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국세(國勢)는 단지 싸구려 물품 시장을 뒤덮다시피 한 물량공세나, 축구 거대 리그의 주경기장 광고판을 도배하듯 점거한 그 다양한 디자인의 한자 물결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어제까지 세계 굴지의 상표와 브랜드로 빛나던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오늘 갑자기 국적을 중국으로 갈아탄 채 머쓱한 모습을 내밀고 있는 미디어의 기사, 사진에서도 절감할 수 있어요. 세계 인구의 1/5이 거주해 왔고, 이 제 그 덩치값을 하느라 미국을 넘어 경제규모 1위, 그리고 동아시아의 패권자 위치를 향해 발돋움하는 모습이란, 개인적으로 달가워하든 그렇지 않든, 받아들여야 할 냉정한 현실입니다. 지록위마의 기만도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하겠죠. 우리 지척에서 거인의 키높이로 저만큼이나 솟아 오른, "진격해 오는" 실체를 애써 부인하는 일은 바르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못합니다.
오랜 기간 이른바 "도광양회"를 모토로 숨 죽이며 실리를 다져 왓던 중국은, 흔히 2008년 국제 금융 위기를 고비로 본격적인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들 말합니다. 그 러나 이 책에서 드라마틱하게 드러나듯, 중국은 이미 그보다 다소 앞선 시기부터 넉넉히 축적해 둔 외화를 밑천으로, 세계 금싸라기 기업을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AS 좋고 디자인, 성능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IBM(국내에선 한때 LG와 파트너십을 맺었죠. 알짜 노하우를 잘 배워 나간 LG는 이후 엑스노트라는 고급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고요)은, 놀랍게도 자사 간판 부문 중 하나인 노트북 사업을,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레노보"라는 회사에 넘깁니다. 아마 국내 마니아들도 당시 충격깨나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책을 보면, 911 이후(미국이 본격 "중국"에 대한 무력 견제에 들어간 시점이 이 때라서, 기준으로 했습니다) 위기의식과 자신감을 동시에 갖게 된 중국이, 얼마나 글로벌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텃밭"을 넓혀 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노보의 예는 그저 드러난 일각에 불과합니다. 책을 보시면, 어지간히도 세계의 노른자를 이들이 탐욕스럽게(자본주의는 본디 탐욕을 그 추동력과 영혼으로 삼습니다) 잠식해 나갔는지, 다큐를 보듯 실감 가능합니다(본디 다큐 대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제가 문장의 주어를 자꾸 "중국"이라는 추상명사(?)로 잡아서 오해가 있으실 수 있지만, 공산당 1당이 영도하는 폐쇄적 정치체제를 가진 이 나라의 일이라고 해서, 국가 주도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만(이런 걸 배우려고 이 책을 읽는 거겠죠), 주인공들은 역동적 기업인들이고, 이들은 (물론 당국의 규제와 감시를 상대적으로 받는 편이지만, 탄탄한 인맥- 소위 "꽌시"-에 의해 비껴나갑니다. 그것도 사업 수완, 룰의 일부입니다) 대단히 탁월한 수완과 과단성, 속도감 있는 결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 프로젝트를 실현해 나갑니다. 이 책은 주로 중국 굴지의 재벌들이 어떻게 글로벌 기업을 식성 좋게 꿀꺽해 나가는지 그 스토리를 담은 책입니다.
중 국 기업에 한(限)한 이야기들인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 비사, 그리고 그 뒷이야기(대실패로 끝난)도 실려 있죠, 이는 널리 알려진 스토리라 새로울 건 없지만, 이 사태를 "중국"이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소재가 됩니다. 같은 국적의 두 기업이 합병해도 기업간 문화 차이 때문에 트러블을 겪는데. 하물며 후진 중국이 세련된 유럽-미국 기업을 "먹는" 사례에 있어서 그 갈등과 알력이 어느 정도겠습니까. 말이 좋아 문화 차이로 얼버무리고 말죠. 제 경험으로, 아직 중국은 평등한 개인 사이의 계약 문화, 리걸 마인드가 정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볼 보와 지리(吉利) 합병의 이야기가 재미있죠? 요즘 차를 몰다 보면 옆차선에 Volvo라는 트레이드마크가 새겨진 중장비가 지나가는 걸 종종 볼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대로, 세단 부문(Volvo Personvagnar)은 이미 포드에게 넘어갔고 그 포드가 다시 지리(Geely)에 지분을 넘긴 거죠. 볼보 본사는 이 책에 나오는 대로, 현재는 상(商)용차 제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따분한 이야기, 예컨대 미국은 스톡홀더의 이익을 중시하는 반면, 독일은 스테이크홀더의 입장을 중시한다 같은, 너무 자주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것 같은 이야기도 박스로 쳐 두고 강조하고 있긴 합니다.
각 장의 제목도 따분하게 붙여진 것도 있지만, 예를 들어 5장을 보시면 Capital Vehicle이라고 붙여져 있네요. 한국어 번역(중국어?)은 "자본의 동맹"이랍니다. 영어 제목은 저게 CVM이라는 유명한 회사 고유명칭이기도 해서, 묘한 레토릭의 즐거움을 줍니다. 여기보면 치파(이탈리아 기업이므로 "치"라고 읽어야겠죠)의 CEO로 페라리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페라리라고 했다가 페라레라고 오타를 냈다가 해서 헷갈릴 수 있지만, Maurizio Ferrari라는 인물이 지금도 (직위만 바뀐 채) 재직 중입니다. (자동차 이름과 철자는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건, "아 중국이 이탈리아 콘크리트 제조사도 사 들이는구나. 돈 많군." 정도가 아닙니다. 미국은 몰라도, 특히 이탈리아 세습 귀족 특권층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 지분은, 미국 사업가들에게도 잘 팔지 않습니다. 하물며 중국인이라면, 비드만 쎄게 제시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그간 중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죠.
인수합병의 사례, 실례만 재미있게 풀어 주고, 이론화한 정식을 제공하지는 않는가? 깊이 있는 이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내용은 교과서를 찾아 봐야겠죠. 그런데, 보통 documentary book이 그렇지만(제가 두 달 전에 쓴 <퍼펙트 베이비>도 그런 구성이었는데요), 방송 회분이 종료되면 한 장(章)도 끝나는데, 각 장의 말미에 <심층 분석>섹션이 꼭 부록으로 붙어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요건 볼만합니다. 학자와 연구원, 정책 결정 고위층의 논문, 르포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방송 스크립트다 보니 좀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부분은 서플먼트라서 그럭저럭 깊이가 있습니다.
<심층분석>이 라고 해서 다 읽을만하다는 건 아닙니다. 어떤 건 중국 저작 특유의, 유아적 인상 비평으로 가득해서 또 한번 실소가 나오는 것도 있었죠. 보고서라든가 실용 문건은 자신의 주관이나 감성을 최대한 자제하고, 수치나 통계 등 객관적 지표를 우선해야 하는데, 마치 무협지에서 절대 선(善)으로 설정된 주인공이 악당을 향해 장엄한 단죄, 선고나 내리듯 평가어 일변으로 일방을 옹호, 타방을 매도하는 품이 우스웠습니다. 미숙한 정신의 고유한 특징이고, 이런 점에서 아직도 중국은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 중국인 저자 일변인가? 그렇지는 또 않아서, 교세라 회장 이나모리의 회고담을 옮겨 놓은 것도 있고, 책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인 잭 웰치의 인터뷰를 실어 둔 것도 있습니다. 후자는 <21世紀 經濟報導>의 인터뷰를 재인용한 것입니다. 원문은 http://www.21cbh.com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이 아직 유치한 걸음마를 떼지는 못 했지만, 나름 치열한 고민도 적잖게 하고 있는 중임을 엿볼 수 있어요.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번역이 너무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원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입니다. 문장 교열이 부실하고, 개념어의 번역도 대단히 어지럽습니다. 역자는 중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옮겼다고 하는데, 이런 책을 옮기려면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확립된 용어가 무엇인지나 파악하고 나서 작업에 손을 대어도 대어야 할 겁니다.
p83:7 스티글라츠 → 스티글리츠. 이 줄에서는 띄어쓰기도 엉망입니다.
p120에서, 1988년이 아니라 1998년입니다.
이 때는 리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 리빌딩을 막 끝낼 무렵인데, 다임러와의 합병 같은 걸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M&A 관행이 아직 성숙기도 아니었음은 당연하구요. 단순한 오타가 아니라, 국제 M&A 역사에 대한 기본 인식이 안 되어 있는 소치입니다.
p110 64억이 맞습니다. $85억은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모르겠네요.
p38 일본인은 한때 더없이 풍경이 아름다웠다..... → 말도 안되는 문장의 개입입니다. 아마 "더없이 낙관적인 장밋빛 전망을 가졌다." 정도로 오역한 것 같습니다.
p39 미국 뉴스워크 지 → 뉴스위크 지
p56 에 보면, 1915년 독일인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법을 두고, "적과의 조례 교섭"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이건 사람이 한 번역이 아니라, 기계의 솜씨 같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Trading with the Enemy Act of 1917를 두고 한 말 같은데, 불특정 독자들이 읽는 책에는 최소한의 성의가 들어가야 합니다. 저술이란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건 학부생 레포트라 해도 F 맞습니다.
p122에 보면 "감사위원회" 가 나옵니다. 이는 독일어 Aufsichtstrat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지만 적절치 않습니다. 한국어 위키에 보면 '감독위원회'가 나오는데 이게 그나마 무난합니다. 참고로 저 위키 페이지는
Aufsichstrat라고 오타를 냈는데, 이것 역시도 틀린 겁니다. Aufsicht가 "감사, 감독"의 의미이고, Rat가 "의회, 회의"의 뜻입니다. Bundesrat 같은 단어에서 흔히 보는 거죠.
독일의 Aufsichtstrat는 우리나 미국, 일본의 감사하고는 다릅니다. 노동자의 참여Mitbestimmung 가 보장된 점에서이죠(주주 아닌 채권자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스테이크 홀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 미, 일의 감사는, 물론 이사나 주주도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제 3자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Aufsichtstrat 를 감사역회라고 번역하는 곳도 있는데, 정확하지도 못할 뿐더러 일제 잔재 용어를 의식 없이 쓰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 "~역"은 대개가 다, 순화되지 못한 일본식 용어입니다. ("취체역"이라고 할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