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 미래는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편석준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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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윌리엄 깁슨은 "미래는 벌써 우리 곁에 와 있으나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명언으로, 기술 혁신의 일상성과 그에 따른 세계관의 절박한 변화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90년에 제작, 개봉되어 큰 인기를 모은 오락영화 <토털 리콜>은 미래상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 중 하나를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처럼 느끼게 하는 오락"으로 꼽아 극의 중추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이때 일반에 처음으로 그 가능성이 널리 인식된 이른바 "가상 현실"은, 이의 보편적 상업적 활용을 위한 여러 지엽적 기술이 간헐적으로, 혹은 제법 화제를 모아가며 개발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근 이십 년이 지나도록 저 고전 SF에서 제시한 비전에 영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도 그런 진단이 자주 나오지만, 심지어 한때 "가상 현실"은 잊혀진 영역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역시 이 책 중에서 시원하게 지적하듯) 페이스북이 뜻밖에도 오너의 강력한 의지에 바탕하여 이 분야 선도적 사업자로 나섬에 따라 다시 부각되는 요즘입니다.

가상현실은 물론 산업적, 혹은 국가 정책적으로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많은 기업들이나 우리 같은 일반 소비자들이 관심을 두기로는 엔터테인먼트, 여가 선용, 오락 방면에서의 역할 쪽입니다. 사람은 못 먹어 본 것, 못 구경한 것, 못 느껴 본 것을 감각적으로 접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면서부터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종족입니다. 체험을 직접 해 보고 싶지만 여러 사정,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다른 절실한 과제나 업무 때문에 감행하기 꺼려진다거나(이 역시 기회비용의 문제입니다만) 할 때는 계획을 접는 게 보통이죠. 가상현실은 한마디로 말해, 비용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거의 진짜나 마찬가지인 체험"을 겪게 돕는 도구, 환경,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비용과 가격입니다. 가짜를 즐기는 데 진짜 체험이나 별 차이도 안 나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면 아무도 그 상품을 사려 들지 않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혹 판매자 입장에서 가격을 타협할(낮출) 수 없다면, 그 서비스는 구매자에게 "진짜를 차라리 능가하는" 멋진 쾌감을 선사할 수라도 있을 만큼 효과가 좋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면에서 생산자들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 못 시켰기에, 여태 업황이 지지부진했던 거죠. "가상 현실"이 인터넷의 보편적 이용이라든가, 모바일 소통보다 더 가능성이 일찍 주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이 정도에 머문 건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왜 다시 가상현실인가? 저커버그 같은 이들도 마냥 개인적 선호를 동기 삼아 모험성 투자를 결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인들이 특히, 머리로는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감각, 특히 시각적 속임수에 자발적으로 넘어가며 "속는 쾌감"을 즐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계화가 진전되고 보편적 대중 문화의 향유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상의 기쁨이 된 지금, 놀이동산 방문이나 기존의 3인칭(이 말의 뜻은 책을 읽어 보면 명확히 다가옵니다) 게임 몰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분명한 욕구가, 여러 채널을 통해 소비자들을 길들이고 나의 원 체질이나 기호인 양 침투를 압박해 옵니다. "이거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지 그래?" 게임과 담을 쌓고 사는 이들에게조차 뉴스를 통해 "포켓몬 고"가 뭔지는 싫어도 개념 파악이 절로 되는 현실입니다.

virtual이란 말은 참 묘한 어감을 가집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실상의" 같은 뜻이 맨 먼저 제시됩니다. 그럼 이건 사실이라는 걸까요, 그 반대라는 걸까요? 우리말 번역 "가상(현실)"을 보면, 아예 가짜라고 단정하는 명명입니다. 빤히 가짜인 줄 알지만 진짜 같고, 진짜보다 더 실감나며 (이게 중요한데) 신나는 효과, 이게 바로 virtual의 본질입니다. p20에는 폴 밀그람 예일대 교수의 규정을 빌려, 현실- 증강현실 - 증강가상(이는 아직 우리, 그리고 산업계, 학계에 낯선 phase입니다)- 가상 처럼, 네 단계가 전 구간을 채우는 개념스펙트럼을 제시합니다. 이 네 단계를 모두 합쳐 "혼합현실"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띠의 양 끝에 위치한 두 단계도 100% 순도는 아닌 셈이죠. 이 스펙트럼이 우리에게 요긴히 가르쳐 주는 한 가지 포인트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 기술적(descriptive) 설명이 아닌, 어렴풋하나마 전체 구조의 그림이 그려진다는 겁니다. 기술적 설명은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 도식화하여 자세히 나오는데, 이 역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핵심만 잠시 발췌하자면, 증강현실은 1) 유저의 시야를 완전히는 가리지 않고(=상당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2)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게 보통이고 3) (생산기업 입장에서)위치 처리, 데이터 처리, 카메라 인식 같은 기술 개발에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가상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이며, 3) 관련해서는 인체의 시각, 청각 등 기초 연구에 보다 집중하는 게 큰 차이입니다. 제 생각에는 개발자들이 주안을 두는 방향인 3)이, 이 책을 읽어나간다거나 혹은 벤처 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사항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그 조작의 주체가 철석같이 믿는, 생존과 존재의 바탕이 될 기제이자 생리 작용이지만, 그 현실은 불완전함과 착오 투성이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상현실이든 증강현실이든 이 인지 메커니즘의 틈을 파고들어 "(객관과 무관한) 주관의 쾌감을 극대화"하자는 상품이자 서비스의 승리를 목적으로 삼는 사업영역이므로, 어떻게든 나약한 인간을 최대한 즐겁게 속여 줄 방법을 찾아내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책에 여러 언급이 나오지만, 이른바 지연속도(그 이하로 화면을 연결하면 단절을 연속으로 착각) 같은 이치의 발견은 벌써 지지난 세기부터 연구를 통해 주목되곤 했습니다. 특히 가상의 세계 하나를 머리속에 자발적으로 생성해 내는 게 VR의 과제이므로, 120도 이상의 시야각을 확보한다거나, 초당 90장 이상의 화면을 처리할 능력을 기기가 보유하게 만드는 게 "시각 기만" 방면에서 업계의 화두였습니다. 나머지 몰입감은 청각 기만이 처리하는데, 이 분야에서도 소위 3D 오디오의 개발 등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체험의 형성은 이제 상용화의 이름값에도 거의 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책 뒤 각론에도 나오지만, 화면 중 유저의 시각이 머무르는 그 부분만 해상도를 높인다거나 하는(시선이 머무르는 부분의 해상도로 전체의 선명도를 판단하는 인간 시각의 한계) 선택과 집중의 간단한 아이디어로 큰 호평을 얻은 한국 기업의 예도 나오는데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개별 단말기의 성능이 아직 아주 만족스런 정도가 아닌 만큼, 정해진(시장 가격을 맞출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최대 효용을 낼 수 있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형편입니다. 아직은요. (아니라면 벌써 우리는 VR 기기의 즐거운 홍수 속에 파묻혔을 겁니다)

장기간 육상 대중 교통 수단에 탑승하거나 항해 중엔 왜 멀미가 날까요? 실제 동작과 뇌가 인지하는 내용이 불일치하는 데 그 원인이 있음은 우리가 다 알죠. VR도 마찬가지라서 소위 VR멀미(적절한 번역 같고요. 우원어는 simulation-sickness라고 이 책에 나옵니다. sea-sick[배멀미] 같은 기존 어휘를 잘 비튼 신조어죠) 문제가 오랜 동안 해결이 안 된 게 이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은 큰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 외에도 포컬큐의 혼란(실제 거리와 뇌의 인식 사이의 격차 설정 교란) 때문에 눈의 피로가 가중되는 게 여전한 난제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전세계에서 3D 영화 <아바타>가 가장 큰 호응을 부른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었는데요. 이때 사실 3D TV도 일부 얼리 어댑터에 의해 호응을 얻고 붐이 일기도 했던 걸 저도 기억합니다. 책에서는 안경 착용의 불편함 등 여러 이유로 이 기막힌 호기를 업계가 살리지 못하고 결국 무위로 돌린 아쉬움을 지적합니다.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같은 게 몇 년 전에 업계 개발자뿐 아니라 유저 섹터에서도 논쟁의 불이 붙는 등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만 또 지금은 지지부진하고, 폴더블 스마트폰 등에 자리를 내 준 형편이죠. 이런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혁신적 기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장에서 현실적 수요를 창출할 수 있게 얼마나 단가를 낮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는 가상현실뿐 아니라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번역 서비스(일단 질적 측면은 차치하고)를 패킷당 비상식적 요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쓰려 들겠습니까. 부자들은 그냥 책임도 쉽게 따질 수 있고 융통성도 높은 사람을 쓰면 그만입니다. 책 후반부에서는 패기 있는 한국 기업들의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데, 읽으면서 이런 현실, 즉 보유한 첨단 기술의 즉각 상용화가 어려운 한계에 대해 절감할 수 있더군요. 카카오는 어느새 법제상으로나 현실의 영향력에서나 "대기업군"에 속하게 되어, 이런 젊은 도전자들의 요긴한 기술을 사들여 벤처 생태계의 바람직한 양상을 구축해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재벌기업 롯데도 자신의 테마파크가 제공하는 오락의 방향성을 다변화하는 데 이 VR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데서 엔터테인먼트 미래상의 분명한 비전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VR은 꼭 오락에만 쓸모가 궁리되지도 않습니다. 현재 한국 TV 정보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내시경 치료술 홍보 영상을 보면, 어느 정도는 VR의 핵심인 그래픽을 최대한 채용한 것들입니다. 책에는 미국 어느 대학에서 VR을 활용한 수술, 동시에 이를 이용한 의대생 교육 현황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다소 궁색한(?) 응용 같기도 하지만 고소공포증 환자 등을 치료할 때 이 가상의 "환경 구축"은 무엇보다 치료진에 큰 도움을 주는 기술이겠죠. 진통제의 오남용은 결국 환자에게 다른 질환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감각에의 기만"은 이 진통제 처방을 줄이는 데도 크게 도움을 준다는 대목이 특히 공감되었습니다.

VR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이미 바싹 다가온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스크린 골프 연습장"이 VR의 가장 생생한 응용이 아니고 뭘까 싶은데요. 이 외에도 저자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사업화하려다 뜻이 꺾인 섹터가 바로 "플스방" 같은 예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저작권자인 소니가 강력한 제동을 걸었기 때문인데, 권리자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이긴 하나 보편적 소비를 위해 어찌 보면 알아서 채널 하나가 구축된 셈인데 업자 모두가 상생하는 쪽으로 판로 생성, 정규화가 법제를 통해 이뤄지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점입니다. 뛰어난 기술이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현실에의 안착으로 해피 엔딩이 이뤄지기까지 이처럼 까다로운 고비가 많다는 점 다시 확인되었구요. 책에 소개된 구체적 정보 덕분에 당장 간편히 사용,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아는 기쁨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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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전쟁 - 과학이 바꾸는 전쟁의 풍경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9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부 지음, 이동훈 옮김 / 한림출판사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Scientific American>에 실린 멋진 기사들을 주제별로 묶은 단행본 시리즈 중 아홉번째 권입니다. 현재 열 권까지 번역 소개되었는데, 일반 대중 상대의 알찬 과학 잡지가 논의의 주제를 얼마나까지 넓게 잡고 독자들에게 지적 쾌감을 안겨줄 수 있는지 저 목록만 봐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선 자신의 관심 주제에 따라 한 권만 골라 정독해도 해당 분야의 첨단 상황(state of the art)을 설명한 멋진 아티클의 향연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갈 수 있으며, 시리즈의 다른 권을 읽고 전 맥락을 먼저 파악해야 하는 성격은 전혀 아닙니다(한 권 한 권이 독립적). 그러나 이 열 권을 모두 읽어낸다면 교양 있는 독자로서 확실히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질 것임은 분명합니다(이 말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제가 그런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 뿐만 아니라, 세상을 파악하는 눈이란 도대체 과학 지식에 발판을 두지 않고서는 그 실체와 효용이 얼마나 부실할 뿐이지 새삼 통감할 수 있죠. 과학에서 시작하여 삼라만상을 이해할 수 있고, 세계가 돌아가는 근본 원리를 탐구할 때 과학의 지평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 총서들을 통해서도 증명되는 셈입니다.

신사, 유한 계급의 지적인 취미로서 자연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보이던 시기도 과거에 있었습니다만 요즘은 개인(설령 그가 천재라고 해도) 단위의 연구와 작업이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처럼 절실한 니즈에 의해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분야라야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게 자연과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딱 뿌린 만큼만 거둘 수 있는 냉혹한 계산의 야속함이 제대로 느껴지는 게 이 분야의 실태이기도 합니다. 역사상 첨단 과학의 발전은 전쟁이라는 야만적 이벤트에 의해 가장 강한 추동력이 마련되기도 했고, 전쟁의 수행 과정을 통해 그간 모르던 여러 원리가 새삼 발견되며 이론상의 두드러진 진전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전쟁은 그 기법의 발전에 있어 서로 밀접한 함수관계를 형성했음은 누구 눈에도 자명하기까지 합니다.

종래 군사 교육 코스에서는 현대전을 CBR(발음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이후 ABC로 배열 순서와 개념어를 교체하기도 했습니다만 대체로 뜻은 같죠)이란 두문자로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화학전, 생물학전, 방사능전, 이 셋이 현대 들어서 "크게 변화한 전쟁의 국면"인데(이 책 원서의 제목이기도 하죠, pace가 아니라 face이긴 하지만), 이 책은 그 전통적(어느 새 retronym이 되어 버린)인 전쟁기법 외에, 1) 무인기(세칭 "드론"), 2) 로봇, 수트(이 책 중의 정식 용어로는 "외골격" 즉 엑소스켈레톤[더 정확하게는 "동력"이 앞에 붙어야죠]이라고 합니다) 등 육상 전투에서 활용될 다양한 무인-유인 장비의 발전 3) 사이버전 4) 우주궤도상에서의 공격- 방어 시스템 등이 더 추가된, 현대적으로 정립된 신 개념 전쟁의 종합적 국면을 설명합니다.

단, 군사학 교의서처럼 엄격하고 기술적인 문장, 구성이 아니라, 설명의 깊이는 전문적이되 관점이나 바탕에 깔린 세계관은 마치 시민사회단체의 패널 입에서 들려 주는 듯, 민간인, 일반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정서가 그대로 풍깁니다. 첨단 전쟁 기술을 옹호하며 적을 섬멸하자는 기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 인류가 이처럼이나 치명적인 무기, 살상 방식을 고안하고도 과연 평탄한 미래를 향유할 수 있을지, 거의 모든 아티클에서 그 걱정이 묻어날 정도입니다.

첨단 전쟁 기법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주제이고 서술의 목적이지만, 특히 3장 "사이버전" 같은 대목은 현대인이 고도의 편익을 누리는 전력 기반 시설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놓여 있으며, 악의적인 세력에 의해 뿌리부터 흔들릴 위협에 노출되었는지 실감나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전통적인 국가 대 국가(혹은 대규모 무장 집단) 사이의 전쟁과는 달리, 소규모 테러 단체나 반사회성향 짙은 개인에 의한 질서 교란(이게 이른바 "테러 행위"이죠)에 대해서는 과연 정부(중에서도 군사 당국)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마지막 챕터를 할애하여 상론합니다.

드론은 사실 전적으로 무인(unmanned)인 상태에서 운용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양성, 훈련된 인력이라고는 하나 역시 "조종사"에 의해 조종되는 기기입니다. 책의 1장은 생각 밖으로 개발 역사가 오래된 무인기를 활용한 전투 기법에 대해 지난 연혁을 간단히 짚은 후, 특히 미 군사 당국이 주된 활동을 펼쳐 온 파키스탄 전역(戰域)에서의 활동 결과를 분석합니다. 드론의 개발, 운용은 "값비싼 인력의 손실을 막고(제가 2차 대전을 다룬 역사서 등을 읽어 보면, 그 총명하고 고난도 교육 투자가 이뤄진 젊은 조종사들의 희생에 대해 그저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무덤덤한 분위기로부터 충격을 받을 때가 있었네요)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단을 택한다는 점에서 필수"라는 옹호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한국 대중의 대체적 정서는 큰 반감을 가질 법한데요. 이 책(의 해당 부분 서술) 역시 그런 "시민사회적 우려"를 명시적으로, 그리고 행간에 짙게 반영합니다. 파키스탄인들(중 파슈툰 인들)은 "싸우겠다면서 정작 전쟁터에 당사자가 얼굴도 안 비추는 비겁한 행태"라며 비난하기도 한다는군요. 무인기는 현재 장기 체공이 어려운 형태지만, 벌처, ISIS(그 말썽꾸러기들과는 무관합니다. 미국에서는 우리처럼 IS로 약칭하지 않고 ISIS로 더 늘려 부르기 때문에 혼란이 더할 듯) 등 보다 긴 시간의 활강이 가능한 혁신이 현재 이뤄지는 중이라고 하네요.

인간의 허약한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더 강한 동력, 더 광범위한 범위의 작업이 가능한 로봇의 개발은 이미 반 세기 전부터 강대국들, 대기업들이 초미의 관심을 가져 온 과제입니다. 이 책의 2장에서 이 오랜 꿈(혹은 위험한 야욕)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1장 드론보다 더 많은 분량으로) 진지한 분석이 펼쳐집니다. 크게 1) 사람의 노동(때로는 판단까지)을 완전히 대신하는 장비 2) 사람의 능력을 강화(인핸스)하는, 탈착이 가능한 보조 도구로서의 각종 첨단 장치들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교과서 혹은 부교재에서 익히 배워 온 대로, "로봇"은 어느 체코 소설가의 상상이 집약된 작품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조어입니다. 이 조어의 함축성, 적절성은 (이 책에도 나오듯) 사실 체코어의 뉘앙스, 혹은 해당 지방의 역사를 돌이켜본 후에야 더 공감하게 되는데요. 의미심장하게도 "도구, 소모품으로 여겨진 존재가 이후 주인, 기성 지배체제에 정면 반항"하는 심상찮은 사연까지 이 개념에는 담겨 있습니다. 책은 현황의 무서운 발달상만을 기계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전개되는 끔찍한 디스토피아상까지 염두에 두며 과연 고도로 자율화한 로봇 장비가 언제까지 인간의 통제 아래 머무를 수 있겠냐는 우려까지 함께 표현합니다. 물론 폭발물 제거 등 인간을 투입하기 곤란한 각종 필수 작업에 요긴하게 활용되는 등 로봇의 건설적이고 평화적인 활용 가능성 역시 무궁무진합니다.

사이버전은 재래식 전쟁이 전혀 예상치 못하던 중요 섹터이자 전술 필드임이 분명한 데다, 선전 포고나 정부 당국의 공식 개시, 간여(engagement) 없이 바로 지금도, 또 외관상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군 당국뿐 아니라, 언제든지 불순 세력의 타깃이나 도구로 떨어질 수 있는 개인 유저들까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성 없는 전쟁은 바로 이를 두고 이름이며, 책에는 특히 미국(그저 추정)에서 개발하여 높은 성과를 거두기까지 한 "스턱스넷 바이러스"의 예를 듭니다. 이 장치는 감시자들의 눈에 바로 띄는 치명적 고장을 하드웨어에 일으키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원격 조종자의 사후 추가 조종 없이 알아서(이게 무섭죠) 핵심 장치의 구동부에 접근하여, (이게 중요한데) 관리자한테 고장 난다는 시그널도 거의 주지 않고 정상 작동 범위 안에서의 노후화처럼 위장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치명적 장애를 일으켜도 이게 사이버전의 일환인 줄 알면 상대에서도 바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는 1) 이란에서의 이런 사례가 대중 과학 저널에까지 보도되어 우리 같은 독자가 다 접할 정도면 이란 당국도 벌써 이런 새로운(..) 형태의 진화한 공격 패턴을 알고 심각한 반성과 대응책을 고려해 뒀다는 뜻도 되며, 2) 이 책은 글쎄요, 불필요한 반중(反中) 감정 유발을 우려해서인지 아니면 창피해서(필자의 성향으로 볼 때 그건 아닌 듯)인지는 모르지만 몇 년 전 황금방패(중국의 사이버 부대)에게 미국이 된통당한 사건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그 부분이 좀 의아했습니다. 이 사건만큼 현대 사이버전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예가 드물 텐데 말이죠. 또한, 비록 바이러스 개발자의 추가 조작 없이(웹에서 격리된 서버니까 당연히 불가능) 작동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재래식 방법인 (내부 배신자의) USB 연결을 통해 이 작전이 성공했다는 점에서(그렇게 배신자와 내통하는 데 들이는 노력이 큰 비중입니다) 좀 과장된 면이 있다고 봅니다. 하긴 진짜 놀라운 사건 사고(암암리의 전쟁)라면 우리가 알 수도 없죠.

화학전의 양상은 비교적 짧게만 언급되고 넘어가는데, 이는 바로 앞 장 생물학전 파트에서 이미 심각한 주제가 다 다뤄진 이유도 있습니다. 사실 전통적인 구분법이 이 두 분야를 구태여 나눠 놓은 편제를 바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을 것 같은데, 생화학전으로 통합 고찰하는 방식도 (이제는) 더 실용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이 SA의 유익한 기사들이 특히 독자들에게 교육적인 이유는, 우리 인체의 폐가 기체 중의 각종 화학 성분(이롭건 유해하건 간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흡수하게 그 수용체가 진화했는지에 대한, 교과서에서 배워 온 기초 원리의 설명에까지 매우 친절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냥 이러이러한 메커니즘을 거치는 거야" 같은 설명이면, 일반 독자가 기반 없이 지식을 소화하기에 거부감이 컸을 겁니다. "사린 가스의 살인 원리" 같은 말은 이 한국어번역판에서만 위트를 발휘할 수 있는 우연의 일치이기도 하겠네요.

이 책에도 나와 있지만 지난 냉전 시대 내내 기어이 대규모 "열전"이 터지지 않은 이유는 그 "상호 확증 파괴(책에는 없지만 이걸 원어로는 MAD라고 합니다. 뮤츄얼 어슈어드 디스트럭션)"의 위하력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상대가 자국의 영토 주요 부분을 초토화해도, 피해국 역시 상대방에 대해 잔존 핵무기로 얼마든지 심각한 응징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래전의 이른바 "선빵"의 효과가 거의 기대될 수 없다는 데 이 핵전쟁의 특징이 있고, 이런 새로운 경지가 인류사에 전개됨에 따라 오히려 본격 세계 대전의 억제 효과(반면 국지전은 더 빈발)를 가져 오는 역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되었지요.

이 책에서 염려하는 건 소규모 핵무기의 통제 불능 유출 확산, (앞 장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기도 한) 사제 폭탄(꼭 "폭탄"에 한정되는 건 아니고, IED라는 원어가 말해주듯 모든 개인 단위의 즉석 제조 무기가 다 포함됩니다)화 같은 경향인데, 이는 마지막 8장 "테러리즘"에서도 다시 논의됩니다. 또한 많은 독자들이 신기하게 받아들일 법한 "친환경 핵탄두"라든가, 기타 산업적, 평화적으로 얼마든지 선용될 여지가 많은 다른 방면으로의 핵 원천기술 논의가 자세히 소개되네요. 반면 전통적 ICBM 같은 대륙간 공방 수단이 아닌, 우주 궤도상에서 폭발시켜 상대국의 시스템에 직간접으로 타격을 주는 방식인 HANE도 소개됩니다. 이때 앞 글자 HA는 현재 논란의 대상인 THAAD와 그 구성부분이 공통입니다. 즉 "고고도(高高度)"에서의 운용이 주 목적이라는 뜻이죠.

이 HANE의 논의에 바로 이어지다시피한 게 제7장 "우주궤도상의 전쟁"입니다. 이 역시 아주 새로운 개념은 아니며, 레이건 대통령 시절 이른바 전략방위구상이라고 해서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주제입니다. SDI가 정식 명칭이며, (이 책에서는 조롱 섞인 표현이라고 하지만) "스타 워즈"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죠. 조지 루카스 감독이 그 말을 쓰지 말라고 당국과 언론에 항의를 하기도 했구요. 여튼 이 무기증강 경쟁을 감당 못한 소련이 몇 년 안 되어 체제가 붕괴한 가장 직접적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주상에서의 치명적, 소모적 군사 경쟁 추세란 사실 지금이라고 완화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치열해지기도 한 인상이 강해요. 어찌 보면, 이 책 7장의 의의는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을 회고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과 미국 사이에 더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현재의 상황을 더 강력히 경고하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각 장의 필자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기조가 반드시 일관되라는 법은 없고, 솔직히 6장에서 "아무리 비관적으로 봐도 파키스탄, 중국, 러시아, 인도(핵보유국 중 일부)는 미국의 우방 미만이 아니다(원문 그대로에요)."라는 기술은 엄혹한 현실을 애써 비껴가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네요.

8장은 우리 시민들이 일상에서 바로 마주칠 수도 있는 위험을 다뤘다는 이유에서 3장의 사이버전과 함께 흥미있게, 그러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읽어 둬야 할 필요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전쟁이란 결코 예전처럼 전방에서만 일어나는 일부 무장 인력 사이의 피튀기는 분쟁이 아니라, "후방"과 "민간"에서도 그 잔혹한 살상의 피해를 절감할 수 있는, 매우 가까이에 와 닿은 위험, 소위 "clear and present danger"입니다. 이 유명한 어구(법학 용어지요. 특히 헌법학)가 책 중에서 직접 쓰이지는 않지만,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일류 저널에 실린 기사답게 이를 의식한 표현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 한국도 노후한 원자로의 퇴역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 책에서도 시의적절하게 원자로의 교체, 개량 논의가 테러리즘으로부터의 위협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 치밀한 분석과 대안이 제시되더군요.

대체로 이 책에 실린 아티클들은 영미의 평판 높은 잡지들이 쓰는, 여유 있게 현황을 돌아보는 듯 딴청을 피우다 갑자기 본격 토픽으로 진입하는 식의, 해외 잡지 많이 구독한 분들에게 익숙할 그런 구성과 문체를 쓰는 모습입니다. 이게 이런 분위기가 잘 맞는 독자들에게는 친숙함을 부르고, 그렇지 않고 정보 습득 위주의 독서가 목적인 (특히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약간의 생경함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중 지향의 저널과 전문가 전용의 특수 매체 사이에 현격히 자리하는 구별점은, 건조한 정보 전달 위주냐 아니면 일반인, 국외자의 관점에서 투사한 비판적 성찰이 가미되어 있느냐의 차이죠. 책의 품격은 그런 인문과의 접합이 어느 지점에서 이뤄져 독자의 각성을 간접으로 끌어내는지, 그 방법과 스타일의 세련됨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두 230쪽밖에 안 되는 분량 속에서 어떻게 이 모든 목적이 다 달성되었는지도 놀랍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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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과 세계시민 - 세계시민 되기 시민교육 연구총서 4
이동수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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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입니다. 집안이나 출신 지역,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 단체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나를 바르게 파악하고 이웃과 타인에 대해 공정하고 열린 시각을 갖는 마음 자세는, 특히 요즘처럼 "관용과 화합, 다문화, 소수자 존중"의 가치가 강조되는 세상에서 특히 필요합니다. 이런 올바른 세계관, 혹은 정치관은 이르면 이른 단계에서 함양될수록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앞에서 말한 대로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며, 올바른 초심도 인생에서 다양한 고비를 맞아감에 따라 흔들리고 퇴색하기가 또한 일쑤입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석학들이 정연하고 진중한 언어로 가르쳐 주시는, "세계 시민으로서 흔들림 없는 도덕성과 참여, 비판 정신"에 대한 바른 시야를 수시로 익히고 이를 실천에 옮김이란 더욱 보람 있고 의미 깊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대중 상대 교양 강연이나, 혹은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을 위한 코스에 교재로 권하기 안성맞춤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숙독해 보니, 세계 시민으로서 부끄럼없이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 함양되어야 할 내용이라는 게, 어쩌면 또 이처럼이나 깊이 있고 보편타당한 지식과 관점을 담고 있나 싶어 절로 희열과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 책 한 권에 법률, 정치, 경제, 세계사, 종교 등 인간사 문명의 천양만태를 압축적으로 요약, 진단, 규정하는 도도한 담론이 모두 담겨 있는 듯, 지식과 소양에 목마른 독자에게 적시적소의 일깨움을 던져 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계 시민"이 되려면 이처럼이나 포괄적이고 섬세한 교양을 체득해야 하며, 또 올바른 관점에서 잘 정제된 지식이야말로 바른 판단과 행동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도 재삼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의 주옥 같은 논문을 높은 안목으로 잘 편집하여 대중에게 전달해 주시는, 경희대 이동수 교수님께서 역시 이 책에도 책임 편집의 소임을 맡으셨더군요. 교수님 본인의 논문은 책머리에 놓인 <환경위기와 생태>입니다. 첫 글이 환경 관련 주제라(또 책의 컨셉이 시민 교육 쪽이라) 혹시 이어지는 다른 논문도 모두 비슷한 주제 아닐까 짐작하신다면 그건 틀렸습니다. 앞서 말했듯 환경, 생태 토픽을 넘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21세기 현대인의 모든 삶의 양상을 주제로 다 아우르고 있으니, 혹 어린 자녀(배움에의 의욕이 왕성한)에게 멋진 교양서 한 권을 딱 원 볼륨으로 선물하고 싶다면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르셔도 됩니다.

환경과 생태 주제가 권두에 배치된 건, 인간이 육신과 건강을 초월하여 정신적 깨달음만으로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석가, 예수, 공자라 한들 오염되고 황폐화한 세상에서 호흡과 영양 섭취라는 기초 생존 활동이 위협받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19세기 산업 혁명이 본격화한 이래 인류는 지속적으로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의 공포에 시달려 왔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우려스러운 추세는 문제의 해결을 더욱 방해하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기후 협약을 무효화하겠다며, 건전한 의식을 지닌 "세계 시민"들을 더욱 걱정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형편이죠.

그렇다고 "성장"의 과제, 목표를 전면 도외시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을 줄이고 환경 친화적인 심성을 회복하는 게 옳습니다만, 한번 흥청망청한 소비 행태에 길이 든 인간의 습성이 금세 청빈과 절제로 회귀하기란 힘들죠. 교수님께서는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 환경담론의 진보적 시각을 대변한다 할 "녹색성장론"의 의의와 연혁을 되짚습니다. 저는 길고 긴 발자취에의 회고를 기대했으나 의외로 최근(1999년) 시점에 그 유명한 폴 에킨스의 저술이 이 입장의 시발점을 이뤘다는 걸 책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과 합의를 이룬 "녹색성장론"의 내용과 방침, 비전에 대해 정확하고 알기 쉬운 소개가 이뤄져 있으므로, 실천적으로나 교양의 목적으로나 꼭 일독이 필요한 논문입니다.

논문에는 이 외에도 생태근대화론(주로 공적 섹터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는), 그에 대한 네오맑시스트의 반응, 또 이른바 "지속 가능 발전론" 등 다양한 시각과 담론들이 설명되었으므로, 환경과 생태의 과제가 오늘날 어느 지점에서 논의되는지 총체척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익한 읽을거리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참여하는 시민, 깨인 의식의 유권자로서 이 환경 이슈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미비하다면 어디 가서 무슨 말을 꺼낼 초보적 자격조차 못 갖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주제는 김윤철 교수님의 <글로벌 경제와 불평등> 한 편뿐입니다만 이 논문이 현재 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상시화한 경제 위기", 이른바 신자유주의 물결에 내재한 근본 모순, 그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국제 NGO 주도의 신 거버넌스 등 굵직하고 확장성 높은 논의가 펼쳐지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한 권(한 편)을 읽고 만 가지 아이디어와 각성을 부를 만한 명문입니다. 확실히, 한국에서도 박세일 교수(지난 2017 .1월에 타계)가 YS 정부에서 야심차게 내 건 "세계화" 바람이 온 나라를 휩쓸 때만 해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세계인 모두의 욕망과 복리를 만족, 증진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게 근 이십여 년이 지나, 실물 경제 규모의 몇 배를 웃도는 금융 경제의 투기 바람이 각국의 생산- 소비 기제 펀더멘털을 위협하고(논문의 기조는, 결국 세계화 때문에 경제 위기의 공포로부터 세계가 안전할 날이 없게 되었다는 쪽입니다), 일반 대중들도 막연하게나마 세계화의 허상을 깨닫고는 엉뚱하게도 제노포비아 같은 국수주의, 폐쇄주의로 퇴행했다는 진단을 내어 놓으십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님은, 1990년대에 큰 인기를 모았으나(한국에서도 대단한 주목을 받았죠. 특히 계간잡지 창비에는 거의 매호 그의 글이 번역되어 실렸습니다) 현재는 거의 잊혀진 편인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의 "세계체제론"이 다시 원용됩니다. 과거 사회과학 독서 열풍에 향수를 지닌 특정 세대분들이 특히 눈길이 끌릴 만한 대목입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이현휘 교수님의 <주권과 국가이성>이었습니다. 교수님은 박승관 서울대 교수의 발언을 제사(題辭)로 삼아, 전쟁과 갈등과 증오와 알력이 그칠 날이 없는 국제 정치 현실에서, 오랜 이념적 기반이자 모든 외교활동의 기초가 될 주권론의 허실이 무엇인지 다시 분석, 회고, 통찰하고 계십니다. 공교롭게도 C V 웨지우드의 명저 <30년 전쟁>을 한국어로 완역한 남경태 씨가 3년 전 타계하기도 했는데요("공교롭다"는 말을 쓴 건, 대체 1648 베스트팔렌 체제의 본질과 실상, 한계가 무엇인지 새삼 주목하게 되는 요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해서입니다. 저런 묵직한 저서가 시장성을 고려할 때 번역, 출판이 잘 안 되는 게 한국의 실정이기도 한데 말이죠). 이 논문에서도 웨지우드의 그 책(외에, 30년 전쟁을 분석한 다른 고전들까지)이 수시로 인용되며, 대체 주권이 무엇인지, 주권 담론에 기반한 근대형 외교 시스템은 과연 어디까지 제 기능을 유지할지에 대해 살벌하고 심각하기까지 한 실증 분석의 틀을 적용합니다.

작년 하반기, 중국이 남중국해 일원의 "영해성"을 강변하며, "이는 우리의 '주권 사항이니 미국이나 '자칭 국제 단체(국제사법재판소를 가리킵니다)'는 개입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정치, 특히 미-중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희한하게도 친중 성향의 포퓰리스트 두테르테가 필리핀(영해 분쟁 당사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야무야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쪽이건, 그에 대항하려는 쪽이건 이 "주권"이라는 (무형의)이념에 이처럼이나 의존한다는 사실부터가, 본의의 탐구이건 발전적 해체적 재정립이건 간에 이론적 천착이 시급함을 잘 알려 준다 하겠습니다.

이 논문은 특히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그 연혁과 논의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데, 그 실질적 기원은 30년 전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신앙의 동지가 아닌 자국 이익의 더 확실한 담보자가 누구인지를 계산하여, 신교 연합국의 손을 들어준 프랑스 왕국의 실력자 리슐리외 추기경(이자 재상)의 원대한 정치적 국량에 대해 특히 상술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종교"나 명분. 혹은 특정 사안(왕실 가문 영토의 상속, 병합 등)을 놓고 벌어지는 즉흥적 이합집산이 유럽 국제 정치의 한계였는데, 리슐리외의 이 기회주의적 처신(이자 정책)이야말로 "국가"를 독립된 이해관계의 주체로 정립하고, 아울러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염치도 양심도 돌볼 것 없이 철저히 실리와 계산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외교의 생리를 최초 규정했다는 의의를 아주 선명하게 밝힙니다. 이성의 반대라면 "감정"이겠는데, 이 감정적 동기에는 "같은 구교국이니 구교국 편을 들어주자"라든가, "특정 왕실의 전쟁 동기가 더 비인도적이므로 그를 징치하자" 같은 게 포함되겠습니다. "국가이성"은 이런 추상적이고 일시적인  인적 요소를, 의사 결정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국가의 실익"만을 기준으로 삼는 기제이죠.

"프랑스는 저 리슐리외(와 그 후계자들)의 현명한 처신으로, 향후 250년에 걸쳐 유럽의 패권을 유지했다."는 서술이 (헨리 키신저의 논문으로부터의 재인용을 통해) 나오지만, 독자로서 여기에는 반대하는 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국권이 유린될 뻔한 상황도 겪었고, 나폴레옹 전쟁의 처리 과정에서도 프랑스는 일시 존립의 위기를 맞기도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왕실의 몰락 후에도 공화정으로서 국체와 정통성을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대체적으로는 보불 전쟁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은 프랑스의 고갯짓 없이 어떤 중대한 정책도 전개할 수 없었음은 분명합니다. "왕실의 이익"이 아닌 "국가이성"에의 개안(開眼)이 있었기에 이런 연속적 번영과 위신의 행사가 가능했음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은 특히 한국인의 정치 행태에서, 이단과 정통의 판별에 집착하여 나의 생각과 다른 모든 입장을 절멸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일종의 주술적 심성(이성, 대화, 타협이 배제된)을 특히 지목합니다. 읽으면서 백 번 타당하다고 여겼지만, 헌데 소위 확증편향이란 게 또 모든 이들의 마음에 나쁜 버릇으로 자리잡아, 이런 말도 좌파 쪽에선 우파를 비판하는 적실한 통박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우파 역시 반대진영의 체질을 어쩌면 그리 잘 짚어냈냐며 아전인수로 해석할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악성 자기파괴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해답은 협소한 에고가 아닌, 이웃과 약자와 환경 전체를 마음과 머리 속에 품고 새길 수 있는 "세계 시민 정신"입니다. "당신은 어디 시민입니까?" "나는 아테네도 에페수스도 다마스쿠스도 아닌, 세계의 시민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어느 고대의 철학자가 지중해 세계를 주유하며 발언했다는 이 감동적인 언술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평화와 항구적인 번영을 위해 우리가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준엄히 깨우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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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 체 게바라
후안 마르틴 게바라 & 아르멜 뱅상 지음, 민혜련 옮김 / 홍익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는 80년대 학번 세대 어르신들 중심으로 이른바 "(좁은 의미의)사회과학 서적"에서 자주 등장하던 걸로 이 위인이 처음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그 앞세대는 잘 모른다는 뜻). 저는 고 정운영 교수님의 여러 수상록을 읽고 이런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혁명가에 대해 처음 알았고(그 짧은 글이 워낙 잘 쓰여진 명문이라 책 몇 권 분량보다도 머리에 남는 게 더 많았네요), 이보다 뒤엔 모 출판사에서 나온 <체 게바라 평전>이 몇 달 몇 년에 걸쳐 애독되는 통에 이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겠죠.

이 책은 (페이퍼백이지만) 양장본인 그 책과 사이즈가 비슷해서, 서가에 나란히 꽂아 놓으면 좋은 자매편(형제편? 그런 말은 없지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동생이자 체 게바라를 가장 외모상으로, 성격 면에서 빼닮았다고 평가 받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 막내 남동생 후안 마르틴 게바라 씨에 의해 구술되고, 저널리스트 아르멜 뱅상에 의해 기록된, 동생의 눈으로 본 "형 체 게바라"에 대한 회고담입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생에 대해 혈육으로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지만, 그의 일생을 연대기처럼 추적한 내용은 아니고, 동생으로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맏형에 대한 여러 기억들을 술회한 형식이더군요. 아무래도 가족 입장에서 바라본 혁명가의 초상이니만치, 그 부모(당연히 저자의 부모이기도 한 분들)나 친척들, 다른 동기(형과 누나 등)에 대한 추억과 행적, 그리고 형처럼 혁명가까지는 아니라도 치열한 민주화운동가로서 (대체로) 살아 온 자신(즉 저자 후안 마르틴 게바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위대한 혁명가는 심지어 지지자 뿐 아니라 만인의 존경을 받는 단계에서도, 인간로서의 가감 없는 본 모습이 아닌 "박제화, 우상화한 왜곡된 표상"으로 오해받곤 하는데 어쩌면 이건 어느 정도 그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지자들의 열광과 연호 속에서도 이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현상이겠는데요. 제가 읽어 보니 저자 후안 마르틴 게바라 씨는 특히 이 점을 매우 거북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떠올리는 체 게바라는 다정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열정에 넘치면서도, 사람을 그저 연대와 우정과 공감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어떤 경우에도 수단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정통 스탠스의 맑시스트나 공산주의자와도 거리가 멀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비난할 때면 특히 그의 고모가 마음아파했다고 합니다. (서구어에서 공산주의자나 무신론자 등의 어휘에는, 특정 정치적 입장을 기계적으로 지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감정적, 윤리적 비난의 뉘앙스가 때로 개입합니다. 따라서 상당 경우 그 자체로 욕이 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죠) 이런 멋진 남자들이 종종 보이는 장난스러운 태도지만, 그는 그의 고모에게 편지를 쓸 때 일부러 맺음말에 "공산주의자" 등을 자칭하는 유머로 상황에 초탈한 모습도 보였다고 하는군요.

이 책에는 장폴 사르트르가 쿠바에서 체 등의 혁명가 무리와 직접 만난 사건에 대해 저자(동생 후안 마르틴 게바라)의 육성으로 회고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후 사르트르는 어느 글에서 "내가 만난 가장 완벽한 사람"으로 체에 대해 평가하곤 하는데, 저는 이 표현을 처음 접한 게 (위에 언급한) 정운영 교수의 에세이에서였습니다. 당시에는 좀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혁명가로서의 불 같은 열정이나 민중과 세계에 대한 한없는 신뢰, 사랑 외에도, (이 책에서 지적하는 바대로) 엄청난 학식과 지성, 그리고 잘생긴 외모 등의 매력에 함께 압도된 느낌을 그렇게 드러낸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사실 사르트르는 추남이었죠). 이건 마치 소설가 공지영이 조국 교수를 두고 "가장 완벽한 남자"라고 표현한 맥락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취소하겠습니다)

몽상가, 방랑자 기질이 강하고 남자로서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의 개성은 아마 그의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형질 같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모친은 아르헨티나에서 손 꼽는 명문가였는데, 비천한 출신의 청년과 결혼한다는 게 어르신들의 승인을 얻을 리가 없었지만 열정에 따른 확신으로 조신한 숙녀 셀리아는 이 청년을 배필로 맞아들입니다. 여튼 장남인 에르네스토는 의사로, 차남인 로베르토는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게 했으니 자식 농사는 성공적으로 지은 셈인데요. 문제는 그 장남, 가장 잘나고 똑똑하고 (이 점이 중요합니다) 어느 무리 속에 세워 놓아도 자연스럽게 리더로 부각되는 타고난 인물이었던 에르네스토는, 의사로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부모가 기대하는 중상류층의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 험난한 가시밭길을 자청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차남 로베르토는 그의 형과 달리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성향이었지만 주위에서 하도 "체"의 동생이라며 핍박하는 통에 자연스럽게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답니다. 책에는 언제나 "최고로 잘난" 형의 그늘에 가려 열등의식과 질투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로베르토의 고뇌에 대해서도 언급이 나옵니다.

앞에서 체 게바라가 정통파 맑시스트나 공산주의자와도 거리가 멀다고 했지만, 특히 주목할 건 1917년 10월 혁명 즈음에 그가 레닌 일파를 향해서도 호된 비판을 내뱉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양키 제국주의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인민을 착취 대상으로 보는 괴물들이다." 물론 이런 태도가 몽상가, 방랑자, 대책없는 이상주의자로서 오히려 그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혁명의 기술적 달성에 집착한 나머지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을 동일시했다거나, 기계적 유물론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 이념 속에서 인간성을 고사시켰다거나 하는 점은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하겠고, 게바라의 저런 태도는 "대체 무엇이 본질인지" 혁명가로서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 피델 카스트로 역시 그저 정의감 넘치는 대학생, 청년이었을 뿐 공산주의자와는 처음에 무관했다는 유력한 시각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겠네요.

체 게바라는 이상에만 사로잡혀 현실을 도외시하는 몽상가이기만 했는가? 저는 이 점을 평가할 때 그가 실무적 측면, 즉 능수능란한 정치적 처세술이라든가, 전시라면 야전에서 그가 얼마나 유효하고 영리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책에는 저자가 투옥되었을 때 갈티에리 장군 체제의 어느 대령이 다가와서 "네가 체의 동생이냐?"를 물은 후, (분명히 철천지 원수 진영인데도) 그가 전략적 천재였음을 입에 침에 마르게 감탄한 후, 볼리비아에서 그가 맞이한 최후에 앞서 벌어진 전투에서 "실수로 진지를 잘못 택한 점"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겼어야 할 전투를 지고 말았다는 데 대해, "같은 야전사령관"으로서 애통해했다는 건데, 이처럼 적으로부터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그의 자질이야말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유시민씨의 책이라든가 여러 다른 자료에는 쿠바 혁명 완수 직후 피델 측과 사이가 벌어져, 위대한 혁명을 아름다운 종적으로 길이 간직하기 위해 체 게바라가 알아서 험지로 떠났다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진짜 혁명가는 체 게바라요, 피델은 결국 탐욕스러운 현실 정치인이자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관점에 대해 정면 반박하며, 피델과 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는 동지이자 친구였다고 강조하는군요. 물론 동생(더군다나 형을 그토록이나 닮고 또 존경했던 동생)이었다고 해도 모든 문제에 대해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며, 이는 체 게바라 사망 당시 카스트로가 보였던 반응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셔 따져야 하겠습니다. "카스트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드물지 않은 이름인데, 체 게바라의 증조할머니 가문 성씨가 "카스트로"이기도 합니다. 체 게바라가 어렸을 때 폐렴에 걸려 이후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 천식 발작이 비롯했다는 말도 동생 입으로 들으니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더군요.

체 게바라의 최후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증언은, 특히 그 화가의 해당 작품이나 십자가 처형을 담은 다른 작품을 보면 많이 공감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체 게바라나 대의와 박애와 평화를 위해 한 몸 돌보지 않고 사심 없이 투쟁한 이들이며, 본성이 참으로 선한 이들이었다는 점은 매우 비슷합니다. 이념과 사상은 다를 수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에서 남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가꿀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대의에는 누구나 찬성할 것이며, 체 게바라는 이런 이유에서 모든 명분과 이상의 최소공배수 혹은 최대공약수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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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저널 -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혼조 마사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극사실주의"라고 작품 성격이 규정되긴 했지만 섬뜩한 묘사가 난무한다거나 해당 직업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든가 하는 식의 소설은 아닙니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포인트에 주목하여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데요. 1) 신문사(간혹 끼어드는 잡지사까지) 기자들과 경찰관들 일부의 고달프면서도 보람 가득한 직업 실정이 어떤지 제대로 엿볼 수 있는 스토리, 2) 7년 전에 벌어져 전 일본을 들썩이게 했던(물론 픽션상으로)아동 납치, 성폭행 사건의 진범과 진상을 추적하는 미스테리물로서의 재미, 어떤 독자라도 이 두 가지 매력 포인트를 치밀하게 부각시킨 작가의 솜씨에 끌려 두터운 볼륨을 끝까지, 단시간에 읽어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특히 나중에 기자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별 잔인하거나 말초적인 부분 없습니다)이나 대학생 들이 읽으면 직업관 설정에 많은 도움이 될 만큼 해당 직역에 대한 실감나는 구현이 이뤄지며, 어느 정도는 다분히 이상화, 모델화한 설정이니만치 현직 언론인들이 읽어도 많은 공감을 부를 것 같습니다(아니면 초심의 각성이라든가).

일본 장편 소설들이 흔히 그렇지만 긴 성명을 어떤 때는 성씨, 어떤 때는 이름, 어떤 때는 별명으로 부르기 때문에 독자들은 한참 읽어가다 누가 누군지 헷갈려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책의 맨앞에 인물 관계도를 정리해 두었는데, 특히 비중이 높은 다섯 명 이름 앞에다 별표를 쳐 둔 센스도 돋보였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과연 소설(국적이 무엇이든)에 몰입을 했다면 기억력이 좋든 나쁘든 사람 이름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책을 한달음에 마치지 못할 사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특히 이 소설은 몇 사람(기자나 형사)들의 이름이 작품 분위기의 이해나 향후 전개에 주요 단서 구실을 할 때가 종종 있기에, 성명을 정확히 기억해 가며 읽을 필요가 더 대두되는 성격입니다.

제목이 잘 말해주듯 이 책은 특히 신문기자, 그 중에서도 지방에 주재하며 수시로 중앙총국과 소통하여 특종을 뽑아내야만 하는 본분을 지닌 기자들의 온갖 애환을 극적으로 잘 버무려낸 수작입니다. 기자라는 직종이 그저 낭만이나 명예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실을 밝히길 꺼리는 각종 인간 군상을 일일이 상대하고 사귀어 두고 비위를 맞춰 가며 말문을 틔워야 하는 온갖 수고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소설에도 나오듯 멋모르고 달려들었다가 몇 개월만에 그만두며 좌절하는 젊은 인력들이 많은 형편이죠. 뿐만아니라 하급직은 많이 뽑는 반면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간부나 관리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실적이 좋고 과오가 적은 소수 능력자만이 해당 신문사에 계속 봉직할 수 있기에 사내에서도 협력 못지 않게 경쟁이 치열합니다(경쟁이 타사 기자들과만 이뤄지는 게 아니죠). 또한, 본인이 능력이 있어도 사내 정치에 능하지 못하거나 가망 없는 라인에 몸담았다가는 억울하게 좌천, 퇴사하는 경우도 흔합니다(이 작품에도 그런 대표적인 캐릭터가 하나 나오고, 다만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별 쓰임새 없이 퇴장해서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하긴 이 세 가지 사항은 비단 신문기자뿐 아니라, 어느 회사나 조직, 직장에서건 공통된 사정이요 애환이기도 하죠.

한국 사회는 특히 일본과 여러 정서라든가 사회적 위계 구조, 작동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잘 쓰여진 기업 소설은 한국의 사정에 그대로 대입하고 읽어도 큰 공감과 시사점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비록 신문사를 소재로 삼았지만 직장 내 경쟁과 암투, 그리고 동료애, 직업 윤리와 명예욕, 출세와 도덕률 사이에서 고뇌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분투와 갈등상을 이 작품 속에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직장인이라도 피부에 와 닿는 깨우침이 있을 겁니다. 현 국회의원이자 전 대통령후보였던 정동영 MBC 앵커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부에 갓 배치되어 온갖 험한 숙식 환경을 거치며 일을 처음 배워나가던 고생담을 전에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걸 은어로 사츠마와리라고 하는데(정 앵커 본인이 직접 이 말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신참 사츠마와리들과 그들을 이끌고 보살피며 때로는 호된 훈육도 가하는 고참 기자들 사이의 미도 높은 소통이 또한 볼거리입니다. 소설에 저 말이 한 번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원문을 매우 정성들여 꼼꼼히 옮긴 역자분의 스타일로 보아 아마 원작에도 등장 안 하지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 소설의 중심 축을 잡는 인물은 세기구치 고타로라고 봅니다. 이 사람은 진실 보도 하나만을 직업관 겸 인생의 모토로 삼고, 남들보다 앞선 특종을 낚기 위해 상관들에 대한 거침없는 반항, 후배들에 대한 냉혹한 다그침과 질책 등으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배울 건 많아도) 주변에 인맥이 안 쌓이는 이단아, 아웃사이더로 아예 직장에서 찍힌 인물입니다. 게다가 치명적인 건, 의욕이 앞서 사실 확인을 제대로 않고 기사를 냈다가 오보를 내어, 신문사의 명예(가뜩이나 경쟁사에 비해 사세가 위축된 판에)를 실추시키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안긴 "전과"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일단 능력 하나는 인정하기에 아주 짜르지는 않고 지방을 전전시키며 붙여는 주는 편이지만, 먹은 나이와 경력, 능력에 걸맞은 승진은 꿈도 못 꿀 판이며, 심지어 그와 가깝다고 판단되는 다른 기자들도 왕따나 멸시를 당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근성과 확고한 소명의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후배들, 특히 마쓰모토 히로후미("마쓰히로"로 약칭, 별칭되며 사내에 마쓰모토라는 다른 성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이름은 특히 잘 알아두어야 하는 게, 중간 쯤에 히로후미라는 이름을 가진 경찰 한 사람이 비중 있게 또 등장하기 때문이죠)와 후지세 유리(여성입니다)는 남들 눈을 피해가며 선배이자 상관인 그와 밀접한 교유를 이루고, (소설 결말에 가서)드디어 주목받을 만한 성과를 거둡니다.

집요한 근성과 굵직한 관록으로 세기구치와 반대편에서 대칭을 이룰 만한 또 한 명의 기자가 니카이도 미노루입니다(이 사람은 성씨만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노루"라는 이름은 작중 기능도 별로 없고 표기도 거의 안 됩니다). 소설 중간쯤에, 이 사람과, 기자들을 매우 싫어하는 과묵한 관리관(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일본 특유의 경찰 계급이죠) 야마가미 미쓰야키(이 사람도 성씨만 기억하면 됩니다)와의 대작(對酌) 장면이 특히 볼만합니다. 저는 이분 집에, 그 아들이 쓴다는 글러브가 혹시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게 풀리지는 않더군요. 그럼 괜히 낭비된 설정 아닌가, 그보다는 세부적인 장면 묘사에도 이처럼 공을 들여 실감을 높인 작가 혼조 마사토의 정성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더 규모와 영향력이 큰 경쟁지에서 근무하다 승진 가망이 낮아지자 차라리 현장에서 더 뛸 여지나 생길 현재의 <주오신문>으로 전직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전 직장의 후배(자기가 키워 줬던)와 분위기 더럽게 충돌을 빚는 장면이 후반에 나오므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합니다만 기자들은 사소한 범법(어폐가 있긴 합니다만)이나 과오를 놓고 경찰들로부터 적잖은 배려를 받는 편입니다. 한 30년 전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신입기자로 채용 절차가 완료되자마자 경찰서에서 자동으로 운전면허가 발급되어 주어지기도 했는데 뭐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일본이나 한국이나 기자-경찰은 긴장 관계에 놓이면서도 또 묘한 공생의 처지를 이어가는 게 사실이죠. 이 책에서도 니카이도가 주자 위반 딱지를 떼인 후 윗선을 만나 잘 해결(?)한다거나 하는 장면이 나오고, 다만 두번째로 딱지를 떼인 후에는 "더 이상 경찰측에 빚을 지지 않기 위해(오프 더 레코드 조건으로 들은 정보를 바로 기사화할 작정)" 말없이 한국 돈으로 십만 원이 넘는 범칙극을 무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기자들이 취재원으로부터 얻은 소중한 정보라고 해도, 그걸 그자리에서 수첩에 받아적는다든가 하지 못할 사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세기구치는 간신히 손바닥에 적은 후 행여 지워질까 염려하여 후배에게 운전을 대신 맡기는 장면도 나오고, 니카이도 같은 이는 가뜩이나 술이 약한 판에 몇 잔 들어간 상태에서 결정적인 정보를 듣고 이를 필사적으로 외우려고 발버둥치는 장면 같은 게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관리관의 전번을 외워야 하는데 6453이 잘 안 외워져 "양끝의 두 숫자와 가운데 두 숫자의 합이 각각 9"라는 힌트로 기어이 기억을 살리고 마는 대목이 웃겼는데요. 만약 저같으면 앞의 64만 외우고, 뒤의 숫자는 11을 뺀다(1씩이 부족하다)처럼 해서 더 쉽게 떠올렸을 것 같았습니다.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또 한명의 중요 인물이 후지세 유리입니다. 마지막에 "전 그저 신문기자라는 직업과 결혼한 셈치겠어요."라는 다소 느끼한 대사를 치기도 하지만, 그녀야말로 의리 있고 직업 윤리관도 강하며 대인관계도 원만하면서 근성도 가득한, 모범적인 직장 여성의 대표처럼 묘사됩니다. 조금 이상한 게 마마보이 같은 광고맨(고소득자에 직장 내 전망도 좋은 고스펙 신랑감으로 세팅)의 애프터를 거절하면서, 이 거절이 자기 인생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아닐지 고민하는 대목이 처음에 나오는데, 이후에 이 부분 관련 사연이 전혀 안 나와서입니다(결국 신문기자로 한 껀 올리고 승진도 해서 잘풀린다는 결말인데). 키도 보통이고 피부 상태도 좋지 않은 걸로 나오지만 스타일이 좋아서 화려한 도심에 거주할 만한 자격이 있는(!) 외모인 듯합니다. 경비 절감 때문에 전철 등을 타고다니는 모습이, 예전에 제가 알던 머니투데이 어느 여기자와도 닮아서 특히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네요.

일본문학 번역의 달인의 솜씨라 술술 잘 읽히지만, 예를 들어 "속보" 같은 말은 이 소설 전체에 두어 번 등장하는데, 우리가 아는 速報가 아니라 "후속 보도"라는 뜻의 續報입니다. 이 말도 국어사전에 있긴 한데 이건 한자로 따로 써 주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겠습니다. "타지"라는 말도 여러 번 나오는데 익숙한 "他地"가 아니라 경쟁지라는 뜻의 "他紙"입니다. 他誌라고 쓰면 또 경쟁 잡지라는 뜻이 되는데, 이런 게 한국어로만 쓰면 뜻이 분간이 잘 안 됩니다. 서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물 관계도를 예쁘게 정리해 준 것도 이 책 편집의 큰 매력이며, 그 앞 페이지에는 일본 전도(개략)와 도쿄 도 인근의 약도가 나와 있어서 지명 파악에도 도움이 되었고, 소설 읽으면서 새삼 일본 지리 공부하는 셈 치고 열심히 앞뒤를 번갈아 펼친 것도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본문 중 일본 문화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한 어휘에 일일이 역주를 달아 준 것도 독자를 위한 배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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