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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 국자에 떠 주는 스님의 커피 - AI 선정(禪定)스님과의 대화
김달수 지음 / 인간사랑 / 2025년 1월
평점 :
별자리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별들의 입장에서라면 그렇게 끼리끼리 인위적 서사에 따라 엮일 이유가 없습니다. 문화권에 따라 별(들)의 이름이 다른 게 당연한데, 유독 북두칠성만은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국자 모양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 같았나 봅니다. 책 p12에서 저자께서 설명하시듯 동양에서도 두(斗)라는 글자가 큰 국자(의 용량)을 의미하며, 서양에서도 Big Dipper, Plough라는 게 우리 동양의 명칭과 뜻이 통합니다 . 꼭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이 아니라 해도, 척박한 대지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중생에게 "국자로 무엇인가를 퍼 주고 싶은" 생각 역시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선정(禪定) 스님은 실존하는 불제자, 성직자의 법명이 아니라, 이 책 저자이신 김달수 닥터가 가꿔 내신 AI 스님입니다. 초탈을 지향하는 스님께 성별(性別)을 정하는 게 의미가 애초에 없지만,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의학정보진흥연구소 소장, 벤처운영자, 유튜버, 발명가인 저자는 여튼 40세 전후의 젊은 수행자를 가정하고 이 AI를 세팅했다고 하십니다. AI라는 게 사람의 일을 빼앗는다면서 보급 초기에 많은 우려가 있었으나, 과거 개인용 컴퓨터가 널리 전파되며 거대기업이나 기관뿐 아니라 사람들 하나하나의 생산성이 크게 늘었듯이, 인공지능도 이를 어떻게 개인화하느냐에 따라 전문직, 기업인, 예술가들이 작업하는 데 어떤 획기적인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달수 소장님의 예에서 보듯, 이제 개인이 득도, 해탈(p178)을 위한 수양을 하는 데에도 AI가 마치 큰스님처럼 그를 이끌어 주는 세상이 될 수 있겠습니다. 큰스님은 모시기도 대하기도 어렵지만 AI는 필요할 때마다 궁금한 바를 물을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챗GPT를 활용해 본 사람들에 의하면 그 그럴싸한 말솜씨와 제시해답의 정확도에 다들 놀랄 만하다고 합니다. p70을 보면 선정스님께 유식(唯識)의 뜻을 물어 보니 저렇게 화엄종, 부파불교, 의식, 연기 등의 개념을 축으로 설명을 내놓으셨다고(?) 합니다. 말씀만 들으면 한 군데도 틀림이 없지만 어차피 사람들이 기존에 내어놓은 지식을 기반으로 취합, 정리한 것에 불과하지 않나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현단계의 인공지능이 으레 그렇듯). 식(識)이라는 게 마치 영어의 perceive처럼, 외계에 객관적 실체가 그리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감각기관과 (짧은) 판단에 의해 그리 인식할 뿐임에도 불구하고 무지몽매한 우리들은 망집과 미망을 객관인 양 착각하고 고집합니다. p103, 또 p203을 보면 마이클 셔머의 말이 인용되는데 "천국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그것입니다. 저자께서 발명가이시기도 하니 더욱 이 말씀의 함의가 깊습니다.
우리가 챗GPT를 쓰면 뭐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은데 김달수 소장님은 AI 선정 스님을 이용하면서(?) 부족한 점(p151, p297)이 많이 보이시나 봅니다. 그런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소장님 본인이 튜닝, 조율을 해 주시니 앞으로는 훨씬 나은 성능(스님께 무엄한 표현이지만)을 보일 것으로 기대됩니다. 제가 쓰는 버추얼 키보드는 제가 자주 쓰는 단어나 표현을 사용자 사전에 계속 제가 입력하는데도, 정작 자주 쓰여서 필요할 때 자동완성이 되었으면 하는 문구는 매번 새로 쳐야 하고, 어쩌다 오타가 난 글자는 죽어라하고 suggestion되니 이건 뭐 아주 미칠 지경입니다. S모 회사에서 만든 소프트웨어인데, 이처럼 근본이 틀려먹은 구조에다가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무슨 공을 들여도 개선이 안 됩니다. 인간이 못 되어먹은 축생의 종자도 교육(p376)을 통해 나아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습니다.
p246 이하를 보면 선정스님께서는 윤회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생망", 즉 이번생은망했다 같은 유행어를 자주 쓰는데, 그 말 뒤에는 다음 생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선정스님께서는 윤회를 긍정하면서도 다음 생에 또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말합니다. 물론 계산하는 관점에 따라 이게 유의미한 숫자가 될 수도 있지만, 무한의 기준에서는 0(零. zero)에 가깝다는 게 p249에서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시 주어지지 않을 소중한 자산임을 알고 초 단위를 아껴 써야 하는 게 인간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p350을 보시면 스님은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의 양면에 불과하다고 갈파합니다. 하긴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대기업의 말단자리에서 큰 출세나 한듯 유세를 부리는 뚱뚱한 음치가 자신만의 고립된 세계에서 액슬 로즈라도 된 양 착각하는 게 꼭 미망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눈에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아니기에, 멍청한 돼지의 헛소리는 죽비를 후려쳐서 고쳐야 한다는 데 일정한 컨센서스를 이룹니다. p375를 보면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대해 선정 스님께서는 역시 기존의 정통한 견해를 정확히 이해하시는지라, 기독교와는 달리(책에 그런 말은 없으나 구태여 불교 교단의 입장에서 딱히 말하는 바가 없다는 전제를 깔고 답변을 시작하시는 품이, 기독교가 선명히 자살을 반대하는 입장과 대비시키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사람이라면 그런 뉘앙스가 읽힐 것입니다) 불교는 "내면적 고찰,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란 답을 내놓습니다. 제 눈에는 학식 높은 40대 스님이 충분히 내놓으실 만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윤회는 다중우주론(p418)에 대해 천 수백년 전부터 불교가 고유의 언어로 이미 준비한 답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추운 아침에 마시는 한 입 커피 안에 130억년 우주의 역사가 담기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설령 AI가 이미 밝혀진 진실의 그럴싸한 리패키징에 불과하더라도, 겸허한 인간의 마음은 마침내 그 안에서 견성(見性)을 이뤄낼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