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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과 세계시민 - 세계시민 되기 ㅣ 시민교육 연구총서 4
이동수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2월
평점 :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입니다. 집안이나 출신 지역,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 단체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나를 바르게 파악하고 이웃과 타인에 대해 공정하고 열린 시각을 갖는 마음 자세는, 특히 요즘처럼 "관용과 화합, 다문화, 소수자 존중"의
가치가 강조되는 세상에서 특히 필요합니다. 이런 올바른 세계관, 혹은 정치관은 이르면 이른 단계에서 함양될수록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앞에서 말한 대로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며, 올바른 초심도 인생에서 다양한 고비를 맞아감에 따라 흔들리고
퇴색하기가 또한 일쑤입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석학들이 정연하고 진중한 언어로 가르쳐 주시는, "세계 시민으로서 흔들림 없는
도덕성과 참여, 비판 정신"에 대한 바른 시야를 수시로 익히고 이를 실천에 옮김이란 더욱 보람 있고 의미 깊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대중 상대 교양 강연이나, 혹은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을 위한 코스에 교재로 권하기 안성맞춤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숙독해 보니, 세계 시민으로서 부끄럼없이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 함양되어야 할
내용이라는 게, 어쩌면 또 이처럼이나 깊이 있고 보편타당한 지식과 관점을 담고 있나 싶어 절로 희열과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 책 한
권에 법률, 정치, 경제, 세계사, 종교 등 인간사 문명의 천양만태를 압축적으로 요약, 진단, 규정하는 도도한 담론이 모두 담겨
있는 듯, 지식과 소양에 목마른 독자에게 적시적소의 일깨움을 던져 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계 시민"이 되려면 이처럼이나 포괄적이고 섬세한 교양을 체득해야 하며, 또 올바른 관점에서 잘 정제된 지식이야말로 바른 판단과 행동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도 재삼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의 주옥 같은 논문을 높은 안목으로 잘 편집하여 대중에게 전달해 주시는, 경희대 이동수 교수님께서
역시 이 책에도 책임 편집의 소임을 맡으셨더군요. 교수님 본인의 논문은 책머리에 놓인 <환경위기와 생태>입니다. 첫
글이 환경 관련 주제라(또 책의 컨셉이 시민 교육 쪽이라) 혹시 이어지는 다른 논문도 모두 비슷한 주제 아닐까 짐작하신다면 그건
틀렸습니다. 앞서 말했듯 환경, 생태 토픽을 넘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21세기 현대인의 모든 삶의 양상을 주제로 다 아우르고 있으니, 혹 어린 자녀(배움에의 의욕이 왕성한)에게 멋진 교양서 한 권을 딱 원 볼륨으로 선물하고 싶다면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르셔도 됩니다.
환경과 생태
주제가 권두에 배치된 건, 인간이 육신과 건강을 초월하여 정신적 깨달음만으로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석가, 예수, 공자라 한들 오염되고 황폐화한 세상에서 호흡과 영양 섭취라는 기초 생존
활동이 위협받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19세기 산업 혁명이 본격화한 이래 인류는 지속적으로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의 공포에
시달려 왔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우려스러운 추세는 문제의 해결을 더욱
방해하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기후 협약을 무효화하겠다며, 건전한 의식을 지닌 "세계
시민"들을 더욱 걱정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형편이죠.
그렇다고
"성장"의 과제, 목표를 전면 도외시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을 줄이고 환경 친화적인 심성을 회복하는 게
옳습니다만, 한번 흥청망청한 소비 행태에 길이 든 인간의 습성이 금세 청빈과 절제로 회귀하기란 힘들죠. 교수님께서는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 환경담론의 진보적 시각을 대변한다 할 "녹색성장론"의 의의와 연혁을 되짚습니다. 저는 길고 긴 발자취에의
회고를 기대했으나 의외로 최근(1999년) 시점에 그 유명한 폴 에킨스의 저술이 이 입장의 시발점을 이뤘다는 걸 책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과 합의를 이룬 "녹색성장론"의 내용과 방침, 비전에 대해 정확하고 알기 쉬운 소개가 이뤄져 있으므로, 실천적으로나 교양의 목적으로나 꼭 일독이 필요한 논문입니다.
논문에는 이 외에도 생태근대화론(주로 공적 섹터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는), 그에 대한 네오맑시스트의 반응, 또 이른바 "지속 가능 발전론"
등 다양한 시각과 담론들이 설명되었으므로, 환경과 생태의 과제가 오늘날 어느 지점에서 논의되는지 총체척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익한 읽을거리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참여하는 시민, 깨인 의식의 유권자로서 이 환경 이슈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미비하다면 어디
가서 무슨 말을 꺼낼 초보적 자격조차 못 갖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주제는 김윤철 교수님의 <글로벌 경제와 불평등> 한 편뿐입니다만 이 논문이 현재 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상시화한 경제
위기", 이른바 신자유주의 물결에 내재한 근본 모순, 그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국제 NGO 주도의 신 거버넌스
등 굵직하고 확장성 높은 논의가 펼쳐지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한 권(한 편)을 읽고 만 가지 아이디어와 각성을 부를 만한
명문입니다. 확실히, 한국에서도 박세일 교수(지난 2017 .1월에 타계)가 YS 정부에서 야심차게 내 건 "세계화" 바람이 온
나라를 휩쓸 때만 해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세계인 모두의 욕망과 복리를 만족, 증진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게
근 이십여 년이 지나, 실물 경제 규모의 몇 배를 웃도는 금융 경제의 투기 바람이 각국의 생산- 소비 기제 펀더멘털을
위협하고(논문의 기조는, 결국 세계화 때문에 경제 위기의 공포로부터 세계가 안전할 날이 없게 되었다는 쪽입니다), 일반 대중들도
막연하게나마 세계화의 허상을 깨닫고는 엉뚱하게도 제노포비아 같은 국수주의, 폐쇄주의로 퇴행했다는 진단을 내어 놓으십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님은, 1990년대에 큰 인기를 모았으나(한국에서도 대단한 주목을 받았죠. 특히 계간잡지 창비에는 거의 매호 그의
글이 번역되어 실렸습니다) 현재는 거의 잊혀진 편인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의 "세계체제론"이 다시 원용됩니다. 과거 사회과학 독서 열풍에 향수를 지닌 특정 세대분들이 특히 눈길이 끌릴 만한 대목입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이현휘 교수님의 <주권과 국가이성>이었습니다. 교수님은 박승관 서울대 교수의 발언을
제사(題辭)로 삼아, 전쟁과 갈등과 증오와 알력이 그칠 날이 없는 국제 정치 현실에서, 오랜 이념적 기반이자 모든 외교활동의
기초가 될 주권론의 허실이 무엇인지 다시 분석, 회고, 통찰하고 계십니다. 공교롭게도 C V 웨지우드의 명저 <30년
전쟁>을 한국어로 완역한 남경태 씨가 3년 전 타계하기도 했는데요("공교롭다"는 말을 쓴 건, 대체 1648 베스트팔렌
체제의 본질과 실상, 한계가 무엇인지 새삼 주목하게 되는 요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해서입니다. 저런 묵직한 저서가 시장성을 고려할 때
번역, 출판이 잘 안 되는 게 한국의 실정이기도 한데 말이죠). 이 논문에서도 웨지우드의 그 책(외에, 30년 전쟁을 분석한
다른 고전들까지)이 수시로 인용되며, 대체 주권이 무엇인지, 주권 담론에 기반한 근대형 외교 시스템은 과연 어디까지 제 기능을
유지할지에 대해 살벌하고 심각하기까지 한 실증 분석의 틀을 적용합니다.
작년
하반기, 중국이 남중국해 일원의 "영해성"을 강변하며, "이는 우리의 '주권 사항이니 미국이나 '자칭 국제 단체(국제사법재판소를
가리킵니다)'는 개입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정치, 특히 미-중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희한하게도
친중 성향의 포퓰리스트 두테르테가 필리핀(영해 분쟁 당사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야무야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쪽이건, 그에 대항하려는 쪽이건 이 "주권"이라는 (무형의)이념에 이처럼이나 의존한다는 사실부터가, 본의의 탐구이건 발전적 해체적 재정립이건 간에 이론적 천착이 시급함을 잘 알려 준다 하겠습니다.
이 논문은 특히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그 연혁과 논의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데, 그 실질적 기원은 30년 전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신앙의 동지가 아닌
자국 이익의 더 확실한 담보자가 누구인지를 계산하여, 신교 연합국의 손을 들어준 프랑스 왕국의 실력자 리슐리외 추기경(이자
재상)의 원대한 정치적 국량에 대해 특히 상술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종교"나 명분. 혹은 특정 사안(왕실 가문 영토의
상속, 병합 등)을 놓고 벌어지는 즉흥적 이합집산이 유럽 국제 정치의 한계였는데, 리슐리외의 이 기회주의적 처신(이자
정책)이야말로 "국가"를 독립된 이해관계의 주체로 정립하고, 아울러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염치도 양심도 돌볼 것 없이 철저히 실리와
계산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외교의 생리를 최초 규정했다는 의의를 아주 선명하게 밝힙니다. 이성의 반대라면 "감정"이겠는데, 이
감정적 동기에는 "같은 구교국이니 구교국 편을 들어주자"라든가, "특정 왕실의 전쟁 동기가 더 비인도적이므로 그를 징치하자" 같은
게 포함되겠습니다. "국가이성"은 이런 추상적이고 일시적인 인적 요소를, 의사 결정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국가의
실익"만을 기준으로 삼는 기제이죠.
"프랑스는
저 리슐리외(와 그 후계자들)의 현명한 처신으로, 향후 250년에 걸쳐 유럽의 패권을 유지했다."는 서술이 (헨리 키신저의
논문으로부터의 재인용을 통해) 나오지만, 독자로서 여기에는 반대하는 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국권이 유린될 뻔한 상황도
겪었고, 나폴레옹 전쟁의 처리 과정에서도 프랑스는 일시 존립의 위기를 맞기도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왕실의 몰락 후에도
공화정으로서 국체와 정통성을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대체적으로는 보불 전쟁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은 프랑스의 고갯짓 없이
어떤 중대한 정책도 전개할 수 없었음은 분명합니다. "왕실의 이익"이 아닌 "국가이성"에의 개안(開眼)이 있었기에 이런 연속적
번영과 위신의 행사가 가능했음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은
특히 한국인의 정치 행태에서, 이단과 정통의 판별에 집착하여 나의 생각과 다른 모든 입장을 절멸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일종의
주술적 심성(이성, 대화, 타협이 배제된)을 특히 지목합니다. 읽으면서 백 번 타당하다고 여겼지만, 헌데 소위 확증편향이란 게 또
모든 이들의 마음에 나쁜 버릇으로 자리잡아, 이런 말도 좌파 쪽에선 우파를 비판하는 적실한 통박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우파 역시
반대진영의 체질을 어쩌면 그리 잘 짚어냈냐며 아전인수로 해석할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악성 자기파괴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해답은 협소한 에고가 아닌, 이웃과 약자와 환경 전체를 마음과 머리 속에 품고 새길 수 있는 "세계 시민
정신"입니다. "당신은 어디 시민입니까?" "나는 아테네도 에페수스도 다마스쿠스도 아닌, 세계의 시민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어느 고대의 철학자가 지중해 세계를 주유하며 발언했다는 이 감동적인 언술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평화와 항구적인 번영을 위해 우리가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준엄히 깨우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