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가, 정말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내려 놓았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우리 땅, 우리 마을 이름에 얽힌 역사 창작 동화 시리즈"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역사 의식이 부족한(정말 부족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네요) 저 같은 성인(成人)이 읽어도 충분한, 아니 그 이상의, 배울거리를 던져 주는 책이었어요. 뭐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에다가, 백범 선생의 모친이신 곽낙원 여사의 성(聖)스러움을 더한 그런 캐릭터였다고 할까요, 이 "창작 동화"의 주인공인 현맹춘 할머니의 삶은, 현대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뜻깊은 사연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을, 제주도에 흔하다는 모진 바람을 능가할 폭풍처럼 독자에게 밀려 오게 하더군요. 이승주 님의 그림도 아름답고 격조 높았거니와, 실존 인물 현맹춘님의 삶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하고, 각 요소의 낭비 없는 구 성으로 문학적 완성도를 높였으며, <토지>나 <혼불>의 미니어처를 연상케 하는 제주 방언, 나아가 순우리말의 향긋하고 다채로운 향연에, 독자는 넋을 놓고 페이지를 넘기고, 멈추고,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 끝내기 아쉬운 독서를 먹먹한 마음으로 마쳤습니다.
현맹춘은, 현재 기준으로 제주도 올레길 5코스에 위치한 방대한 동백숲을 혼자 힘으로 조성한 업적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17세 때 가난한 오씨 집안에 둘째 며느리로 시집 와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던 방법으로 시가의 가산을 늘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을 꾸릴 기대에 가득합니다. 관습과 고루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과 가족의 활로를 모색하는 인생은, 주변의 사소한 것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개척 정신이 그 깊숙한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가 많죠. "아무리 제주도에 바람이 잦다지만, 어떻게 이처럼 쉬이 지붕이 날아갈 수 있을까? 집도 튼튼히 지어야겠지만, 바람을 막아 줄 숲(이것의 방언이 "수월"이라는군요)을 조성하는 게 근본의 방책 아닐까?" , "지척에 보이는 게 바닷물인데, 어째서 돈을 주고 따로 소금을 사 먹어야 할까? 버둑(황무지라는 뜻입니다)과 벵듸(허허벌판)에 염전(소금빌레)을 조성하여, 흔한 자원으로부터 자급자족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가난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려는 생기 있고 진취적인 정신이 내린 결론이고, 그녀는 이를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숲(수월) 조성 과정에서 해충인 송충이의 가시에 찔려 며칠 동안 드러누워야 했던 맹춘은(저는 송충이가 흉한 꼴에 나무를 상하게 하는 줄만 알았지, 가시까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낙엽을 치울 걱정도 없고 해충이 번식할 우려도 없는 수종(樹種)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동백(돔박)나무를 떠올립니다. 이 선구자적인 개척 사업으로 인해, 거주민들은 근 백년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혜택을 보고 있는 셈이죠.
그녀는 친정에서 얻어온 산귤 씨를 뿌려, 요즘 말로 농가 부업을 시도하여 별도의 수익원을 모색합니다. 친정 어머니가 특별히 이 산귤씨를 구해 준 것은, 시집 간 후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를 온 딸에게 "출가외인은 시댁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며, 물질 도구를 대여하는 일을 금했기 때문입니다(동네 사람들의 압력력이 더 결정적이었지만). 이처럼 이 동화는 마치 성인용 본격 소설처럼, 앞서 무심히 제공된 화소(話素)가 반드시 뒤에서 요긴하게 재활용되는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던데요. 이런 예가 여럿 있으니 글을 이어나가면서 수시로 지적하겠습니다. 아무튼, 애써 가꾼 귤밭이 그 소출을 거둘 시기가 되자, 어떻게 알았는지 관청의 아전이 와서 부부를 호되게 추궁하며 매질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득 탈루를 시도(과실이라고 해도 위법은 위법이죠)한 셈이니 전혀 명분 없는 처사는 아니겠으나, 문 제는 그 "세율"에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정한 생산량의 100%를 책정하니, 만약 재해로 그 분량에 미달하면 부족분은 맹춘 부부가 다 채워 넣어야 합니다. 땀 흘려 노동한 대가의 일부도 못 챙기고, 오히려 추가의 착취까지 당하니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야밤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밭에 뜨거운 물을 뿌려 애써 가꾼 작물을 다 고사시키고 말죠. 이 에피소드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비트는 어리석은 과세 정책을 밀고 나간 당시 "조정(책의 표현입니다)"의 무지함을 폭로하는 구실을 하는데요. 앞부분에 나온 증언, "잠녀는 가혹한 조세 부담이 지워졋으니 차라리 일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았으나, 이미 관청에 등록이 된 터라 물질을 포기할 자유도 없었다."는 부분과 연관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멸적 수탈 구조의 부조리가, 국가와 지배층, 기층 민중의 삶을 모두 파멸로 치닫게 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맹춘은 생산 구조, 계층 질서의 모순과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 일생을 보냈던 근대사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됩니다. 앞서 말한 산귤밭의 존재를 관아에 고변한 자가 따로 있었던 걸로 암시되는데요, 바로 맹춘의 어린 시절부터 사사건건 훼방과 질시를 일삼았던 악녀, 왕생이라는 캐릭터가 그것입니다. 본디 얼굴 예쁘고 마음씨까지 착한 여주인공에게는, 이처럼 저주 받은 성품의 안타고니스트가 양념처럼 끼게 마련이죠. 이상하게도 인물이 더 나았던 맹춘은 가난한 남성에게 시집오고, 봐 줄 구석이 없었던 왕생은 여유 있는 집안과 연을 맺어 이후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걸로 나옵니다. 맹춘은 이후 모진 고생으로, 누구에게나 가난한 아주머니 취급을 받는 행색으로 전락하지만, 왕생은 허여멀건한 모습으로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장면에서까지) 노동과는 거리가 먼 유한 계급의 이미지를 유지하는가 봅니다.(물론 이는 극적인 변전을 이후에 맞이하는데요, 스포일러가 되므로 자세히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자기 백성을 가장 못난 방법으로 괴롭히던 나라, 나랏님은, 물밀 듯 밀려오는 외세의 위력 앞에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제주도에는 느닷 천주교의 위세를 빙자하여 새로운 수탈의 마수를 뻗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일종의 권력 진공 상태에서, 우리가 잘 아는 이재수의 난, 유명한 민란이 발생하게 되죠. 이 소설에서는. 비록 민중의 한을 대변하는 존재로 이 맹춘이 설정되고는 있으나, 민란 한가운데에서 자칫 "폭도들"에게 자신과 피붙이가 큰 화를 입을 뻔했다는 설정을 둠으로써, 이재수의 난에 대해서 그리 긍정 일변의 평가를 하지는 않습니다. "천주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를 빙자한 악한들이... " 같은 서술을 통해, 민감한 문제에 대한 균형 있는 접근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은 현지에서 어느 정도 합의된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점도 무시 못 하기에, 작가는 책 후기에서 아동 독자를 위해 표준적인 역사 평가를 상세히 제시하고도 있습니다. 참 여러 각도에서 세심한 배려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처럼 무거운 역사 이야기만 가득하냐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서, 맹춘은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남편과의 사이에 일찍 수태를 하게 됩니다, 꿈에 진주를 움켜 쥐고 내 것으로 하려 들자, 어느 할머니가 나타나, "그렇게 네 것으로만 취하려 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경고를 하고 떠납니다. 꿈의 뜻이 궁금해서 손윗동서에게 물어보니, "태몽이긴 한데 계집아이 꿈이라 대를 잇진 못하겠군!" 이라는군요. 하지만 달을 채우고 낳은 아기는 사내애였습니다. 아마 자신이 아들을 보지 못하니 저런 경망한 소리를 제 바람을 담아 떠드나보다 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뒷부분에서 이 손윗동서가 소박 맞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다른 부인을 들이고도 끝까지 아들이 없었는지, 맹춘의 첫아들은 결국 시아주버니에게 양자로 가고 맙니다. 새로 들인 부인도 나중에 어느 대목에 등장해서 의미있는 대사 한 마디를 하는데요, 이처럼 이야기가 재미있게 이어지면서도 뭐 하나 낭비되는 요소 없이, 마치 맹춘의 야무진 살림솜씨마냥 스토리가 찰지고 밀도 있게 꾸려집니다.
제주도에서 일제 강점기 연간에 그처럼 활기 있는 저항 운동이 일어난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새 노령에 접어든 현맹춘에게, 이 독립 운동은 다른 각도에서 그의 인생을 다시금 시험합니다.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현맹춘이 이 과정에서 보이는 자세와 태도는, 참으로 신중하면서도 현명합니다. 젊은이들의 의기는 이해하지만,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도 책임 있는 태도는 아니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무지몽매하던 이전 장의 아낙 캐릭터들은 다 퇴장하고, 신식 문물과 계몽 교육에 그 영혼이 눈 뜬 젊은 여성상이 보기 좋게 이야기를 채워 나갑니다. 현맹춘은 무기력하고 암담했던 과거와, 활기와 의지로 가득하지만 불안정한 미래를 가교하는 제주의 혼으로 구실합니다. 이 과정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마치 <자이언트>같은 서양 고전 연대기 영화를 보듯 읽는이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있더군요. 저항을 소재로 삼고 한과 고발을 짙게 투영하면서도, 결론을 화해와 평화로 끌고 나가는 건 참 보기 드문 일입니다. 현맹춘의 삶을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건, 마지막에 울창하게 이뤄진 동백 숲이 못마땅해서 일부러 침입하여 수목을 망가뜨리는 아이들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땅을 물정 모르는 신혼 부부에게 팔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자가, 이제 부동산 가치의 급격한 상승을 보고 그 개발자의 노고는 잊은 채, 부당거래라도 한 듯 불평을 제 자손에게 털어 놓는 모습, 얼마나 못나고 사악합니까. 그러런데 현맹춘은 그리 여기지 않습니다. 언젠가 젊은 시절 자기 꿈에 나타났던 그 할머니처럼, 나눔을 모르고 협소한 소유욕만 챙기는 태도를 나무라려, 하늘이 내린 경고로 받아들이는 거죠. 바로 이 대목에서 맹춘은 스칼렛 오하라나 <토지>의 서희를 넘어, 동양식 성녀상에 접근하는 거죠.
표현이야 제주 방언의 아름다운 성찬이 펼쳐지니 읽고 새기는 맛은 기대해 마땅하지만, 작가의 솜씨는 대단히 섬세합니다. 예를 들면 이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아마 제주 일각에는, "먹을 것을 구한다"를 일종의 대유법(제유법)으로 삼아, "쌀을 구한다."라고도 하나 봅니다. 이런 사소한 표현에까지 신경을 써서, 문장 하나하나에 기술적 의미 이상의 특별함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출가"라고 하면 보통 "시집간다" 정도로 이해하는데, 웬 후주 표시가 되어 있나 해서 넘겨 보았더니 저런 각별한 의미가 따로 있었네요. 참고로 제주도는, 아직도 아래 아 음가가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자분이 얼마나 이 책에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 능력 범위 안에서, 저는 이 책에서 단 하나의 오탈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조카에게 주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현맹춘 님이 동백꽃 사랑하던 마음마냥 이 책을 제 서가에 고이고이 모셔두기로 했습니다. 아, 참, 현맹춘 님의 위대함은 "나눔"의 정신에도 있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타협책으로, 책 주인인 제가 이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잘 소화한 정수(精髓)를, 제 조카에게 저의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좋은 책은 그 교훈과 향취를 주변에 어떻게 해서건 전파를 해야지, 아끼면 똥 된다는 말처럼 저혼자 꿍쳐서(이 책 p75 참조)는 안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