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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꿈결 클래식 6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흑미 그림, 백정국 옮김 / 꿈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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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고전에 무지하고 소양이 부족하다 해도 이 <노인과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아무리, 읽지도 않고 아는 척 한 마디씩 하는 게 고전이라곤 하나, 이 작품에 관해선 대강의 줄거리(!)를 누구라도 당당하게(?) 남 앞에서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고요("아, 그건 나도 알지. 그 노인이 혼자 .... 뭐 이런 얘기 아냐? 맞지?"). 심지어 제가 어렸을 땐 이 고전을 소재삼아 허무 개그 비슷한 농담거리가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개그의 소재로 쓰이려면 일단 토픽이 대화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야 하겠으니, 줄거리의 유명도 면에서 이 작품을 능가할 만한 고전은 아마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 <구토>라든가 <인간의 굴레>를 소재로 웃기는 이야기를 지어내 퍼뜨릴 수 있을까요?


전에 꿈결 클래식의 일환으로 나온 <변신>을 읽고 아 이 작품이 이런 메시지를 담았었구나, 하고 제법 신선한 충격을 받아 가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공식화, 박제화하여 "A작품- B라는 주제"라 편의로 정리하는 내용들은, 그게 입시 위주의 교육이 부호화하여 보급하는 게 아닙니다(한국 입시 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리석고 정직하지 못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소양을 과시하기 위해, 속물들끼리 모여 합의한 바를 암기하고 다니는 거죠.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부호로 내 정신의 공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시간을 내어서 원전 혹은 알찬 번역본을 마주해야 합니다.


청소년 시절, 혹은 학부 시절에 이미 진지하게 읽은 내용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카소의 추상화가 그를 볼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환기시켜 감상자가 "질리지 않듯", 고전 역시 읽을 때마다 자신의 그간 성숙한 진도에 맞춰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고, 어쩌면 가장 깊은 오의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어려서 고전을 읽었다 함은, 그렇지 않은 남보다 먼 거리를 볼 수 있다는 정도이지 그걸로 최종의 단계를 마쳤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늙어서 처음 맛보는 독서는 늙어서 겪는 성행위처럼, 절정은 물론 끝물까지 다 지난, 시들고 어설프며 슬프기까지한 모종의 흉내에 불과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이 작품을 읽고 부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야구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나요?" 답은, "그래서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이다."였는데, ㅎㅎ 이 말씀은 지금 생각해도 명답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질문에 대한 직접적 답이 아닌데, 그간 책깨나 읽은 저도 제 아들(없지만)에게 이런 명답은 못해 줄 것 같습니다. 역자 후기에 보니, 역자께서는 대단히 심오한 해석을 내립니다. 조금만 인용해 보면...

"... 자주 끼어드는 야구 이야기가 작품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고도 보인다. 그러나 야구는, base로 돌아오는 게 목적인 게임이다. 노인 역시 고기를 잡았건 못 잡았건, 영혼의 안식을 얻었건 못 얻었건, 배를 몰고 나갔던 바다에서 결국은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만, 밖에 머물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건 원점 회귀나 퇴행적 리셋이 아닙니다. 돌아오고 나서야 우리는 자신의 성장과 성취를 겸허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면, 겸허한 반성과 내려 놓음 역시 나의 초심이 소재한 그곳에서 이루는 것이죠.


야구가 베이스(물론 홈 베이스를 가리킵니다. 베이스는 1, 2, 3루에도 다 있으니까요)로 돌아오는 게 목적인 게임이라는 말씀은, 특히 이 작품의 주제와 연관할 때 참으로 심오한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ㅎㅎ 꼭 그런 교화적 스탠스를 떠나서도, 이 야구 이야기가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조 디마지오는 물론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도 생존해 있긴 했으나, 요즘 아이들이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 가지는 느낌처럼 운동 선수라기보다는 아득한 전설 같이 다가왔습니다. 조 디마지오는 그 어렸던 시절 제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는데, 딕 시슬러는 제가 이 꿈결판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읽고서야 "아 맞어, 이 이름도 그때 있었어."라는 생각이 비로소 떠오르더군요. 만약에, 헤밍웨이의 이 작품에 조 디마지오만 있었으면 야구 이야기 전체가 대단히 공허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저는 요즘 한국 작가들의 단편을 읽을 때, 그저 분위기만 내려고 (작가 자신이 잘 소화도 못 한) 몇몇 이름이나 사건을 끌어대는 게 상당히 눈에 거슬리더군요. 조 디마지오 이름 옆에 딕 시슬러가 나오기 때문에, 야구 이야기가 건성의 흉내가 아님이 증명되며, 당대 야구팬(들)의 실감과 역동성 한 자락이 이 작품 속에 멋지게 포착되는 겁니다. "뭐, 딕 시슬러라고? 이 사람 이거 그때 야구 좀 본 사람 맞네!" 자기 작품이 후대에 길이 남을 줄 알고 헤밍웨이가 영리한 도장을 이렇게 찍어 둔 거죠. 야구팬이면 뭐합니까. 아는 사람들 사이에 티를 낼 줄 알아야지.

노인...의 말이라기보다 작가 자신(다르죠?)의 말로, "거센 바다를 가리켜 쿠바 어부들은 여성 정관사 la를 쓰지 않고, 남성 정관사 el을 붙이기도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권위자의 완역본을 읽었어도, 이런 말은 어린 머리에 납득이 안 되었기에 그냥 흘려넘긴 부분이죠. 저는 솔직히 이런 말은, 헤밍웨이가 이쪽 언어 화자들의 정서를 표피적으로만 받아들인 소치라고 봅니다. 언어 속의 성(gender. 문법의 성)은, 자연적 성별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인도 유럽 어족 중 유독 영어만이 이 gender를 까맣게 잊은 채 놀고 있기 때문에, 영어권 작가인 헤밍웨이가 이런 소릴 할 수도 있는 거죠. sex와 gender가 별개라는 데서 성 해방 담론이 태동할 수 있는 건데, 묘하게도 그의 (언어적, 담론적) 무지가 생전 실물로서의 성향과도 매치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역주가 친절합니다. 이 고기가 어느 종을 가리키느냐를 놓고, 이미 청새치라는 게 정설로 굳어졌지만, 역자께서는 본문의 어느 대목까지가 그저 "새치"이며, 어디서부터를 두고 "청새치"로 해석해야 할 지 근거를 들어 가며 세심하게 구분합니다. 지명 "산 티아고"를 두고 역자께서는  어원을 쉽게 풀어 주시는데, 혹 어떤 독자는 Sant+Iago의 오류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아요. 이는 오랜 역사를 두고 이뤄진 언중(言衆)의 오분석이며, 실제로 저쪽 사람들이 디에고나 티아고 같은 이름을 흔히 쓰고 있습니다.


역자께서는 이 작품이 처음에 헤밍웨이가 의도했던 다른 제목이 붙었을 수 있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실제로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이만큼 제목이 줄거리와 주제를 잘 함축하는 예도 드물지요. 이 작품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까지 그만큼이나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비결은, 주제의 보편성, 플롯의 (위대한) 단순성 못지 않게, 제목의 함축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자께서는 그 외에도 TV 주말의 명화 코너에서 이 작품의 영화판을 감상했던 회고를 적어 두시는데, 1) 흑백 2) 잦은 재방송 등을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세대 차이를 절감했습니다. 흑백 방송 시대에는 도대체 영화가 컬러인지 본래 흑백인지를 판별할 방법이 없었을 텐데, 저는 이 영화를 제 성장기에 딱 한 번 방영된 게 컬러였던 걸 또렷이 기억하거든요. 확실히 흑백 포맷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에, 지루한 영화도 어떤 점에서 재미있게 보도록 돕는 면이 있습니다. 저의 부친(극장에서 컬러판 필름을 이미 보신 분)은 그 주말 밤에 "이 소설은 절대 영화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며 말씀을 길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진정 이 충실한 완역본 본문만 읽어 봐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될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걸 스크린에 담은 채 전달이 과연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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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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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로서의 유쾌함과 소재로서의 범죄가 한 작품에 같이 다뤄지기는 여간 힘들지 않을 텐데, 그런 뜻에서 코지(cozy) 미스테리의 창작자들에게 고충이 크리라 짐작합니다. 독자도 끔찍한 상황들의 이해, 접수, 정리에 대한 부담을 덜고 순전히 지적 유희로서의 미스테리 해결에만 몰두할 수 있으면 정말 편하겠죠. 배경과 인물, 사건 등이 모두 한국적인 것들로 바뀔 수 있다면 읽어가기에 더 고마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암울한 삼수생의 처지인데다 처음에 스스로 흘리는 암시와는 달리 용모도 그닥 매력적일 것 같지 않은(어느 어르신께 "애기엄마"란 말을 듣는다든가, 유창희한테 "아줌마"로 불린다든가 하는 걸로 보아), 강무순이라는 여성이 1인칭 화자 겸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이곳 시골(작품 중에는 구체적으로 "충남 운산군 산내면 두왕리"라 나오지만, 가상의 주소죠)에 살았는데, 삼수생이 되어 다시 돌아온 거죠. 여기서 몇 년 전 홀로되신 할머니 홍간난 여사와 여름을 함께 지내야 합니다.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 마을은, 15년 전 피해 당사자는 물론 마을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긴 어떤 "범죄 사건"을 겪었는데, 공권력과 미디어가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고 전국적 시선을 끌었지만 아직도 진상이 오리무중입니다. 삼수생이 언제나 그렇듯 공부는 하기 싫고 엉뚱한 데서 존재감은 느껴 보고 싶고, 마침 우연히 마주친 저편 사는 "같은 양반댁"의 종손 유창희(중학생 꽃돌이로 묘사됩니다)를 만나 같은 관심사도 확인한 겸, 팔자에 없는 명탐정으로 변신합니다. 남 일에 코 디밀기가 얼마 안 남은 생에 큰 낙이신데다 연세에 비해 여전히 정력 넘치는 홍간난 여사도 이에 합류, 3인은 드디어 "한날 한시에 같이 실종된 네 여성들"의 행방을 찾아 나섭니다. 홍간난 여사의 회고로는 "...그땐 워낙 인신매매도 많았던 터라.. "라지만, 이 말이 타당하려면 소설의 배경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이라야 하겠습니다. 여튼 멀쩡히 잘 살던 네 명의 여성(처녀, 유아, 학생 등)들이 갑자기 없어졌다면, 이는 누군가 나서도 해결해야 할 불의, 범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피해자 가족 중 하나인 목사님 부인은 사라진 딸 때문에 완전히 실성해 버린 상태라고 하니.

눈에 띄는 건 이런 시골 마을의 사정상, 이웃의 피해와 아픔은 일단은 곧 나 자신의 곤란으로 바로 공감대가 연결되었다는 점이죠. 홍간난 여사도 피해자들을 무지 동정할 뿐 아니라, 당장 제 살 길 걱정해야 할 이웃들도 마음씀이 다들 비슷합니다. 마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수생이 책은 안 보고 의분에 불타며 실종자를 찾아 나서는 마음과도 닮은(..은 아닌가요?) 목가적이고 더없이 평화로운 인상과는 달리, 이 마을의 삶은 윤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각 가정마다 비극적이고 불쾌한 사연들을 대개 하나 이상씩 품고 있습니다. "이런 안온한 고장에 왜 이런 범죄가...!"는 외부인의 물정 모르는 감상일 뿐이고, 언제 터져도 터질 고름과 상처가 범죄 사건으로 응집되어 나타났다는 게 더 정확한 진단 같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런 시골을 보고 그런 삭막한 말을 할 수 있나?"
"오히려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릴세, 도시에는 여론도 있고 보는 눈도 있고 보다 세련되고 타당한 판단이 지배하는 곳이기나 하지. 하지만 시골은 닫힌 동네야. 편협한 여론이 한번 가치의 대세를 점하면 그게 곧 진리로 행세하겠으며, 드문드문 떨어져 사는 여건상 범죄를 은폐하기란 또 얼마나 편하겠나?"

셜록 홈즈의 이런 평가가 유별난 게 아니라, 일반인이 인정하기 불편할 뿐 그게 곧 진상을 꿰뚫은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활기있는 장면이 펼쳐지는 건, 자신이 멀미에 약하다는 것도 잊고 사태의 진상을 밝힐 의지 하나로 두 젊은이(..)와 함께 장거리 버스편으로 유씨 댁 부부를 미행하는 홍간난 할머니를 묘사한 대목입니다. "전투력을 상실한 아군을 버려두고" 운운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강무순의 엄청난 수다에 담긴 표현들이 다 참신하고 웃기지는 않았으며, 솔직히 그 상당수는 짜증이 나기까지 했습니다만, "철학은 몰라도 시간은 칸트였다(정해진 순간 정확히 코를 골며 숙면에 빠지는 자기 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 등 몇몇 마디는 꽤 재치있었지요. 강무순은 이과인지 문과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때는 멘델을 거론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행렬을 중1때 그만뒀다"는 걸로 봐서 공부하고는 연이 안 닿는 분 같습니다. 그만 둔 게 문제가 아니라 뭘 언제 공부했는지도 맵이 생성 안 된 걸로 봐서요.

진상은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강무순 유창희 홍간난 트리오에게 특별히 마플 급의 탐정력이 보유, 실현되어서라기보다, 진실이란 본디 그렇게 힘이 쎈 편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이란, 대개는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 인위의 세팅이 이를 가로막기란 오히려 그게 더 어렵겠죠. 진실이 (홍간난 여사 말마따나 박사님 전문가님 기자님 따위가 그렇게 많이 마을을 거쳐 가며 헤집어 놨음에도 안 밝혀진 진실이)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낸 건, 본디 진실이란 인간 사이의 진정어린, 1차적 소통에 근거를 두며, 그 소통이 본래의 힘을 발휘할 때 마치 썩은 장막이 제풀에 주저앉듯, 혹은 햇볕이 망또를 자발적으로 벗기듯, 사리를 제 자리로 갖다 둘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본디 하나가 아니라 "따로 또 같이"에 불과했기에, 한꺼번이 아니라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어째서 그 재앙들이 한 날 한 시에 다가왔는가? 이는 우연이 아니라, 재앙이 다른 재앙을 알아보고 길동무를 삼는 이치와 같습니다. 결과는 또다른 원인이 되어 사고를 유발하고, 그래서 결과들은 처음부터 한 형제였던 양 어깨를 겯습니다. When it rains. it pours.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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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치 개구리 소년 실종처럼 최소 사고라고 생각했던 그 미제 사건은, 알고 보니 한 건만 단순 사고였을 뿐이었네요. 진상이 모두 밝혀지니 강무순 트리오는 정말로 명탐정으로 등극해 마땅한 듯 할당된 미션을 다 해결했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지울 이유는 없으나, 보는 우리는 과연 마음이 편안해도 될까요?

실종 사건은 그저 단순 사고에 불과했지만, 진짜 "범죄"는 모두의 눈에 띄지 않고 영원히 은폐되었습니다. 범죄자가 제 응보를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에. 그는 존재감도 없던 풍경에서 이제 끔찍한 사고의 희생자로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 그는 오히려 사면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어가는 그 순간 이 가증스러운 범인은 무엇이 제 인생에서 남는 장사일지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있었어요. 그의 기대대로 되었으니 이 피해자를 가장한 범죄자는 죽음과 승리를 맞바꾼 셈 아니겠습니까? 유령같이 살아 온 그에게 목숨이 큰 의미를 가진 듯 보이지도 않고 말이죠.

그녀, 모두의 선망이 된 그녀였지만 박제처럼 이상화하여 존재가 규정되어 버린 삶이었기에,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고 범죄자의 손에 끔찍한 꼴을 당해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무정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못난이 모지리로 태어났다 해도,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다 죽어야 합니다. 광인, 변태성욕자의 손에 죽은 것보다, 19년을 모두의 허상에 맞춰 붕 뜬 듯 산 그 시간이 더 비극이라고 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유창희의 나이라든가 강무순의 무심한 듯 내뱉은 말 속에 들어 있던 진실처럼 "미모는 이 집안 내력일세" 어쩌구 하는 것, 기타 그 숱한 단서들에서 감을 어느 정도는 잡았을 겁니다. 腐녀자스러운 강무순의 수다가 (거듭 말하지만) 짜증스럽긴 하지만(BL깨나 좋아할 것 같죠? 쩝), 크리스티 여사의 <ABC 살인 사건>에서 "헤이스팅스가 몰랐던 사실"처럼, 어느 죽어가는 자의 "주마등'이 시점(視點)과 시간을 초월하여 독자에게 건네는 말 등이, 책을 끝까지 덮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무를 감추려면 숲에 숨기라는 기본 트릭까지 닮았네요, 그러고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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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들 - 뇌의 사소한 결함이 몰고 온 기묘하고도 놀라운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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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란 생각할수록 신비한 조직입니다. 분명 사람의 자그마한 신체 안에 부착된 일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전 우주를 품을 듯 방대한 사고를 수행하고, 물리계에서 채 감지되지도 않을 미세한 영역까지 훑을 듯 세심합니다. 코아세르베이트에서 단백질이 정보 전달의 필사적이고도 면면한 레이스를 시작하려 진화의 첫 발걸음을 떼었을 때, 뇌의 이처럼 찬란한 진화까지 예비했을까요? 플라나리아나 미역, 버섯은 고사하고, 우리 바로 아래 단계인 원숭이, 침팬지만 봐도 별반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동물의 경우 그저 치명적 사고나 방지하기 위한 원시적 콘트롤 타워 이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주객이 전도된 듯 존엄한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사람의 신체와 안위를 지키기 위해 뇌가 발전한 게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인 듯 말입니다.

이런 뇌에 대해, 괜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저 건조한 시선으로 대담한 탐구를 시도하는 게 현대의 뇌과학자들입니다. 어느 신체 기관이나 마찬가지로, 뇌 역시 그 주인인 인간이 당한 우연한, 혹은 의도된 사건에 의해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처가 상처를 입은 당사자에게 영구적인 손해를 입히고 마는지(안타깝지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장애의 경우, 말 그대로 상처가 장애로 기능하고 만 불행한 예이고, 이런 진행과 결과가 절대 다수지요), 행여 뜻하지 않은 축복으로 작용하는지를 놓고 실로 흥미로운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현대의 임상 사례뿐 아니라, (저 같은 독자에게는 정말 흥미롭게도) 과거 역사의 숱한 중요 인물(역사에 남으려면 중요한 인물이라야 하니까요)의 예까지 모두 포함하는 게 이 책의 태도입니다. 과거의 기록에서 "뇌의 상처와 그 효과"를 더듬는 건 저자 샘 킨의 시도라기보다, 그 역시 (현대 임상례부터의 유용한 결론 추출이나 마찬가지로) 뇌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입니다. 샘 킴 같은 대중서 저자들은 어디까지나, 이를 소양 없는 일반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또 재미있게, 다듬는 역할이죠.

허먼 멜빌이 그의 장편 <모비 딕> 서두에, 고래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과 언급을 인용하고, 작품 도중에도 고래의 생리에 대해 그처럼이나 자세한 서술을 행한 점 때문에, 문헌 분류 당국에서 처음에는 이 책을 수산업 영역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유명하죠. 책 한 권을 쓰려면 그만큼 관련 주제에 대한 몰입적 헌신과 철두철미한 연구, 나아가 저술 전과 후의 자신이 다른 존재로 거듭나려는 각오까지 다 필요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샘 킴의 이 책도 비록 대중서라고는 하나 저자의 비상한 성의가 돋보입니다. 다양한 뇌 손상의 사례는 그 자체로, 개별로 떼어 놓고 읽어도 (만약 신문 기사의 단편적 보도라고 쳐도) 재미있는 아티클입니다만, 제가 이 책을 통독한 후 챕터의 명명이나 주제별로 다시 시야를 달리해 읽어도 그 세심한 사례의 편집 감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읽기에 재미도 있지만, 이 책은 마치 아름다워도 모든 각도에서 다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처럼, 구조의 미를 지닌 그런 책이더군요.

구조의 아름다움이란 크게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책에 "꽂혀진" 수많은 미주들입니다(미주인지 각주인지는 원서를 확인하지 못 해 모르겠습니다만, 독자는 이 어노테이션들을 읽는 재미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책의 재미 반 이상을 잃음과 같아요). 둘째는 특히 책의 첫 장도 아니고 제3장에 마련된, 저자 나름의 뇌신경개론 강의입니다. 이는 대체 책 주제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학문적 발판, 전제가 될 뿐 아니라, 저자 자신이 앞으로 이 책에서 무슨 용어(반드시 학문적으로 합의된 바가 아니라, 때로는 저자 자신만의 프로토콜, 혹은 감정적, 편의적 의미를 담아 쓸 때도 있습니다)를 어떤 식으로 쓰겠다는 공표인데, 이를 (흔히 교과서가 그리하듯) 첫 장에 배치하지 않은 건 형식적 딱딱함을 최대한 멀리하겠다는 제스처, 혹은 첫 두 챕터를 벌써 읽어 봐서 알겠지만, 이 책에 쓰이는 말이나 논리라는 게, 어느 정도는 독자들이 (일일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할 만한 수준의 용어례라는 것, 일종의 자신감을 불어 넣기 위한 의도라고 보입니다. 이것이 저자의 유쾌한 어조와 겹쳐, 형식과 의도와 일치하는 구조미를 자아낸다는 뜻입니다.

ㅎㅎ 사실 저자의 배치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이뤄져서일 뿐이지만, 지지난 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중 두 건의 암살자(당대에도 그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는 유명한 편이죠)에 대해, 구태여 한 챕터에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정신이상, 과대망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유력합니다만, 그게 구체적인 뇌손상에서 비롯했다는 증거는 사실 뚜렷하지 않거든요. 또, 뇌손상이 설령 있었다 한들 암살자의 행동에까지 "주인"을 몰고간 공통점이 있기까지하다는 정황은 어디에서건 안 드러납니다. 이 책에도, 죄인을 살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일 "정신이상 책임무능력" 항변은 재판 절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무렵이면 책임무능력 항변 자체가 이론적으로 (특히 미국에서라면) 정립되지 않았을 시절이긴 합니다만. 여튼 외부 손상이라는 어떤 계기가 없어도, 일부의 내상이 점점 전체로 파고 들어, 얼굴 근육의 좌우 통제를 동일하게 이룰 수 없다든가 안구의 조절이 자유롭지 못하다든가 하는 게 모두 전반적인 뇌손상의 효과라는 점을 "주장"하는 건, 뇌과학자 아니라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도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광신자들의 일탈 행동이 극단(무려 대통령 암살!)으로 치닫는 건, 우리 샘 킨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뇌"가 어딘가 잘못된 소치이지, 결코 정치적 음모론의 주장(꼭 쑹홍빙의 <화폐 전쟁>이라고는 제가 말 안 하겠습니다)처럼 거대한 세력의 도구로 쓰고 버려진 결과가 아니라는 점 다시 강조하는 바입니다! ㅎㅎ 이 책 읽고서는 이 소리, 저 책 읽고서는 저 소리를 말한다면, 그건 이미 뇌가 손상된 독자라는 자백이니까요! ㅋㅋ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그저 성병 관련 인자인 줄 알았는데, 뇌에 침투하여 사물의 정확한 인식을 방해할 수 있다는 건 처음 배웠습니다. 이 장에서는 "얼굴의 이식"과 "얼굴 인식"의 상호 관련에 대해 논급하는데요, 특히 전자는 몇 달 전 의미 있는 학문적, 임상적 진보가 이뤄져 언론 보도를 타기도 했습니다. "얼굴"이 그저 인간 피부의 평균적 연장이 아니라, 뇌와 긴밀한 연계를 갖고 그 특성, 손상, 질환, 장애를 일일이 다 대변하기에 그 이식도 그렇게나 (그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저자의 핵심 취지이겠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이 책은 뇌과학 개론서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책 같이 보이고, 실제 이야기책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읽다 자연스럽게, 현대의 뇌과학자들이 지금 어떤 결론에 잠정 도달해 있는지, 그 최소한의 컨센서스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게 책의 마력이더군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신해철도 생전에 "얼굴맹" 증상을 호소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게 그저 웃고 넘길 건망증이라든가 사회성 적성 무력으로 치부할 가벼운 이슈가 아님을, 책은 은근 짚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하나의 주장일 뿐임을 독자는 유념할 필요가 있겠네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책에 제시된 낱낱의 흥미진진한 사례보다, 왜 이 사례들을 저자가 한 챕터에 넣었는지 의미를 곱씹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이야기는 금방 읽혀지기 마련이고, 뇌의 기능과 구조라며 요즘 나오는 책들이 그간 너무 자주 다뤄서 선지식도 부족하다곤 못하겠으니 말입니다.

반드시 머리를 다쳐서가 아니라, 어디가 되었든 중추 신경의 일부가 손상되면 바른 감각, 바른 판단에 장애가 생겨 타인(정상인)이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목격되죠. 제2장에서도 총을 맞은 가필드가 통증과 파편의 소재에 대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서술이 있었는데, 5장에서는 "환상 사지"라는 토픽 아래 소위 유령 감각에 대해 재미있는 사례가 계속 소개됩니다. 없는 걸(이제는 없어진 걸) 있다고 우기는 환자를 보면 기가 막힐 만한데, 이미 뇌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구축된 신경 회로가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계속 동일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환상 통증"의 경우 이 기막힌 아이러니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인데요. 가려워서 긁고 싶은데 긁지를 못하는(잘려 나가서 긁을 데가 없는) 당사자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그런 처지에 속하면, 진정 인간 존엄의 최소 조건이 파괴된 자신에 대해 근본적 애착이 떨어져 나갈 만한 감정적 충격을 겪지 싶습니다. 남북 전쟁의 casualty에 대해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전쟁의 참상, 극단적 상황에 처한 타인의 불행에 대해 새삼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화제가 아니었을지요. 여튼 이 책에서도 친절히 설명하는 "뇌의 가소성"은, 그래서 다시 인간의 존엄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사자의 노력 여부에 따라)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고 생존의 편의를 위한 노력을 벌일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 개념과 패러다임은 단단한 위치를 갖고 출발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단단한 기반을 가졌던 출발의 이점을 상실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샘 킨이 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8년 전에 이 프리온 이론의 당부를 놓고(?) 엄청난 집단 홍역을 앓은 적이 있죠. 스탠리 프루시너가 처음에 겪었던 곤란은 첫째 이 개념이 기존의 체계와 대단히 이질적이어서, 마치 기존의 체계가 이종 단백질에 대해 면역 반응이나 보이듯(ㅋㅋ) 그저 감성적으로 거부되었다는 사실, 둘째 아무래도 업계와 학계가 공생 관계에 놓인 부분이 크니, 업계의 이익이 학계의 이익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었다는 점 도저히 부인은 못 할 겁니다. 샘 킨은 "... 여전히 체내에 잠복하여 그 도화선에 불 붙을 날만 기다리는... " 같은 서술을 하는데, 이만큼이나 현생 인류는 마치 기우제를 지내며 기근을 모면하려는 조상들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인류가 여기까지 생존한 건 그저 요행이었는지도, 혹은 지난 시절 흑사병이나 대규모 전쟁 같은 재앙은 그저 서곡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지질시대가 워낙 압도적인 볼륨을 자랑하니, 유한한 인간의 (이 책에서 잘 가르치듯) 매우 유한한 두뇌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게 고작... 역자 설명 중 p-word에 대한 풀이가 있는데, f-word도 있습니다(성질은 서로 비슷해요. 이런 말로 표현했다는 자체가 기성 주류의 엄청난 거부감이 전달되고도 남는 겁니다). 같은 장에 소개된 소아성애자 가이듀섹의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일화는 제 생각에 샘 킨의 유머 감각 발로라고 여겨지니, 주제와의 지나친 연계는 심각하게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가이듀섹 이 인간 뇌를 스캔해봐야?"ㅋ).

아, 그렇군요. 다음 장의 토픽 일부가 성(性)과 관련되어 있으니, 매끄럽게 넘어가려고 유머의 기름칠을...(은 아닙니다). 변연계에 대해서는 그게 왜 영어로 limbic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아리송했는데, 이 부분을 읽고 잘 납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는 자체가, 그간 왜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려줌이나 마찬가지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지각과 반응의 기제가 아닌, 보다 추상적인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가니 더욱 논의의 혼란이 커지는 게 당연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저술가"인 샘이 이 논란 많은 토픽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까가 주목되었는데, 과연 그답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흥미의 불을 지피기, 자신이 은근 지지하는 결론 암시하기 스킬로 책(대중서)의 밀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마엽(요즘은 우리 학계가 "전두엽"을 이렇게 순화해서 부르나 보죠? 전 몰랐습니다)의 손상은 결국 감정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이 세부적인 사항에 집착해서 상위 단계의 결정을 못 내린다는 점은 이미 많은 책에서 지적하던 내용이죠. 샘 킨의 표현을 빌리면, 전두엽 손상자는 "빅 픽처"를 못 그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누굴 두고 근시안적이다, 먼 미래를 보고 일을 꾸미지 못한다고 할 때 앞으로는 "쟤 전두엽이 덜 떨어졌군"이라고 비웃으면 될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지난 시절 통속작가들(시드니 셀던이라고 콕 짚지는 않겠습니다)이 얼마나 이 이슈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한 후 소설에 다뤘는지 알 수 있습니다(속았다는 느낌에 갑자기 화가 나는군요).

이 이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느 책에도 다 나오는) 와일더 펜필드 박사님이 해당 장을 다 채우다시피하네요. 책에는 안 나오지만 아니, 이 "축복받은 질환"(소위) 뇌전증 하면 줄리어스 시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연 나와 줘야 하는 것 아닌지 그게 이상했습니다. 축복 어쩌구 하는 것도 태반은 그의 사례에서 연유했고 말이죠. 물론 다들 예상하다시피 도스토옙스키, 잔다르크, 이런 고정 멤버들은 다 불려 나옵니다. 저는 사례 중에 (불쌍하게도 수술 당한) 고양이들이 특유의 장난스러움, 개성 등을 다 상실하고 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도 나와서 하는 소리지만,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어디에 쓸 것"이며 고양이가 말썽을 안 피우면 그게 맛도 없는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와 뭐가 다를까요? 많은 혁신적인 가설들은, 그게 잘 제한된(자격 갖춘) 실험 환경에서 이뤄지지 않았다거나, 혹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실험군, 대조군의 결과일 뿐이라는 이유에서 배척, 기각됩니다. 뇌과학자들(다른 분야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이 내놓은 그 숱한 결론과 주장들은, 이런 이유에서 어디까지나 신중하게, 유보된 자세의 필터와 또다른 검증을 거쳐야만, 탄탄한 신뢰의 "경전"인 교과서에 실리게 되죠. 이 역시 무한 번의 개정과 변경, 철회의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만. 호문클로스, 혹은 육-영-심의 오묘한 구조는, 제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과학교양서에도 실려 있던 주제입니다만, 이 책도 변함 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정녕 이 영역에서 순수 과학만을 분별 증류하려면, 생체 실험이라도 해야 화끈한 도약이 이뤄질까요? (어디까지나 농담입니다. 다만 많은 발전이 이뤄졌음에도, 어떤 섹터는 낡은 관념의 덫에 걸려 맨날 제자리걸음인 현실이 개탄스러워서 했던 소리에요)

앞 장도 망상(어떤 망상은 너무도 위대하고 유용하기까지해서, 잔 다르크는 제 나라를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샘 킨을 비롯한 일부의 해석, 주장입니다)에 큰 비중을 둔 주제지만, 이 장 역시 신체의 통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뇌가 무시하고 놓치는지, 그 결과로서의 망상이 다뤄집니다. 그 중 통제 불가능한 손은, alien hand라는 원어가 잘 드러내듯, 그저 통제만 안 되는 게 아니라 마치 남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듯 제멋대로인 증후군을 가리킵니다. 이 기제는 책에 친절히 잘 설명되어 있는데, 비단 손 뿐이 아니라 감각영역 손상(역시 전두엽 손상일 경우)이 일어났다면, 이 감각 영역에서 더 이상 피드백을 보내 주지 않자, 앞서서 움직인 손(물론 자신이 원해서 움직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라고 그 마루엽(예전에 두정엽이라고 부르던 것)이 판단하는 겁니다. 소위 "주체 감각"을 잃기 때문에, 이 감각을 다시 느낄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게 되며, 이 때문에 (이 기제를 이해 못하는 사고 중추는) 내 손이 남에 의해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보는 거죠. 마루엽의 "장난"은, 그 임자가 더 이상 자신의 신체에 대한 조절을 못 하고, 나아가 모든 충동을 통제할 수 없는 원인으로 설명됩니다. 물론 "그"는 장난을 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편안한 정상 상태로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인, 그러나 무용한 노력을 하는 중이지만.

익숙한 것과 그렇지 못한 영역 사이를 처리하는, 인간만이 보유한 신비한 회로가 고장 났을 때,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중한 관계가 파탄나기 일쑤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오며 축적한 기억, 정서, 애착 등이 가지는 고유한 색깔, 개성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더 이상 속해 있던 네트워크 속의 그 사람이 아니죠. 저자는 이런 사례를 다루며, 인간 통성으로 유발할 수 있는 애틋하고 유감스러우며 저 깊은 감정의 심연에서 솟아나올 법한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근원적 비관을 (유려한 문장 속에) 표현합니다. 익숙한 사실, 어쩌면 통속적인 사례 하나를 전달해도 듣는 독자의 반응을 고려한 이런 영리한 화술이야말로, 각별히 뛰어난 소통 능력을 지닌 샘 킨의 우월한 뇌가 존재 증명을 하는 대목이겠습니다. 원 제목과는 달리 "뇌과학자들의 결투"는 기대만큼 자주 부각되지는 않는데요. 결투를 생생히 재현하다 혹시 관전하는 독자의 뇌가 과부하로 다칠 수 있다는 그의 배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학계의 첨단을 평균적인 독자가 소화하기에 이 정도 내용이면 임계의 안전한 하회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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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 서 - 고대 중국의 예악.역법.치수.경제 완역 사기 시리즈 (위즈덤하우스)
사마천 지음, 신동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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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作 <史記>에서 이 <書>가 차지하는 위상, 성격은 무엇일까요? 어지간히 <史記>를 즐겨 읽고 재미있어하는 이들도, <書>만큼은 지루해하거나 아주 건너뛰기가 일쑤입니다. 비단 <사기> 안에서의 문제인 건 아니고, 역사 일반에서 제도사가 받는 대접이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제도사를 재미있게 소화할 수 있는 독자는 내공이 상당히 깊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역자 신동준 선생님도 이 권(<書>)을 제도사, 문명사로 파악합니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우리 평범한 독자들 눈엔 아마 그 범주에 쉽게 포섭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유는 역사 애호가들이 여태 접해 온 제도사란 대개 비교 제도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통시적 관점에서 제도의 변천, 공시적 관점에서 지역적 편차를 주된 논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書>는 우리 미숙한 독자들에게 어딘가 위화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그나마 <평준서>가 서사 위주의 편제이기 때문에 "역사서" 비슷한 느낌이 나고, 秦 이후 태사공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부들의 활약 실황과 규제법규의 변천을 논급하기 때문에 "제도사"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그 앞의 다른 책들은 역사서라기보다, 군주가 제도를 운용해야 할 당위성을 실컷 논변하는 철학 강의 같은 인상을 주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書>는, <사기> 전체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프레임과 개별 범주를 통째로 제공하는, 나머지 각권에 모세혈관처럼 침투하여, 실제 이뤄진 사적과 인물들의 동선에 역동성과 철학적 해석 기반을 제공하는 원천입니다. 다른 권에서 모호하게만 다가왔던 각종 개념과 범주가, 이 <書>를 꼼꼼히 독해한 후에야 통합적 의미로 독자의 정신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제도 속에서 인물은 일시의 卒이나 광대가 아닌, 시대를 초월한 영속성을 지니고, 반대로 인물이 그 안에서 구체적 의의와 형상화를 남긴 제도라야 후대의 귀감이 될 전범으로 승계될 수 있습니다.

신동준, 김원중 두 분의 역본을 함께 대조하는 재미를 누릴 독자들은, 특히 이 <書>를 읽으며 각 8권의 해제에서 두 역자의 견해가 정면 대립하 는 대목들을 자주 만나게 되겠습니다.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큰 재미 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데요. 특히 신동준 선생님이 "...일각에서 이런 주장을 제기하나.." 같은 투로 토픽을 꺼내면 거의 예외 없이, 김원중 교수님은 해당 대목에서 반대 입장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書>의 각종 대목이 후대의 가필, 위작이냐, 아니면 다른 권에서와 마찬가지로 태사공 자신의 편집 원용이냐를 다투는 문제에서, 신동준 선생님은 그 원전성을 비교적 옹호하시는 편입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학계의 논의 현황을 볼 때 쉽게 판가름하기 어렵습니다.

<禮書>
p16에서 관중이오의 처신을 비판하며 "삼귀"를 거론하는 대목이 있는데, <열전>의 해당 대목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여기서 의견이 갈린다는 걸 익히 압니다. 신동준 선생님은 "삼할의 商稅"를, 김원중 선생님은 "세 명의 처첩"을 뜻한다고 각각 새깁니다. 이 부분은 <열전> 1권 서평에서도 제가 써 두었습니다. p17에서 위 영공의 남색 악습을 비판하는 대목도 여전히 반복됩니다(정말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단 여기서는 "위령공"이 아닌 "위 영공"으로 표기하십니다.

<樂書>
이 책은 "예서"와 짝을 이루는 책이라는 데 대해 학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없는 편이죠. 다만 저는 동양사상의 아득한 원류에서 이 두 개념, 즉 예와 악이 그처럼이나 밀접한 쌍대(duality) 관계를 이루는지 이 고전을 읽고 처음 실감했습니다.

역시 김원중 교수님은 <사기지의>를 원용해, 이 부분이 후대의 가필, 위작이라는 견해이신데요. 신동준 선생님 역시 <사기지의>의 학설을 소개하고 있으나, 사마천이 다른 편에서도 유지하는 저술 태도처럼, 5경 중 하나인 <예기>의 "악기"를 참고로 하여 인용했다고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는 해당 텍스트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역시 한문 원문과 신 선생님의 해석을 나란히 볼 수 있으므로 유익합니다.

김원중 교수님의 경우, 특별히 "노래와 연주 및 춤까지도 포함한다"고 설명하십니다. <세가> 등 여러 다른 권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노래"에서 오히려 핵심의 요소가 "가사"라고 생각되며, 오늘날 우리가 대체로 가사보다는 곡조를 더 중시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음란하다, 기운차다 등의 평가가 음률 자체보다는 가사의 내용을 두고 이르는 것 같았습니다.

p37 "삼후지장"에 대해 이 책에서는 딱히 설명이 없으나, 김원중 교수님 책에는 "대풍가"라고 후주 15번에서 해설하시며, 와 어조사 兮(혜)가 동의어라는 부언까지 있네요. 어조사 는 <시경>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법요소입니다.

p45 "삼"은 신동준 선생님 책에는 별 설명이 없으나, 김원중 교수님 책에는 하의 우왕, 은의 탕왕, 주의 문, 무왕을 가리킨다는 설명이 후주를 통해 나와 있습니다. 三아니며, 이 책에 실린 한문 원문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삼황 오제"가 입에 익은 독자들은 자칫하면 착각할 수 있습니다.

p69 "빈모가"라는 인물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는 데에 대해, 두 분 역자는 동일한 견해입니다.

p73 이하에 실린 내용은 <시경>의 편제와 동일하죠. <오태백 세가>의 계찰 관련 기사와 비교, 대조해도 밀도 있는 독서가 될 것 같습니다.


五音

상징

군주

신하

백성

일(事)

물건(物)

인체 장기

비장

심장

신장

둘째 행, "궁상각치우"를 인채의 기관에 비유한 대목은 <예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태사공 자신의 논평 중에 언급되기 때문이죠.


덕을 본받음

음란을 방비함

덕을 베풂

은혜에 보답함

윤리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정서

질서

조화

하늘

구별

동화

외모(밖→안)

마음(안)


무제가 총애한 이부인의 오빠 이연년에 대해서는 <열전> 2권 후반부에 따로 항목이 짧게나마 나옵니다.

<律書>
p87:1에 보면 행위의 주체가 "진시황 and 호해"로 명시됩니다. 원문을 보면 秦二世宿軍無用之地라 하여, 주어는 "호해"만을 삼는데요. 역자께서는 이 대목을 실제 역사의 기록과 대조하여 맞지 않다고 본 겁니다. 김원중 선생님 역본에도 이에 후주를 달아, 두 군주 부자의 소행으로 파악하는 게 옳다시는 태도입니다.

우리 현대 독자들이 파악하는 律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대개는 "법률"을 떠올리겠으며, <사기>의 내용과 편제를 개괄적으로나마 이해한 분들이라면 이 권의 실 주제가 "군사"라는 점을 알고 "군율" 쪽으로 개념을 잡아나가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비로소 텍스트의 맨얼굴을 접한 독자라면, 이 파트가 차라리 "병법"의 당위론적 측면, 혹은 군사의 운용과 이상적인 군주 통치술의 타협과 교차지점을 논한 내용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 권의 후반부는 차라리 천문 토픽, 곧 뒤에 나오는 <天官書>의 緖論에 가깝다는 점도 여러 학자들이 지적합니다. 이는 아직도 제도사의 미려하고 정확한 분류가 행해지지 않거나, 인식이 미진한 흔적이 이 대가의 저술에도 여전히 잔존한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도 되고, 반대로 원칙이 무엇이었든 간에 태사공 자신의 세계관, 역사관, 제도관은 이러하다는 고집과 소신의 피력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曆書>
p101에서, 사마천이 육십갑자 명명을 쓰지 않고 특이하게 "언봉섭제격"을 쓰는 점을 거론합니다. 역자 신동준 선생님은 이에 적극적 의의를 부여하여, "스승인 동중서의 <춘추번로>를 관통하는 키워드"라든가, 천입합일설, 천인감응설의 발로라고 해석하십니다. 이와는 달리 김원중 교수님은 p134에서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만 설명하시죠. 그러나 좀 뒤로 넘기면 p159에서 역시 천인합일설 언급이 나오기는 합니다.

<河渠書>
p259:1에 보면 關東 지역이 잠시 언급되는데, 김원중 교수님 번역(p299:9 )에는 "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맥상으로나 한문 원문에 비추어서나 명백한 오류입니다.

치수 관련 사업이 비단 농업에 국한한 것은 아니지만, 8서 중 하나를 이처럼 치수 관개 정책에 할애한 것만 보아도 당대의 관점 뿐 아니라 태삳공 자신의 가치 평가도 농업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지 짐작 가능합니다.

<平準書>
신동준 선생님은 특히 이 책을 두고 <화식열전>의 자매편이라며 두 책의 유기적 연관성을 강조합니다. 신 선생님은 관중이오의 사상을 두고 "商家" 로 독립적인 범주를 마련하여 의의를 부여하시는데, 이는 <관자> 완역본을 따로 내신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일입니다. "정치경제학"이란 용어는 종래 비주류 좌파 경제학을 지칭하는 걸로 이해되어 왔으나, 역자께서는 이 용어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여, 민생을 풍요롭게 하고 정치질서와 경제운용원리를 동양적 인의 사상에 의거 통합적으로 파악할 것을 오랜 지론으로 강조해 오셨죠.

태사공은 사사로이 동전(銅錢)을 주조하여 거만의 부를 얻어 마침내 모반까지 일으킨 오왕 劉濞(고제 유방의 서장자인 劉肥[齊 도혜왕]와는 다른 사람이고, 형의 아들, 곧 조카입니다)의 예를 거론하는데, 사실 동전 주조권을 받았다고 해서 다 세력을 쌓은 건 아니고, <등통열전>을 보면 그런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도 경영 능력의 결핍으로 신세를 망친 (우스운) 예가 나옵니다. 등통이 누구인지 벌써 잊은 분들은 <열전> 2권 "영행열전"으로 다시 돌아가 확인하십시오.

얼핏 보아 관자의 사고 체계인 "商家"의 골자는, 1) 한편으로 구태의연한 농본억상 정책을 지양하여, 사회 전체에 유통하는 부 총량의 증가를 지향, 만백성이 윤택하게 후생을 누릴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전제와 2) 정치인, 관료와 대상인 간의 불건전한 유착을 억제하고, 아무 규제 없는 자본 증식 만능의 원리를 철저히 배격하 여 신자유주의적 배금주의의 폐단(신동준 선생님의 표현입니다)을 발본색원하자는 도학적 스탠스가 서로 적지 않은 모순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종래 이상적인 군자상, 경세가의 모범은, 어느 하나의 모토나 도그마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중용의 길을 걸으며 실제의 성과를 위해 융통성을 능수능란히 발휘하는 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사공의 시대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 부국 강병을 위해 대대적 변법을 시도한 왕안석도, 그가 내세운 여섯 신법 중 핵심을 이루는 "평준법"이 바로 이 <書> 중 한 권의 제명에 일부의 기원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산이 넉넉하되, 그 고른 향유 역시 담보되어야 태평 성대가 찾아온다"는 이 분명한 인식은, 북송대로부터 다시 천 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도모하자는 첨예한 정치 이슈의 중핵을 형성합니다. 왜 <書>를 현대에 다시 조감, 숙독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사기>의 독해를 그저 흥밋거리의 맛봄 수준에서 한 단계 위로 도약시킬 수 있는지, 태사공은 분명히 독자들을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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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세가 - 역대 제후와 공신들의 연대기 완역 사기 시리즈 (위즈덤하우스)
사마천 지음, 신동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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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신동준 선생님의 평에 의하면, 분량 면에서 이 사마천 史記 <세가>는 <본기>의 두 배이고 <열전>의 절반입니다. 중요성 면에서도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이미 대중화한 <열전>이나, 아무래도 미화, 가공, 예찬의 성격이 강한 <본기>보다도, 오히려 이 <세가>에서 우리 일반 독자들이 취할 만한 교훈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본기>는 특히 漢 고제를 다룬 서술의 경우, 승자의 역사로서 마냥 곧이곧대로 수용하기에는 꺼려지는 대목이 없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는 최후의 승자였던만치, 그 놀랄 만한 처세와 용인의 기술은 현대인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바가 적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史記> 전체를 통틀어, 만약 조직(회사) 내 정치 다툼에서 마지막의 승리를 쟁취하고 싶은 독자가, 주의 깊게 읽어야 할 행적의 위인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이 고제 유방을 들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의 경우, 어떤 회사건 오너, 오너의 후계자 등이 누리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지는 못 합니다(비슷한 예가 최근 한 분이 있긴 했는데 결국 잘 안 풀렸죠). 이 때문에, 조직 내에서 2인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상을 점한 여러 "次上"의 성공자들이 남긴 행적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자 신동준 선생님이 "2인자들의 성공학"이라며 이 책에 대해 총평한 것은 그런 취지에서 비롯했다고 생각되네요.

<세가>는 제후의 지위에 오른 이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사적을 담은 기록입니다. 제후라 함은 중원의 최고 통치자에 의해 분봉되어 지방 각지에서 군주로 군림한 이를 대체로 가리킵니다. 초기에는 왕(주나라 왕은 帝로 불리지 않았다고 <사기 본기>에 언급되었고, 제가 쓴 리뷰에서도 이를 밝힌 바 있습니다)의 同姓 실력자(형이나 동생, 가까운 친척)들이 이 자리에 올랐지만, 이후에는 그런 원칙이 꼭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해당 지역에서 권력을 잡으면, 여러 명분을 만들어 주 왕실에 사후 승인을 받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죠. 춘추 전국 시대의 사정은 이러했으며, 漢 고제 유방에 의해 천하가 통일된 후에는 개국 공신, 그리고 일가 친척들이 제후에 임명되었습니다.

제후는 자신의 자리를 자손에게 세습시킬 수 있었으나, 그 자손들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거나 모반의 혐의를 쓰고 봉지를 빼앗기기 일쑤였습니다. 이로부터  한참 후, 중화 제국의 통치 시스템이 성숙기에 이르면 황제가 임명한 관료가 지방을 다스리는 게 보편화되고, "제후국"이라면 사실상 중원의 통치권이 미칠 수 없었던 우리 고려, 조선 등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죠. <사기 세가>에서 다루는 제후는 이처럼 고전적인 의미의, 대륙 내 존재했던 지방 실력자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책의 맨처음에 <오태백 세가>가 등장합니다. 역자 신동준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제후의 전범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기에, 이런 편집상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는 취지입니다. 적장자(맏아들)가 있는데도 더 영특한 동생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자신은 먼 험지로 나아가 왕화(중화 문명의 혜택)를 널리 입게 함은 확실히 귀한 신분으로서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림이겠는데요. 우리 역사로 눈을 돌리면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위를 이은 고사가 언뜻 연상되기도 합니다(만 배경상 차이가 크겠죠?).

역자 신동준 선생님은, 태백은 이름이 아니라 항렬의 표시일 뿐이라고 하십니다. 각주에서 <사기색은>을 인용하여, 태(太)가 항렬이고, 백(伯)이 이름이라는 취지이신 것 같은데요. 이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백중숙계"의 기호에 다소 어긋나기도 해서 흥미롭습니다.

오태백의 후손 중 지혜롭고 겸허한 처신으로 이름 높은 계찰이, 오나라 왕의 분부를 받잡고 천하를 순회하며 사자 노릇을 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노나라에 머물며 음악을 감상하는데, 이때 거론되는 곡명은 모두 그 유명한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실린 시가들입니다. 중국 고전 애호가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게, 같은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하신 <완역 시경>이 올해 2016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소장하고 있기에 비교해 가면서 읽었습니다.

계찰이 노나라에 머물며 음악 총평을 한 기사는, 이게 노나라에서 이뤄졌기에 노나라의 역사를 다룬 <춘추>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죠. 실제로 사마천 역시, 수백 년 전의 <춘추>를 원전으로 해서 이 부분을 저술하기도 했고요. 저본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문장 표현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리뷰에서 언급한 "교언영색"과 "교언선색"의 차이처럼, 사마천의 당대인 감각으로 자신의 시대에 잘 통하지 않는 용례다 싶으면 과감히 풀어 쓴 까닭입니다. 언어는 역사성(시대에 따라 뜻이 변천함)을 속성으로 가진 실체이니 말입니다.

마침 신동준 선생님이 완역한 <춘추좌전>도 있어서, 이 <오태백세가>를 읽을 때는 세 권을 함께 펼쳐 놓고 읽었습니다(김원중 역 <세가>와 정범진 판까지 합하면 다섯 권). 신동준 역은 언제나 한문 원문이 함께 실려 있기에, 춘추의 원문과 사시 세가의 원문이 어떻게 서로 같고 다른지를 대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책 p20 이하에 나오는 곡명들은 <시경>의 순서와 같습니다. 다만 <위풍>은 그나마 이름이라도 거론하나, <조풍>은 본문에서 계찰이 듣지도 않았다고 하며 아예 이름 언급이 없습니다. "상소"와 "남약"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이 전혀 없는데(김원중 교수님 판에도 없습니다), <춘추 좌전>에는 본문 중 괄호 안에 해설이 실렸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조하십시오(한길그레이트북스 제75권, p395 중간쯤). 이들은 악곡의 종류이며(서양 고전 음악에 비기면 교향악, 소나타, 환상곡 하듯이), 대무(주 무왕), 소호(은), 대하(하), 소소(순 임금) 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나눈 분류입니다.

다만 어떤 대목은 김원중 판이 더 친절한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팔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후주에서 "금석사죽포토혁목"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김, p63 후주 20번). 오음(=궁상각치우), 팔악 같은 건 그냥 상식으로 간주해서 신 선생님께서 생략하셨는지에 대해선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

같은 구절인데도 같은 역자께서 아주 미세하게 다른 느낌으로 번역한 대목도 있습니다.

사심재, 도당씨지유民 근심이 깊다 <사기 오태백세가 계찰> - 반말
사심재, 도당씨지유風 생각이 깊습니다 <춘추> - 높임말

근심, 생각으로 각각 번역어가 다른데, 원문에는 "생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신동준 선생님 책은 한자 원문을 그대로 싣고 있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누릴 수 있는 편의지요. 이는 뒤의 구절 何憂之遠也을 참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은 여기서 근심이란 뜻입니다.

이 책 p22에는 "燕之巢于幕"이란 사마천의 원문이 나오는데, 그가 참조한 <춘추(좌전)>에는 燕之巢於幕上이라고 되어 있습니다(한길그레이트북스 제75권 p398:7). 于와 於는 그저 같은 말이지만, 아무튼 이렇게 서로 작은 차이를 보이네요. 신동준 선생님도 <춘추>에 上자가 더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어서 그 유명한,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 군주의 묘 근처 나무에 기어이 보검을 걸어 주고 떠났다는 계찰괘검(季札掛劍)의 고사가 나옵니다. 이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계찰이죠.

<제태공 세가>
p43 에 보면 제 태공이 사악의 후손으로 나오는데, 四嶽에 대해서는 <오제 본기>를  참조해서 읽어야겠습니다. 참고로, 이 책 <陳杞世家> p175에 보면 "泰嶽(태악)"의 후손이란 대목이 한참 뒤에 또 나옵니다.

p67 중간쯤에 보면 제 여공의 이름이 無忌라고 나오는데, 후대의 인물인 위공자 신릉군도 같은 이름이죠. 사기 마니아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고 배무기 교수님의 선친께서도 특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드님의 이름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강태공을 태공망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때 "태공"은 누굴 가리키는 걸까요? 김원중 교수님은 아마도 "태공"이 보통은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근거에서, 본문 중 설명 형식으로 "문왕의 아버지인 계력"이라고 하십니다. 신동준 선생님은 다소 모호하게 "선대의 왕"이라고 새깁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작년 이맘때쯤 쓴 이 서평을 참조해 주십시오.


제 태공은 물론 우리가 아는 강태공 그 사람입니다. 이 신동준 선생님의 책을 보면 "태공이 대략 100세에 죽자, 아들 정공 급이 즉위했다."(p47:3)라고 되어 있는데, 한자 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 본기>에 보면 주 문왕이 유리에 갇혀 있으면서 "아마도 육십사괘를 만들었을 것이다"라며, <사기> 전체를 통틀어 흔치 않은 추측성 문장이 있습니다. 사마천이, 신뢰할 만한 기록에 근거하지 않고 세간에 전하는 바에 따라 기록할 때 보이는 태도지요. 이 때 "蓋 = 대개(大槪)'이겠습니다.

김원중 교수님은 이 를 문장 전체에 걸치는 걸로 해석합니다. "아마 태공이 죽은 지 백여 년이 되었을 때 아들 정공이 즉위했을 것이다."(김원중 판 <사기 세가>p74 중간쯤) 다만 당사자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났는데 그 아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으므로, 이는 신동준 선생님의 해석을 좇아야 할 것 같네요.

<연소공 세가>
p141 중간쯤에 보면 유세가인 녹모수의 말 중에 "나라를 재상 子之에게 양위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김원중 판에는 정반대로, "옳다"고 되어 있어 흥미롭습니다. 어느 분 주장이 옳을지는 독자들이 직접 읽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p209 중간쯤에 나오는 삼진은 三晉입니다. 이때부터 전국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거겠죠.

<월왕구천세가>
신동준 선생님은 이 파트를 일러 사실상 "범리열전"이나 마찬가지라고 평합니다. 거의 망국 군주가 될 뻔한 구천을 도와 천하의 패자로 군림시켜 놓고도, "구천은 어려울 때는 몰라도 평안할 때 같이 영화를 누릴 위인이 못 된다"며, 나라의 반을 갈라 주겠다는 구천의 제의를 뿌리치고 제나라 등 타국으로 망명합니다. 빈손으로 시작해도 워낙 수완이 좋았기에, 가는 곳에서마다 사람을 모으고 큰 사업을 일으켜 억만장자로 부러울 것 없는 신분이 됩니다. 마치 셈 족의 시조 아브라함을 보는 듯합니다.

이 범리의 말년 일화 중 재미있는 게 있어 요점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 범리의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사람을 죽이고 옥에 갇혀 사형 집행만 기다리게 됩니다.


- 범리는 막내 아들더러 "초나라의 장선생"을 찾아 그에게 황금을 주고 형을 구해 오라고 명합니다.


- 이 소식을 들은 첫째 아들이 "아버지께서 장자로서 나를 믿지 않으시니 분하다"며 자결 소동까지 벌이자, 할 수 없이 범리는 이 맏아들을 초나라로 보냅니다.


- 맏아들은 장선생을 찾아 부탁하고, 황금을 받은 장선생은 범리의 명성을 익히 알았기에 반드시 청탁 내용을 이루겠다고 다짐합니다. 장선생은 맏아들에게 "즉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지만, 왠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맏아들은 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 맏아들은 초나라에 머물며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자신이 따로 챙겨 온 뇌물을 초나라의 다른 실력자에게 별개로 전달하여 일을 처리하려 듭니다.


- 한편 천문을 관찰하던 장선생은 몇 달 후 별자리가 적당하게 배치되자, 이를 핑계로 초나라 왕을 알현합니다. "징후가 심상치 않으니 큰 덕을 베푸셔야 하겠습니다." 장선생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왕은 곧 대사면을 베풀 것을 지시합니다.


- 맏아들이 뇌물을 준 다른 실력자는 이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맏아들에게 가서 "곧 대사면이 단행될 것 같다"며 귀띔해 줍니다. 맏아들은 괜히 장선생에게 거금을 썼다는 판단에, 장선생을 찾아가 "선생이 애 쓰시지 않아도 동생이 풀려날 것 같다"며 황금을 돌려 달라는 눈치를 보입니다.


- 장선생은 처음부터 돈 욕심이 없었으며,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삼아, 재산가로 이름 높은 범리에게 평판을 얻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일이 잘 처리되면 그러지 않아도 돌려줄 생각이었던 청렴한 장선생은, 이런 맏아들의 태도에 모욕감을 느낍니다.


- 장선생은 다시 초나라 임금을 찾아갑니다.
"왕께서 대사면을 베푸시는 데 대해, 항간에선 범리에게 뇌물을 받은 소치라고 여깁니다. "
왕은 진노합니다. "내 어찌 범리 좋은 일을 시키겠소!"


- 범리의 맏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형이 집행된 동생의 시신만 수습하여 귀향하게 됩니다.


- 모두가 애통해하는 가운데, 아버지인 범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조용히 웃습니다. "맏아들은 나와 고생하며 함께 재산을 모은 애라 돈을 아끼는 성격이오. 하나 막내는 고생을 모르고 자란 터라 내가 시킨 대로 돈을 쓰면 그만이었겠지. 모든 걸 염두에 두고 막내를 보내려 한 것인데..."


<鄭 세가>
서문에서 신동준 선생님은 이 정나라에 대해 복잡미묘한 느낌을 서술합니다. 朝晉暮楚처럼 시세에 따라 강대국에 영합해야 하는 한심한 처지를 겪기도 하나, 정자산이란 명재상의 대에 이르면 대륙의 허브 국가로서 그 지정학적 위치를 최대한 잘 살리는 능란한 수완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평하십니다.

공자와 달리 사마천은 안영을 좋아하고 정자산을 소홀히 기술했다는 게 신 선생님의 견해인데요. 과연 그런지 다시 이 책의 앞으로 돌아가 숙독해 봤습니다. pp.71~81(제태공세가)를 보면, 제 영공에서 제 경공에 이르는 시기까지 안영의 행적이 자세히 다뤄집니다.

p430에 보면 정 환공의 질문에 태사 백의 대답이 "제는 백이의 후손이다."이지만, 정작 <제태공세가>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어서 흥미로웠습니다. 

鄭君 乙이 보위에 오르고 한 애공이 나라를 멸망시키는 대목에서 이 파트가 끝납니다. 공교롭게도 전국시대의 출범과 맞물려 나라가 망하고, 이 다음부터 <조세가>가 시작되며,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간다는 의미에서 책의 정확한 정중앙을 이룹니다.

<趙세가>
시작 부분에 서왕모, 그리고 녹이 등 준마의 설화가 또 반복됩니다. 우리 나라 시조 중에도 "녹이 상제 살지게 먹여~" 운운하는 구절이 있죠.

참고로 정범진 총장님 책(까치판)에는, 비록 앞에서 몇 번 나온 개념이라 해도(서왕모라면 얼마나 자주 나왔겠습니까) 혹시 잊었을 독자들을 위해 처음 보는 이름처럼 몇 번이고 각주를 통해 설명해 주는 친절함을 보입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趙盾 언급되는데, <진 세가>에 자세히 나온 것처럼 진양공을 잘 모신 명신입니다. 이름의 저 글자는 "모순", "순상지"에서처럼 "방패 순"이란 글자이지만, 자전을 찾아 보니 이름자로 쓸 때에는 "돈"으로 읽는다는군요. 김원중 교수님, 그리고 정범진 교수님 책에서는 "조순"이라고, 신동준 저자께서는 "조돈"으로 표기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두 책들보다는 이 책의 태도가 옳을 것 같습니다.

여기 보면 조돈은 나라가 어지러워질 걸 걱정하여 선군의 친동생을 즉위시킬 준비를 하는데, 후계자의 적모가 나타나 "적자가 살아있는데 선군(진양공이죠)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다른 이를 옹립하려 하십니까?"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사가 신동준 선생님 책, 그리고 정범진 교수님 책에선 존대말로, 김 교수님 책에서는 반말로 나옵니다. 이 여성의 이름에 대해 다른 책에선 설명이 없는데, 유독 정범진 교수님 책에선 "穆嬴"이라고 각주를 통해 밝힙니다.

그런데 이 사항에 대해서는, 앞 <晉세가>로 다시 돌아가면, p300이하 본문에 태자의 모친 이름까지 "목영'이라고 나옵니다. 또 여기서는 목영의 대사가 반말 비슷하게 처리됩니다. 분위기를 보면 반말이 더 적합하게 느껴지네요. 조돈은 질책(김원중 교수님은 "견책'이라고 옮깁니다)을 받을까 두려워했다고 적혔는데, <晉세가>에서는 아무 설명이 없고 이곳 <조세가>에서만 그 주체가 "외척"이라고 밝힙니다. 이 역시 다른 책에선 설명이 없는데, 정범진 총장님 책에선 그 외척의 실체를 秦 왕실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설득력 있죠.

다만, 趙穿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신동준 선생님은 아무 부대 설명이 없습니다. 김 교수님은 본문 중에서 "조순의 사촌"이라고 작은 포인트 활자로 덧붙입니다. 이런 건 김 교수님 책이 편했습니다.

<공자세가>
p645:8에 보면, "공자가 노나라 재상의 직무를 대행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게 좀 재미있습니다. 학자마다 입장이 다를 뿐더러, 같은 신동준 선생님이 옮긴 다른 책에도 해석이 조금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공구가 노정공을 相禮했다."(<춘추좌전>3 - 한길그레이트북스 제76권 p406 중간) 
여기서 공구는 물론 공자의 본명입니다. 춘추 좌전 원문에도 禮는 없는데, 역자께서 과감히 번역문에만 삽입하는 태도입니다.

김원중 교수님 책의 해당 부분에는 "공자가 노나라의 儐相이 되었다."라고 옮기는데, 설명에서 "빈상이란 재상이 아니라, 의례적 상국 자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김 교수님의 같은 책 p661, <공자세가> 중에서 "재상의 일을 임시로 보고 있었는데.."라고 번역하신 부분과 다소 모순됩니다. "의례적"이라면 이름뿐이고 실무가 없는 자리라는 뜻이기 때문이죠. 영어로 sinecure에 해당하는데, 당시 공자의 위상이 모국에서 그런 대접을 받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儐을 賓(손님 빈)으로 잘못 보시고, 客卿과 같은 의미로 착각하신 건 아닐까요?(이건 그냥 제 생각입니다만)

儐相이란, 고려나 조선사에 보면 "재상이 아닌데도 나라를 대신하여 대국과의 외교 현안을 맡아 처리하는 중직"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의례적"이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입니다(이름은 높지 않으나 맡은 일이 중대함). 공자 역시 임금을 수행하여 대국에 가 업무를 잘 처리했다는 기술이 이어지는 걸로 보아, 신동준 선생님의 이 책 중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喪家之狗라 는 말이 있죠. 이걸 1) "초상집의 개(상갓집 개)"로 옮길 것인지, 아니면 2) "떠돌이 개(집을 잃은 개)"로 옮길 것인지는 예전부터 논쟁거리였습니다. 더군다나 이게 대성현인 공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니 말입니다. 이 신동준 선생님 책, 김원중 교수님 번역, 정범진 총장님 책 등 세 권 모두, 1)의 뜻으로 새기고 다른 부가 설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기> 전문가로 이름 높은 김영수 선생님(도서출판 알마에서 이분 번역이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이나, 한학자는 아니지만 박경귀 교수님 같은 분은 2)가 옳다는 입장에 가깝습니다.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전국을 유세했지만 정착하지 못했던 당시 공자의 처지를 볼 때 저는 2)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1)은 아마 조선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제로 초상집만 돌아다니며 걸식하던 에피소드가 낳은 오해가 아닐까요.

<전경중완세가>
제 나라는 본디 강태공의 봉지여서 姜姓 呂氏의 땅이었지만 대략 전국 시대 초기에 이 전씨가 사실상의 왕위 찬탈을 행합니다. 따라서 이 파트는 <晉세가>의 후편입니다. 원래 田씨는 陳나라의 陳씨였는데, 이 제나라에 망명한 후 성이 바뀐 경위가 나와 있습니다. 앞부분 <陳杞世家>와 유기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p595 각주에 보면 陳 여공의 이름은 "他"가 아니라 "약"임을 앞에서 언급했다고 하시는데, 그 앞이 구체적으로 어디냐면 p174의 각주입니다.

개인적으로 세가에서 가장 관심 깊게 본 파트가 <유후세가>였 습니다. 장량은 반 신화적인 인물로 후대인의 뇌리에 남아서이기도 한데요. 이 책을 보면 신선이 아닌, 피와 살을 가진 현실적 관료, 책략가로서의 면모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알고 보면 초한 전쟁기에 활약한 누구 못지 않은 명문 거족의 후손이며, 용모 또한 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흔쾌히 유방 같은 근본 없는 건달의 막하로 들어간 건 역시 장량 자신이 사람 보는 안목이 빼어났음을 말합니다. 그의 신출귀몰한 행적은 제갈량을 방불케 하는데요, 마지막 후계자 책봉 문제로 고제가 고민할 때, 장량이 선뜻 나서서 四皓(네 명의 은자)를 불러들여 대세를 굳힌 대목이 볼만합니다. <열전>의 관련 대목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 고제 유방이 천하통일을 이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로 소하를 꼽았고, "사냥개가 공이 큰 게 아니라 그 개를 묶은 줄을 올바른 방향으로 던질 줄 아는 자가 공이 크다"며, 논공행상을 두고 의론이 분분할 때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의 전략적 비전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기도 한데요. 다만 저는 소하가 동향인 패현 출신으로서 그의 먼 일가 친척이나 진배없었던, 핏줄만큼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던 이유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소하는 오늘날로 치면 "보급의 달인"이 었습니다. 전쟁에서 병사들에게 군량과 무기를 대는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루말할 수 없죠. 소하는 특히 병력이 전멸해도 끊임 없이 보충병을 모집하여 전선으로 보냈는데, 행정 수완이나 임기 응변이 탁월해야 가능한 업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제국의 승상 자리에 올라서도 행정의 기준과 만능의 매뉴얼이라 부를 만한 것을 확립했죠. 이후의 조참이 "나는 소하가 닦아 놓은 길만 조심히 걸으면 된다"고 했을 만큼입니다.

이런 소하도, 한 고제가 지방 반란을 평정하러 서울을 비웠을 때 의심을 샀는데, 일부러 폭정을 펼쳐 "저자가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 나라를 가로챌 야망은 없나 보다."하고 유방이 안심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꼭 그렇게 속였다기보다, 정치 고수들끼리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제스처라고 보면 되겠죠.

조참 파트를 보면, 고제에 의해 마차 밖으로 내던져져 어린 나이에 죽을 뻔한 그 혜제가 승상 조참의 아들에게 "내가 물었다고 하지 말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저러는지 그 속을 좀 알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조참은 나중에야 황제의 근심을 알고 "폐하께서도 고제만 못하시며, 저 역시 소하만 못합니다. 괜히 일을 벌이는 것보다 그저 전철만 밟는 게 오히려 현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걸 보면 혜제 역시 현명한 군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일찍 죽었다는 게 안타깝죠.

<진승상세가>
p847 에서 "용모만 관옥과 같을 뿐 속은 텅 빈 자입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이에 대해 정범진 선생의 책은, 각주를 통해 "관옥"의 뜻이 뭔지 설명합니다. 한편 김원중 교수님은, "관에 달린 옥과 같을 뿐으로 그 속에 꼭 재주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군요.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平 雖 美丈夫 如冠玉耳 其中未必有也

역자 신동준 선생님이 "2인자들"이라 칭한 건, 자신의 기량만으로 지방의 통치권을 결국 보장 받은 여러 "예비 覇者", 그리고 고제 유방을 받들어 지존의 자리에 올리고 자신들도 부귀 영화를 누린 "끝까지 팽 당하지 않고 성공을 이어간 2인자"들 에 주목한 평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회음후 한신이나 팽월 같은 이는 하늘이 점지했다 할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난 일세의 효웅이었지만, 세속적으로 부러움을 받을 만한 성공 사례는 못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포나 번쾌 역시 영웅들이었고 끝도 대체로 좋은 편이었지만, 인신의 경지로 극에 달한 영화를 누리진 못 하였기에 역시 <세가>에 실리지 못 하고 <열전>에서나 행적을 볼 수 있는 인물들입니다. 우리가 <세가>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성공"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위인들의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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