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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들 - 뇌의 사소한 결함이 몰고 온 기묘하고도 놀라운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6년 7월
평점 :
인간의 뇌란 생각할수록 신비한 조직입니다. 분명 사람의 자그마한 신체 안에 부착된 일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전 우주를 품을 듯 방대한 사고를 수행하고, 물리계에서 채 감지되지도 않을 미세한 영역까지 훑을 듯 세심합니다. 코아세르베이트에서 단백질이 정보 전달의 필사적이고도 면면한 레이스를 시작하려 진화의 첫 발걸음을 떼었을 때, 뇌의 이처럼 찬란한 진화까지 예비했을까요? 플라나리아나 미역, 버섯은 고사하고, 우리 바로 아래 단계인 원숭이, 침팬지만 봐도 별반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동물의 경우 그저 치명적 사고나 방지하기 위한 원시적 콘트롤 타워 이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주객이 전도된 듯 존엄한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사람의 신체와 안위를 지키기 위해 뇌가 발전한 게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인 듯 말입니다.
이런 뇌에 대해, 괜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저 건조한 시선으로 대담한 탐구를 시도하는 게 현대의 뇌과학자들입니다. 어느 신체 기관이나 마찬가지로, 뇌 역시 그 주인인 인간이 당한 우연한, 혹은 의도된 사건에 의해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처가 상처를 입은 당사자에게 영구적인 손해를 입히고 마는지(안타깝지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장애의 경우, 말 그대로 상처가 장애로 기능하고 만 불행한 예이고, 이런 진행과 결과가 절대 다수지요), 행여 뜻하지 않은 축복으로 작용하는지를 놓고 실로 흥미로운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현대의 임상 사례뿐 아니라, (저 같은 독자에게는 정말 흥미롭게도) 과거 역사의 숱한 중요 인물(역사에 남으려면 중요한 인물이라야 하니까요)의 예까지 모두 포함하는 게 이 책의 태도입니다. 과거의 기록에서 "뇌의 상처와 그 효과"를 더듬는 건 저자 샘 킨의 시도라기보다, 그 역시 (현대 임상례부터의 유용한 결론 추출이나 마찬가지로) 뇌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입니다. 샘 킴 같은 대중서 저자들은 어디까지나, 이를 소양 없는 일반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또 재미있게, 다듬는 역할이죠.
허먼 멜빌이 그의 장편 <모비 딕> 서두에, 고래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과 언급을 인용하고, 작품 도중에도 고래의 생리에 대해 그처럼이나 자세한 서술을 행한 점 때문에, 문헌 분류 당국에서 처음에는 이 책을 수산업 영역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유명하죠. 책 한 권을 쓰려면 그만큼 관련 주제에 대한 몰입적 헌신과 철두철미한 연구, 나아가 저술 전과 후의 자신이 다른 존재로 거듭나려는 각오까지 다 필요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샘 킴의 이 책도 비록 대중서라고는 하나 저자의 비상한 성의가 돋보입니다. 다양한 뇌 손상의 사례는 그 자체로, 개별로 떼어 놓고 읽어도 (만약 신문 기사의 단편적 보도라고 쳐도) 재미있는 아티클입니다만, 제가 이 책을 통독한 후 챕터의 명명이나 주제별로 다시 시야를 달리해 읽어도 그 세심한 사례의 편집 감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읽기에 재미도 있지만, 이 책은 마치 아름다워도 모든 각도에서 다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처럼, 구조의 미를 지닌 그런 책이더군요.
구조의 아름다움이란 크게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책에 "꽂혀진" 수많은 미주들입니다(미주인지 각주인지는 원서를 확인하지 못 해 모르겠습니다만, 독자는 이 어노테이션들을 읽는 재미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책의 재미 반 이상을 잃음과 같아요). 둘째는 특히 책의 첫 장도 아니고 제3장에 마련된, 저자 나름의 뇌신경개론 강의입니다. 이는 대체 책 주제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학문적 발판, 전제가 될 뿐 아니라, 저자 자신이 앞으로 이 책에서 무슨 용어(반드시 학문적으로 합의된 바가 아니라, 때로는 저자 자신만의 프로토콜, 혹은 감정적, 편의적 의미를 담아 쓸 때도 있습니다)를 어떤 식으로 쓰겠다는 공표인데, 이를 (흔히 교과서가 그리하듯) 첫 장에 배치하지 않은 건 형식적 딱딱함을 최대한 멀리하겠다는 제스처, 혹은 첫 두 챕터를 벌써 읽어 봐서 알겠지만, 이 책에 쓰이는 말이나 논리라는 게, 어느 정도는 독자들이 (일일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할 만한 수준의 용어례라는 것, 일종의 자신감을 불어 넣기 위한 의도라고 보입니다. 이것이 저자의 유쾌한 어조와 겹쳐, 형식과 의도와 일치하는 구조미를 자아낸다는 뜻입니다.
ㅎㅎ 사실 저자의 배치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이뤄져서일 뿐이지만, 지지난 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중 두 건의 암살자(당대에도 그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는 유명한 편이죠)에 대해, 구태여 한 챕터에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정신이상, 과대망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유력합니다만, 그게 구체적인 뇌손상에서 비롯했다는 증거는 사실 뚜렷하지 않거든요. 또, 뇌손상이 설령 있었다 한들 암살자의 행동에까지 "주인"을 몰고간 공통점이 있기까지하다는 정황은 어디에서건 안 드러납니다. 이 책에도, 죄인을 살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일 "정신이상 책임무능력" 항변은 재판 절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무렵이면 책임무능력 항변 자체가 이론적으로 (특히 미국에서라면) 정립되지 않았을 시절이긴 합니다만. 여튼 외부 손상이라는 어떤 계기가 없어도, 일부의 내상이 점점 전체로 파고 들어, 얼굴 근육의 좌우 통제를 동일하게 이룰 수 없다든가 안구의 조절이 자유롭지 못하다든가 하는 게 모두 전반적인 뇌손상의 효과라는 점을 "주장"하는 건, 뇌과학자 아니라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도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광신자들의 일탈 행동이 극단(무려 대통령 암살!)으로 치닫는 건, 우리 샘 킨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뇌"가 어딘가 잘못된 소치이지, 결코 정치적 음모론의 주장(꼭 쑹홍빙의 <화폐 전쟁>이라고는 제가 말 안 하겠습니다)처럼 거대한 세력의 도구로 쓰고 버려진 결과가 아니라는 점 다시 강조하는 바입니다! ㅎㅎ 이 책 읽고서는 이 소리, 저 책 읽고서는 저 소리를 말한다면, 그건 이미 뇌가 손상된 독자라는 자백이니까요! ㅋㅋ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그저 성병 관련 인자인 줄 알았는데, 뇌에 침투하여 사물의 정확한 인식을 방해할 수 있다는 건 처음 배웠습니다. 이 장에서는 "얼굴의 이식"과 "얼굴 인식"의 상호 관련에 대해 논급하는데요, 특히 전자는 몇 달 전 의미 있는 학문적, 임상적 진보가 이뤄져 언론 보도를 타기도 했습니다. "얼굴"이 그저 인간 피부의 평균적 연장이 아니라, 뇌와 긴밀한 연계를 갖고 그 특성, 손상, 질환, 장애를 일일이 다 대변하기에 그 이식도 그렇게나 (그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저자의 핵심 취지이겠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이 책은 뇌과학 개론서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책 같이 보이고, 실제 이야기책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읽다 자연스럽게, 현대의 뇌과학자들이 지금 어떤 결론에 잠정 도달해 있는지, 그 최소한의 컨센서스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게 책의 마력이더군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신해철도 생전에 "얼굴맹" 증상을 호소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게 그저 웃고 넘길 건망증이라든가 사회성 적성 무력으로 치부할 가벼운 이슈가 아님을, 책은 은근 짚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하나의 주장일 뿐임을 독자는 유념할 필요가 있겠네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책에 제시된 낱낱의 흥미진진한 사례보다, 왜 이 사례들을 저자가 한 챕터에 넣었는지 의미를 곱씹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이야기는 금방 읽혀지기 마련이고, 뇌의 기능과 구조라며 요즘 나오는 책들이 그간 너무 자주 다뤄서 선지식도 부족하다곤 못하겠으니 말입니다.
반드시 머리를 다쳐서가 아니라, 어디가 되었든 중추 신경의 일부가 손상되면 바른 감각, 바른 판단에 장애가 생겨 타인(정상인)이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목격되죠. 제2장에서도 총을 맞은 가필드가 통증과 파편의 소재에 대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서술이 있었는데, 5장에서는 "환상 사지"라는 토픽 아래 소위 유령 감각에 대해 재미있는 사례가 계속 소개됩니다. 없는 걸(이제는 없어진 걸) 있다고 우기는 환자를 보면 기가 막힐 만한데, 이미 뇌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구축된 신경 회로가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계속 동일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환상 통증"의 경우 이 기막힌 아이러니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인데요. 가려워서 긁고 싶은데 긁지를 못하는(잘려 나가서 긁을 데가 없는) 당사자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그런 처지에 속하면, 진정 인간 존엄의 최소 조건이 파괴된 자신에 대해 근본적 애착이 떨어져 나갈 만한 감정적 충격을 겪지 싶습니다. 남북 전쟁의 casualty에 대해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전쟁의 참상, 극단적 상황에 처한 타인의 불행에 대해 새삼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화제가 아니었을지요. 여튼 이 책에서도 친절히 설명하는 "뇌의 가소성"은, 그래서 다시 인간의 존엄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사자의 노력 여부에 따라)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고 생존의 편의를 위한 노력을 벌일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 개념과 패러다임은 단단한 위치를 갖고 출발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단단한 기반을 가졌던 출발의 이점을 상실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샘 킨이 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8년 전에 이 프리온 이론의 당부를 놓고(?) 엄청난 집단 홍역을 앓은 적이 있죠. 스탠리 프루시너가 처음에 겪었던 곤란은 첫째 이 개념이 기존의 체계와 대단히 이질적이어서, 마치 기존의 체계가 이종 단백질에 대해 면역 반응이나 보이듯(ㅋㅋ) 그저 감성적으로 거부되었다는 사실, 둘째 아무래도 업계와 학계가 공생 관계에 놓인 부분이 크니, 업계의 이익이 학계의 이익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었다는 점 도저히 부인은 못 할 겁니다. 샘 킨은 "... 여전히 체내에 잠복하여 그 도화선에 불 붙을 날만 기다리는... " 같은 서술을 하는데, 이만큼이나 현생 인류는 마치 기우제를 지내며 기근을 모면하려는 조상들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인류가 여기까지 생존한 건 그저 요행이었는지도, 혹은 지난 시절 흑사병이나 대규모 전쟁 같은 재앙은 그저 서곡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지질시대가 워낙 압도적인 볼륨을 자랑하니, 유한한 인간의 (이 책에서 잘 가르치듯) 매우 유한한 두뇌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게 고작... 역자 설명 중 p-word에 대한 풀이가 있는데, f-word도 있습니다(성질은 서로 비슷해요. 이런 말로 표현했다는 자체가 기성 주류의 엄청난 거부감이 전달되고도 남는 겁니다). 같은 장에 소개된 소아성애자 가이듀섹의 한심하고 개탄스러운 일화는 제 생각에 샘 킨의 유머 감각 발로라고 여겨지니, 주제와의 지나친 연계는 심각하게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가이듀섹 이 인간 뇌를 스캔해봐야?"ㅋ).
아, 그렇군요. 다음 장의 토픽 일부가 성(性)과 관련되어 있으니, 매끄럽게 넘어가려고 유머의 기름칠을...(은 아닙니다). 변연계에 대해서는 그게 왜 영어로 limbic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아리송했는데, 이 부분을 읽고 잘 납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는 자체가, 그간 왜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려줌이나 마찬가지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지각과 반응의 기제가 아닌, 보다 추상적인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가니 더욱 논의의 혼란이 커지는 게 당연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저술가"인 샘이 이 논란 많은 토픽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까가 주목되었는데, 과연 그답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흥미의 불을 지피기, 자신이 은근 지지하는 결론 암시하기 스킬로 책(대중서)의 밀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마엽(요즘은 우리 학계가 "전두엽"을 이렇게 순화해서 부르나 보죠? 전 몰랐습니다)의 손상은 결국 감정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이 세부적인 사항에 집착해서 상위 단계의 결정을 못 내린다는 점은 이미 많은 책에서 지적하던 내용이죠. 샘 킨의 표현을 빌리면, 전두엽 손상자는 "빅 픽처"를 못 그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누굴 두고 근시안적이다, 먼 미래를 보고 일을 꾸미지 못한다고 할 때 앞으로는 "쟤 전두엽이 덜 떨어졌군"이라고 비웃으면 될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지난 시절 통속작가들(시드니 셀던이라고 콕 짚지는 않겠습니다)이 얼마나 이 이슈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한 후 소설에 다뤘는지 알 수 있습니다(속았다는 느낌에 갑자기 화가 나는군요).
이 이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느 책에도 다 나오는) 와일더 펜필드 박사님이 해당 장을 다 채우다시피하네요. 책에는 안 나오지만 아니, 이 "축복받은 질환"(소위) 뇌전증 하면 줄리어스 시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연 나와 줘야 하는 것 아닌지 그게 이상했습니다. 축복 어쩌구 하는 것도 태반은 그의 사례에서 연유했고 말이죠. 물론 다들 예상하다시피 도스토옙스키, 잔다르크, 이런 고정 멤버들은 다 불려 나옵니다. 저는 사례 중에 (불쌍하게도 수술 당한) 고양이들이 특유의 장난스러움, 개성 등을 다 상실하고 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도 나와서 하는 소리지만,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어디에 쓸 것"이며 고양이가 말썽을 안 피우면 그게 맛도 없는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와 뭐가 다를까요? 많은 혁신적인 가설들은, 그게 잘 제한된(자격 갖춘) 실험 환경에서 이뤄지지 않았다거나, 혹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실험군, 대조군의 결과일 뿐이라는 이유에서 배척, 기각됩니다. 뇌과학자들(다른 분야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이 내놓은 그 숱한 결론과 주장들은, 이런 이유에서 어디까지나 신중하게, 유보된 자세의 필터와 또다른 검증을 거쳐야만, 탄탄한 신뢰의 "경전"인 교과서에 실리게 되죠. 이 역시 무한 번의 개정과 변경, 철회의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만. 호문클로스, 혹은 육-영-심의 오묘한 구조는, 제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과학교양서에도 실려 있던 주제입니다만, 이 책도 변함 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정녕 이 영역에서 순수 과학만을 분별 증류하려면, 생체 실험이라도 해야 화끈한 도약이 이뤄질까요? (어디까지나 농담입니다. 다만 많은 발전이 이뤄졌음에도, 어떤 섹터는 낡은 관념의 덫에 걸려 맨날 제자리걸음인 현실이 개탄스러워서 했던 소리에요)
앞 장도 망상(어떤 망상은 너무도 위대하고 유용하기까지해서, 잔 다르크는 제 나라를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샘 킨을 비롯한 일부의 해석, 주장입니다)에 큰 비중을 둔 주제지만, 이 장 역시 신체의 통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뇌가 무시하고 놓치는지, 그 결과로서의 망상이 다뤄집니다. 그 중 통제 불가능한 손은, alien hand라는 원어가 잘 드러내듯, 그저 통제만 안 되는 게 아니라 마치 남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듯 제멋대로인 증후군을 가리킵니다. 이 기제는 책에 친절히 잘 설명되어 있는데, 비단 손 뿐이 아니라 감각영역 손상(역시 전두엽 손상일 경우)이 일어났다면, 이 감각 영역에서 더 이상 피드백을 보내 주지 않자, 앞서서 움직인 손(물론 자신이 원해서 움직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라고 그 마루엽(예전에 두정엽이라고 부르던 것)이 판단하는 겁니다. 소위 "주체 감각"을 잃기 때문에, 이 감각을 다시 느낄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게 되며, 이 때문에 (이 기제를 이해 못하는 사고 중추는) 내 손이 남에 의해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보는 거죠. 마루엽의 "장난"은, 그 임자가 더 이상 자신의 신체에 대한 조절을 못 하고, 나아가 모든 충동을 통제할 수 없는 원인으로 설명됩니다. 물론 "그"는 장난을 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편안한 정상 상태로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인, 그러나 무용한 노력을 하는 중이지만.
익숙한 것과 그렇지 못한 영역 사이를 처리하는, 인간만이 보유한 신비한 회로가 고장 났을 때,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중한 관계가 파탄나기 일쑤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오며 축적한 기억, 정서, 애착 등이 가지는 고유한 색깔, 개성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더 이상 속해 있던 네트워크 속의 그 사람이 아니죠. 저자는 이런 사례를 다루며, 인간 통성으로 유발할 수 있는 애틋하고 유감스러우며 저 깊은 감정의 심연에서 솟아나올 법한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근원적 비관을 (유려한 문장 속에) 표현합니다. 익숙한 사실, 어쩌면 통속적인 사례 하나를 전달해도 듣는 독자의 반응을 고려한 이런 영리한 화술이야말로, 각별히 뛰어난 소통 능력을 지닌 샘 킨의 우월한 뇌가 존재 증명을 하는 대목이겠습니다. 원 제목과는 달리 "뇌과학자들의 결투"는 기대만큼 자주 부각되지는 않는데요. 결투를 생생히 재현하다 혹시 관전하는 독자의 뇌가 과부하로 다칠 수 있다는 그의 배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학계의 첨단을 평균적인 독자가 소화하기에 이 정도 내용이면 임계의 안전한 하회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