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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싱 1 ㅣ 오싱 1
하시다 스가코 지음, 김균 옮김 / 청조사 / 2013년 11월
평점 :
<오싱>은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시점,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거의 같은 주파수와 진폭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전합니다. 저 멀리 미국이나 유럽에도 소개되었고, 그곳의 독자(讀者)들 역시 한 여인의 삶으로 알레고리된, 일본이라는 사회 자체의 가난과 무지, 봉건 잔재의 혁파 과정을 장대한 서사시로 다룬 이 작품의 독자(獨自)적 가치에 큰 갈채를 보냈다고 하죠? 하지만 이는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건조한 정보에 지나지 않고, 20101년대인 바로 지금을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 맹렬한 경제활동으로 겪어 내고 있는 세대가 자신의 영혼과 감성, 혹은 이성으로 수용하는 이미지는 아니겠습니다. 최근 스크린으로 다시 옮겨지기까지 한 <오싱>. 왜 30여년이 흐른 지금 와서 다시 <오싱>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이 현대판 "고전"의 텍스트와 행간을, 첨단의 문명과 트렌드의 세례,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시대정신의 촉각을 예민하게 발동시킨 후에야 그 진정성 있는 내용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처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 그저 읽는 이의 눈물만 짜내는 신파류의 애담(哀談)이 전개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영어로 흔히 tearjerker라고 하는). 우리가 부모님 세대로부터 전해 들은 바도 그렇고, 오싱은 그저 어린 여자 주인공이 가난에 찌들고 멸시 받고, 온갖 고생만 하다가 마침내 세속적 부(富)라는 보상을 받는 결말로 끝나는, 상투적인 입지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오싱이 결국은 악몽과도 같았던 가난이 저주를 이기고 거부(巨富)를 쌓는다는 결말입니다. 이는 그 동시대인들에게는 합당한 정의의 회복 같이 다가왔겠으나, 시대를 격한 현대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로 신파입니다. 차라리 모진 고생 끝에 여전한 빈곤에 파묻힌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이는 냉연한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모던함이라도 있습니다(신파성의 역설적 완화). 그런데 그 모진 시련을 딛고 결국엔 보란 듯이 자수성가의 봉우리에 올라 수난의 보상을 받는다? 당대 대중(한국과 일본 기준)의 정의감과 문화적 성숙도에 비추어 이는 결국 신파입니다. 가난을 극복하러 일에 중독되다시피 피땀을 흘린 그 노고도 사실이요, 노력이 그 땀의 결실을 어느 정도는 정직하게 돌려 주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결말도 과장은 아니지만, 오싱처럼이나 모진 시련을 한 몸으로 겪어낸 이는 극히 드물었겠고, 그녀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성공의 정점에 오른 인생은 더욱 드물다는 점에서이죠. accentuate the positive, eliminate the negative! 신파의 생명은 바로 장점의 부각, 단점의 희석이라는 과장법에 본질이 있습니다.
만약 이 <오싱>이 그런 변종 신파, 철저히 당대에만 효용, 호소력을 가졌던 신파에 불과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화려하게 살아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퇴장했던 <오싱>이 다시 현대인의 커튼 콜을 받은 배경에는, 무언가 지금에 와서 다시 들여다 봐도 영감을 주고 활기를 생산하는,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여전히 그 안에 있는 덕분이었을 겁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다 알 것 같은, 읽지 않아도 다 읽은 것만 같은 착각을 편하게 부르는(고전이 보통 이렇습니다만) <오싱>을, 지금 이 시점에서 직접 읽어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이 1권을 읽고 느낀 점을 간략히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소설은 시간순서대로 따분하게 사건 배열을 하지 않고, 80고개를 넘은 노인이 된 오싱을 둘러싼 풍경과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싱의 시선과 회고가 내러티브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핏줄도 아닌 양손자 격 게이의 눈을 통해 주로 그녀의 생각과 행동이 독자에게 전해집니다. 이 게이는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 정도의 나이이며, 이전 세대의 선입견이나 속물 근성을 아직은 물려 받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싱 노인과 이 청년 게이 사이에는 어떤 혈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오싱 노파는 이 청년을 친손주 이상으로 사랑합니다만, 우리는 소설을 읽어 가면서 그 배경과 깊은 곡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이의 눈을 통해 초반의 액자가 형성되면서, 우리는 이 소설의 공명대가 무한히 유효한 젊은 세대 시선의 성격을 유지한다는 점에 공감하며 서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약 시종일관 노인의 1인칭으로 흘러갔으면 우리는 이 장편의 구경꾼으로만 남았을 것이며, 지난 시대의 객담은 그 자체로 소설의 낡은 페이지 안에서 고립되었을 겁니다.
2) 오싱은 물론 운명처럼 어떤 이끌림에 의해 자신의 고향, 그 신산과 고생에 녹아든 고장으로 단신 이동을 감행했지만, 그 심리적 배경에는 가족과 사업체에 대한 불만이 깃들어 있었을 겁니다(자신은 애써 부인하죠). 아들과 운영진에 대한 생각은 불만과 노함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에는 우려가 더 갚은 차원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로 가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파국에 도달한다." 사업의 영속성에도 걱정이 미치거니와, 그 사업이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에까지 노인의 사려는 범위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웃들 사이에서 인심을 잃고서 어찌 이윤을 계속 낳을 수 있겠으며, 설사 장사가 잘 된들 주변을 궁핍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면 이것은 이기적인 죄업에 다를 바 아닙니다. 오싱 할머니는 가문의 장래와 공동체의 미래까지 동시에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어. 이대로는 안된다." 바로 이 점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경영학 이론을 배운 바 없는 그녀지만, 삶의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통해 살아 있는 지혜를 터득한 위상인지라 한숨 하나에도 백명 천명 분의 생령과 고뇌를 담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불길한 예언이라도 되듯, 오늘날 성장이 정체되고 전통 가치가 송두리째 변질 붕괴된 일본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고전과 한시절 유행물의 차이는 이처럼, 그 교훈과 유용성이 현재에까지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서 차이가 납니다.
3) 오싱이 모진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물론 두뇌의 총명함에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태생의 밝은 성격, 정의감, 좁은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환경의 요구와 압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줄 아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이런 성격상의 매력은, 인간이 그 깊은 마음에서부터 언제나 동경하고 수렴하려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녀의 주변에는, 인간의 탈을 쓴 악종 말종도 있었지만, 약속이나 한 듯 뜻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 은인과 조력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인류 보편의 희망을 상징하는 성화 봉송 주자가 그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듯, 릴레이식으로 출현하는 은인, 의인들은 오싱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휴머니티의 약한 맥이 마침내 그 결을 맺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면면히도 그 줄을 이어갑니다. 이 중에는 마치 반군국주의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 동사 직전의 오싱을 자기 체온으로 살리는 탈영병 쥰사쿠도 끼어 있습니다. 그는 오싱에게 문자를 가르쳐서, 보다 넓고 열린 세상으로 인도하는 한 줄기 등잔의 구실을 합니다.
4) 오싱의 역경 극복 과정이 자연스럽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나카가와 목재상에 더부살이로 팔려가 특히 스네라는악질 관리역의 모진 학대에 시달리는데, 결국 은 50전 절도의 누명을 쓰고 "직장"에서 반타의로 이탈하고는, 끝내 목귀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만약, 나카가와家로 복귀하여 그 악한들 앞에서 명예 회복을 하고 그들을 설복하는 식으로, "작은 단계"에서의 승리까지 다 챙기게 하는 구성이었다면 현실감이 매우 덜했을 겁니다. 그러나 오싱은 일단 이 단계에서 역량 부족으로 좌절을 맛봅니다. 그리고 쥰사쿠 일가로부터 생명력을 충전받은 다음, 본가로 귀환하여 극한 상황에서 일단 생존을 도모할 방도가 무엇인지 자각합니다, 고용 계약이 성립하기도 전에 신나는 모습으로 더부살이길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연민의 대상이라기보다 "마땅히 저래야지!"라는 동감과 응원의 표적이 됩니다. 가가야 쌀 도매상에 당도해서도, 그 악몽 같았을 나카가와 목재상에서의 경험을, 커리어나 이력처럼 내세우는 그녀의 강인한,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시대를 초월한 회복 탄력성 그 미덕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같은 점들이, 오늘에 와서 다시 오싱을 읽어야 할 그 보편적인 매력과 감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