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드나잇 저널 -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혼조 마사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극사실주의"라고 작품 성격이 규정되긴 했지만 섬뜩한 묘사가 난무한다거나 해당 직업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든가 하는 식의 소설은 아닙니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포인트에 주목하여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데요. 1) 신문사(간혹 끼어드는 잡지사까지) 기자들과 경찰관들 일부의 고달프면서도 보람 가득한 직업 실정이 어떤지 제대로 엿볼 수 있는 스토리, 2) 7년 전에 벌어져 전 일본을 들썩이게 했던(물론 픽션상으로)아동 납치, 성폭행 사건의 진범과 진상을 추적하는 미스테리물로서의 재미, 어떤 독자라도 이 두 가지 매력 포인트를 치밀하게 부각시킨 작가의 솜씨에 끌려 두터운 볼륨을 끝까지, 단시간에 읽어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특히 나중에 기자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별 잔인하거나 말초적인 부분 없습니다)이나 대학생 들이 읽으면 직업관 설정에 많은 도움이 될 만큼 해당 직역에 대한 실감나는 구현이 이뤄지며, 어느 정도는 다분히 이상화, 모델화한 설정이니만치 현직 언론인들이 읽어도 많은 공감을 부를 것 같습니다(아니면 초심의 각성이라든가).
일본 장편 소설들이 흔히 그렇지만 긴 성명을 어떤 때는 성씨, 어떤 때는 이름, 어떤 때는 별명으로 부르기 때문에 독자들은 한참 읽어가다 누가 누군지 헷갈려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책의 맨앞에 인물 관계도를 정리해 두었는데, 특히 비중이 높은 다섯 명 이름 앞에다 별표를 쳐 둔 센스도 돋보였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과연 소설(국적이 무엇이든)에 몰입을 했다면 기억력이 좋든 나쁘든 사람 이름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책을 한달음에 마치지 못할 사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특히 이 소설은 몇 사람(기자나 형사)들의 이름이 작품 분위기의 이해나 향후 전개에 주요 단서 구실을 할 때가 종종 있기에, 성명을 정확히 기억해 가며 읽을 필요가 더 대두되는 성격입니다.
제목이 잘 말해주듯 이 책은 특히 신문기자, 그 중에서도 지방에 주재하며 수시로 중앙총국과 소통하여 특종을 뽑아내야만 하는 본분을 지닌 기자들의 온갖 애환을 극적으로 잘 버무려낸 수작입니다. 기자라는 직종이 그저 낭만이나 명예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실을 밝히길 꺼리는 각종 인간 군상을 일일이 상대하고 사귀어 두고 비위를 맞춰 가며 말문을 틔워야 하는 온갖 수고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소설에도 나오듯 멋모르고 달려들었다가 몇 개월만에 그만두며 좌절하는 젊은 인력들이 많은 형편이죠. 뿐만아니라 하급직은 많이 뽑는 반면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간부나 관리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실적이 좋고 과오가 적은 소수 능력자만이 해당 신문사에 계속 봉직할 수 있기에 사내에서도 협력 못지 않게 경쟁이 치열합니다(경쟁이 타사 기자들과만 이뤄지는 게 아니죠). 또한, 본인이 능력이 있어도 사내 정치에 능하지 못하거나 가망 없는 라인에 몸담았다가는 억울하게 좌천, 퇴사하는 경우도 흔합니다(이 작품에도 그런 대표적인 캐릭터가 하나 나오고, 다만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별 쓰임새 없이 퇴장해서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하긴 이 세 가지 사항은 비단 신문기자뿐 아니라, 어느 회사나 조직, 직장에서건 공통된 사정이요 애환이기도 하죠.
한국 사회는 특히 일본과 여러 정서라든가 사회적 위계 구조, 작동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잘 쓰여진 기업 소설은 한국의 사정에 그대로 대입하고 읽어도 큰 공감과 시사점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비록 신문사를 소재로 삼았지만 직장 내 경쟁과 암투, 그리고 동료애, 직업 윤리와 명예욕, 출세와 도덕률 사이에서 고뇌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분투와 갈등상을 이 작품 속에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직장인이라도 피부에 와 닿는 깨우침이 있을 겁니다. 현 국회의원이자 전 대통령후보였던 정동영 MBC 앵커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부에 갓 배치되어 온갖 험한 숙식 환경을 거치며 일을 처음 배워나가던 고생담을 전에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걸 은어로 사츠마와리라고 하는데(정 앵커 본인이 직접 이 말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신참 사츠마와리들과 그들을 이끌고 보살피며 때로는 호된 훈육도 가하는 고참 기자들 사이의 미도 높은 소통이 또한 볼거리입니다. 소설에 저 말이 한 번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원문을 매우 정성들여 꼼꼼히 옮긴 역자분의 스타일로 보아 아마 원작에도 등장 안 하지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 소설의 중심 축을 잡는 인물은 세기구치 고타로라고 봅니다. 이 사람은 진실 보도 하나만을 직업관 겸 인생의 모토로 삼고, 남들보다 앞선 특종을 낚기 위해 상관들에 대한 거침없는 반항, 후배들에 대한 냉혹한 다그침과 질책 등으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배울 건 많아도) 주변에 인맥이 안 쌓이는 이단아, 아웃사이더로 아예 직장에서 찍힌 인물입니다. 게다가 치명적인 건, 의욕이 앞서 사실 확인을 제대로 않고 기사를 냈다가 오보를 내어, 신문사의 명예(가뜩이나 경쟁사에 비해 사세가 위축된 판에)를 실추시키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안긴 "전과"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일단 능력 하나는 인정하기에 아주 짜르지는 않고 지방을 전전시키며 붙여는 주는 편이지만, 먹은 나이와 경력, 능력에 걸맞은 승진은 꿈도 못 꿀 판이며, 심지어 그와 가깝다고 판단되는 다른 기자들도 왕따나 멸시를 당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근성과 확고한 소명의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후배들, 특히 마쓰모토 히로후미("마쓰히로"로 약칭, 별칭되며 사내에 마쓰모토라는 다른 성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이름은 특히 잘 알아두어야 하는 게, 중간 쯤에 히로후미라는 이름을 가진 경찰 한 사람이 비중 있게 또 등장하기 때문이죠)와 후지세 유리(여성입니다)는 남들 눈을 피해가며 선배이자 상관인 그와 밀접한 교유를 이루고, (소설 결말에 가서)드디어 주목받을 만한 성과를 거둡니다.
집요한 근성과 굵직한 관록으로 세기구치와 반대편에서 대칭을 이룰 만한 또 한 명의 기자가 니카이도 미노루입니다(이 사람은 성씨만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노루"라는 이름은 작중 기능도 별로 없고 표기도 거의 안 됩니다). 소설 중간쯤에, 이 사람과, 기자들을 매우 싫어하는 과묵한 관리관(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일본 특유의 경찰 계급이죠) 야마가미 미쓰야키(이 사람도 성씨만 기억하면 됩니다)와의 대작(對酌) 장면이 특히 볼만합니다. 저는 이분 집에, 그 아들이 쓴다는 글러브가 혹시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게 풀리지는 않더군요. 그럼 괜히 낭비된 설정 아닌가, 그보다는 세부적인 장면 묘사에도 이처럼 공을 들여 실감을 높인 작가 혼조 마사토의 정성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더 규모와 영향력이 큰 경쟁지에서 근무하다 승진 가망이 낮아지자 차라리 현장에서 더 뛸 여지나 생길 현재의 <주오신문>으로 전직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전 직장의 후배(자기가 키워 줬던)와 분위기 더럽게 충돌을 빚는 장면이 후반에 나오므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합니다만 기자들은 사소한 범법(어폐가 있긴 합니다만)이나 과오를 놓고 경찰들로부터 적잖은 배려를 받는 편입니다. 한 30년 전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신입기자로 채용 절차가 완료되자마자 경찰서에서 자동으로 운전면허가 발급되어 주어지기도 했는데 뭐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일본이나 한국이나 기자-경찰은 긴장 관계에 놓이면서도 또 묘한 공생의 처지를 이어가는 게 사실이죠. 이 책에서도 니카이도가 주자 위반 딱지를 떼인 후 윗선을 만나 잘 해결(?)한다거나 하는 장면이 나오고, 다만 두번째로 딱지를 떼인 후에는 "더 이상 경찰측에 빚을 지지 않기 위해(오프 더 레코드 조건으로 들은 정보를 바로 기사화할 작정)" 말없이 한국 돈으로 십만 원이 넘는 범칙극을 무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기자들이 취재원으로부터 얻은 소중한 정보라고 해도, 그걸 그자리에서 수첩에 받아적는다든가 하지 못할 사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세기구치는 간신히 손바닥에 적은 후 행여 지워질까 염려하여 후배에게 운전을 대신 맡기는 장면도 나오고, 니카이도 같은 이는 가뜩이나 술이 약한 판에 몇 잔 들어간 상태에서 결정적인 정보를 듣고 이를 필사적으로 외우려고 발버둥치는 장면 같은 게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관리관의 전번을 외워야 하는데 6453이 잘 안 외워져 "양끝의 두 숫자와 가운데 두 숫자의 합이 각각 9"라는 힌트로 기어이 기억을 살리고 마는 대목이 웃겼는데요. 만약 저같으면 앞의 64만 외우고, 뒤의 숫자는 11을 뺀다(1씩이 부족하다)처럼 해서 더 쉽게 떠올렸을 것 같았습니다.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또 한명의 중요 인물이 후지세 유리입니다. 마지막에 "전 그저 신문기자라는 직업과 결혼한 셈치겠어요."라는 다소 느끼한 대사를 치기도 하지만, 그녀야말로 의리 있고 직업 윤리관도 강하며 대인관계도 원만하면서 근성도 가득한, 모범적인 직장 여성의 대표처럼 묘사됩니다. 조금 이상한 게 마마보이 같은 광고맨(고소득자에 직장 내 전망도 좋은 고스펙 신랑감으로 세팅)의 애프터를 거절하면서, 이 거절이 자기 인생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아닐지 고민하는 대목이 처음에 나오는데, 이후에 이 부분 관련 사연이 전혀 안 나와서입니다(결국 신문기자로 한 껀 올리고 승진도 해서 잘풀린다는 결말인데). 키도 보통이고 피부 상태도 좋지 않은 걸로 나오지만 스타일이 좋아서 화려한 도심에 거주할 만한 자격이 있는(!) 외모인 듯합니다. 경비 절감 때문에 전철 등을 타고다니는 모습이, 예전에 제가 알던 머니투데이 어느 여기자와도 닮아서 특히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네요.
일본문학 번역의 달인의 솜씨라 술술 잘 읽히지만, 예를 들어 "속보" 같은 말은 이 소설 전체에 두어 번 등장하는데, 우리가 아는 速報가 아니라 "후속 보도"라는 뜻의 續報입니다. 이 말도 국어사전에 있긴 한데 이건 한자로 따로 써 주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겠습니다. "타지"라는 말도 여러 번 나오는데 익숙한 "他地"가 아니라 경쟁지라는 뜻의 "他紙"입니다. 他誌라고 쓰면 또 경쟁 잡지라는 뜻이 되는데, 이런 게 한국어로만 쓰면 뜻이 분간이 잘 안 됩니다. 서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물 관계도를 예쁘게 정리해 준 것도 이 책 편집의 큰 매력이며, 그 앞 페이지에는 일본 전도(개략)와 도쿄 도 인근의 약도가 나와 있어서 지명 파악에도 도움이 되었고, 소설 읽으면서 새삼 일본 지리 공부하는 셈 치고 열심히 앞뒤를 번갈아 펼친 것도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본문 중 일본 문화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한 어휘에 일일이 역주를 달아 준 것도 독자를 위한 배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