반을 georgist로 살게 했던" 이란 수식어가, 헨리 조지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습니다. 지금 감각으로는 "뭘 그렇게까지나?"하는 회의적 반응이나 불러일으킬 것 같지만, 그런 막연한, 그리고 잘못된 선입견은 이 책을 읽으면서 깨어지리라 기대합니다. 그가 제시한 토지단일세제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근본의 불의를 제거하는 발본색원의 처방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물론, 이를 단시간에 전면적으로 도입할 수는 없습니다. 꼭 심술쟁이 빌프레도 파레토 할아버지의 강력한 훼방에 발목이 잡혀서가 아니라, 그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무리한 독재적 조치들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고,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고의 선과 가치라 해도 정의라는 낮은 단계의 관문을 거치지 않았다면 없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세제 대원칙, 즉 "발생하는 소득과 부가가치를 우선적으로 과세 대상으로 삼는다." 는 명제는, 이 책에서 헨리 조지가 통렬히 비판하고 있듯, "열심히 흘린 땀과 창의력"을 모욕하고, 억제하며,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말처럼, "신이 인간과 동식물에게 내린 무상의 축복인 대지에, 어떻게 사람이 인위적으로 금을 그어 배타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백인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같은 생각은, 대지에 두 발을 디디고 오로지 지구의 중력에만 복종할 의무를 지닌 채, 사슬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 우리 인간이 당연히 그 머리와 영혼으로부터 떠올릴 수 있는 공감의 대상입니다. 대 체 어느 공동체가, 노동과 창의적 사고를 장려하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그에다 벌칙을 부과할 수 있습니까? 공공의 서비스 기능을 가동하기 위한 재원인 조세의 징수는, 육체적, 정신적인 그 어떤 노동이나 기여도 하지 않는 블로소득, 자산으로부터 우선적으로 이뤄저야 함이 당연합니다. 이는 (헨리 조지의 말처럼) 자연의 정의인 것입니다.
Marx 는 말하기를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그 원인과 구조를 직시하지 않고, 도피적 환상에서 그 탈출구를 찾는 일체의 행태를 두고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비유이자 경구라서, 딱히 종교를 모욕했다는 식으로 편협하게 받아들일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헨리 조지는, 이 책 도처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들 중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하고 지상에 내려온 구세주의 가르침을, 그가 본디 말했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왜곡 없이 실천에 옮기자."는 취 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본디 무력과 폭력, 기만과 착취, 억압과 모멸로부터 헤방되고자 했던 민중의 의존처였는데, 이것이 어찌하다 가진자, 지배층의 편한 도구로 타락하여 지상에서 정반대의 기능을 하고 있으니, 헨리 조지, 그리고 그와 뜻을 같이했던 수많은 행동가, 그리고 베링 해, 시베리아를 사이에 두고 다른 대륙으로부터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던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의 개탄 대상이 되지 않았겠습니까(톨스토이는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구두수선공이 만난 예수> 같은 감동적안 동화를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의 저 구절이 모티브죠). 이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헨리 조지는 사회 모순의 지적과 그 근본적 해소를 주장하는 점에서 Marx와 공통적이나, 그 방법론에 있어 보편적 휴머니티에 더 깊은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Marx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진보와 빈곤>은 현재 한국어판으로도 여러 책이 나와 있고, 헨리 조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우리의 뇌리에 새겨진 터라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헨리 조지의 삶과 사상에 가장 정통한 전문가이자, 실천적 조지스트로 꼽힐 만한 전강수 교수님의 번역으로 이번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전강수 교수님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김수행 교수님의 제자 중 한 분이시기도 하고, 김수행 교수님이 언제나 견지했던 글쓰기 원칙 중 하나인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문장"의 구현에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아 오신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최고 장점은, 말 그대로 소설처럼 잘 읽힌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첫째, 헨리 조지 자신이 워낙 막강한, 감동적이고 호소력 짙은 문장을 구사하는 필자이기도 했고, 둘째, 이 전강수 역자가 헨리 조지의 사상에 정통한 전문가라는 사실, 마지막으로, 전강수 교수님 본인이 빼어난 문장가이자 박식한 저술가라는 사실에 크게 힘입습니다. 소설처럼 잘 읽히는 문장에, 풍부한 역주까지 달려 있기 때문에, 고전을 읽는다는 부담이 전혀 없이 마치 진보언론의 칼럼이나 독파하듯 책장이 잘 넘어갑니다. 잘 넘어가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매 페이지마다 사회 모순과 인간성 본연의 문제에 대한 각성을 쉼 없이 떠올리게 합니다.
이 책은 헨리 조지의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 줄 만큼, 빼어난 창작 문장과 명구의 인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루이 블랑의 유명한 경구 "능력에 따라 생산하며,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를 제가 영어 원서에서 찾아 보니 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ies; to each according to his wants,라고 되어 있더군요(루이 블랑은 물론 불어로 저 말을 했겠지만). 영어로 읽으나 한국어로 읽으나 입에 착착 감기는 참 아름다운 레토릭입니다. p121 중간 쯤에 보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가 있죠? 이는 구약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밟아 떤"다는 건 탈곡 작업을 말합니다.
이 책은 역사서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습니다. 책에는 당시 폭력적이고 파렴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른바 robber baron들의 이야기가 가득 나옵니다. 벤더빌트 제이 굴드, jp 모건... 그런가 하면 극심한 기근이 덮친 고향을 떠나 대거 신세계로 들어 와서 사회 최하층부를 구성했던 아 일랜드 이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실려 있죠. 헨리 조지는 이들을 가리켜, "인간 쓰레기"라며 다분히 역설적인 호칭을 부여합니다. 물론 그 동기에는 정의로운 분노가 깔려 있죠. "어떻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동족을 이처럼이나 비참한 지경에 방치할 수 있는가?"
130여년 전의 책이 현 사회에 무슨 개선에의 시사점을 던져 줄까? 같은 회의가 드는 분은 이 대목을 읽어 보십시오.
p32:9
소규모 가게주인과 소상인들은 대기업의 영업사원이나 직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우석훈이나 김용민, 김어준 책에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130년 전에 저술된 바로 이 책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고전은 무엇을 고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바로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도 퇴색하지 않고 유효하게 적실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는 책 아니겠습니까.
이 책의 원제는 social problems입니다. 그렇죠. 그저 <(제반)사회 문제>입니다. 대단히 겸손하고(?) 온건한 제목입니다. 한국에서 헨리 조지에 가장 정통한(이론과 실천 모든 면에서) 전 교수님이 옮긴 이 한국어 번역본은, 보시다시피 <사회문제의 경제학>입니다. 진보 경제사상가의 고전은 거개가 사 회적 문제 논의에 초점이 맞춰진 성격이므로, "경제학'이라는 말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에게는 "사회학 = 경제학"의 등식이 성립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예컨대 "두 분야의 만남" 같은 규정은 그 인식의 깊이 없음을 드러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 책은 사회적 문제를 논급하며, 기초적 수준의 시장 원리 지식을 분석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번역판의 저 제목은 자칫 소활해 보이는 첫인상을 만회하기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전강수 교수님의 문장이 참 좋습니다. 예를 들어, p197:9의 긴박(緊縛) 같은 단어를 보십시오, 토지에 예속된 농노 등의 처지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인데, 저는 이 단어를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 보기까지 했습니다. 사전의 정의로는 "[명사] 꽉 졸라 얽어맴"이라고 나옵니다. "와, 어제 준플레이오프 긴박감 쩔?便?여? " 할 때 그 긴박緊迫은 아닙니다. 이처럼 교수님의 문장은, 잘 읽히면서도 적확한 어휘를 구사하시고 있다는 점이, 독자로 하여금 고마움과 즐거움을 느끼게까지 하는 부분입니다.
고 전을 읽다 보면, 특히 그것이 경제문제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면, 아무래도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을 하고 있기가 쉽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손쉽고 경박한 비판을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과 재발견의 자세로 독서에 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고전에서 허점을 찾아 내는 일은, 마치 청출어람의 분위기처럼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의 뿌듯함을 실감할 수 있어 지식 쌓는 보람을 느끼게도 해 줍니다.
p160 이하의 12장 "과잉생산" 챕터를 보십시오. 헨리 조지는 이 장에서, 어느 한 섹터의 생산이 증가하면, 그 재화의 가격은 하락하며, 이 내려간 재화를 구입하게 된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소득이 증가하게 되어(쌀값이 만원에서 9천원으로 내려갔다면, 개인은 [가처분]소득이 1000원만큼 증가한 셈이겠죠?), 다른 재화를 구입할 여력이 늘어납니다. 이는 다른 재화의 소비까지 촉진하게 되고, ... 이 선순환은 끊임 없이 이어져, 사회는 공황이라는 것을 모르게 된다는 주장입니다(헨리 조지의 시대에도 대규모 불경기는 주기적으로 사회를 엄습했습니다). 어떠신지요? 네. 느끼신 대로, 이 주장은 지나치게 나이브하고, 다양한 내외생변수의 개입을 무시한 단순화입니다. 이 당시에는 (정치하게 이론화된 상태로)알려져 있지는 않았겠으나, 재화의 가격 하락은 대체효과와 소득효과를 동시에 부릅니다. 이것이 당해 개별 재화의 가격에 미치는 영향도 정확히는 알 수 없고(대부분은 수요 증가로 나타나겠지만), 하물며 타 생산 부문에 미치는 영향을 올바로 계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헨리 조지는 놀랍게도, "그 재화를 사용하는 다른 생산분야의 원가 하락"마저 유발하여, 이 지복(至福)의 파장이 그칠 줄 모르고 확대된다고까지 하나, 이는 그야말로 과격한 일반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재화가 현실에서 존재하는 예라면, 아마 석유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티셔츠, 피자, 운동화, 영화관람료처럼 대중적인 소비 섹터에서도, 그런 "일타삼피"의 꽃놀이패를 찾는 일이란 극히 어려울 뿐입니다. 현대의 네트웍이나 산업 연관 관계의 복잡성은, 그런 단순한 처방을 거부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세분화한 개인의 개성 발달도 이에 한몫합니다. 오늘 당장 토니모리의 50%세일이 개시된다고 해서, 바로 인접한 못된고양이 매장의 매상고가 과연 조금이라도 증가할지의 여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런 주장은 마치 "정직이 최상의 책략이다." 같은 속담의 타당성만큼이나 현실에서의 힘이 약합니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검은 속셈을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은 채 신사협정을 맺고 혼자 준수할 수 있을까요? 나 혼자 깨끗하다고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최악의 사기꾼에게 좋은 일만 시켜 주는 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의 대가에게 그 좋은 점을 칭찬해 줘 봐야, 상대는 좋은 과실만 챙기고 입을 씻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이 사람은 이미 선행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악에 어리석은 방법으로 공헌한 자도, 똑같은 악행의 실천에 공범으로 가담한 것이기 때문이죠. 헨리 조지의 저 아이디어(12장에서 논한)가 문자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동시간대에 모든 인류가 휴머니즘으로 제 영혼을 정화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체의 경제적, 사회적, 개인적 부조리와 악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악과 이기심이 일소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복귀했다는 전제 아래 저 처방은 타당합니다.
다만 헨리 조지의 아이디어는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다 줍니다. 우선 그보다 앞선 시대의 경제학자인 세이가 주장한 (이른바) 법칙의 내용을 보십시오, 터무니없게도, 이분은 "모든 상품은 결국 시장에서 청산되게 운명지어져 있으며, 일반적 과잉생산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폈죠. 겉으로 봐서 후대의 헨리 조지가 한 말과 표현이 똑같습니다. 다만 세이가 한 말은, 시장의 전지전능성을 강조한 극단적 보수파의 입장이고, 헨리 조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독점자본가의 탐욕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아주 선명한 대척을 이룹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유와 배경이 전혀 다르나, 결과적으로 동일한 명제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순진한, "숭고한"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합니다.
다 음으로 다른 시사점도 있습니다. 헨리 조지보다 한참 뒤의 사람인, 케인즈를 떠올려 봅시다. 이 사람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뭡니까? "경기가 나쁘면 돈을 찍어내 뿌려서라도 경기 부양에 나서야(아베도 요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지, 시장만 믿다가는 다 죽는다."죠. 근데 이 이야기도, 저 위에 제가 적은 대로(당연히 이 책에 나온 대로), 헨리 조지의 주장과 통합니다. 이것은 개별 명제의 우연적 일치가 아니라, 아예 기조와 본의까지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만 케인즈의 생각은 "가난한 다수를 구할 수 없는 사회는 부유한 소수도 구할 수 없다."는, 소수 귀족 엘리트의 체제 수호 본능과 우수한 지성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죠.
번 역에서 몇 가지만 지적했으면 합니다. p33 중간 쯤에 보시면 아서 대통령의 언급이 나옵니다. 체스터 a 아서는 미국의 21대 대통령인데, 영화 <다이하드 3> 중에서 "퀴즈"의 소재로 잠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폭발물이 설치된 학교 이름). 첵에는 역자의 보충 설명을 통해, "낙선한 아서가 낚시를 하러 가자 철도회사들이 가차없이 잘라버렸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입니다.
체 스터 a 아서는 일종의 정치 청부업자 같은 유형으로 수완이 좋아 대통령까지 된 사람인데요(영화 <다이하드 3>에서는 새뮤얼 잭슨의 입을 빌려 "세무공무원이 대통령까지 출세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국세청장직은 엽관행위로 따 낸 자리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본가들의 후원을 받아 부통령 지명을 따 내고, 가필드 대통령의 암살 후에 그 직을 승계했으나,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중추수노선을 걷습니다. 유명한 조치로, "기차에서 흑인들도 차별 없이 좌석에 앉을 권리"를 법제화한 일이 있죠(이게 현실이 되려면 이후 백 년이 더 지나야 했지만요). 이 조치로 특히 철도회사에서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업무가 산적한 현직 대통령이 플로리다로 낚시를 떠난다고 하자(당시에는 워싱턴에서 플로리다까지 가려면 대단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들 철도회사들이 보복 차원에서 직무 태만을 걸고 언론을 통해 그를 집중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체스터 a 아서는 정치적으로 재기불능이 됩니다. 원문의 deadhead는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고, 역자의 설명은 틀린 것입니다.
p119의 아래 8째 줄을 보십시오. 잘 이해가 되십니까? 이 문장은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re are those who constantly talk and write as though whoever finds fault with the present distribution of wealth were demanding that....
이 문장을 본 뜻이 살아나게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의 부(富) 분배 시스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마치 예외 없이 ....... 를 일치되게 주장하기라도 하는 양,
덮어놓고 매도하는 필자와 논자들이 있다.
이렇게 쓰면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책의 그 번역은, 전 교수님이 올바로 이해하신 바를, 독자로 하여금 다른 방향으로 오도할 모호성을 띠고 있습니다.
p116의 "미드 나이트 미션"은, 한국어나 영어나 아무 이유 없이, '미드-나이트'로 띄어쓰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여기서 띄어쓰기를 하면 다른 뜻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고유명사이니만큼 그 중요성은 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