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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수바드라 다스 지음, 장한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6월
평점 :
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한 달 전쯤('24.5) 제가 <비트겐슈타인 입문>이라는 제목의, 프랑스 저자분이 쓴 유명한 책 한 권을 리뷰했었는데요. 그 본문 중에 보면 contemporary 인류학자이자 여성학자(많이 배우신 부류의 페미니스트) 한 사람의 논문, 비트겐슈타인의 페미니스트 식 재해석을 다룬 글이 잠깐 인용되었더랬습니다. 그 논문 저자 이름이 비나 다스였고,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인도 사람입니다. 지금 이 책 저자 수바드라 다스 박사는 그분보다 젊은 분인데 다스("봉사자")라는 성씨가 원래 벵골 지방에 많아서일 뿐 두 사람이 서로 혈연관계이거나 한 건 아닙니다. 그 비나 다스, 지금 이 책 저자 수바드라 다스 모두 벵골 출신입니다. 다스라는 성은 힌디어로 दास라고 쓰는데, स는 원래 밑에 취소 기호가 붙어야 하지만 그냥 저렇게도 씁니다. 원 발음이 "다사"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찰스 다윈은 근대 들어서도 이어지던 종교적 폐습의 근본을 허문 사람으로도 칭송받습니다만, 이 책에서 저자는 인종적 편견을 깬 데에도 크게 기여한 점을 강조합니다. 식민 통치 시절 영국인들로부터 혹심한 인종 차별을 겪었던 인도인들, 그 중에서도 벵골 지방에는 영국인들이 일찍부터 밀고들어와서 이 풍요로운 땅을 수탈했었습니다. 그 먼 후손이기도 한, 역사학자 수바드라 다스가 이 주장을 하는 건 정말 독자 입장에서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것입니다. p51을 보면 대영제국에 노예제 폐지법 적용이 겨우 1833년에 이르러서라는 건, 법적으로 대영제국에 편입된 식민지에의 적용을 말함이며, 인도는 엄밀하게는 무굴 제국과 각 토후국의 명목상 지배를 받았지 저때는 영국의 법적 통치를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사실상, 경제적, 무력 지배).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넘어서 세포이 항쟁 진압을 거치고 인도 제국이 선포되어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게 되었죠.
p69를 보면 tu regere imperio populos, Romane, memento라는 라틴어 구절이 인용되며, 이 구절은 베르길리우스가 썼다고 나옵니다. 이게 고대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발췌되었으니 당연하겠습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17세기 계관시인 드라이든이 "그렇지만 로마인이여, 오로지 당신만의 힘으로 인류를 통치하고 세상을 복종시키는 것이다"라고 번역했다고 나오는데, 저 구절만으로는 그리 새겨지지 않습니다. "너 로마인이여 기억하라, 사람들을 제국의 힘 아래 통치한다는 것은"까지입니다. 드라이든의 저 번역에 해당하는 구절은 뒷부분까지가 다 나와야 합니다. "오로지 당신만의", "그렇지만" 같은 건 베르길리우스의 원문에 없고, 드라이든의 번역문에만 있는 문장 성분입니다. 아마 드라이든은 저 구절을 그리 읽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드라이든은 "로마인이여"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로마라는 도시를 의인화하여 "로마여"라고 했죠.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의 라틴어 원문은 (이 책에서도 보듯) 명백하게 "로마인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참 후 칼라일은 영국인을 새로운 로마인이라 선언했고, 매우 다른 동기에서 20세기 초 무솔리니도 영국인을 그리 불렀다고 책에 나옵니다. 저자가 구태여 칼라일과 무솔리니의 그 발언을 인용하는 게 매우 재미있게 읽힙니다.
휴 블레어(p103)뿐 아니라 19세기 인류학자, 문화학자들은 너나할것없이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주장한 바는, 특정 민족이나 인종만이 문자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더 독특하게 보입니다. 잉카 문명만 해도, 키푸라는 고유의 기록 시스템(p114, p220)을 갖고 있었음이 최근에 밝혀짐에 따라 그 오랜 선입견 하나가 깨어졌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피사로 패거리에게 그토록 선진 시스템 전체가 쉽게 무너진 사실에 대해서도 별반 이상해할 게 없습니다. 그런 예는 몽골 기병에게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 중 하나인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 대학살이 벌어진 사실이나, 베이징의 빈틈을 여진-차하르 연합 세력이 수시로 공략하여 민간을 약탈하다가, 결국 도르곤이 입관하여 패권을 차지하고 양주의 학살을 지시한 예 등 부지기수입니다. 이 모두에 공통된 하나의 원리는, 패배한 이들 역시도 그 체제에 내부 모순이 심각하게 축적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잉카 제국이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는 점도 대단할 게 없는 게, 대영제국은 어디 면적이 좁아서 나치에게 멸망 직전까지 몰렸겠습니까?
Death is the great equalizer(p309). 이 말은 개인뿐 아니라 문명권, 나라, 도시의 경우에도 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익히 배운,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의 죽음에 대해 다소 기이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제9장의 서술이 가장 재미있게 읽혔는데, 얼핏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토픽들을 기막히게 엮어서 "서양은 모든 죽음을 망쳐 놓았다(p337)" 같은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내는 저자의 스토리텔링 기술에 탄복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인기 있는 강연자, 채널 운영자인 사실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할까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