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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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의 미발표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2000년 이후 그가 머물며, 노년의 웅숭깊은 사색의 산물로 글을 풀어 내고 빚어 온 바로 그 거처를 선생과 그 주변에서 노란 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노란집에서 나온, 언제나 활력에 가득 차 뜨락을 자기 영역으로 누비고 다니는 병아리들이 우리에게 끝없는 영감을 제공하듯, 물리적 노년에 접어드셔서도 젊은이를 압도하는 에너지, 긍정의 아우라, 그리고 재치를 곁들여 특유의 현실 비판이나 깊은 통찰을 보여 주신 선생님, 그 최후의 흔적과 가르침이 전혀 못 보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처럼 출현함은, 신의 선물, 혹은 저 멀리 계신 당신의 반갑기 그지 없는 마지막 인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선생의 유작 모음이, 산뚯한 저 그림들(이철원 선생의 솜씨들입니다)과 곁들여져, "노란(갓 피어난 생명의 활기와 유쾌함을 상징하는 색깔)집"이라는 타이틀로 엮여져 나옴은, 앞서서 말한 대로 물리적 죽음의 유산임을 어쨌든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생전의 선생은, 언제나 활력과 위트를 뼈 있는 가르침과 폭 넓은 각성에서 빼 두신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거창한 의미 부여에 자신과 독자를 매몰시키려 드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 주셨으면 하는 우리의 기대에 의외로 잘 부응하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노란집에서 그가 쓰시고 이렇게 남긴 글들, "노란집"이란 제목을 달고 예쁘게 나온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유작의 느낌보다는, 언제나 선생이 발랄하고 거침 없이 발화하던 그 어조 그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매번 보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선생은 데뷔작 나목에서부터, "그 많던 싱아...", "아주 오래된 농담"에 이르기까지, 참 한결 같으신 모습이었습니다. 선생은 이 유작, 미발표 원고 모음에서도, 전혀 변하시지 않고 그대로인 모습,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쓰신 글들에서도 생전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인격과 작풍의 일관성이 그대로 배어 있기에, 우리는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아픕니다. 정직하고 고지식하게 자란 어린 시절의 일화("사탕가게의 깨어진 유리창"), 장년의 뒷부분에 들어 겪은 한 지인의 아드님 결혼식 참여 회상("소탈한 결혼식과 서툰 주례사의 스승"), 몸에 배지 않은 어색한 존칭과 격식 그 이면에 자리한 가식과 불성실에 대한 풍자("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어느 것 하나 생전의 그 위트와 풍자, 일침과 다정한 미소의 묘한 공존에서 벗어나는 게 없습니다. 그는 노란집 아니라 생전 그 어느 시점, 사후의 한 길목에서도, 놀라운 일관성으로 그의 언어를 전달합니다. 그 말에는 한 사람이 짓고 가꾸었다 여기기 좀 힘들 만큼 다양한 숨결이 녹아 있습니다만, 그 색채와 일관성이 워낙 설득력 있게 배어나는 터라, 읽는 이들은 언제나 그 곁에 머물러 줄 것만 같았던 바로 그분의 체취를, 어려움 고마움 없이 흡입하는 공기처럼 그저 소비할 뿐입니다. 이래서 더 아쉽고, 이래서 더 슬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생의 지난 글들이 언제나 그랬듯, 읽고 또 읽어도 물리질 않습니다. 그래서 신기합니다. 가뜩이나 반복 반추가 가능한 웅숭깊은 글들을 남기고 가신 분인데, 또 이렇게 예쁘고 선생 당신 다운 책이 나왔으니, 서글프게도 또 당분간 당신의 부재를 잊을 수 있습니다. 생전에 그리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던 당신이, 사후에조차 또 이런 유산을 예비해 두셨으니, 우리는 진정 당분간은 아쉬운 줄 배고픈 줄 잊고 살 것입니다. 끝없이 희망과 공염을 산출하는 그 아늑한 "노란집의 노란집" 덕택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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