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무너지다 - 한국 명예혁명을 이끈 기자와 시민들의 이야기
정철운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언론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칠 것이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약성경 중 루가복음의 한 구절을 약간 변형한 것인데, 대략 유신시절 기자 대량 해직 사태때부터 널리 퍼졌습니다. 고 송건호 선생, 리영희 교수 등의 책이나 강연에서 자주 볼 수 있었죠.

작은 책이지만 현대사의 큰 줄기 하나를 언론인의 시각으로 담아낸 무게가 느껴집니다. 박근혜 정부의 사실상 몰락을 가져온 이번 사태는 촛불의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혁명의 "방아쇠(이 책 중의 표현입니다)"를 당긴 주체가 언론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민완 기자이신 저자(진보매체 <미디어오늘> 소속입니다)의 눈으로 볼 때, 강고한 정부 권력이 결국 무릎을 꿇어가는 그 과정은 지난 정치사에서 좀처럼 보지 못한 드문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간 적대 관계를 유지해 온 여러 언론사들이 동맹, 연합을 이루며 대형 비리를 세상에 고발한 국면이 두드러졌는데요.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한 좋은 예로도 기억될 것 같습니다.

"언론과 다투는 정부 권력이란 참으로 못난 짓을 하는 꼴이다." 이런 말은 지난 정부에서도 여러 번 들어 온 격언(?), 혹은 따끔한 독설이었습니다. 저자는 책 처음에서 박근혜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언론사와 고소 고발 등 여러 분쟁을 벌였음을 지적합니다. 그리 단단한 집권 기반을 갖지 못했던 정부가, 심지어 보수 언론 매체들과도 간단 없는 다툼을 벌였던 게 스스로를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겠는데요. 어쩌면 스스로 저지른 업보 말고도 정치적으로 서투른 실책의 남발, 무모한 각세우기 등이 총체적으로 빚은 비극인 듯도 합니다.

현정부 들어서고는 국제 언론 관련 단체 등에서 평가하는 언론 자유의 현실도 열악해졌습니다. 외신기자들의 객관적 기준으로 본 각종 지표도 내리막을 걸었으니 이게 대외신인도랄까 국격 같은 데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 만무하죠. 정부는 심지어 일본 산케이신문 특파원의 추측성 전언 보도 한 구절을 문제삼아 큰 소송전(그것도 형사소송)을 벌였는데, 저자는 이 대목을 두고 "진영의 보-혁을 가리지 않는", 괘씸죄성 단정과 기분파 보복만이 횡행한, 예측 불허의 정책 기조가 낳은 난맥으로 진단합니다. 산케이신문이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극우성향 매체임을 염두에 둔 분석입니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한국의 헌법재판소도 며칠 전 정식 쟁송 쟁점으로 채택한 "세월호 7시간" 관련 보도가 그 원인이었기에 지금 돌아보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책은 이어서 종편 출범이 이뤄진 5년 전, 지난 대선 전후의 여러 사건, 현정부 출범 후 종편이 걸어온 길이나 크고작은 사건을 짚습니다. 종편은 출범 당시에도 특혜 논란을 빚었는데요. 특히 대선 국면에선 보수 성향 유권자들을 응집시키는 역할을 크게 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요즘은 방송에 잘 안 나오는 분 중 박은주 부장의 발언 "형광등 100개"가 불러온 파장과 지금의 희화적 반향도 다시 언급하는군요. 다만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박 기자는 당시 박 후보의 부정확한 어법(주술 호응이 안 이뤄짐) 같은 걸 지적하며 기사에는 그 나름 소신을 담아 보도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까지 두루 지적하는 대목에서 이 책의 공정성 기준 일부를 엿볼 수 있네요.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은 주로 진보성향의 논객, 전문가들이 자주 원용하는 프레임입니다. 저자께서도 지적하시는 것처럼, 운동장의 지평이 언제나 불공정하게 머무는 게 아니며, 야당이나 진보 진영에서 부지런히, 정확하게 아젠다를 추출, 선점하면 현명한 국민은 이에 바로 호응해 왔습니다. 저자는 오랜 세월 언론에 몸담아온 기자답게, 세칭 조중동에서도 얼마든지 현 정권이나 보수 진영에 비판적인 인사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지난 선거에서 문재인을 찍었다"고 고백한 동아일보 기자부터, "우리는 지금 빚을 내어 거대한 경로잔치를 벌일 뿐"이라고 개탄한 "종편 방송사 소속인(이렇게만 표기됐네요)"까지, 사리에 어긋나는 대목에서 대의에 분연히 공감하는 양심은 어디에서나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저자께서는 조선일보, TV조선 기자진들만의 경쟁력, 역량에 대해서도 합당한 평가를 아끼지 않습니다. "일단 사건이 터지면, 이슈와 아젠다를 선명히 정리하여 밀고나가는 건 우리가 최고다." "우리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시장만 보고 나가는 편이다." TV조선 엄성섭 앵커의 말을 인용한 이런 대목들은 사실 지난 시절부터 반대진영 언론매체에서도 인정해 온 부분입니다. 지금은 종이신문의 위력이 엄청 줄었지만, 한겨레신문 등에선 조선일보의 광고편집 센스가 예술이라면서, "이러니 (저들이) 돈을 벌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죠. 물론 여기서 언론기관의 소명이 상업적 기조에 있어선 안 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 거겠고요.

안민석 의원의 활동 이전에도, 미르 재단의 의혹에 대해선 이미 조선일보가 선제적 보도로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사실 불과 몇 달 전이지만 그간 사태가 너무 급박하게 변해 왔기 때문에, 손석희 사장의 jTBC 특종 말고는 우리가 다 잊어버렸음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 시점에 송희영 논설위원이 대우조선 관련 비위 혐의로 사직하고, 조선일보는 해명 보도를 내고 하던 것도 다 우리가 이례적인 사건이라며 설왕설래하곤 했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굵직한 결과만 부각하는 게 아니라,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치닫기까지 어떤 과정이 선행되었는지 차분하게 짚어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SBS CNBC 소속 김형민 PD는, 많은 네티즌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최순실 사태가 세인의 주목을 받고 수면위로 이처럼 떠오르게 한 일등 공신에 가깝습니다. (전 SBS 앵커인 김형민 부장과는 다른 분입니다) 해시태그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해 준 사건이기도 했죠. jTBC는 이 무렵 정유라의 특혜 의혹을 정규뉴스 시간에 집중 거론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숱한 소문이나 스캔들 중 하나 정도로만 봐 넘기곤 했습니다. 이 책의 백미는 제2部부터 시작되는, 10월 7일부터 10월 26일까지의 숨막히듯 이어지는 연대기식 사건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 국민은 무신경했지만, 날선 의식의 기자들과 정부 사이의 숨막히는 대결 양상은 치열하게 물밑에서 전개되었으며, 오직 진실을 향하려는 기자의 눈에 이 모든 "역사"가 소상히 캐치되었건 겁니다. 승부가 결정난 10월 26일에 과거 또 무슨 일이 있기도 했다는 건 국민 모두가 다 아는 바이겠습니다.

이 책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지난 세기 중반 히틀러가 사고를 치기 전에는, 전문가들 사이에 자본주의- 공산주의 간의 한판 대결이 발발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공산진영의 독재자 스탈린과 미-영 진영이 손잡고 "Allied Forces"를 이루리라고는 아무도 점치지 못했습니다. 요즘도 unlikely ally(있을 법하지 않은 동맹)라는 말은 흔히 쓰곤 하죠. 저자는 미-영-소(蘇)를 한겨레, jTBC, 조선 측에 비유하기도 합니다(각각 매칭이 아니라는 건 따로 설명이 붙었습니다). 후반부에는 중국의 지난 항일 투쟁사에 비겨 "국공합작"이란 말도 나오네요.

1997년 대선이 끝나고 한참 후 한겨레신문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았던 쾌거인 정권 교체" 당시를 회고하며, 등장인물(대부분 현역 정치인)들에 대한 경칭을 생략하고 한 편의 소설처럼 꾸민 형식으로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DJT연대를 촉진했던 배후의 일등 공신이었던 한광옥씨, 소장 국회의원 김민석 씨 등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여, 당시를 감격어리게 기억하는 독자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었죠. 이 책 역시 역사의 바른 맥이 자리잡은 후, 그런 추억으로 남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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