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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 체 게바라
후안 마르틴 게바라 & 아르멜 뱅상 지음, 민혜련 옮김 / 홍익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는 80년대 학번 세대 어르신들 중심으로 이른바 "(좁은 의미의)사회과학 서적"에서 자주 등장하던 걸로 이 위인이 처음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그 앞세대는 잘 모른다는 뜻). 저는 고 정운영 교수님의 여러 수상록을 읽고 이런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혁명가에 대해 처음 알았고(그 짧은 글이 워낙 잘 쓰여진 명문이라 책 몇 권 분량보다도 머리에 남는 게 더 많았네요), 이보다 뒤엔 모 출판사에서 나온 <체 게바라 평전>이 몇 달 몇 년에 걸쳐 애독되는 통에 이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겠죠.
이 책은 (페이퍼백이지만) 양장본인 그 책과 사이즈가 비슷해서, 서가에 나란히 꽂아 놓으면 좋은 자매편(형제편? 그런 말은 없지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동생이자 체 게바라를 가장 외모상으로, 성격 면에서 빼닮았다고 평가 받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 막내 남동생 후안 마르틴 게바라 씨에 의해 구술되고, 저널리스트 아르멜 뱅상에 의해 기록된, 동생의 눈으로 본 "형 체 게바라"에 대한 회고담입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생에 대해 혈육으로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지만, 그의 일생을 연대기처럼 추적한 내용은 아니고, 동생으로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맏형에 대한 여러 기억들을 술회한 형식이더군요. 아무래도 가족 입장에서 바라본 혁명가의 초상이니만치, 그 부모(당연히 저자의 부모이기도 한 분들)나 친척들, 다른 동기(형과 누나 등)에 대한 추억과 행적, 그리고 형처럼 혁명가까지는 아니라도 치열한 민주화운동가로서 (대체로) 살아 온 자신(즉 저자 후안 마르틴 게바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위대한 혁명가는 심지어 지지자 뿐 아니라 만인의 존경을 받는 단계에서도, 인간로서의 가감 없는 본 모습이 아닌 "박제화, 우상화한 왜곡된 표상"으로 오해받곤 하는데 어쩌면 이건 어느 정도 그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지자들의 열광과 연호 속에서도 이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현상이겠는데요. 제가 읽어 보니 저자 후안 마르틴 게바라 씨는 특히 이 점을 매우 거북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떠올리는 체 게바라는 다정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열정에 넘치면서도, 사람을 그저 연대와 우정과 공감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어떤 경우에도 수단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정통 스탠스의 맑시스트나 공산주의자와도 거리가 멀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비난할 때면 특히 그의 고모가 마음아파했다고 합니다. (서구어에서 공산주의자나 무신론자 등의 어휘에는, 특정 정치적 입장을 기계적으로 지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감정적, 윤리적 비난의 뉘앙스가 때로 개입합니다. 따라서 상당 경우 그 자체로 욕이 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죠) 이런 멋진 남자들이 종종 보이는 장난스러운 태도지만, 그는 그의 고모에게 편지를 쓸 때 일부러 맺음말에 "공산주의자" 등을 자칭하는 유머로 상황에 초탈한 모습도 보였다고 하는군요.
이 책에는 장폴 사르트르가 쿠바에서 체 등의 혁명가 무리와 직접 만난 사건에 대해 저자(동생 후안 마르틴 게바라)의 육성으로 회고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후 사르트르는 어느 글에서 "내가 만난 가장 완벽한 사람"으로 체에 대해 평가하곤 하는데, 저는 이 표현을 처음 접한 게 (위에 언급한) 정운영 교수의 에세이에서였습니다. 당시에는 좀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혁명가로서의 불 같은 열정이나 민중과 세계에 대한 한없는 신뢰, 사랑 외에도, (이 책에서 지적하는 바대로) 엄청난 학식과 지성, 그리고 잘생긴 외모 등의 매력에 함께 압도된 느낌을 그렇게 드러낸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사실 사르트르는 추남이었죠). 이건 마치 소설가 공지영이 조국 교수를 두고 "가장 완벽한 남자"라고 표현한 맥락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취소하겠습니다)
몽상가, 방랑자 기질이 강하고 남자로서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의 개성은 아마 그의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형질 같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모친은 아르헨티나에서 손 꼽는 명문가였는데, 비천한 출신의 청년과 결혼한다는 게 어르신들의 승인을 얻을 리가 없었지만 열정에 따른 확신으로 조신한 숙녀 셀리아는 이 청년을 배필로 맞아들입니다. 여튼 장남인 에르네스토는 의사로, 차남인 로베르토는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게 했으니 자식 농사는 성공적으로 지은 셈인데요. 문제는 그 장남, 가장 잘나고 똑똑하고 (이 점이 중요합니다) 어느 무리 속에 세워 놓아도 자연스럽게 리더로 부각되는 타고난 인물이었던 에르네스토는, 의사로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부모가 기대하는 중상류층의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 험난한 가시밭길을 자청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차남 로베르토는 그의 형과 달리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성향이었지만 주위에서 하도 "체"의 동생이라며 핍박하는 통에 자연스럽게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답니다. 책에는 언제나 "최고로 잘난" 형의 그늘에 가려 열등의식과 질투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로베르토의 고뇌에 대해서도 언급이 나옵니다.
앞에서 체 게바라가 정통파 맑시스트나 공산주의자와도 거리가 멀다고 했지만, 특히 주목할 건 1917년 10월 혁명 즈음에 그가 레닌 일파를 향해서도 호된 비판을 내뱉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양키 제국주의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인민을 착취 대상으로 보는 괴물들이다." 물론 이런 태도가 몽상가, 방랑자, 대책없는 이상주의자로서 오히려 그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혁명의 기술적 달성에 집착한 나머지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을 동일시했다거나, 기계적 유물론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 이념 속에서 인간성을 고사시켰다거나 하는 점은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하겠고, 게바라의 저런 태도는 "대체 무엇이 본질인지" 혁명가로서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 피델 카스트로 역시 그저 정의감 넘치는 대학생, 청년이었을 뿐 공산주의자와는 처음에 무관했다는 유력한 시각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겠네요.
체 게바라는 이상에만 사로잡혀 현실을 도외시하는 몽상가이기만 했는가? 저는 이 점을 평가할 때 그가 실무적 측면, 즉 능수능란한 정치적 처세술이라든가, 전시라면 야전에서 그가 얼마나 유효하고 영리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책에는 저자가 투옥되었을 때 갈티에리 장군 체제의 어느 대령이 다가와서 "네가 체의 동생이냐?"를 물은 후, (분명히 철천지 원수 진영인데도) 그가 전략적 천재였음을 입에 침에 마르게 감탄한 후, 볼리비아에서 그가 맞이한 최후에 앞서 벌어진 전투에서 "실수로 진지를 잘못 택한 점"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겼어야 할 전투를 지고 말았다는 데 대해, "같은 야전사령관"으로서 애통해했다는 건데, 이처럼 적으로부터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그의 자질이야말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유시민씨의 책이라든가 여러 다른 자료에는 쿠바 혁명 완수 직후 피델 측과 사이가 벌어져, 위대한 혁명을 아름다운 종적으로 길이 간직하기 위해 체 게바라가 알아서 험지로 떠났다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진짜 혁명가는 체 게바라요, 피델은 결국 탐욕스러운 현실 정치인이자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관점에 대해 정면 반박하며, 피델과 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는 동지이자 친구였다고 강조하는군요. 물론 동생(더군다나 형을 그토록이나 닮고 또 존경했던 동생)이었다고 해도 모든 문제에 대해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며, 이는 체 게바라 사망 당시 카스트로가 보였던 반응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셔 따져야 하겠습니다. "카스트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드물지 않은 이름인데, 체 게바라의 증조할머니 가문 성씨가 "카스트로"이기도 합니다. 체 게바라가 어렸을 때 폐렴에 걸려 이후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 천식 발작이 비롯했다는 말도 동생 입으로 들으니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더군요.
체 게바라의 최후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증언은, 특히 그 화가의 해당 작품이나 십자가 처형을 담은 다른 작품을 보면 많이 공감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체 게바라나 대의와 박애와 평화를 위해 한 몸 돌보지 않고 사심 없이 투쟁한 이들이며, 본성이 참으로 선한 이들이었다는 점은 매우 비슷합니다. 이념과 사상은 다를 수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에서 남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가꿀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대의에는 누구나 찬성할 것이며, 체 게바라는 이런 이유에서 모든 명분과 이상의 최소공배수 혹은 최대공약수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