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훈처럼 - 땅과 하늘과 바다의 길을 연 대한민국 수송계의 거목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 9
고수정 지음, 유재천 감수 / FKI미디어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진그룹은 일반 소비자들에게야 택배 사업 정도로 유명하지만, 물류와 운송, 그리고 항공 산업 대한항공이란 거대 유닛을 소유하고 이끄는, 한국 산업 중추 실체 중 하나죠. 그 창업주 조중훈은 워낙 잘 알려진 인사이고, 사업 초창기 H그룹 창업주 모 씨와의 불편한 인연으로도 세간에 큰 화제가 되기도 한 분입니다. 2002년에 타계하여, 그 길고 뚜렷한 인생을 마감했을 때의 그의 향년은 82였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한진은 인천을 기반으로 합니다(4년제 인하대학교, 그리고 전문대인 인하공전도 모두 한진 그룹 소유죠). 한진상사를 인천에서 갓 창립하고, 대담한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갈 때 그의 나이 불과 30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좀 하자면, 앞서 리뷰에서 언급한 조홍제씨는 이때 44세의 중년이었고, 이병철로부터 사업 전망에 대한 설명을 청취하는 정도였으니 지역의 대부호였을 뿐 아직 사업의 감도 익히지 않을 무렵입니다) 젊은 사람이 배짱 한 번 대단하군! 언제나 주위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지냈으며, 실제로 다른 중견 사업가들이 해방 직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사 업체를 불하 받아 기반을 닦거나, 해당 기업체에 소속되어 관리자 신분으로 인수를 받은 유리점이 있었던 반면, 조중훈은 상대적으로 맨주먹 창업이나 마찬가지였죠. 이 책에 나오듯이, 그냥 트럭 한 대로 모든 것을 시작했고, 다시 접었다가, 다시 일어셨습니다. 지 금 한진 하면 생각나는 택배 산업, 전국의 소위 "1톤 사장님"들을 우리는 우습게 여기지만, 이 거대 기업의 창업주 역시 당시만 해도 그저 트럭 한 대 몰고 다니는 정처 없는 인생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많은 상념이 교차하게 됩니다.


인천 바닥에서 신용을 쌓으며 좀 잘나가는가 싶었는데, 한국동란의 발발로 그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됩니다. 하 지만 의지와 배짱으로 다져진 조중훈의 마음가짐은 누가 함부로 침노할 수 있는 연약한 지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완과 순발력을 발휘하여, 미군 군수품 수송 계약을 따내는 데에 성공합니다. 미군측에서도 그의 성실성과 추진력에 감복하여 수주액을 점차 늘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기업 한진 그 도약 발판 마련의 시작이었습니다.


미 군과 연계를 맺게 되니 항공 물품 운송에도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것을 계기로 "에어 코리아"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손을 대는 영역마다 큰 이익을 보는 놀라운 재간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그였지만, 잘나가는 업적 뒤에는 부담도 없지만은 않았는데요. 박정희는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공기업 한국항공공사를 조중훈더러 인계할 것을 강권합니다. 조중훈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시대 분위기가 분위기였던지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겠죠. 허울이 좋은 "국적 항공사" 대한항공은 이래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한진은 "여객" 운송에까지 확장을 보기에 이릅니다.


마지못해서, 혹은 사업상의 불이익을 권부(權府)에서 가할까 하는 두려움에 받아들이긴 했지만, 일단 인 수한 후에는 순풍에 날개를 단 듯, 홍콩, 파리 등으로 취항 노선을 확대하는 등 일취월장의 추세를 탑니다. 이 무렵에 드디어 베트남 전쟁이 터지는데, 한진은 이에도 참여하여 거액을 달러로 벌어들이기에 이릅니다. 운송은 특히나 국제적 영역을 취급할 수밖에 없는 부문이므로, 그가 벌어들이는 거의 모든 수익은 달러 매개였습니다. 사업 보국을 몸으로 실천하는 그였지만, 전화로 고생하는 현지 베트남인들에게는 "타 민족의 고생을 기화로 이익만을 취하는 어글리 코리언들"이 밉고도 미웠다고 합니다. 조중훈은 이런 점도 감안하여, 거래시 월남인들의 감정과 자존심을 최대한 존중하고, 취업의 기회를 현지인에게 대폭 개방할 것을 지시합니다.


조중훈은 사업 수완 못지 않게 실용적(practical) 유머 감각 역시 상당했다고 하죠? 석유 파동은 당시 한국 같은 자원 부재 개도국에게 특히 타격을 주었습니다만, 기름으로 움직이고 기름으로 돌아가는 운송업계가 받은 타격은 여타 업종과 비길 바가 아니었습니다. 원가를 아끼고 또 아껴야 하는데, 한번은 아래에서 "비행기 동체에 페인트를 안 칠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건의가 들어오자, 그렇게 하라며 겉표면에 " 이 비행기는 비키니 차림입니다."라고 쓰게 지시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위트가 넘칩니까. 이런 여유야말로 위기를 도리어 기회로 만드는 사업가만의 기지라고 할 수 있죠.


그 는 대단히 진취적이고 공격적 기질이 강했습니다. 박정희가 카터 행정부 시절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미군 철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자, 자체 국방력 충원을 위해 방산물자 생산을 지시하는데, 조중훈을 이를 받아들여 국산 전투기 1호인 "제공호"를 생산, 성공하기에 이르죠.


이 책은 다소 시대 관계가 좀 셔플링되어 편집한 모습입니다. 조중훈 하면 또 지일파로 유명한 기업인인데요. 그 중에서도 고급의 인맥만 알짜로 구축해서 필요할 때마다 동원한 전설적인 일화로 유명한 분이 조중훈입니다. 이 책에 보면 장기영 부총리(당시 한국일보 오너)가 조중훈을 불러, 한일 외교 정상화에 일익을 담당할 것을 주문합니다. 이때 그가 알게 된 일본 정치인 중에 다나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물론 나중에 총리대신을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 그 사람입니다. 이 책에도 그런 서술이 있습니다만, "학력은 비록 미흡하나, 야심과 총기로 가득했다"는 점이 공통이라고 적어 놓았는데요, 실제로 다나카 가쿠에이는 국졸 학력으로 그만큼이나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로도 유명하죠.


조 중훈의 위대한 면은 언제나 인재 양성이라는 기업의 소명에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는 일류 조종사 확보에만 주력한 게 아니라, 한국에서 자체 양성을 하는 인프라를 창설하는 일에도 정력을 쏟았는데요, 그 결과가 우리가 보는 명문 학교들입니다. 일국의 미래도 결국은 인재 양성에 달려 있고, 위대한 기업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 생각하면 그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홍제처럼 - 세계 시장을 상대로 싸운 황금의 손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 10
박시온 지음, 배기은 감수 / FKI미디어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효성그룹은 현재 그룹 내외적으로 공히 위기를 맞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창업자 조홍제 회장의 삶을 돌이켜 보면, 거대 비즈니스의 흥업이 이처럼이나 많은 노력과 정성, 개인의 의지가 투입되는 간난의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고개가 숙여집니다. 일반인들은 효성 그룹이라고 하면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IT 종사자들은 낯익어할 수도 있구요. 중공업, 건설자재, 섬유 등 생산재 분야에서 한국 경제 대동맥 순환의 중추적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과거 한 때 국내에서 오토바이 브랜드의 대명사였던 효성스즈키 스프린터를 기억하십니까? (물론 이 회사는 현재 S&T로 넘어갔습니다만) 어려웠던 시절 일본 거대 기업과의 합작을 통해 기술도입에 앞장섰던 점에서도, 이 효성은 돋보이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조홍제 창업자는 이병철씨보다 4살 연상(이 책에는 다섯 살로 나옵니다)입니다. 이병철씨는 경남 의령 출신이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는 인접한 함안 대지주 가문 소생이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진전되기 이전 시점부터, 삼성물산은 남한 전체에서 첫손에 꼽는 대기업이었습니다. 이 삼성물산을 이병철씨와 공동 출자하여 설립(10:7로 조홍제의 비중이 더 높았으며, 조씨 가문의 재력이 더 컸던 덕입니다)하고, 나중에는 제일제당 대표이사의 지위에까지 취임합니다.

조홍제는, 당시 해외진출 실적이 전무하다시피했던 한국에서, 외화 획득을 위해 홍콩에 오징어 등의 해산물을 수출하러 출장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해외 시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살벌하고, 무도함과 반칙이 판을 치는 곳이었습니다. 흔히 상도의(商道義)를 이야기하지만, 이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한가한 개념애 불과했죠. 현지 상인들의 담합 탓에 꼼짝 없이 헐값에 아까운 물품을 버리게 오게 될 형편에 놓인 조홍제,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아니면 그가 평소에 다져 놓은 인복이 큰 효험을 마침 보았는지(말이 쉬울 뿐 능력자에게만 가려 찾아 주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현지 거상(巨商) 임창복의 도움을 받아 오징어 등을 양가(良價)에 처분하고 귀국합니다. 그는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행운이 따라주는 편이었습니다만(예를 들면 삼성에서 지분 관계를 청산하고 나온 후 설립한 조선제분이 바로 큰 수익을 올린 일 등이 있죠), 행운도 실력자에게만 따르는 법입니다.


이 책에는 다소 모호하게, "제일제당 사카린 밀수 사건"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당시 제일제당 대표는 조홍제씨였는데, 회사의 사카린 밀수 총책임자로 그가 일단 총대를 매고 법적 책임을 지는 것(징역형)으 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해외에 당시 체류 중이던 이병철은 일단 법적 제재를 면했으나, 다른 소스에 의하면 중정에 끌려가서 호된 옥고를 치른 것으로 나옵니다. 청소년 전기에 너무 세세한 내용까지 다룰 수는 없는 일이었겠구요. 여튼 조 회장은 이 일을 계기로 삼성과 연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조선제분을 인수해서, 당시 국민적 과제이던 먹거리 해결 영역에서 큰 일익을 담당하고, 자신도 알짜 산업을 일으키는 계기로 삼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56세였는데요. 요즘과 달리 당시 이 연령이면 노인 대열에 속했습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손자 재롱이나 봐야 할 나이에 무슨 창업인가?"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로서는 적잖은 목돈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그 단계에서 흥업의 꿈을 접고 싶지 않았을 테죠.


다음에는 한국타이어 인수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책에서도 잘 나와 있듯, 본디 일제 시절 <조선다이야>로 시작했던 이 기업은. 1960년대말 완전한 빚더미에 올라 앉은 부실덩어리 골칫거리였습니다. 이 기업은 조홍제의 각별한 정성과 번득이는 사업가 기질의 혜택을 입어, 알짜 수익 창출원으로 거듭나죠. 현재 한국타이어는 해당 업계 내  세계 10위권 굴지의 대규모 업체이며, 조홍제의 둘째 아들 양래씨의 소유로 효성에서 계열분리된 위상입니다. 이쯤 되면 그를 일러,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불러 줘도 별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p136에 보면 근검절약이 몸에 밴 그의 생활태도에 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53년식 크라이슬러를. 효성기업이 탄탄대로에 올라선 후까지 몰고 다녔다는(직접 몰지는 않았겠습니다만) 에피소드인데요. 가 난한 한국의 형편을 감안한다 해도, 크라이슬러라는 게 원래 고급차 레벨에 속하는 기종도 아닌데다, 세월이 그만큼이나 지났으니 주위의 눈촐을 살 만도 했겠습니다. 이 책에도 보면, "똥차라고 호텔에 가면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하태 사장의 말로 인용), 참 지금은 몰라도 그때 역시 한국의 호텔가에서는, 똥차에 눈길 안 주고 괄세하는 풍토가 있었구나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임 영규, 배기은, 송재달 이라고 하면 지금도 효성이나 한타에서는 레전드로 통하는 쟁쟁한 원로들입니다. 이들이 포진한 기획실을 앞세워 조홍제는 20년, 30년을 내다보는 거대 설계를 짜 나가는 시도에 나섭니다. 효성 창업주 조홍제가 타계한지 벌써 30년이 되어갑니다만, 아직도 이 정신은 면면히 그 후계자들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탄 소섬유는 그야말로 "future thing"인데요, 효성이 추진하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향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업 판도를 바꿔 놓을 기대주 종목이죠. 이 모든 것은 이미 1970년대에 야무지게 미래지향적 자세로 기업의 토대를 닦은 그라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만약 사카린 옥고 후 손에 쥔 큰 자금으로 개인의 만족이나 추구하며 노년(돌이켜 보면 그로부터 딱 16년이 물리적 수명으로 남아 있던 셈입니다)을 보냈다면, 오늘날의 유망한 효성중공업이나 한타가 과연 존재했겠습니까? 사람은 가도 그가 남긴 위업은 영원한 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자들의 생각법
하노 벡 지음, 배명자 옮김 / 갤리온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 대 경제학의 지평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행동경제학이라며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만, 그 단초는 이미 게임이론 형성과정에서도 보이고 있었습니다. 즉,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동안에 다른 행위자는 어떤 사고를 진행하고 있을까?에 대한 고려를, 게임의 진행 과정에서 제약 룰로 편입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한 다면 어느 단계까지 허용할 것인가가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카너먼의 공헌이라면, 심리학적 기법과 확립된 명제를 경제학 기본 이슈에 전면적으로 적용하여, 거의 구조 전체를 바꾸어 놓은 쾌거를 이룩했다는 점입니다.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적입니다.

이 "하노 벡Hanno Beck"이라는 독일인 저자의 책은, 재미있는 필치로 그간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대중서는 이처럼 내러티브가 자연스럽고 흥미로워야 하는데, 벡이라는 저술가는 그 점에서 대단히 빼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어요. 왜 인간은 어떤 상황에 처해서, 그 상황이 요구하는 가장 합리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트버스키(일찍 죽어서 불행히도 카너먼과 같은 영예를 누리지 못했죠)와 카너먼은, 어찌 보면 다소 짖궂은 방법으로,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상황이나 착시에 의해 달라 보이는 실험적 상황을 고안하여, 실험 대상자들이 명백히 불합리한 선택을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이에 대해, 경제학의 기본 가정인 합리성이 매 순간마다 배반당하는 이유를 두고, 인간 심리에 내재한 근본 성격에서 그 규명을 시도합니다. 귀납적 프로세스를 따랐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천재적인 직관능력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같은 우아한 해법과 명제의 도출이 가능했던 거죠.


"본전을 생각하면 전체를 잃는다." 이는 이른바 매몰비용sunk cost의 오류로 설명되고는 합니다. 이미 발생한 손실은 그저 기정 사실로 취급하고, 만회하려는 미련을 갖지 않고, 소위 "연결 회계"를 중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전 생각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손실의 악령을 떨칠 기회마저 박탈된다는 결론이죠. 사실 정말 어려운 점은, 과연 어디까지가 매몰 비용이며, 어디서부터가 현재 유효하게 발생 중인 비용인지 가르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매몰"이 일단 객관적으로 확정되었다면,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버리면 되죠. 일단 매몰이 확실한 후에도 미련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연이 보유한 합리성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판단을 이어나간다는 결론밖에 안 됩니다.


왜, 수학적으로는 동일한 기대값을 부여하는데도, 사람들은 기꺼이 게임에 참여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존재하는가? 저자의 설명은 명쾌합니다. 같은 절댓값을 가진다 해도(방향만 다른 벡터), 손실이 주는 비매력이 훨씬 큰 강도로 다가온다는 거죠. 이를 위험 회피 성향(risk aversion)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다른 말로는 부여효과(endowment effect)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둘 다 심리학 용어). 내가 가진 건 남이 가진 것보다 더 큰 가치로 보이는 착시 현상이 그 배후에 자리합니다.


p45에 보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좋아하나, 나서는 건 좋아하지 않고, ...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 사람은 농부일까, 아니면 도서관 사서일까,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 때에, "도서관 사서"라고 냉큼 대답하는 사람은, 휴리스틱에 근거한 추론을 행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쉽게 말해, "어림짐작"에 불과하다는 거죠. 만약 독일 국민 직종 종사자를 다룬 통계가 있어, 도서관사서의 비율이 2%, 농부의 비율이 4%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답을 맞힐 확률은, "농부" 쪽이 2배나 높다는 거죠.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이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직업을 선택할 때, 과연 자신의 타고난 성향과 적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인구 비율에 따라 무작위로 확률에 맡기는 식으로 선택할까요? 그 사람의 성격이 정말 위에 적힌 저대로라면,
그 사람은 실제로도 직업을 "도서관 사서"로 골랐을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의 "적성"이나 "성향"에 대한 정보는, 단순한 짐작으로 이어지는 clue라고 할 수 없고, 그 자체가 유력한 통계 지표의 하나입니다. 적성 같은 결정적인 정보는, 고작 짐작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조건부 확률로 모집단의 범위를 줄여주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내게 아프다고 말할 때 - 내 지친 어깨 위로 내려앉은 희망의 씨앗 하나
이명섭 지음 / 다연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명섭 저자의 책을 이번에 처음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사랑에 관한, 혹은 애정사에 대한 아 포리즘 모음은, 외국 필치로보다 국내 책이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어요. 종교 서적을 읽어도 그런데요, 아랍어로 코란이 낭송될 때 무슬림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불가사의한 법열에 빠져 든다고들 하죠? 내용도 중요하지만, 네이티브가 느끼는 그 고유의 감각과 울림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일체적 감흥이 있으려면 아무래도 그 언어의 매개와 도움이 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이렇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건 내 이야기구나." "이건 참으로 적실한 가르침이다." "어떻게 이처럼 맞는 말만 모아놓았지?"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얼마  전 원불교 교무님이 쓰신 책을 읽고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는데요, 역시 그 나라 고유의 가르침은 (해당 종교를 믿고 안 믿고에 상관 없이) 언어 자체의 힘으로 깨우침, 공감을 전달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죠.


술은 사랑을 달굴 때 필요하지, 그 반대의 조건, 즉 이별 후에 들이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p167). 술은 악마가 흘린 천사의 눈물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 음주 상황이 빚는 이중성을 잘 간파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결론인데요. 이런 불교적 관조("일체 유심조")는 의외로 두루두루 상황에 잘 적응된다는 게, "지내 보면 절감하게 되는" 유용성이에요. 어찌 보면 어디서건 들어 봤을 흔한 내용인데, 텍스트까지 컬러효과를 주어 독자에게 다정하게 다가오는 편집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탁월했습니다.


저는 로맹 롤랑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요, 한번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p175). 분노는 하루 동안의 수명을 가짐에 불과하지만, 그 하루 동안 파괴된 것을 수습하는 데에는 백 년이 걸릴 수 있다. 로맹 롤랑도 그 시기의 사람이기도 하지만요, 저는 이 말을 듣고 2차 대전 당시 히틀러가 "기왕 전쟁에 진 것, 점령했던 파리를 모조리 파괴하라!" 고 명령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생각납니다. 비정상적 멘탈을 가진 한 개인에 의해 수백년의 역사를 보유하고 천 만 시민의 애환과 노고를 담은 도시가 한 순간에 파괴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는데요. 시가지는 복구될 수 있었겠지만, 상처 입은 인류의 자존과 명예는 어떻게 쓸어담을 수 있었을까요. 백 년의 세월도 태부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런 비정상적 멘탈을 가진 이는,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중에서 아주 악성의 질환을 가진 자는, 그런 허물을 지닌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고 혐오스러워서, 제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는 까닭에 몸서리치며 증오하기에 이른 상대를 두고 "상처가 크다, 환경이 나쁘다"는 둥의 심리학적 투사를 행하기에 이릅니다.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추한 모습,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대방의 안온하고 정립된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니, 감정적 치환으로 도착적 심리 상태 조성을 통한 사이비 힐링을 시도하는 거죠. 책에도 나와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어려서 특히 어머니의 스킨십, 부친의 따스한 정을 못 받고 자란 결손가정 출신일 공산이 큽니다. 그런 결핍된 마음으로 성장했으니 커서 제대로 된 이성의 키스 한 번이나 선사받았을 리 없고, 자신에서 대가 끊기면 모를까 그런 악순환을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거겠죠. 이 책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발달시키는 감각은 촉각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워낙 잘못된 경우라면 어떤 방법이 동원되어도 "백약이 무효"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불쌍한 영혼을 지닌 인간에게도 우정, 친구는 필요합니다. (p251)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정말 멋진 말이죠. 라틴어로 "알터 에고"라는 게 다 이런 걸 두고 이름이죠. 사람 인자가 마주 보는 두 막대를 서로 의지하게 버팅겨 놓은 지사(指事)에서 비 롯했다고 하듯, 인간은 결국 사람 사이에서만 인간인 법입니다. 역시 결론은 소통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상대의 의사 교환이 동등하게 보장되는 쌍방향 소통이며, 내 말만 들어달라고 끔찍한 투정을 부리는 정신 질환을 의미함이 아니라는 것도 독서를 통해 명백해졌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과 짝을 이루는 권이 <미움, 우정,...>인데요. 읽는 재미와 분위기의 활력으로만 기준을 삼는다면 이 책이 독자에게는 더 친절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짧은 길이의 "무대"에서 모든 것을 보여 줘야 하는 제약을 안고 있기 때문에, 보통 작가의 역량은 더 짧은 분량의 단편에서 잘 검증됩니다. 순전히 읽는 재미로 보나, 또 노벨상 수상 작가인 먼로의 다채로운 면을 감상하기에나, 한 권만 꼭 골라야 한다면 저는 이 책을 선택하겠습니다. 같은 한 벌 소속이라고 해도 이 책이 그 사이즈가 더 작기 때문에, 아마 기차 여행 도중 같은 특수한 처지의 독자라면, 그런 점에서도 더 유리한 면이 있겠네요, 제가 특별히 이 말을 하는 이유는, < 미움, 우정,...>도 그렇고 이 작품집도 그렇고,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의 이곳저곳을 이동하는 데에 기차가 효과적인 수단으로 실제 활용되며, 궁벽한 지점지점을 이동하는 데 있어 기차는 특별한 정취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 우정,...>에서는, 수록된 어느 작품에서도 작가로서의 화자가 특별히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가구>에서 주인공은 작가 신분이기는 하지만, 전업 작가로 보기는 다소 모호하고, 설사 말하는 시점(혹은 부친의 사망 시점)에선 작품 활동을 접었다고 해도, 구성의 타당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주인공의 소설 창작은, 그저 소설 속 불행, 혹은 갈등 발아의 구실이었을 뿐입니다. 반면 이 작품집 맨 처음에 실린 <작업실>에서 대뜸 우리에게 제시되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여성 작가 신분이며, 작가 신분이라는 설정이 빚는 그 모든 사소한 파장의 작용, 부작용이 얼개의 전부에 가깝죠. "주인공이 작가임"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이야기가 안 되는 그런 구조입니다. 게다가 분량은 대단히 짧습니다.


이 <작업실>에 서 각별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하는 인물은, 중년 남성인 집주인입니다. 처음에 제시되기로 그는, 좀 유별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소심함을 드러내기는 해도, 특별히 사악한 부류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남성은, 알고 보니 들이는 세입자에게마다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괴벽, 아니 아주 나쁜 범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네요. 가당치 않게 세입자의 사생활을 침해하는가 하면, 자신의 방문(이것 자체가 엄청난 무례죠)을 무시했다는 사실에서 "여성이 그 순간 바람직하지 못한 상대와 난잡한 행실을 벌이지 않았다면 자신의 방문을 무시했을 리가 없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고 듭니다. 급기야는 공동 화장실에 저질러진 난잡한 낙서까지 세입자의 친구(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탓으로 돌리는, 일종의 정신병인 패러노이아 증세까지 드러내죠. 주인공인 작가는 급기야 이 징그러운 중년 남성에게 "살의를 느낀다"고 까지 우리 독자에게 표방하기에 이릅니다. 읽는 우리도 그랬으니 오죽했을까요. 그런데 결말은 예측지 않은 돈강식입니다. 주인공은 그저 퇴거를 결정하고, 당일 이사를 거들러 나타난 주인집 여자는 극심한 우울이 자기 존재를 짓누르는 모습인데, 그를 보고는 주인공은 그간의 적의(適意)가 맥없이 다 빠져나가는 체험을 합니다.


보통, 신경증에 시달리며 스티븐 킹의 <미저리>에서처럼 세입자(생각해 보니 거기서도 소설가가 주인공이었군요)를 괴롭히는 집주인이라면, 히스테리라는 이름(본디, 여성에 국한한 병이라고 오인되어 왔습니다)이 걸맞을 여성으로 설정되는 게 관습이죠.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남성이며, 제법 지능적이어서 주인공을 꽤나 괴롭힐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결말에서 드러나듯 제풀에 지쳤는지 앓아 눕고 마는 우스운 결말로 마무리됩니다. 집 요한 스토킹이 무색하게 맥없이 좌절하는 모습도 우습거니와,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점도 골계미를 더합니다. 헌데 특이한 건, 흔히 세상의 주목을 받으려는 초보 속물 작가가 요란하게 과시하듯, 짐짓 기법을 이리 익숙히 구사하는 재주가 있음을 과시하는 의도가 전혀 안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나름 반전"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이고 편집증적 행태를 보이는 남성의 예로는 <미움, 우정,...>에서 <위안>에 나오는 생물 교사 루이스가 있었는데, 그도 결국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죠. 


<미움, 우정,...>의 마지막 단편 <곰이 산을...>을 떠올려 보십시오. 죽어가는, 한때 사랑했고, 지금은 다른 방법으로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은 자신을 유혹에 던져 가며(아니면, 기막힌 합리화 기제를 통해 특유의 방탕벽을 만족시키며?) 착란 상태의 아내가 한때 친하게 지냈던 늙은 남성(그 역시 환자입니다)을 요양소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아내의 반응이란? "아이슬란드에 대한 이런 멋진 책이 있는 줄 몰랐네요.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구죠?" 마치 O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연상케 하는 반전의 연속이었죠(그런 까닭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하구요). 그 작품과 이 <작업실>을 비교해 보세요. 냉소 속에 인생의 따뜻한 이면을 조명하는, 무기교의 기교로 잔잔한 진실을 전달하는 작가의 역량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먼로는, 심각하지 않고 가벼운, 과연 그리 부르기까지 해야 할까 싶은 귀여운 세미 불륜을 여러 차례 다룹니다.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려는 방편(시대 배경이 좀 예전인가 봅니다)으로 세일즈에 나서지만, 워낙 성격이 샌님이라서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아내는 남편을 조마조마하게 지켜 보기만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버지는 어렸을 적 친구였던 "가슴 큰 아줌마"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죠. 이 작품 역시 < 미움, 우정,...>에 실린 단편 <쐐기풀>과 매우 닮은 설정과 구조를 가집니다. 두 책에서 서로 닮아 보이는 두 편의 을 짝지우는 일도, 이번 노벨상을 수상한 "가식 없는 거물"의 개성을 보다 심도 있게 감상하는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움, 우정,...>보다 이 작품의 번역과 편집, 그리고 내용 자체가 더 마음에 들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