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0배, 재택창업으로 퇴사합니다 - 고졸 흙수저의 억대연봉 성공스토리!
이승주 지음 / 생각수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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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온갖 종류의 사기꾼들이 곳곳에서 판치며 선량한 사람들을 노리는 사회도 참 보기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자께서는 p45에서 대뜸, 갓 군을 제대한 젊은이에게 바로 접근하여 거액의 돈을 앗아간 악질을 회상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월천, 아니 월 1억을 왜 벌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어집니다. 사실 사기꾼들도 아무한테나 접근하여 사기를 치려 들지는 않습니다. 저자처럼, 젊은 나이에도 많은 돈을 벌고, 어떻게든 돈 벌 방법을 강구하여 결코 자신을 궁핍 상태에 방치하지 않는 사람한테라야 하다못해 사기꾼들도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것입니다. 저자는 아직도 젊은 분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특히 젊은 독자들이 이런 분을 보고 본을 받아야 그 장래에 먹구름이 끼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도 여태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었으나 일일이 리뷰를 올렸던 건 아닌데(의무서평은 예외), 이 책에서도 저자는 자신의 책에 사기꾼 이야기가 빠진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로서 저는 이 저자분이 사기꾼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사기꾼들의 각종 창의적인 수법들은, 그 반사회적 범죄적 성격만 좀 빼고 읽는다면, 그 우아하고 테크니컬한 면모로부터 관객들(?)의 감탄을 이끌어내는 면이 분명 있습니다. 일찍부터 월 1억, 아니 월천을 벌고 싶어하는 젊은 독자들도, 이런 사기꾼들의 수법을 미리 잘 알아 둬야 앞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또 그런 사기 수법이나 유형으로부터 역으로 사회 구조나 법체계에 대해 거 실체를 파악할 수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p64에서 저자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혹시 아직 부족한 점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적어도 내 평생 먹고살 방법은 마련해 두었다고, 내가 만든 수익구조를 평가할 수 있다." 솔직히 저는 이승주 대표의 책을 읽으며, 아 이런 방식은 나 혹은 다른 독자들도 충분히 참고할 수 있는 유익한 시스템이겠지만, 저런 건 이 대표 본인 같은 분 아니면 남이 쉽사리 따라하기 힘들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자신감, 정글이나 사막 한복판에 갖다던져 놔도 나는 어떻게든 내 수완으로 살아올 수 있다는 확신만큼은, 특히 젊은이들이 정말로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게, 월천을 벌 수 있다가 아니라 "벌어야만 한다"인 점도 우리가 다시 그 뜻을 되새겨봐야 하겠습니다. 

이승주 대표의 책은 솔직한 점이 또 마음에 듭니다. 사실 이 대표쯤 되면 마케팅 주제 정도애 대해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강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p86에서 말하듯 요청이 들어와도 구태여 응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강연료로 몇백씩 받아봐야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짜 실전에서 통하는 마케팅의 비법은 그걸 고작 수백만원 받고 팔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전부는 아니겠으나, 마케팅 강의를 하는 강사분들은 알고보면 실제 마케팅을 해 본 분들이 아니라 강의로 돈을 벌기 위해 전문적으로 강연 교육을 받은 이들이 상당수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강연을 들어봤자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반면 이 대표는 지인, 은인들의 업체를 방문하여 영업이 잘 안 되는 곳은 상호나 여러 홍보 방식을 바꿔 사람이 꽉꽉 차게 거저 바꿔 줬다고 합니다. 참 멋집니다. 

사회 생활을 할 때 인맥 관리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부고나 청첩을 아무한테나 보내며, 끝에 동시발송 문자임을 양해해 달라는 문구 하나를 딸랑 덧붙이고 면피하려는 사람은 그게 제정신일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도 이런 행태를 지적(p112)하며 크게 불쾌해합니다. 책 앞에서 지인에게 영업 노하우와 마케팅 요령을 무료로 가르쳐 드린 일화에서 볼 때, 저자는 인맥 관리에서 진정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분으로 보입니다. 어디서 사회생활을 어설프게 배운, 별 능력도 없는 저급 속물이나, 저런 동발부고문자 수백 통을 스팸처럼 보내는 몰상식한 짓거리를 하는 법입니다. 

염색사 시험이라는 제도가 있는가 봅니다. 이 대표의 책은 어느 것이라도 그의 부분적 자서전처럼 읽히는데, 젊은 나이에 그런 직업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먼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찾아가는 모습이 참 대견하게 여겨졌습니다. 시험에 나오는 건데 안 가르쳐 준 학원 선생님을 원망하며, 여튼 되는 대로 엉터리 답을 써 낸 임기응변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읽었으며 그래서 붙으셨다는 결론이겠지 짐작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기어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그때 붙었다면 난 지금처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p156)" 월 천을 월급으로 받아도, 거기에 만족하고 살아온 사람은 그 한계를 결코 못 벗어난다는 게 그의 결론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오로지 자기 힘으로만 그 많은 돈을 번 사람한테 그 비결을 들으라는 충고에 큰 힘이 실렸습니다. 그 버스 안에서, 몇 분 간격으로 천만원, 칠백만원 입금 문자가 계속 찍히던 젊은 여성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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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 리스트
나태주 지음, 지연리 그림 / 열림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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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 20일에 국민시인 나태주 시인의 <오늘도 나는 집으로 간다>를, 5월에 김지수 에디터의 인터뷰 책 <나태주의 행복 수업>을 리뷰했었습니다. 이제 시인의 신작 시집 <버킷 리스트>를 펼치는데, 우선 그 제목부터가 독자를 숙연하게 합니다. 버킷 리스트라는 말 자체가, 이제 생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으신 시니어분들만이 거론하실 만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책은 3부로 나뉘었는데 1, 2, 3부가 모두 버킷리스트란 제목이며, 단지 각 부제가 "해 보지 못한 일", "가장 많이 해 본 일"," 꼭 해 보고 싶은 일"로 다를 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시집에는 서시(序詩)가 따로 붙었는데 그 제목도 <버킷 리스트>입니다. 이 시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만 시인께서는 참 젊고 발랄한 감각을 언제나 자랑하는 분입니다. 운문 중에 괄호를 거리낌없이 붙이는 것도 격식에 얽매이는 분이라면 그리 쉽게 시도를 못 할 일입니다. 또 우리 독자들도 익히 알듯 시인께서는 사모님과 참 금슬이 좋으신데, 서시의 버킷리스트에는 그분께 실연당하기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런 달콤한 실연이라면 첫째 안전장치가 달려서 마음이 놓이고, 둘째 실연으로부터 그 달콤함만 뽑아서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젊은이들도 이미 생의 결론을 다 알고 나서 당하는 실연이라면 겁 먹지 않고 더 과감하게, 사랑하는 상대에게 대시할 수 있겠습니다. 또 이 부분은 시인께서 은근히 험블브래깅을 하시는 대목이기도 한데, "난 생전 실연이라는 걸 당해 본 적이 없으니 애써 버킷리스트에 넣어야 할 정도"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 사랑은, 그(녀)를 접하고 나서야, 전에 그런 줄 몰랐던 걸 비로소 깨닫게 하는 효과 또한 없었습니다. 있습니다. p43의 <다시 제비꽃>을 보면, "널 보고 나서야 작은 눈이 예쁜 줄 알았다. 작은 키가 예쁜 줄 알았다"고 하시네요. 그러니 한번 사람이 lovestruck되면, 취향이고 뭐고가 전부 바뀌는 겁니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이런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지만, 처음으로 내게 취향을 일깨워준 사람 앞에서 모든 게 리셋되는 행복한 느낌은 아스라히 누구나 다 기억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영원한 명구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가 다시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 내 반쪽을 만나기 전, 사람은 아직 제대로 산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눈은 하늘로 열린 창문, 바다로 흐르는 강물...(p146 <어느 날>)" 참, 사랑에 빠진 사람들한테는 그이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고 그이 자체가 세상을 보는 채널이요 창구입니다. 그런데 블랙홀 같게도 느껴져서, "너 앞에서 빨려들어갈까 겁이 나고 부끄럽기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젊은 시절의 이 설레는 감정을 노년에 이르러서도 같은 상대에게 고스란히 느끼거나 기억한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마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아리아 "Tonight"에서, "널 알고 나서야 이 삭막한 땅이, 그저 하나의 주소(address)였던 게 드디어 별(star)이 되었다"는 그 가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공교롭게도 p193에 나온 <눈 위에 쓴다>를 보면 시인께서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을 노래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눈 위에 뭘 쓴다는 걸까요? 물론 널 사랑한다고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라는 별, 쉽게 떠날 수 없다는 것인데, 사랑하는 네가 아니었다면 이 시적 화자는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이조스 아니라도 벌써 여길 떴을지도 모릅니다. 이때 눈은, 눈[雪]일까요 아니면 눈[眼]일까요? 저는 어느 쪽으로 새겨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눈(snow)이란, 이 태양계에서 오직 지구에서만 구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물질입니다. 눈이 내리면 사람들의 교통과 산업에는 도움보다는 방해 사항이 많음에도, 인간은 심미안과 감정이라는 게 있기에 눈에 환호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p249에는 <변명>이라는 재미있는 시가 있습니다(책에는 제목이 변명1이라고 되었지만, 이는 같은 제목의 시를 구별하기 위한 넘버링이라고 출판사측에서 밝히고 있으므로, 저는 이 후기에서 숫자를 생략하겠습니다). "귀가 작고, 코가 작고 눈이 작으나, 입술이 크고 붉은 아이가 보고 싶다. 실상 이것은 네가 보고 싶다는 뜻이다" 얼마나 간결하게, 그리움을 표현하며, 동시에 단순한 반전으로 모두에게 웃음을 머금게 합니까? 나태주 시인 아니고서는 누가 쉽게 흉내도 내기 어려운 공력이라 하겠습니다. 

시인이 그 인생을 통달한 경지는, p294의 <흰 구름>을 보면 엿볼 수 있습니다. 예전엔 내가 그를 우러러보았는데, 지금은 그가 나를 굽어본다... 물론 이를 마치, 호손(N. Hawthorn)의 <큰바위얼굴>에서처럼, 성실히 살아 온 거대한 생애가 어느새 남들이 우러러봐 온 마일스톤과 같아졌다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겠으나, 저는 다르게도 읽혔습니다. 구름은 그저 하늘에 뜬 객체, 대상이었던 게, 이제는 처지를 전혀 바꾸어 내가 물(物)의 입장에 서서 나를 객관화하여 볼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세상을 달관한 이에게는 천지가 모두 나이며, 내가 곧 자연이자 누리입니다. 

지연리님의 일러스트가 책 곳곳에 적절하게 녹아들어 시화전(詩畵殿)을 방불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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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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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독일어 verrücken이라는 단어는 옮기다, 바꾸다 같은 뜻입니다. 이것이 verrückt라는 과거분사형을 갖고, 형용사로 파생하면 "미친"이란 뜻이 됩니다. 한편, 재귀동사 sich verlieben은 사랑에 빠진다는 뜻인데, 그 과거분사형 verliebt in은 영어의 fallen in love와 같습니다. 헤세처럼 이지적이고 윤리적이면서도 그 감정이 폭풍우를 치듯 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돌아가는 듯 보였겠습니다. 그러면서도 헤세 같은 휴머니스트가,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방도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 책을 엮은 편집자 폴커 미헬스가 서문에서 말한 대로, 헤세가 떡갈나무에 대해 쓴 시의 한 행입니다. 미헬스는 고령이지만 아직 활동 중이며, 헤세 연구와 비평에 대해 세계적인 권위자이지만, 헤세가 타계할 때 고작 스무 살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헤세의 품에 안겨 자란 친손자처럼, 누구보다도 인간 헤세(이미 고인이 되었건만)와 잘 공감하며 현대 독자와 지난 세기의 문학적 거인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았습니다. 

"인생은 계산도, 수학 도식도 아닌, (하나의) 기적이다.(p27)" 헤세는 이 대목에서 스스로 고백하기를, 같은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고, 같은 연들과 싸웠고, 같은 나비를 좇았다"고도 합니다. 그의 워딩으로도 세상은 제법 단조로운 패턴의 반복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기적입니까? 그런데도 특정 포뮬러(아직은 인류가 찾지 못한)에 의한 분석과 해독을 끝내 거부할 만한 깜냥인가요? 헤세는 이 (가상의) 질문에 대해서도 "그럼, 기적이다마다."라 대답할 듯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헤세의 개인적 삶은 그에게 그리 녹록한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그의 이상에 비해 비루했고, 그의 선한 천성에 비해 야만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헤세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건, 그런 핸디캡을 안고서도 공정하게, 또 정확하게, 생은 과연 기적임을 긍인하고 환희에 차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광대로 여겨졌던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서서히 장악해갈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간디가 펼친 활동은 유럽에서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또 헤세에게는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이 비웃음과 탄압을 받던 와중에도 여전히 분투해 가는 그 과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2차 대전이 마침내 끝나고 인류 공영의 어젠다에 대한 대단히 폭력적인 도전이 좌초했을 때, 헤세는 차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그 모든 독기를 내려놓고 형제를 위해 가슴을 열자고 제안합니다. 인습의 존재를 넘어 비폭력의 위대한 명분에 단단히 안기기 위해 말입니다. 

1930년에 쓴 어느 편지에서 그는 53세의 자신을 가리켜 "늙은이"라 칭합니다(p202). 편지의 수신인이 "당신네 젊은이들"이라서인 것 같은데, 글쎄 저의 편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워낙에 갈등과 고뇌와 좌절 가득한 여정을 젊은날 걸었던 그여서인지, 53세의 헤세 같으면 자신이건 남들의 시선으로건 이미 생체의 venom이 다 빠져나간, 쭈그러든 노인 같아 보였을 법도 합니다. 전하는 말씀의 내용도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생이 부조리하고 모순 덩어리인 게 어디 내 책임입니까? 당신들 젊은이들은 마치 그렇기라도 하다는 양 무책임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군요." 확실히, 어느 시대이건 그 "젊은이들"이 문제입니다. 1930년대에 헤세에 젊은이라 불렸던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 백골이 진토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문호 헤세의 대양과도 같은 마음은 그 모든 무책임과 경솔함마저도 기어이 너그럽게 끌어안습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삶이 아니며, 우리는 그저 그리로 걸어갈 뿐이다. 어떤 이는 영원히 그 길을 걷기도 한다.(p267)" 마치 그의 장편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이 고타마를 만나고 카마라를 만나고 마침내 친구 고빈다를 두번째 만나도, 그 마음이 더욱 평안에 수렴했을지언정 마침내 완전한 득도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모호하고 유보적인 태도였던 것도 생각이 납니다(지극한 겸손의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길은 거기에 길이 나 있어서 걸을 뿐, 어디로 꼭 도달되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생은, 그렇다고 목표가 없는 맹목인가? 이에 대해 헤세는 단호하게 부인합니다. "세상에 크고작은 길이 많아도, 목표는 (의외로) 공통이다. 생의 마지막 걸음은 언제나 자기 혼자의 힘으로 디뎌야 한다.(p303)" 비록 높은 산정에 누구나 도달할 수는 없어도, 데미안이나 그 모친의 큰 폭 후원 없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당당하게 내딛는 싱클레어의 작은 몸짓은 아브락사스의 시선에 입각해서도 대견해 보입니다. 헤세의 통찰과 담담한 표백은 그 앞에서 누구도 겸손해지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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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물리학 필독서 30 - 뉴턴부터 오펜하이머까지, 세계를 뒤흔든 물리학자들의 명저 30권을 한 권에 필독서 시리즈 22
이종필 지음 / 센시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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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활동하는 물리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가장 객관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학문 체계가 물리학입니다. 물리학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4백년 전의 아이작 뉴턴이지만, 그 이전의 학자들이 쓴 저술들 중에서도, 흥미롭고 참고할 만한 것, 영감을 주는 책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고전의 위치를 차지하며, 후대인들에게 길을 잃지 않게 배려하는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한편,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등 뉴턴의 이론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거나 아예 다른 지평을 제시한 인물들이 쓴 걸작들도 있는데, 진리의 발견을 위한 인간 지성의 끝없는 발걸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명한다 하겠습니다. 

p18에는 20세기 철학자 앨프리드 화이트헤드의 명언이 나오는데 "유럽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가 그것입니다. 고전(classic)의 정의에서, 모든 생각의 기초와 틀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게 핵심이니 저 말도 과장이 아닙니다. 가던 길이 막힐 때 잠시 숨을 돌리고 고전을 다시 살피면 의외로 바른 좌표가 시사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우리가 그를 의식하건 않건 그 고전의 언어와 발상에 일일이 토대를 두기 때문입니다. <티마이오스>를 소개하며 저자는 오늘날의 공학, 의학 등 모든 학문의 기초가 플라톤, 또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얼마나 크게 빚지고 있는지를 상기합니다. 저자는 비록 수천 년의 간격을 두었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생명력을 발하는 이들 고전을, 현대의 독자들도 꼭 한 번쯤은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19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볼츠만(p89)은 엔트로피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정의, 정립한 업적이 있지만 당대에는 물론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습니다. 과거 물리학자들이란 대개 논문이나 교과서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기에, 요즘 학자들처럼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책을 따로 내지는 않았습니다. 볼츠만의 경우 19세기~20세기 초에 걸쳐 자신의 중요한 저술을 출간했으나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고, 오늘날 이 분야의 교과서들이라면 그간의 성과를 반영하여 훨씬 이해하기 쉬운 포맷입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볼츠만 본인의 책이 아닌, 데이비드 린들리라는 우리 시대 과학저술가의 대중서로 저 위대한 정신의 업적을 소개합니다. 아마도 어린 독자들은 제레미 리프킨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이 개념의 창시자쯤인 걸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과학자조차도 아니죠. 

하이젠베르크의 생을 보면, 천재가 걷는 길의 한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파천황의 업적을 (자신도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이뤄 내고, 자신들과 비슷한 천재들과 교류하고 그들로부터도 최고라고 인정받고... 하이젠베르크는 아인슈타인과 달리 정규 교육 과정 이수 내내 언제나 최고로 인정받았으며, 아인슈타인과 달리 기존의 프레임이 전혀 담지 못하는 완전히 새로운 생각도 거리낌없이 떠올리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마 생전에, 양자역학 발전의 최대 수혜자로, 부존 자원 하나 없는 21세기 극동의 한 나라가 오로지 반도체 하나로 먹고살 줄이야 전혀 몰랐겠습니다. 아무리 그가 천재였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자께서는 토론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그의 책이 독자들에게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고 걱정(p113)하시나, 사실 그같은 천재가 쓴 책치고는 일반인들을 꽤나 배려하는 편이기 때문에 (각오를 미리 한 독자들에게는)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자연과학은 대개 누구라도 객관적으로 같은 걸 보고 정리하며 통일된 결론에 동의할 수 있는 체계라고 여깁니다. 또 p149에서 저자가 설명하듯 칼 포퍼의 반증주의까지 포섭하며 반증의 여지가 높을수록 더 과학적이라는 컨센서스까지 있으니 이 믿음은 더욱 강화되는 듯합니다. 증명도 안 되고 그렇다고 반박도 힘들기 때문에 끈이론 같은 것도 과학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측도 있다는 서술에 이르면 독자가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노어우드 러셀 핸슨의 <과학적 발견의 패턴>을 소개하며 저자는 "뭘 본다는 행위 자체에 이미 사상과 관점이 개입함"을 지적하며, 자연과학에서도 완전한 탈(脫)주관은 불가능하다는 책의 결론을 강조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도 이런 핸슨의 관점에서라야 (아인슈타인처럼 갈등을 겪지 않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데, 물리학의 온전한 이해는 그로부터 몇 발짝 떨어져서 대상을 바라봐야 가능하겠다는 심오한 진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 책에 소개된 상당수의 고전은 한국어로도 (고맙게도) 이미 번역되었으며 저자는 각 번역서의 이런저런 특징까지도 세심하게 짚어 독자에게 일러줍니다. 아마 이 중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책은 킵 손이 쓴 <블랙홀과 시간여행>일 텐데, p187에 나오듯 영화 인터스텔라 자문을 맡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도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실 대중에게 더 잘 이해되는 포맷, 스타일로 (남의 생각을 이리저리 짜깁기하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책을 쓰는 것도 큰 재능인데, 킵 손은 이미 당대 최고 과학자이면서도 이런 영역에서까지 다시 성공을 거두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께서 이미 최고의 두뇌를 지닌 분이며 해당 분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달성하셨기에 책이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내용을 신뢰하며 진행하는 독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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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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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포는 아직도 일본이 열심히 미국과 유럽을 따라배우던 시기 영미의 추리장르에 푹 빠져 아예 일본의 미스테리, 괴기 서브컬처 영토를 하나 창시한 거장입니다. 사실 요즘 눈으로 보면 란포는 장르의 당대 정격에 충실하여 성실한 모방을 행했다기보다, 아예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하나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타한한데, 같은 시기 일본의 이런저런 다른 개척자들과는 달리 유독 한국에서도 열렬한 지지가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부커판 표지에는 한자로 그의 이름을 江戶川亂步라고, 디자인의 일부로 활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잞알려진 대로 그는 E A Poe를 흠모하여 필명을 저리 지었는데, 잘 뜯어 보니 그 이름에 든 뜻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문인들에게는 난(蘭)을 치고 시를 쓰는 게 마치 정원을 산보함과 같았는데, 그의 괴기한 픽션을 읽다 보면 그 그로테스크하고 고어한 필치가 가히 亂步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영화 중에도 <배니싱 트윈>이라는 게 있는데, 본디 같은 부모를 공유하는 형제자매 사이에도 묘한 경쟁 심리, 이른바 sibling rivalry라는 게 존재합니다. 하물며 같은 태(胎)에서 성장한 쌍생아라면 혹여 복중에 나란히 붙어 지낼 당시 서로 싸운 적이 많았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상상의 힘이 빚어낸 게 쌍둥이를 둘러싼 각종 괴담들입니다. 아마도 이 선집에 실린 첫째 작품 <쌍생아>는 이 분야의 끝판대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에 특유의 일본 한자 폰트로 双生児라 쓴 모습마저 괴기스럽게 멋있습니다(제 기분 탓이겠죠?) 한국 정자체라면 雙生兒라고 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1988년 이상문학상 공동수상작이 임철우 작 <붉은 방>이었는데, 물론 란포의 1925년작 <赤い部屋>이 훨씬 먼저이며, 내용도 판이합니다. 그러나 엄혹한 시국에 소신대로 행동하다 공안 당국에 끌려가 끔찍한 일을 당한 청년 역시도, 일종의 란포 세계에 살았는지 모를 일이긴 합니다. 이 선집에서는 p30 이하에 수록되었습니다. "셜록 홈즈도 알 수 없는 범죄"라는 구절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비행(非行)과는 저게 다른 의미입니다. 셜록 홈즈는 미스테리의 실상을 밝히는 탐정이지, 누굴 잡아넣는 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란포의 세계는 비틀리고, 기괴하고, 징그럽고, 비참한 이미지로 가득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이에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실제로 그의 문체는 매우 퇴폐적이고 그러면서도 때로 청초하게 예쁩니다. "훅 달아오르는 태양의 열기가 길가에 늘어선 전신주들을 해초처럼 흔들고 있었다(p69. <백일몽>)" 아마도, 되다 만 범죄자, 이상성욕자, 무슨 맥주가 좋다는 둥 어설픈 허세를 부리는 정신착란자, 제 깜냥을 모르고 남들에게 이상한 영향력을 끼치려다 비참하게 고꾸라진 영혼의 퇴장을, 이처럼 적절하게 장식하는 멘트도 드물겠습니다. 

사람이 그 얼굴을 바로 드러내지 않고 가면을 쓴다는 건 벌써 정직한 소통을 거부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정반대의 효과가 나기도 하며, 오히려 가면을 쓰고서 평소의 사회적 평판, 계급, 지위와는 무관하게, 상대를 블라인드 상태로 만들고 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게 하는 상황도 있는데 그게 바로 가면무도회입니다. 란포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면무도회>에서는 인물들이 더 예외적이고 bizarre한 처지에 놓이는데... 젊은시절 란포는 레귤러한 가면무도회에 몇 번이나 참석해 봤을까요? 여튼 비범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편과 그녀의 온갖 속삭임을 엿들으며 얼마나 비참하고 슬펐는지 모릅니다(p225)" 엿듣는 행동이 장소와 자세라도 당당하면 그나마 마음의 위축됨이 덜할텐데, <사람이 아닌 슬픔>에서 화자가 숨어든 장소는 다름아닌 창고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창고에 숨어들어 뭘 꾸민다 해도 자괴감이 들 것인데, 이건 원 피해자가 되레 어둠에 몸을 의탁하는 판이니... 장궤 안에서 발견된 인형은 차라리 미국 영화 Child's Play 시리즈에서처럼 끔찍한 저주의 상징이자 매개입니다. 

젊은 처녀의 생기(p329)란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혈관에도 새로이 따끈한 피가 돌게 하는 마법의 물질입니다. <누름꽃과 여행하는 남자>에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노인은 알고보니(p355) 에도가와 본인의 분신, 특별 출연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이 단편은 망명 헝가리 귀족 오르치 부인의 피조물 "구석의 노인" 시리즈를 살짝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아무튼 란포 유니버스 고유의 슬슬 썩어가는 변태미의 앙상블을 잘 연주한, 한국어판 이 선집을 유난히 더웠던 여름에 읽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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