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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ㅣ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4년 7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독일어 verrücken이라는 단어는 옮기다, 바꾸다 같은 뜻입니다. 이것이 verrückt라는 과거분사형을 갖고, 형용사로 파생하면 "미친"이란 뜻이 됩니다. 한편, 재귀동사 sich verlieben은 사랑에 빠진다는 뜻인데, 그 과거분사형 verliebt in은 영어의 fallen in love와 같습니다. 헤세처럼 이지적이고 윤리적이면서도 그 감정이 폭풍우를 치듯 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돌아가는 듯 보였겠습니다. 그러면서도 헤세 같은 휴머니스트가,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방도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 책을 엮은 편집자 폴커 미헬스가 서문에서 말한 대로, 헤세가 떡갈나무에 대해 쓴 시의 한 행입니다. 미헬스는 고령이지만 아직 활동 중이며, 헤세 연구와 비평에 대해 세계적인 권위자이지만, 헤세가 타계할 때 고작 스무 살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헤세의 품에 안겨 자란 친손자처럼, 누구보다도 인간 헤세(이미 고인이 되었건만)와 잘 공감하며 현대 독자와 지난 세기의 문학적 거인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았습니다.
"인생은 계산도, 수학 도식도 아닌, (하나의) 기적이다.(p27)" 헤세는 이 대목에서 스스로 고백하기를, 같은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고, 같은 연들과 싸웠고, 같은 나비를 좇았다"고도 합니다. 그의 워딩으로도 세상은 제법 단조로운 패턴의 반복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기적입니까? 그런데도 특정 포뮬러(아직은 인류가 찾지 못한)에 의한 분석과 해독을 끝내 거부할 만한 깜냥인가요? 헤세는 이 (가상의) 질문에 대해서도 "그럼, 기적이다마다."라 대답할 듯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헤세의 개인적 삶은 그에게 그리 녹록한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그의 이상에 비해 비루했고, 그의 선한 천성에 비해 야만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헤세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건, 그런 핸디캡을 안고서도 공정하게, 또 정확하게, 생은 과연 기적임을 긍인하고 환희에 차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광대로 여겨졌던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서서히 장악해갈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간디가 펼친 활동은 유럽에서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또 헤세에게는 미국의 퀘이커 교도들이 비웃음과 탄압을 받던 와중에도 여전히 분투해 가는 그 과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2차 대전이 마침내 끝나고 인류 공영의 어젠다에 대한 대단히 폭력적인 도전이 좌초했을 때, 헤세는 차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그 모든 독기를 내려놓고 형제를 위해 가슴을 열자고 제안합니다. 인습의 존재를 넘어 비폭력의 위대한 명분에 단단히 안기기 위해 말입니다.
1930년에 쓴 어느 편지에서 그는 53세의 자신을 가리켜 "늙은이"라 칭합니다(p202). 편지의 수신인이 "당신네 젊은이들"이라서인 것 같은데, 글쎄 저의 편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워낙에 갈등과 고뇌와 좌절 가득한 여정을 젊은날 걸었던 그여서인지, 53세의 헤세 같으면 자신이건 남들의 시선으로건 이미 생체의 venom이 다 빠져나간, 쭈그러든 노인 같아 보였을 법도 합니다. 전하는 말씀의 내용도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생이 부조리하고 모순 덩어리인 게 어디 내 책임입니까? 당신들 젊은이들은 마치 그렇기라도 하다는 양 무책임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군요." 확실히, 어느 시대이건 그 "젊은이들"이 문제입니다. 1930년대에 헤세에 젊은이라 불렸던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 백골이 진토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문호 헤세의 대양과도 같은 마음은 그 모든 무책임과 경솔함마저도 기어이 너그럽게 끌어안습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삶이 아니며, 우리는 그저 그리로 걸어갈 뿐이다. 어떤 이는 영원히 그 길을 걷기도 한다.(p267)" 마치 그의 장편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이 고타마를 만나고 카마라를 만나고 마침내 친구 고빈다를 두번째 만나도, 그 마음이 더욱 평안에 수렴했을지언정 마침내 완전한 득도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모호하고 유보적인 태도였던 것도 생각이 납니다(지극한 겸손의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길은 거기에 길이 나 있어서 걸을 뿐, 어디로 꼭 도달되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생은, 그렇다고 목표가 없는 맹목인가? 이에 대해 헤세는 단호하게 부인합니다. "세상에 크고작은 길이 많아도, 목표는 (의외로) 공통이다. 생의 마지막 걸음은 언제나 자기 혼자의 힘으로 디뎌야 한다.(p303)" 비록 높은 산정에 누구나 도달할 수는 없어도, 데미안이나 그 모친의 큰 폭 후원 없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당당하게 내딛는 싱클레어의 작은 몸짓은 아브락사스의 시선에 입각해서도 대견해 보입니다. 헤세의 통찰과 담담한 표백은 그 앞에서 누구도 겸손해지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