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움베르토 에코가 "특별한 기회에 쓴 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사실 그가 쓴 글은, 특별한 기회(이 "특별하다"는 말도 그의 기준에서 평가한 말입니다만)에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글들이 특별합니다. 어려서 저는 그의 명작 <장미의 이름>, 그리고 (너무도 어려웠지만) <푸코의 추(초판 제목은 이러했고, 저는 아직도 제가 읽은 첫 판본이라 이 이름이 더 친숙합니다)> 등을 읽었고, 앞으로 성인이 되어 독서를 하고 머리 속에 무엇을 정리하고 가꿔 나가야 할지에 대해 기본 프레임을 정하는 계기로 삼았더랬습니다. 그 후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같은 책을 읽고, 저렇게 똑똑하고 박식한 분도, 그 때문에 짊어져야 할 업보, 숙명 같은 것이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어렴풋하게나마 가졌더랬습니다.

 

총 14편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역시 에코 교수는, 자기 책에 달린 부제 한 문구에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법이 없어, "특별한 기회에 쓴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하게나마 서언에서 해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글들은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어떤 과장이나 미화 같은 의도를 담았다기보다는, 정말로 특별한 투고 요청, 강연, 혹은 주목할 만한 사건 발발에 즈음하여 집필 계기를 마련했다는 사정이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어느 정도는 부담을 지니고 있었는지, "집필 계기가 특별했다고 해서 반드시 내용까지 창의적("특별"이란 형용사는 피하고 있습니다)일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행여 독자나 팬이 쏟을 과도한 기대를 완화하거나, 자신의 부담을 좀 덜려는 "귀여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의 그답게, 책임 회피라든가, 혹은 대가로서 편안하게 루틴, 매너리즘에 젖은 채 비블리오그래피의 길이만 늘이고 인세수입만 늘리려는 마음은 전혀 먹지 않고 있다는 듯, 자신의 새 글들이 실린 이 책에 대해 "(최소한) 독자가 읽기에 즐거운 글들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에는 변함이 없을 테고, 자신은 그러한 (가상의) 요청에 충실한 글을 썼노라 자부한다는 선언을 온건하게 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선, 각 글들이 어떤 동기, 어떤 환경에서 집필되었는지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회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책 읽으시려는 분들은 요 파트를 꼼꼼히 읽어 보셔야, 본문의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에코의 책을 읽다가 언제나 중도 포기하시는 분들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배려(독자로서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우리는 이런 대가의 책을 읽을 때만은,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읽는 것이지 쇼 프로그램을 즐기듯 편안하게 뭘 먹으며 소파에서 즐길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가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나 에코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지, 이미 서언에서 작가 본인이 충분히 힌트를 준 바에 따라 읽어 나가는 게 정석이며, 또 유일한 해독(?) 방법입니다.

 

첫번째 실린 글 <적을 만들다>에서, 에코는 다양한 인용문을 들고 있습니다. 하긴 뭐 언제는 이분이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런 재미로 우리는 그의 책을 읽어 나가는 거죠. 혹시 이런 게 지겹다 싶으신 분들은, 자신의 태도를 재고하지 않으시면, 에코 책 읽기는 지속적인 고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는 본디 이 방대한 문헌의 세계에서 보물 찾기를 하며 "혼자 노는" 사람이며, 이런 데에 공감 못 하는 분들은 처음부터 그의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에겐 이 세계를 무대로 한, 또 시간의 총체를 배경으로 한 책읽기와 기호 분석이 삶의 유일한 소명이요 존재 이유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에 공감을 못하면 우리 역시 자신의 시간을 더 생산적인 다른 작업에 바쳐야 현명한 태도이겠습니다.

 

그의 인용문을 읽는 데 큰 거부감이 없는 분들도, 과연 이런 지식을 머리 속에 새로 정리해가며 읽어야 하는지(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암기가 수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에코가 말미에 덧붙이는 코멘트만 소화해 가도 충분한지 갈등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봅니다. 에코의 초심자는 전자의 수고를 하려 들어도, 처음부터 그게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에코 급의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면야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책(소설 포함)을 읽다 보면, 그가 인용하는 저자와 문헌에 대해 자연스럽게 흥미가 붙습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밟지 않으면, 괜한 거리감과 권태감만 첫 단계에서부터 몸에 밸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성문종합영어> 등에서 "Beauty is only skin deep." 같은 말을 접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고 지나칩니다. 어떤 이는 <성문종합영어> 옆 페이지 쯤에 나오는 "용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None but the brave deserve the fair)."와 착각을 일으켜서, 이 말의 출처가 드라이덴인 줄 잘못 아는 수도 있습니다. 이 책 27페이지를 보십시오. 에코는 "10세기에 살았던 클리뉘 수도원장 오도"라는 분이 이 말을 언급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클리뉘 수도원이야 당연히 알아도, 오도 수도원장이란 이름은 태어나서 저는 처음 들어 봅니다. 에코가 이 책에서 "최초"라는 평가나 단정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저 말의 이제 전거나 출전을 논할 때 이 어카운트를 거론해도 큰 실책은 아니지 않을까 하며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변이나 타인의 땀 같은 체엑이 내 몸에 묻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쳐 한다. 그런데 여자란, 아름다운 피부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온통 그런 것들이다." 사실 우리는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군 제대한 예비역 선배들한테 그 비슷한 말을 듣곤 합니다. "여자의 배를 갈라 보면(의대생 등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남자보다 훨씬 많은 지방과  노폐물로 가득차 있다. 여성의 몸은 그저 겉으로만 아름다울 뿐이며, 사실은 남자보다 성분, 체형, 구조면에서 훨씬 추한 존재이다." 하긴 이런 인식이 근래 확산되어 여성들도 몸매 관리, 특히 체지방 관리를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제게 이런 말을 해 준 선배 본인은, 어쩌다 캠퍼스를 지나칠 때마다, 혹은 시내 번화가에서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여성을 곁에 두고 있더군요. 여성분들은 하여튼 말만 번지르르 잘하는 남자한테 절대 솔깃하면 안 됩니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남자한테는 자기 신조와 정반대되는 감언이설을 퍼뜨리는 게 이런 분들이고, 오늘 나한테 잘해주고 내일은 다른 여성에게 더 잘해주는 게 이런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 위의 오고 수도원장 같은 분은 그렇지 않고, 진심과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렇죠, 아름다운 "거죽" 밑에 숨겨진 실체를 상상하면, 마음에서 육욕이 끓어오르더라도 한순간에 스러지고 마는 효과를 내는 게 저 말입니다. 에코는 이 글을 최근에 썼으나, 아마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읽고 머리 속에 정리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장미의 이름>에도 그 비슷한 말이, 윌리엄 수도사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드소가, 마을에서 도둑질하러 온 가무잡잡한 피부의 다람쥐 같은 소녀와 마주치면서, 그녀의
"젊고, 미남이시군요."
한 마디에 넘어가, 태어나서 처음이라 할 열락과 환희의 하룻밤을 겪은 후, 이를 통회하는(아드소는 평생 순결을 서원한 수도사이니까요) 그에게 해 주는 말이 이겁니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그 추함, 그 비루함, 그 부조리함, 그 덧없음에 대해, 내가 지금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지금 네 나이에 알 수 있는 지혜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해 주면서 老윌리엄 수도사 역시 평소의 침착을 잃고 어조가 떨리는 품입니다. 서평을 쓰면서 저 역시 타자를 치는 손이 흥분되기도 하네요.

 

<섬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는, 혹시 <전날의 섬>을 읽으며 많은 피로를 느끼셨을 분들에게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에코의 독자들 중, "왜 이분은 지난 시절의, 이미 극복된 과학 기술에 대해 이렇게 천착, 혹은 집착할까?"하며 불만을 가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학 기술(심지어 경제학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은, 아웃오브데이트 된 것은 이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코는, 본연의 영역을 넘어선 이 경계에 대해 대단히 고집스럽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고 정확하게 연구하여, 이를 독자들에게 흥겨운 분위기로 들려주는 일을 즐기죠(흥겹고 즐거운 건 물론 화자인 그고, 듣는 우리는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입니다만).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문이란 당대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과 이해 없이는 반쪽짜리의 불구입니다. 둘째, 설령 자연과학의 첨단을 이해하는 순간에도, 그의 지난 과거 이력을 어느 정도 알지 못하고는, 이미 그것은 천박한 암기이거나(공대생들은 아쉽게도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이런 길을 밟는 수가 많죠. 예컨대 수학 정리의 증명은 사치입니다. 그냥 외워야 합니다! ㅜㅜ), 부정확한 타협인 수가 많습니다. 어느 교수님 말마따나 "모르면 모르는 거고 알면 아는 거지 그 중간은 없"는 법이니까요.

 

에코는 비판적 성향의 지식인입니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 실린 <위키리스크에 관한 고찰>은 누구나 안 읽어 볼 수 없는 중요한 문헌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특히 마지막의 이 아티클을 통해, 에코가 진정 과거에 매몰된 화석이나 고립된 천재가 아닌, 우리 모두와 소통하며 친교를 즐기는 고마운 동시대인임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니그마 세계 2차 대전 3부작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생각과 감정을 타인에게 정확히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언어, 그 중에서도 문자 언어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마음이 맞지 않는 타인에게는 숨기고, 나의 친구, 동료에게만 알아 보게 하려는 보다 세련된 욕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암호입니다. 나의 정확한 의도를 숨기고 상대를 착각 속에 빠뜨리려면, 머리를 열심히 짜내어 도구를 고안해야 하는데, 이에는 상당히 큰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렇게 들인 노력의 보람이 있으려면, 상대를 속이고 얻는 물질적, 혹은 정신적 대가가 상당히 큰 것이라야 했겠습니다. 암호 통신이 전쟁에 있어 필수 수단으로 발전한 건 이 때문입니다. 전쟁 자체도 무엇인가 큰 것(돈이든, 땅이든, 자존심이든, 대의 명분이든)을 얻기 위해 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싸움입니다. 한번 벌인 싸움을 이기려면, 갖은 꾀를 다 짜내어 적을 속여야 하고, 그런 책략에 말려들어 적이 제 풀에 넘어지면, 나의 피를 흘리는 수고 없이 효율적인 승리를 거두는 셈입니다. 아군의 통신을 우수한 암호 속에 잘 숨기고, 적의 소통 수단을 그 주고받는 암호 해석을 통해 교란시키는 일은, 탱크 수 천 대, 전투기 수백 대,  보급 선박 수백 척, 무엇보다 소중한 인명 수십 만을 아끼고 살릴 수 있는 첩경입니다.

 

2차 대전 당시 그 승패가, 연합국 측에 그 속내와 전략을 속속들이 간파 당한 추축국 측의 안이한 통신 정책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는 이가 많습니다. 한번 무적의 암호 체계를 개발한 후, 우수한 게르만 인이 구축한 방벽을 타 민족의 두뇌 따위가 뚫을 수 없을 것이라고 과신한 독일군, 아예 그런 대비책조차 개발하지 않은 채 원시적 복호화 작업만으로 열심히 기밀과 작전 사항을 송수신하여 속내를 미국 측에 훤히 읽힌 일본군, 이들의 잘못된 방침과 판단이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합니다. 고작 암호 전술 운용 따위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소설을 읽어 보시면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의 움직임이 적시에 간파되면, 아군 수천 수만의 기동을 안전하게 하고, 그 효과는 고스란히 적군측의 피해로 전가됩니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내 생각이 상대에게 속속들이 읽히고 있다는 자각은 결정적인 사기 저하를 불러 옵니다. 사기가 떨어진 군대갸 적에게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가상의 주인공 토머스 제리코는 아직 서른도 안 된 신출내기 수학자입니다. 돌아가신 부친이 수학자였고(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1차 대전 격전지였던 이프르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의붓아버지와의 원활하지 못한 관계가 끼친 악영향 때문에, 약간 냉소적이면서도 소심한 성격을 지니게 된 그는, 조국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에 돌입하자 바로 차출되어 암호 해독반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영국 최고 명문 학부에서 일찍이 교수들에게 인정 받은 바 있고, 부친의 유지도 유지였거니와 무엇보다 제리코 본인이 수학에 살고 수학에 죽는 몰입형 인간입니다. 현대 수학은 워낙 복잡다기하게 발전하여, 적성을 빨리 찾아 전공을 특정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듭니다만, 이 시절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수학 전반을 사랑하고 능숙히 내용을 다루는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그가 강점을 드러내는 분야는 패턴 분석과 퍼즐입니다.

 

제리코는 원주율 파이가 테일러 급수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며, 이런 패턴의 미를 추상적인 수식 속에서 찾을 줄 아는 그의 직분을 두고 시인이나 화가, 작곡가의 소명이나 마찬가지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직관이 가능하면서, 수학을 놓고서만은 맹인이 되어 버리는 주변 사람들의 무지를 오랜 동안 지켜 봐 왔기에, 그로서는 더욱 평균적 인간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굳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대상을 놓고 그 가치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저열한 지성과 감성만 지녔을 뿐인 이들이, 오히려 우월한 이의 기준과 능력을 두고 "이상하다"는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법도 한 제리코입니다.

 

이런 제리코이지만, 국가에 대한 원칙적 충성심은 순결할 만큼 간직하는 명예로운 인간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내면서도, 고위 당국자들의 한심하고 무능하며 경멸스러운 작태를 봐 오면서 그런 초심이 사멸해 버리는 게 보통인데, 제리코는 군사 기밀의 먼 범주에 속하는 사항까지도 어머니에게 숨길 정도로 고지식한 애국자입니다. 이런 제리코이건만, 괴퍅하고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동료나 상관에게 언제나 오해를 사고, 혹시 적과 내통하지는 않는지, 사명감이 미적지근한 위인은 아닌지 의심받기가 일쑤입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핳 수 있는 결정적 임무를 수행하는 중인데도(그래서 비공식적으로 국왕과 수상에게 격려 전화까지 받은 요인인데도) 일개 대학 짐꾼에게까지 미덥지 못한 시선을 받고 구설수에 오르는 꼴이니,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뿐입니다.

 

이런 제리코라지만, 혈기가 넘쳐 흐르는 팔팔한 20대 사내로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마음이 격동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블래츨리로 오는 기차 객실 안에서 그는 옆에 앉은 아가씨가 신문 오락란의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 오는, 다소 황당한 체험을 합니다. 마치 제리코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 이런 문제는 당연히 그에게 물어야 한다는 듯, 초면의 여성, 게다가 미모의 여성이 자신에게 접근해 온다... 그러나 제리코는 그답게, 마치 기다렸다는 빛의 속도로 문제를 해결하고, 나에게 과분한 이런 여성과 말을 틀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합니다.

 

제리코를 이처럼 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수학 외에 처음으로 아름다운 다른 존재를 만나, 밤을 새워 그 연정에 설레게 만든 이는 클레어입니다. 제리코에게는 자신 존재의 본질을 이루다시피하는 암호 풀이의 미션이, 국가 존망의 문제와 맞물려 이제 필생의 과업으로 등장한 형편인데, 여기에 여태 경험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해 준 아가씨마저, 수수께끼 같은 경로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독일군의 암호도 풀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 놓은 "베아트리체"의 정체도 밝혀 내야 합니다. 어느 "에니그마"가 그 풀이로 인해 이 젊은이의 정력을 더 소진시키는지는 모르겠으나, 제리코는 점차 두 문제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달아 갑니다. 클레어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동시에 구하는 것임을, 우리 독자와 함께 알아 가는 그 긴장과 재미, 서스펜스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매력입니다.

 

암호학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한 책도 있고,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초보적 원리부터 자세히 풀어 놓은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인이 상업적 용도로 처음 발명했고, 이에 본질적 혁신을 가해서 난공불락의 체계를 구축한 전설의 암호 기계 에니그마에 대해, 평소에 잘 모르겠다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고 소설적 재미와 함께 그 원리를 깨칠 수도 있겠습니다. 왜 에니그마가 철벽의 시스템이었는지, 그런 시스템이 결국 다른 방향의 지혜에 의해 뚫릴 수밖에 없었는지, 로버트 해리스는 이보다 더 쉬울 수 없겠다 싶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의 줄기는 전쟁사 해설이나 암호학 강의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개성 강한 캐릭터들 사이의 애정, 갈등, 긴장, 대립, 화합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해리스가 언제나 자기 작품에서 보이는 솜씨지만, 비열한 악한은 독자의 공분을 일으키고, 때묻지 않은 영혼을 지닌 주인공은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을 부르게끔 제시되고 있습니다.

 

회전자 하나가 늘어나면 왜 암호 해독이 26배로 어려워지는가. 다름 아닌 키가 작동하여 종이에 찍어내는 알파벳의 수가 26자이기 때문이죠. 회전자의 수가 n이라면, 이를 통해 부호가 담고 있을 수 있는 메시지의 경우의 수는 26의 n제곱이 될 것입니다. 특정 키가 결코 자신을 타이핑할 수 없어, 오히려 문자열의 대조를 통해 정체를 똑바로 노출시킬 수 있다는 치명적 약점은, 가장 교묘한 위장이 가장 적나라한 폭로라는 심오한 역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은 그 이름만 간간히 거명될 뿐 무대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앨런 튜링이 주인공 제리코의 스승으로 그나마 대사 약간이 주어진 채 나오는데, 얼마 안 되는 비중으로나마 독자는, 왜 이 사람이 종전 후 잔인하게 영국 지배층으로부터 폐기 처분되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 군담 소설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처럼 "주군, 이 자를 건사 못하시겠거든 차라리 죽여버리십시오." 같은 거죠. 동성애 습벽 따위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겠고.. 중반 들어서 자주 이름이 나오는 되니츠는 해군 제독이고(소설 중에서는 "장성"이리고 합니다만...), 히틀러가 죽은 뒤 독일 국가 수반 지위를 계승한 거물입니다. 상처 입고 거칠어진, 조심스러운 외양 아래 한없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속모습을 감추고 있는, 클레어의 룸메이트 헤스터가 아마 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은 여성 캐릭터일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리코(그 이름도 승리의 상징이죠.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의  극적인 성취가 있었던 바로 그곳을 딴 이름)에게 크게 하나 배운 건, 앞으로 영자 신문에서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 때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가 하는 요령이었습니다. "문제를 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히 사랑해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유혜자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과 집착, 경계 넘어 하나됨과 범죄 사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떠오르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글린타우어가 내놓은 이 신작은, 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연은 희귀하고 이례적인데, 다만 겉으로 봐서는 흔한 남녀 사이의 사랑 다툼입니다. 두 당사자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그렇게 몰아가려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것은 사랑 다툼이 아니라, 당장 해소되고,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상 복구 되어야만 하는 끔찍한 사고"로 간주합니다. 이 두 사람 주위의 친구들은, 두 사람 모두를 존중하지만, 그 중 한 사람에 더 공감한 나머지, 그 사람의 관점, 즉 "사랑 싸움으로의 해석"에 동의하여, 다른 사람을 살살 달래면서 좋은 결말, 해피한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게 노련하고 애정 어린 조율을 시도합니다.

이게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럼, 내막, 속사정은 어떠할까요?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인 여성 유디트의 입장이 주로 반영된 설명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이어지고 있지만, 그건 유디트 개인의 "시선, 생각, 감정"일 뿐입니다.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사태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죠. 소설에서 어떤 인물이 주인공 위치라는 건 일종의 특권인데요. 우리 독자는 그게 누구의 것이든, 특권을 인정하는데 인색합니다. 주인공이 아주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 특권 부여가 용서가 되겠다 싶으면 모를까, 잘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누구 편을 들어 주면 안 되겠다며 신중해집니다.

유디트는 매력이 부족해서, 우리 독자가 함부로 손을 들어 주기 주저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삼십 대 중반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꽤 아름다운 편인가 봅니다. 한창 피부의 윤택과 광채가 꽃필 나이,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자연산 방향을 풍길 나이는 비록 지났지만, 그녀는 대신 성숙함과 정서적 안정이라는 면에서, 여인의 다른 매력을 뿜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나이를 먹었다고 여성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볼품 없이 시드는 이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생활력 있고 강단이 넘칩니다. 그럴다고 사람 안 가리고 되바라진 모습을 보이냐면, 절제할 줄도 압니다. 남자가 비록 도에 넘친 바람둥이인 사정이 있다고는 하나, 20대의 절정이라 할 육체적 매력을 풍기는 남성 크리스와 아무 무리 없이 뜨거운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일단 유디트 이 여성이 매력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자, 사정이 이런데, 유디트의 친구들도 그렇고, 그 남동생, 심지어 어머니(아버지는 아닙니다. 이상하게 아버지는, 이 딸의 인생에서 몇 발짝 거리를 두더군요)까지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유디트의 해석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유디트가 스토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 (이 역시 유디트의 주장일 뿐입니다) 한네스에게 더 공감하고 동조합니다. 너 왜 그러냐고, 너 아니라 어떤 여자도 반할 만한 남자고, 너 아니라 어떤 여자한테 가도 사랑받고 존경 받을 남자인데, 니가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 너한테 좀 넘쳐보이기까지도 하는 남자인데, 덥석 물 생각은 안 하고 왜 이상한 내숭, 혹은 신경 과민이냐고.




우리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디트 이분 너무하는 거 아냐? 하긴 성격이 저러니 저 나이를 먹도록 혼자였지.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데 이건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읽고 있는 제가 남자라서, 유디트가 저러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마땅히 해야 할 이해를 베푸는 데에 주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주위의 여성 한 분에게 물어 봤습니다만, 저하고 별로 생각이 다르지도 않더군요. 유디트, 흠, 이분을 이제 좀 편한 마음으로 비난해도 될 것 같네요.

그래도, 그래도... 한네스- 이분 나이도 지극히 먹은 사람입니다. 사십대 초반이니, 처신이 똑바르지 않으면 좋은 소리 못 듣을 처지입니다- 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여자가 저러는 거겠지. 여튼 여자가 마음 안 주고, 싫다는 의사 표시 분명히 했는데도 남자가 계속 그러면 그건 남자 잘못이지. 남자라면 더군다나 스토킹으로 오해 안 받도록 더 분명한 주의가 필요한데 말야. 뭐 이렇게 생각?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음, 한네스 씨가 일방적으로 유디트를 쫓아다닌 건 아닙니다, 선수답게 멋진 구애를 처음에 시도한 건 맞지만, 이후에는 쌍방 동의 하에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친지들에게 소개하는 과정도 있었고(이상한 건, 한네스 씨가 뚜렷한 사회적 지위, 재력이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유디트를 자신의 주변에 소개시키는 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유디트는 반대로, 자신의 주변 모든 이들, 진짜 한 사람도 삐놓지 않고 이 한네스를 소개 시켜 줬습니다), 한네스 씨가 유디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바도 없습니다. 유디트도, (독자를 향해) 말이 많은 주인공이 아니라서(어떤 소설을 보면 내면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여성이 자기 자아를 해부하듯 독자에게 간청해 가며 들려주는 것도 있죠. 그러나 유디트는 이런 케이스에 비하면 차라리 과묵하다 하겠습니다), 정확히 유디트가 어떤 계기로 한네스에게 마음을 끊었는지 알기가 힘듭니다. 겉으로 봐서는 둘이 베니스 여행(이것도 한네스 씨가 경비와 계획 모두를 마련한, 여자친구 유디트에의 선물이었죠)을 갔다 온 후, 무슨 변덕인지 유디트가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게 전부입니다.

여튼 여자가, 남자를 향해 싫다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했으면, 자기가 소년 청년도 아니고 중년 남성이라면 "알았다"며 분명히 발을 끊어야죠. 그런데 딱 한번(일단 드러나기로는), 한네스 씨는 유디트 주변에서 죽치고 앉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는 했습니다. 이건 안 되죠. 하지만 분명히 경고를 하자, 그는 물러납니다. 최소한, 문자를 발송하고 꽃을 선뭏하고 집 주변을 배회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타격을 받아 병원에 먼저 입원하기까지 하는 게 한네스 씨였습니다.

자, 이렇게 되니, 애정을 줄 듯하다가 매정하게 끊어버려 남자 하나 폐인 만든 유디트라며, 보는 이에 따라서는 여성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더군다나 신분도 버젓히 갖추고 매너도 좋다는 평판이 자자한데 말이죠. 게다가 한네스 씨는 능력도 있어서, 유디트의 실직 상태인 동생 알리에게 근사한 일거리를 마련해 주기까지 합니다. 이러니 예비 처남, 처남댁, 장모님까지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디서 니가 이런 재주로 이런 일등 사윗감을 데려왔냐고, 유디트의 어머니는 딸을 다시 보기까지 합니다.

유디트는 그러나 주변에서 자기 편을 안 들어 주고, 환상이든 현실이든 원치 않은 남자가 자기 인셍에 끼어들어와 나가질 않는다고 생각하자, 미치기 직전까지 갑니다. 나중에는 약간의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모르는 사람에게 길에서 말을 걸고 마구 울다가 실신하는 일이 벌어져,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합니다. 이쯤 되니 유디트 편을 드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독자도 여기에 이르러선 짜증이 슬슬 일기 시작합니다. 자기 감정에만 충실해 가지곤 주위에 민폐 끼치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여자가 신사 한 사람 범죄자 만드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여기까지는, 소설이 사태를 모호하게 몰고 갈 뿐 진상이 안 드러납니다. 독자는 자기 감정과 취향애 따라, 대채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마음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말입니다.

불과 세 쪽 정도를 남겨 놓고, 소설은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결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지어버립니다. 혹시 이러다 열린 결말 비슷하게 가지 않나 생각했던 독자에게는 천만 뜻밖으로, 열린 결말은커녕 "쾅!" 소리 내고 닫히는 철제 도어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면 불과 세 페이지를 남기고, 그간 숨겨져 왔던 진상이 밝혀지는 겁니다. 독자가 마음의 준비도 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내용 누설이 있으니. 혹시 소설을 읽을 마음이 있는 분은 주의하십시오)



유디트는 조명 인테리어 가게 사장입니다. 상당히 잘 안풀리던 외조부의 가게를 이어받아 어머니가 고전하던 사업을, 자신이 맡은 후로는 제법 좋은 태깔로 살려 놨습니다. 이 가게에는 비앙카라는 여직원을 두었는데, 스무 살도 안 된 여성답게 수다스럽고 행실이 좀 조신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의외로 생각이 깊고 세상 물정에 밝은 면이 있습니다. 유디트가 유능한 경영자이니까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잘 가려 뽑은 게죠. 이 비앙카가 큰 공을 세웁니다. 비앙카도 애가 똑똑하니까 자기하고 잘 맞는 남친 하나를 잡아 사귀고 있는데, 이 남친이 아니었으면 유디트 사장은 인생 망칠 뻔했습니다.

세상 일은 진정,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모릅니다. 유디트 주위의 가족, 친구들도 어제오늘 사회 생활을 시작한 풋내기가 아닌데, 어느 남자의 노련한 매너와 재력, 그럴듯한 분위기만 보고 모두 속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며칠 동안 밀착해서 함께  지내 보니, "왠지 이건 아니다!" 같은 여자의 육감으로, 한네스 씨의 본모습이 턱 하고 감이 왔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날 이후 유디트는 이 뭔가 모르게 꺼림칙한 존재를 자신의 인생에서 지우려 노력했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속 검은 한네스는 범죄의 경계를 애써 넘지 않으면서 또 한번의 수작을 부리려다 마침내 임자를 만난 거죠. 애정소설, 반전 스릴러라기보다, 진실이 무엇인지 인간의 진심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판단하기 힘든, 우리네 현대 사회의 실상을 풍자하는 우화 소설 같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엠마뉴엘 1 - 육체에 눈뜨다 에디션 D(desire) 7
엠마뉴엘 아산 지음, 문영훈 옮김 / 그책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엠마뉴엘은 고상한 취향과 평판 좋은 신분을 지닌 장을 남편으로 둔 유부녀입니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점이 많지만, 여튼 그녀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로나 스스로 판단하기로나 어엿한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필름에 주연으로 등장한 실비아 크리스텔을 두고, 6개 국어에 능통했다거나 IQ가 160이 넘었다거나 하는 소문을 들려주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일단 얼굴에서 그리 지적이라거나 야무진 인상이 풍기지 않고, 작품 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이 들어왔을 텐데 돈 관리를 제대로 뭇해 말년에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든가, 우리 나라 제작진에서 발주한 어느 에로 영화에 등장할 때(일단 그 시절의 한국 영화에, 월드스타가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부터가 그리 명예로운 일은 아니죠) 같이 출연한 배우가 "매우 지치고 늙은 모습이었다"고 증언한 바를 통해서도, 그리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리하고 총명한 여성은, 일단 사소한 일상에서도 행복을 찾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 똑똑한 분이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크리스텔의 이미지로 영원히 우리 뇌리에 남을 캐릭터 엠마뉴엘은, 그러나 이 원작 소설에서 생각 외로 적극적이고, 학문적 배경을 없잖이 갖춘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여성이 수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이 소설이 무대가 된 시대만 해도 일단 눈을 크게 뜨고 당사자를 다시 볼 만한 스펙이었음에 분명합니다. 한국이야 워낙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을 고르고, 학점 관리나 간신히 하여 졸업하는 풍토이므로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습니다만(제 주위에 어떤 분도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셨지만, 제가 여쭤 보면 하나도 모르시죠 ㅎㅎ).

 

이 원작 소설에서의 엠마뉴엘은 그저 졸업장 간판으로만 "수학 전공"을 내세우는 처지가 아니라, 실제로 대화나 사고 구조가 합리적이고 냉철한 일면을 지닌 여성이더군요. 영화에서는 이런 면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지만요. 나이 차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는 마리안느와 대화할 때, 둘 사이의 정신 세계가 얼마나 다른 컬러를 노출하는지 살펴 보십시오. 엠마뉴엘이 그래서 다른 이들과 시(詩), 문예, 그리고 설익은 채로나마 철학을 논할 때(여기서 그저 음담 수준으로 빠지지 않고 에로티시즘의 형이상학 쪽으로 간간히 -자주는 아니구요 - 방향을 트는 게 다 이런 지적인 배경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엠마뉴엘은 이제 인생에 있어 나른하고 설레는 봄을 맞이한,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이나 파피꽃처럼 싱싱한 청춘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마주치는 그 어떤 남성의 시선과 심작박동을 잠시라도 멎게 하는 아름다움을 지녔죠. 따분한 담론이 그녀의 터질 듯한, 그리고 방향 모를 아찔한 충동과 설렘을 붙잡아둘 수 없고,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곡선이 에워싼 그 몸이 자연스레 이끄는 바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장의 정부(그러나 장에게 부인이 있었다거나 한 사정이 아니라, 그저 혼외 관계라는 의미입니다)가 되었을 때, 나도 아이 아닌 여인이 되었다며 마냥 뿌듯해하던 그녀였습니다. 우리식 감정으로는 약간 이해가 안 되지만,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을 바꾼 후 "이제부터 미시즈 OOO라 불러주세요."라고 긍지 가득한 톤으로 조음하는 여성들을 서양 문예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음... 그러나 엠마뉴엘은 여기서 잠시, 독자들을 실망시키는 쪽으로 일탈하는 듯 보입니다(독자도 독자 나름이라 오히려 좋아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수영장에서 이뤄진 캐주얼한 분위기의 부인들 회합에서, 그녀는 선배들 격인 이들 유한 마담들과 잘 지내야만 했으나, 왠지 거리감, 위화감만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미국 출신의 보이시한 숙녀 "비(Bee)"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는데, 이 때문에 위태하나마 성숙한 여인의 길로 성큼 들어서려던 그녀는 같은 성(性)에 유혹되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갈등 아닌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비"는 곧바로 다가서긴 좀 어려운 분위기라, 때마침 나타나 준 소녀 마리안느를 대체물 삼아 소통의 갈증을 풉니다.

 

영화에서는 이 마리안느(너무 철이 없죠)가 엥마뉴엘을 연모하며(연모라기보다 그냥 육체적 이끌림입니다) 여러 번 구애를 시도하지만, 자기 스타일 아니다 싶은 데다 그저 어리기만 한 소녀 쪽에 큰 설렘이 안 생기는 엠마뉴엘로서는 매번 회피하는 걸로 묘사됩니다. 반면 이 소설에서 둘의 관계는 보다 복잡하고 알쏭달쏭한 모습인데요. 엠마뉴엘이 "여자 사이의 교감"에 대해 다소 옹호론 비슷한 조로 분위기를 잡자, 마리안느는 바로 이를 두고 허리를 자르듯 "철없는 애들이나 여자 맛을 찾는 것"이라며 상대의 코를 들어가게 합니다. 하긴 이래야, 많은 경험과 철이른 데뷔 덕에 세상이 뭔지 지긋한 관록(?)을 지녔으면서도, 그냥 짐승 수준으로 몸을 막 굴리지 않는 완성도 있는 캐릭터로서의 "마리안느"가 독자의 머리 안에 자리를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화에서의 마리안느는 솔직히 그냥 포르노 엑스트라 같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영화에서의 엠마뉴엘은 내내 수동적이고 언제 위험에 빠질 지 모르는 미숙한 아가씨(물론 유부녀지만)로 비치지만, 소설에서의 모습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비와 마침내 뜨거운 밤을 지낼 때에도, 자신보다 연상이고 사람 사이에서 더 부대껴 본 상대를 두고 제법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하는 모습입니다. 소통할 때 대화의 주도권을 연하자가 쥐는 건 그리 흔한 패턴이 아닌데, 소설에선 오히려 엠마뉴엘이 말을 더 많이 하는 듯하고, 심지어 행위에서도 상대 육체의 쾌감 포인트, 그리고 절정에 이르는 테크닉 몇을  가르쳐 주기까지 합니다("이거 너한테 배운 거야."라며 비가 엠마뉴엘을 크레딧해 주는 장면도 2권 후반에 나오죠). 영화에서도 이 소설에 묘사된 기법을 비에게 엠마뉴엘이 시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만, 내내 소극적인 태도만 보이던 엠마뉴엘이 갑자기 왜 저러나 하는 생각만 들었더랬는데요(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아마 생략된 장면에서 비가 가르처 줬겠지 짐작만 하고 넘어갔었습니다).  이 소설을 보니 그 장면도 납득이 됩니다. 감독은 자기가 읽은 텍스트, 그리고 머리 속에 구상한 씬을 독자가 당연히 알겠거니 하고 화면을 구성해서는 안 되는데요. 함축과 생략도 원칙과 룰이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자캉의 솜씨와 역량에 대해 심각한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리안느("마리안느"와 헷갈리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중년 여성이고, 별로 호감이 안 생기는 타락한 여성입니다)가 백작 부인인 줄은 소설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엠마뉴엘에 반한 이 여자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 마침내 실내 스쿼시장에서 한 게임한 후 챈스를 잡아 회포를 (일방적으로) 푸는 걸로 나오는데요. 영화를 보시면 엠마뉴엘의 상체에 잔뜩 밴 땀을 닦아 주다가 "아, 도저히 못 참겠다."라고나 말하듯(그런 대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무너져내리며 얼굴에 늙은 팔자주름을 잡고 자신의 육욕에 픽 굴복하는, 따라서 게임에서의 패자의 모습으로 이 늙은 아리안느가 묘사됩니다. 그러나 소설은 그렇지 않고, 주도권을 누가 쥐는지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첫 정사가 이뤄지고, 주고받는 대화도 우열이 쉽게 가름 안 되는 팽팽한 분위기입니다.

 

남자가 제외되는 가운데 여성들끼리의 폐쇄적인 애정 행각으로 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엠마뉴엘이나 그 주변의 여인들이나 모두 미성숙한 루저로 남았을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를 풍기면서, 엠마뉴엘의 정신적 성숙은 그 육체의 게임과 모험에 동반하여 설레는  속도로 나아갑니다. 이제 이 즈음에서, "성(性)에 대한 그 모든 의문과 불안의 해소는 내게 맡겨 다오!"를 모토삼아 외치고 다니는, 에로티시즘의 차르, 타이쿤이신 마리오 아저씨가 등장합니다. 성 담론과 실습에 관한 한 슈퍼 마리오의 존호(尊號)가 아깝지 않은  이 구루(guru)의 활약은 제2권에서 본격 펼쳐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엠마뉴엘 2 - 순결에 반하다 에디션 D(desire) 8
엠마뉴엘 아산 지음, 문영훈 옮김 / 그책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엠마뉴엘도 물론 2편이 나왔고, 심지어 나오지 말았어야 할 3, 4, 5, ... n편도 줄을 이어 등장했습니다만, 이 원작 소설과의 연계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부제가 같아 착각하기 쉽지만, 이 2권과 영화의 2편은 거의 아무 연결지점이 없다 해도 되겠습니다. 굳이  찾자면 지리적 배경으로 반환 전 홍콩이 잠시 등장한다 정도? 여기서 이제 단단한 실체로서 레귤러 서클을 형성한 엠마뉴엘, 마리오 들은 성(性)을 그 응결 매체로 삼아, 이론과 실천 양 면에서 항구적 소통과 열락을 꾀하는 연대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예전에 영화 버전을 봤을 때, 행위와 이론의 대가, 그랜드마스터라고 평판이 자자한 이 마리오님이 등장하실 때, 충격과 실망이란 게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극한의 혐오가 치밀어오를 만큼 늙고 사악한 얼굴에 잘 어울리는, 거대한 덩치를 지닌 호색한에 변태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배우의 등장이었는데요. 허연 백발을 머리에 이고 아래위 수트도 역겨운 익스트림 화이트로 코디를 한 그 늙은이가, 뼈밖에 안 남은 듯 가냘픈 엠마뉴엘을 덮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끔찍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에 제가 미리 상상한 그런 장면은 안 나타나더군요.

 

영화에서도, 이 원작 소설에 묘사된 대로, 타이 원주민 남성들(어리거나 혹은 나이 들었거나)에게 엠마뉴엘을 "단련"시키는 길을 선택한다든가, 혹은 금지된 향 정신성 물질을 흡입시킨다거나 하는 스토리라인이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소설과 원작이 거의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 면을 보자면, 마치 선승이 제자를 훈련시키듯, 막연하고 추상적인 명제를 툭툭 던지듯이 일방통행으로 이뤄지는 게 영화 버전이고, 이 소설에서의 장면은 그렇지는 않아서 상당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학생"인 엠마뉴엘이, 그 완성된 결론에 함께 기여하겠다는 듯 비중 있는 참여 행태를 보입니다.

 

소설에서의 마리오는 중년 남성이기는 하나, 짐작건대 남편 장보다 좀 더 나이가 든 중년, 아주 나이 든 태가 풍기지는 않는 관리가 잘된 중년으로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영화에서의 남편 장은 중년, 마리오는 노년, 소설에서의 장은 장년 남성, 마리오는 중년 정도로 설정된 것 같아요. 영화에서 마리오 역을 맡은 배우는 사실 당대 유럽 영화계에서 거물급 비중이었고,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작 <사티리콘>에서도 아주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마리오와 엠마뉴엘, 그리고 이제 이 둘을 구심점으로 형성된 여러 인사들의 "동아리"는, 소통의 와중 담론과 행위를 유기적으로 교차시켜 가며 마치 인도 굽타 시대의 바즈라야나 교단이 도를 찾아 수행이나 하듯 서로의 지적, 육적 갈증을 채우려 합니다. 우주의 진리는 수학적 언어로밖에 탐구할 수 없는 한계를 확인하듯, 성애의 큰 목표가 한 발을 담그고 있는 "생명 탄생과 존재의 비의"에 대해, 이들은 치열한 논쟁을 펼칩니다. "우주의 생명체가 먼 광년의 거리에서 우리를 지켜 볼 때, 아무 깊은 근원과 내력을 지니지 못한, 긴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 박제된 미물이나 보듯 그렇게 우릴 관찰할 것이다."는 대목에서, 이들이 말초적 쾌감에 존재를 매몰하지 않고 의식 있는 고등생명체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의 대부분은 따분한 형이상학 담론이 아닌, 각종 성희(性戲)의 전위적 경연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독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이 2권까지를 펼쳐 들었든 간에 실망할 일은 그닥 없겠네요. 지금 세상에도 조신한 숙녀라면 그 생긴 모습만 봑도 소스라칠 것 같은 "도구"가, 근 한 세기 전에 쓰여진 이 소설 중 아리안느와 엠마뉴엘이 심도 있게 즐기는 행위에서 큰 도움을 주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안 나온 건 당연하구요. 영화와 소설이 이런 점에서도 큰 차이가 나는데, 스토리라인에서 한두 번 정도 등장하다 후반에 자취를 감추는 것과 달리, 소설에서는 낭비된 캐릭터 없이, 엠마뉴엘의 각기 다른 욕구를 특화하여 채워 주는 역할로 고루, 그리고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활용되고 있습니다.

 

미술가 안나마리아는 영화에서는 전혀 안 나오는 인물인데, 이 소설에서는 특히 2권에서 큰 비중으로 등장하여, 예컨대 누구의 pubic hair가 븍극 스라소니의 그것처럼 눈부시다니 뭐니를 평가하고 있습니다(세상에,.... 북극 스라소니는커녕 코카서스 인종의 그것도 어디 맨눈으로 구경읗 해 봤어야... ). 사자갈기 같은 머리를 한(갈기는 숫사자에게만 있습니다만...) 소녀 메르베와의 대화에선, 소설이 주된 장소적 배경으로 삼는 타이의  분위기와 밀착한, 불교 승려들의 모습이 잠시 포착됩니다. "저들이 관심을 두는 건 주로 숫처녀 쪽이에요." 이 말은 아주 역설적인데, 대화는 누가 봐도 아직 처녀성을 간직했을 여인들을 두고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못 하는 엠마뉴엘에게 메르베는 제2의 펀치를 날립니다. "즉, 저들은 당신 같은 타입을 좋아하죠."

 

여기서 이 2부의 부제 "안티버진"의 의미가 어느 정도 해명되기 시작합니다. 순결이니 처녀니 하는 것의 이데아적 의미는, 어떤 육체적 조건이나 상태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어떤 영혼이 충분한 경험을 하고서도 그 체험의 의의, 영향, 혹은 "맛"이  무엇인지 넉넉한 이해를 하지 못할 때, 그 영혼은 아직 위험한 "처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혹은 반대로, 아직 신체의 꽃잎이 채 떨어지지 않은 단계라 해도, 육체의 쾌감이 무엇인지 감도 못 잡고 있거나. 영혼의 타락이 일정 수위를 넘어버렸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처녀를 잂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엠마누엘의 경우, 타고난 순수, 무구함의 정도가 워낙 깊다 보니, 어지간한 체험으로도 그 처녀의 보호막을 아직 잃지 못했고, 이는 순결의 보존으로 긍정적인 의미라기보다 오히려 육적 갈증으로 인한 타락으로 치달을 위험마저 내포하기에, 마리오나 기타 "성숙한 친구들"은 정신적 트레이닝을 통해 그녀가 빨리 "이 끈덕지고 위험한 처녀 딱지"를 떼게 도와 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2권의 "안티버진, 순결에 반하다"의 참된 함의가 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