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
루스 호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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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는, 혹은 그렇다고 여기는 어떤 물건을 내 곁에 두면 그 상실감을 달랠 수 있을까요? 대체로 이런 분들의 경우, "내가 그(그녀)를 잃은 건 내 잘못이 있어서다." 같은 죄책감을 달래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내가 그(그녀)를 잃은 건 반대로 뒤집어보면 그(그녀)가 나를 잃은 것이기도 하고(한쪽의 죽음으로 인한 사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상실감을 힐링받아야 할 피해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이런 관계의 "상실"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을 가해자 위치에 놓습니다. 물건을 고이 간직하는 건, 어찌 보면 일종의 속죄 의식(儀式)과도 같습니다. 조상에 대해 올리는 제사를 끊이지 않고 후손에게 대신 재산처럼 상속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의식(意識)의 연장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처음에 대뜸 등장하며 이 모든 상실감(과 죄의식)을 우리 독자들에게 아련히, 잔잔하게 공유시키는 앤서니 퍼듀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문인입니다. 이분은 자신의 약혼녀가 남긴 물건들 뿐 아니라, 어느 때부터는 다른 이들이 "잃어버린" 물건까지 서재에 보관하며 누군가(그 물건을 잃은, 알지 못할 어떤 이)의 상처를 힐링해 줄 태세를 잔뜩 갖춥니다. 독특하게 보이지만, 자신의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스스로 다스리는 방법이,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는 남들의 상처를 달래 주는 데에서 찾은, 아주 이타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을 찾아낸 셈입니다. 퍼듀는 다만 자신의 생명이 이 과업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육 년 전 고용한 비서 로라에게 이 일이 이어지도록 뜻 깊은 부탁을 합니다.

소설의 1/5쯤 지난 지점에서 퍼듀 씨는 자는 듯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앞에서도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비서 로라가 벌여 나가는, 흘러버려 어느덧 자신의 존재 의의와 기억까지 저류에 쓸려버릴 것 같은, "모든, 잃어버려지기 직전의 안타까운 것들"을 붙들어 두려 안간힘을 쓰는, 다소는 우습기도 하고 다소는 좀 분하기도 한(특히 여성 독자들이 그리 여길 만한) 인생의 여러 국면을 조명합니다. 물론 로라 같은 여성에게 그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는 "국면"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관계입니다. 로라처럼 정 많고 미련 많고 약점 많고 정의감도 좀 괜히 많다 싶은 여성에게, 관계가 남긴 상처와 은근한 추억과 맹렬히 솟는 생에의 활력은, 다루기 어려우면서도 그녀를 언제나 살아 숨쉬는 존재로 만드는 동력이고 늪입니다.

LOST AND FOUND. 죽은 노 소설가 퍼듀가 자신의 "시설"에 붙인 간판입니다. 소설 제목도 그렇고 내용을 봐도, 어떤 집착이나 강박 관념 같은 게 느껴지는 "수집가"보다는, "키퍼" 즉 지킴이 정도가 사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퍼듀와 로라 모두에게), 로라는 이후 뜻하지 않게(그녀로서는 기대 못했을 일종의 행운이겠기에) "지키게 된" 이 커다란 집에서 망자의 뜻도 충실히 수행하고, 동시에 그 뜻을 지켜 주려면 먼저 자신의 인생에서 꼬이고 상처 받은 관계들부터 돌보고 해결해 나가야 함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이를 위해, 그녀의 직접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선샤인"과의 밀도 높은 관계(그 실상은 "돌봄")를 가꿔 나갑니다. 뭔가 형편이 피었나 싶어 빈대처럼 먼 곳에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못된 빈스에 대해서는 살충제를 뿌리듯 단호한 몸짓으로 멀리 퇴치하기도 합니다. 꼭 이런 망할 자식이 어디나 하나씩은 있어 남자 망신을 다 시키죠.

이웃집 정원사에서 멋진 동반자가 된 "연하남" 프레디, 성깔 있고 실력도 좋은 법정변호사(배리스터겠는데, 배경이 영국이라 이런 설정이 끼어듭니다. 하긴 이 소설은 이거 아니라도 여러 부분에서 물씬 영국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더군요) 사라, 또 유니스, 포샤, 캐럿 등이 번갈아가며 등장하여, 로라의 관계와 삶 그 안과 밖을 촘촘히 채웁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로라와 반대되는 듯 비슷한 듯 여러 주변 인물들이, 확장된 로라의 여러 성격을 대변하며 코믹하게, 때로는 살짝 슬퍼지게 그녀가 누구인지 독자에게 전달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들을 살피라고, 어쩌면 우리 독자들도 자신의 확대 버전으로 주변에 친구, 지인 관계를 구축하고 사는 지도 모릅니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캐릭터 중 특히 선샤인이 자꾸 눈 앞에 남아 아른거리는데, 저 역시 퍼듀 씨로부터 뭔가 애틋한 유산이나 미션을 넘겨 받은 것 같아 살짝 슬프면서도 흐뭇한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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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가토 노리히로 지음, 김난주 옮김 / 책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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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책(경제학)의 몇몇 대목을 짚으며 그러시던 게 기억 납니다. "이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용어 번역조차 바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초를 가르칠 때, 다소의 왜곡을 감수하고 뭔가를 전달하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 아니면 아주 원칙대로 꼬장꼬장하게 학습자의 힘들고도 힘든 각성을 유도하는 정석을 걷게 할지는, 선택이 쉽지 않다." 만약 전자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쪽이라면, 어려운 내용도 무조건 쉽게(왜곡되든 말든) 풀어 주는 게 최고의 미덕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것도 쉽게 설명해 줘야 할 판에, "가뜩이나 쉽고 재미있는 것"을 오히려 어렵게 꼬고 든다면, 그런 작업이 과연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물어보나마나입니다. 책 제목이 더군다나 <...는 어렵다>라면 더욱 그렇죠.

그런데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1) 하루키의 작품 중 알쏭달쏭했던(그런 게 뭐가 있었을까 싶어도 이 책을 읽고보니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싶더군요) 대목들에 대한 작가론적,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든가, 2) 독자들은 엄청 환영해도 동료 작가(물론 까마득한 선배들을 포함)나 평론가로부터는 "버터 바른 상업적 치장"이라며 홀대, 폄하되었던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그들이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끔" "심각하고 본격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내용이더군요.

어려운 걸 쉽게 풀어내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저 감성적으로 상쾌해질(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감을 해 주고 지나칠) 내용에다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어려울 텐데, 하루키의 작품에다 하루키스럽지 않은 심각한 비평 용어로 옷을 입힌 걸 보니(사실은 벗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당혹스럽다가도 재미있어집니다. 당혹스럽다는 건 "내가 예전에 끌렸던 하루키가 정말 그런 모습 그런 의도였을까" 하는 생경함이 아마도 그 이유일 텐데, 하긴 끌리는 걸 언제까지나 미지의 영역에 남겨 두는 것보다 한번쯤은 정색하고 "분석"해 보는 작업도, 차라리 독자(우리 자신)의 성숙을 위해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예 이런 번거로운 생각도 (하루키의 독자답게?) 떨쳐 내고 나면, 저자(비평가) 가토 노리히로 선생이 하루키의 개인사를 짚어 가며 그 숨은 의도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대목이 그저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비평 용어를 몰라도, 정말 하루키의 팬이라면 그 느낌이 딱딱한 외피를 깨고 바로 접수되는 "텔레파시"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독자 하기 달렸습니다. 읽고 나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저자께서 꽤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고, 하루키 말고도 여러 당대의 일본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분이지만, 하루키에 대한 든든하고도 순도 높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애정의 방향을 공유하고 밀도까지 비슷하다면, 한 마디를 던져도 그 말이 품은 의미 열 개가 얼마든지 접수 가능합니다.

저자는 하루키의 활동 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눕니다. 1979~ 87, 1987~99, 1999~2010이며, 하루키의 팬이라면 저 연도의 구획이 대강 무엇을 기준으로 이뤄졌는지 책을 펴 읽기 전부터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각 시기는 "부정성의 행방", "자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어둠 속으로" 등의 제목이 붙었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저 거창한 세 개의 어구보다, 각론(저자는 각 시기를 다시 2, 3개의 구간으로 나눕니다)에서 등장하는 "디태치먼트", "내폐성", "맥심(칸트식 개념입니다)", "폴리티컬" 같은 개념어들이, 하루키 문학의 핵심 개성과 은밀한 무의식 등을 속속 잘 짚어낸다 싶었습니다.

제가 특히 공감한 건 제1기, 2기(이 책 저자의 기준)를 향한 분석입니다. 이념의 대립이 청춘기 지성을 족쇄처럼 억압할 때 이미 역사의 향방이 다른 쪽으로 고비를 틀었음을 알고 초연한 듯 쿨한 듯 개인의 내면으로 시선을 집중하면서도 감각의 쾌락("청춘이 자신의 특권을 누리는 건 죄가 아님")에 몰입하는 듯, 그러면서도 스스로 정한 원칙은 지키는 내향성(책에서는 "내폐성"이란, 보다 강도 높은 용어를 씁니다) 따위가, 특히 그런 조류가 자신의 청춘기를 휩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어필을 했을 거란 분석이죠. 여기서 저자는,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은근 그의 작품에 깔린 "역사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공감을 얻는 비결이 있다면, 일본인으로서의 죄의식이나 초국적성의 청춘적 방황 같은 게 도처에 향수처럼 뿌려져 있다는 건데, 저자가 서문에서 특히 최근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긴장된 정세를 언급하는 것도 깊은 사려가 깔려 있습니다.

사실 하루키의 문학은 엔터테인먼트 장르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게, 모든 작품이 읽기에 말쑥하고 똑떨어지는 경쾌한 내러티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일부 건방진 독자들이, 그의 작품세계라면 아주 익숙하고, 마땅히 이러겠거니 여기는) 어떤 경로로부터 크게 이탈합니다. 한국에서는 당시 알 수 없었으나, 이 점 관련 "대체 뭐냐", "쓰다 만 것 아니냐" 같은 항의를 적잖게 듣고, 편집진도 (벌써 거물이 된 그에게) 문의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때 하루키는 "(그런 점들을 혹은 의도를) 이해하려면 (나의 시대에는) 오래 걸릴 것" 같은, 어찌 보면 정말 그답지 않은 고답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물론 아닙니다만). 저자는 "왜 우리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별도의 이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시론(프레임)을 제시하는 거죠. 이 시도들이 정말 작가 하루키의 내심과 일치한다면, 이제 (책 제목대로) "하루키는 (알고보니 정말로) 어려웠다"가 되는 겁니다. 물론 모르고 지나친 게 알고 보니 어려웠음을 깨달았다면, 깨달은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어려운 게 아니죠.

저자는 평단과 작가들이 모두 하루키를 폄하할 때 거의 혼자서 그를 옹호하던 스탠스를 보이기도 했고(이 때문에, 그의 표현을 빌리면, "역시 버터바른 치장형 평론가군" 같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 (이제는 하루키의 작가적 위상을 거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된 후인) 최근 몇 년 동안엔 오히려 하루키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시도하다 매체 편집자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모두 예스라고 할 때 노를 외치기는 어느 조직, 직역에 속한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데, 그만큼 확고한 신뢰와 분명한 공감에 이르렀기에, 소신 있으면서도 분명한 개성이 깃든 보편타당한 패러다임(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닐지요. 이 책, 한 번만 더 읽고 나서, 지금까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책장에 꽂힌 모든 그의 책을 다시 만나는 여행을 떠나봐야겠습니다. 위대한 정신은, 즐겁고 예사로운 말투 속에 진짜 진리를 심어 주는 게 그의 진짜 성취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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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세상의 모든 꿈을 팝니다
빌 캐포더글리.린 잭슨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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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어라, 믿어라, 도전하라, 실행하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사실 자본주의가 고도의 성숙 국면을 보여야 탄생하고 성황을 누릴 수 있는 분야입니다. 매뉴얼과 설계 도면에 맞춰 공장을 짓고 컨베이어 벨트를 돌려 판에 박힌 제품을 찍어내는 제조업과는 달리, 혹은 사람의 일차원적 욕구만을 만족시키는 도구, 소모품성 제품을 생산하는 섹터와는 달리, 사람의 깊은 마음 속에 숨겨진 욕망과 꿈과 아름다운 이상을 대리 만족시키는 생산활동이란, 차원이 다른 창의성과 공감 능력이 바탕이 되어야만 지속,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실사 영화를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진귀한 풍경을 보여 주는 패턴은 20세기 초반부터 등장하여 이미 산업의 중요 양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제작으로, 어린이 뿐 아니라 성인 관객까지 끌어들여 90분 가까운 시간 동안, 고급 연극을 보듯 강렬한 희열과 감동을 유발하는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은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월트 디즈니 말고는.

이 책은 두 분 저자에 의해, 창업자 월트 디즈니의 생애 중요 국면과, 창업자 사후에도 끊이지 않고 면면히 전개된 해당 회사의 왕성한 활동, 그리고 월트 디즈니라는 한 인간의 개성과 기업가 정신뿐 아니라 그의 창업혼을 그대로 계승한 후임자들의 성취로부터도 강력한 영감을 받은 다른 회사들의 성취에 대해, 경영학 각론(혁신, 의사결정 구조, 인사관리 등)과 자기계발적 요점을 잘 뽑아내어 독자에게 재미있게 가르치는 내용을 담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성공적인 개인, 혹은 조직이 활발히 그 성공을 이어나가며, 언제나 변함 없는 듯 그 자리를 지키는 걸 두고 감탄하기보다는 그저 당연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쉴 새 없이 생산해 내는 상품과 서비스를 일상에서 (충성스럽게) 소비를 하면서도 말입니다. 소비자들 역시 직장에서는 생산 활동에 가담하는 노동자, 혹은 관리직이기에, 비록 내가 예사롭게 접하고 소비하는 제품이지만 내가 만약 저들 입장이라면 과연 이 정도 완성도, 만족도를 이뤄낼 수 있을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게 정상입니다.

헌데, 실사영화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창의적인) 개발자들에 대해서는, "뭐 정해진 룰과 루틴이 있겠지" 하는 정도로 그냥 봐 넘깁니다. "픽사" 같은 놀라운 혁신의 사례로 꼽히는 팀, 조직에 대한 강의, 연수를 받고서도, 극장에 가선 무심히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고 적당히 감동 받으며 기분 업 되어서 나오는 우리들을 보면, 당연히 바쳐야 할 찬사와 존중이 너무 소홀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특히 이런, "디즈니社의 진정한 도전 정신과 혁신의 모범" 같은 책을 읽고 나서는 더욱요.

디즈니가 운영하는 곳은,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들의 감정과 정신까지 한껏 정화해 주고 고양시켜 주는 애니메이션 제작섹터뿐 아니라, 어린이들(우리들 대부분도 누리면서 성장기를 보낸)이 좋아하는 테마파크가 또 있습니다. 이 역시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한 번쯤은 방문하여 마음껏 환상에 빠져들고 꿈을 키우는 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월트 디즈니의 위대한 면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간 누구나 겪고 치르고 거쳐가고 싶은, 한없이 즐거우면서도 때묻지 않고 맑은 심성으로 누릴 수 있는 "꿈의 향연"을 자신의 의도와 공간 속에 유감 없이 풀어낼 수 있었던 그 저력과 야망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품을 만한 순수한 욕망을 먼저 한 발 앞서 알아내고, "당신 자신도 몰랐으면서 언제나 꿈꾸던 게 바로 이것 아니었습니까?"라며 완성된 형태로 척 제시하는, 이런 내밀하면서도 건전한 감동을 자극하고 끌어내는 사업가야말로 궁극의 레벨입니다.

디즈니의 정신은 첫째도, 둘째도 철저한 고객 우선주의입니다. 저자도 말하지만, 이런 표어를 회사에 안 걸어 두는 이는 없습니다. 실천으로 옮길 생각이 있건 없건 누구나 하는 말입니다. 월트 디즈니의 행적에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이를 철저한 실천으로 옮기고, 자신의 직원들에게 하나하나 공유하게 하고, 직원들마저 조직의 이념과 지향성을 내면화하여, 고객들에게 서비스했다는 사실입니다. 감동 받은 고객 하나가, 자신도 자기 회사에서 관리직이다 보니 이런 놀라운 서비스를 실천한 직원의 사례가 이후 디즈니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살펴 봤다고 합니다. 요란스럽게 포장되거나 홍보할 것도 없이, 디즈니에서는 그런 고객 감동의 서비스가 일상이었다고 하는군요.

이 책은 디즈니의 사업 섹터뿐 아니라, 그런 디즈니의 사업 정신을 실제로 이어받은 다른 회사의 CEO들, 혹은 (놀랍게도) 비영리단체(데이케어 센터라든가)의 관리자들까지 인터뷰하고 실사 결과를 잘 정리하여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저자들의 관점에서 "이 사례는 디즈니 정신에 포섭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실제로 그 현장의 책임자들이 "나는 월트 디즈니의 고객 우선주의, 혁신의 정신에서 크게 배우고 각성했으며 이를 실천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들 털어 놓는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꿈꾸는 사람도 그 꿈을 믿지는 않을 수 있고, 꿈을 믿는 이도 감히 도전할 마음을 못 품으며, 실행에 옮기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월트 디즈니의 위대한 점은, 이 네 단계를 모두 자신의 내면에 소중히 가꾸고 결실을 맺어, 그의 사후에조차 면면히 이어지는 경영 이념으로 수천 수만 직원들에게 함양하여 널리 퍼뜨렸다는 점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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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벌과 권력 - 재력과 권력은 누구로부터, 언제, 어떻게 오는가
효제 지음 / 지식공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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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묘를 어디에 써야 후손들이 잘 살고 복된 삶을 누릴까 하는 고민은, 첫째는 유독 풍광이 아름답고 햇볕이 고루 드는 지형을 많이 갖춘 이 한반도의 탁월한 조건에서 비롯했고(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풍류도, 낭가 사상 등), 다음으로는 아마도 원초적인 효도의 마음가짐이 그 원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소중한 국토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 경건히 여기는 그 자세와 관계 있으며, 둘째는 생전에 양친을 극진히 섬기던 공경의 정신을, 사후까지 이어간다는 극진한 효심의 발로로 못 볼 바 없습니다. 이렇다면 구태여 미신이나 세속적 구복에의 집착으로 폄하할 이유도 없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인륜에 정성을 쏟는 이가 현세에서도 복락을 누리는 윤택한 생을 누린다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사회 질서 유지 차원에서도 건전합니다.

이 책은 조상의 묫자리를 명당으로 쓴 이가 과연 당대, 혹은 가까운 후세에 그 음덕을 누리게 되는지를 놓고, 유머러스한 대화, 혹은 우화 형식으로 그 인과적 이치를 논합니다. 저자 효재(본명은 이문호 박사. 영남대 신소재공학부, 응용전자학과 교수. 서울대 공대, 카이스트에서 학부와 석박사를 각각 마침) 선생은 물론 본인이 현대 첨단 공학의 최정수를 맛보고 현재까지 그 연구를 이어가는 대표적인 지성인이기 때문에, 소위 풍수지리의 엄격한 인과율에 대해 맹신하는 식으로 논의를 이어가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직접 화법이 아닌, (좀 의외지만) 조조, 유비, 손권(관우와 장비는 안 나옵니다) 등 가상 인물을 등장시켜, 풍수지리를 바라보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시각을 대변하게 합니다. 세 인물 중 어느 누구도, 풍수학에서 말하는 인과율이 절대적이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저자의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조는 사실상 이 우스꽝스러운 담론을 주도하는 위치인데, 시대를 추측한다면 아직 삼국이 정립하기 전, 중원에서 황제를 보필하며 제국의 명분을 형식상으로 대변하던 시절 같습니다. 유비와 손권은 직급상 물론 아랫사람의 예의를 다해 조조를 대하지만, 마치 신하가 군주를 대하듯 삼가는 태도가 역력하더군요. 물론 속에는 또한 원대한 포부를 한 자락 감추고 표현하는 정치적 제스처이겠지만 말입니다. 마음에는 다른 생각을 유보하면서, 일단 상대를 향해서는 열심히 주제에 몰입하는 품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우리 현대인들이 풍수지리에 대해 품는 태도를 어느 정도는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뭔가 미심쩍고 아니다 싶지만, 한편으로는 조상 대대로 이어진 그 나름 비의를 갖춘 믿음에 뭔가 숨겨진 그윽한 진리, 혹은 "통계적, 과학적 인과율"이라도 결국 존재하는 게 아닌지 하는 삼가는(더 솔직하게는 뭔가를 기대하는) 자세가 슬쩍슬쩍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가상의 3인, 혹은 저자 자신(?)뿐 아니라, 무심한 듯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여지를 남기는 우리 모두의 심리와 닮거나, 그를 대변하는 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풍수지리학을 둘러싸고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엄격한 실증주의가 그 학풍이던 모 명문대 지리학과에서, 가장 유대 깊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큰 분란과 다툼이 벌어져 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프로이트와 융 사이의 대립에나 비길 수도 있을, 방법론과 연구의 지향에 과연 전통의 풍수론이 포함될 수 있냐를 놓고 벌어진 알력이었죠. 현재는 이 책에서도 널리 인용되는 것처럼, 명당의 실체와 이론적 구조를 놓고 "박사학위 논문"만도 수십 편이 발표된 상황입니다. 이제는 최소한 이를 놓고 진지한 학문적 논의를 삼을지 말지에 대한 대립상은 어느 정도 정리된 형편이죠. 배척하는 쪽은 여전히 배척하되, 연구하는 인력은 스탠스와 지향을 분명히하고서 밀도 있는 연구를 이어가는 상황입니다. 이 책 저자께서는 공학도, 과학도이며 젊은 나이에 매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분이지만, 이질적인 분야에 이만큼 천착하신 건 일단 소속 대학교에 이쪽(풍수학) 연구인력이 집중 포진한 사정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저는 추측합니다.

총 9장으로 이뤄진 구성인데요, 6장까지가 풍수지리학 일반 이론, 혹은 공식의 정립을 다룹니다. 저자께서는 구태여 가상의 인물들을 동원하여 이들 사이에 주거니받거니 하는 수다, 혹은 말벗 사이에 오가는 언어언의 교감 형식을 취하는데, 이는 그만큼 풍수지리론의 본체가 (어떤 이유에서건)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을 잘 드러냅니다. 저 역시 이 책 한 권만으로는 대체 그 논의체계가 어떤 구조인지에 대해 명확한 그림이 잡히지 않았고, 어쩌면 여태 근대적인 합리주의,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사고 방식이랄까 지적 소양이 이의 납득을 거부하고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혹은 말입니다, 너무 깊이 파고들 생각은 말고 대략 이 정도라는 것만 알아두라는 저자의 [차라리]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일개 독자가 이 정도인데, 공학의 특정 섹터에서 한국 최고 권위자들 중 한 분이라면 오죽하겠습니까. "좀 현대적 시각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으로 변환해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소만?" 같은 해학적인 멘트가 등장인물들 사이에 자주 오가는 것도 이 같은, 어느 정도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진지함의 강도를 조절하려는 저자의 의도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의 7, 8, 9장은, 속된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에 접근한 독자들을 위한 본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아니, 거의 확실하죠). 책에서 명당을 잘 쓴 보람은 첫째 기준이 그 수가 얼마나 번성했느냐입니다. 한국은 지금의 어르신 세대가 소위 베이비 붐 제너레이션이라서, 또 그 성장기가 하필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국가 차원의 고도발전기와 겹칠 때라, 자손 수가 늘어나는 게 무슨 큰 복이나 될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특별히 복 안 받아도 형제자매는 부담스러울 만큼 많음). 하지만 예전에는 출생 직후 질병, 부족한 영양 섭취 등으로 일찍 사망하는 비율이 높았고, 아이들을 성년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자체가 집안의 여력 없이는 불가능했겠으며, 그저 대를 잇는 사실로만으로도 부모님과 조상 볼 면목이 선다고 여겼기에 이 팩터는 비중이 크게 다뤄졌지 싶습니다. 앞의 1~6장에서 이런 이유로, 자손의 수효는 발복을 판단하는 중요 기준입니다.

다음으로, 저자께서도 그런 집안 출신이시겠습니만,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자리(이분 세대라면 문과는 고시 합격, 이과는 이름난 의사나 저자처럼 대학 교수직 취임 등)를 일찍부터 거치는 게 또한 "명당을 쓰는 보람" 중 하나가 아닐 수 없죠. 여기서 저자는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명당"인지, 묫자리가 명당/흉당의 이분법이 아닌(예전에는 그런 오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명당/비명당으로 가를 수 있는지, 기존의 풍수론이 혼란스럽게 논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정리"합니다. 여기서 "논리적"이란 말은, 풍수론 자체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란 뜻이 아니라, 종래 혼란스럽고 알쏭달쏭하게 전개된 풍수론의 패러다임을, 그나마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는 있게 공식화, 체계화했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래서 결국 우리 속된 독자들이 궁금한 건, 어디다가 묘를 써야 현재 잘나가시는 재벌들처럼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사느냐, 혹은 (저자께서 아주 심혈을 기울여 분석하시는 것처럼) 대통령 같은 지극히 존엄한 자리에 오를 수 있느냐, 나아가 이제 두 주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어느 분이 묫자리를 기막히게 쓰셨기에 당선이 되실 전망인가, 뭐 이런 문제겠습니다. 명확한 답은 없고, 다만 한국의 재벌가나 정치사의 소소한 구석에 밝은 지식을 갖춘 독자라면, 풍수론 그 자체의 결론이라기보다 최소한 저자께서 누굴 염두에 두었는지는, 두고 이런 말씀을 하는지는 아마 감이 올 겁니다.

왜 어떤 사람은 잘나가다가 말년에 운이 크게 어그러지는가, 명당이 사후적 요인으로 명당의 조건을 잃기도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기존의 이론이 명확히 구명한 바가 미진한지, 혹은 저자께서 확신이 아직 없으신지 여러 의문으로만 의견을 표명합니다. 이 중에는 "한때 총기가 넘치던 인생이 갑자기 그 총기를 잃기도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는데, 혹시 저자 자신의 사정을 은근 반영하신 문장은 아닌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묫자리를 어느 지관에다 물어봐도 명당이라는 품평을 듣는데, 왜 자손이 복을 못 받는는가를 놓고 통박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명당은 충분조건이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그저 필요조건일 뿐"으로 정리하고 넘어갑니다. 즉 "묘만 잘 쓴다고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정도죠. 이것도(이 말이 절대진리라고 아주 기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뒤집어 해석하면, "묫자리를 비명당으로 쓴 이는 복을 못 받는다."란 결론이 (논리적으로!) 나오니 그리 허술한 규정도 아닙니다. 뭐 제 생각을 곁들이자면,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쓰고 안 쓰고를, 여러 전문가(?)들에게 묻고 다니는 분들 같으면, 이미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그 나름 여유있게 사는 이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꼭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상관관계(나아가 역 인과관계, 즉 돈이 있으니 묫자리도 잘 쓰게 된다ㅋ) 정도를 보여 주는 자료, 사례가 아닐까 , 뭐 그런 느낌을 가져 봤습니다. 책 속지는 최고급 용지를 써서 읽고 넘기기에 상쾌하며, 재미로 읽어 넘기건 진지하게 운명(?)을 해석하는 도구로 쓰건 이야깃거리는 충분히 제공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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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본다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공민희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등에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에 대해 자발적으로 무신경한 노출, 공개를 일삼을까요? 소설 중에도 그런 대목이 나오지만, 자신은 일기장에다 적듯 무심히 솔직한 느낌, 일상의 여러 순간,신상 정보 따위를 게시했는데, 전혀 기대 안 한 남이라든가, 때로는 지인이라도 뜻밖의 순간이나 장소에서 그 정보를 읽고 있다면, 당황하는 게 당연합니다. 물론 똑똑한 사람은 그런 당황, 후회의 순간을 만들지 않게 평소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만.

"어떻게 내 계정에 접속할 수 있었죠?"
"이건 누구나 볼 수 있게, 당신이 게시해 놓은 것들이에요. 전체 공개로 해 두셨나 보죠."

상당히 분량이 두꺼운 이 스릴러는, 어떤 못된 X(들)이, 무작위(?)로 수집한 남(주로 여성)들의 정보를, 불법으로 개설한 사이트에 게시한 후 유료 회원들에게 팔아넘긴다는 끔찍한 음모, 사건을 주된 소재로 삼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부수적으로, 이혼과 별거, 재결합을 둘러싼 가족들 간의 아픔, 갈등, 오해, 포용이라든가, 번잡한 만큼 위험하기도 한 런던 도심 생활의 여러 선명한 단면, 혹은 생계를 위해 치열한 경제 현장에 뛰어들어 여러 고충을 겪어야 하는 여성들의 노력을 생생하게 담아내고도 있습니다. 긴 만큼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도 다양하고 그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여러 연상, 감동, 혹은 그저 지식도 풍부하다는 게 매력입니다. 물론 이 소설의 최고 장점은, 제법 충격적인 반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사리고 있는 충격적인 진상이겠습니다.

이 소설은 여러 장면에서 스토킹, 미행, 성폭력(혐오스럽거나 구체적인 묘사는 전혀 없고 과거 회상 속에 사건 요약 형식으로 간단히 언급될 뿐이라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큰 문제가 된 묻지마 폭행 등, 주로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또는 범죄 미수)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아마도 여성 독자들이 읽으면서 오싹오싹해진다거나 마음을 쓸어내릴 대목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여성 작가가 다분히 의도한 바겠고요. 특히 (위에도 언급한) 마지막의 진짜 반전은, 아마도 주인공 "나(조 워커)" 또래의 중년 여성들이 읽으면 소름이 안 끼칠 수가 없을 것 같더군요. 물론 중년 여성이 아닌 독자 입장에서도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주인공 조 워커는 글쎄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평범보다는 좀 더 여러 혜택을 누리고 사는 편에 속하는(이렇게까지만 써도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요) 이혼 후 새 애인을 만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둔 두 아이(아들, 딸)을 키우고 사는 여성입니다. 전문직까지는 아니지만 먼데인 워크는 아닌 수준의, 부동산 중개인(한국과는 달리 영미에선, 잘나가는 분들은 꽤 고소득을 올리는 직종입니다. 한국도 서서히 그렇게 되어 가는 듯)의 사무 보조역을 맡았으며, 다만 고용주 헤일로(책에서는 "할로"로 표기)와는 관계가 좋지 못합니다. 여러 스트레스를 받아서, 특히 이 소설이 다루는 구간에서는 특히 현저한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정서가 불안해져서 그러려니 이해는 하지만, 제 생각에는 할로 사장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 같은데 "나(조 워커)"가 너무 민감하게, 근거 없는 자기 감정에 따라 멋대로 판단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공 조도 나중엔 지레 체념하듯 "해고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가는데, 여튼 우리 독자들이 봐서 알듯 그는 결국 조를 배려하지 않습니까? 관대하게 휴가도 주고 말입니다.

제가 좀 불만이었던 부분은, 재미있긴 했으나 구태여 주인공을 1인칭으로 설정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조금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일방적으로(혹은 근거가 있든 간에) 의심하고 못미더워하는 인물은 진짜 범인으로 드러나는 게 드물죠. 여튼 불안해하고 흔들리는 주인공의 동요하는 시선과 화법 때문에, 독자들도 괜히 혼선을 빚으며(때로 멀미까지 느끼며) 힘들게 사건을 뒤쫓게 됩니다.

이 소설을 쓴 클레어 매킨토시는 전직 경찰로서 집필의 길에 투신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1인칭 주인공 조 워커 말고도, 켈리라는 진짜 경찰(여순경)도 한 명 등장하여 진행을 양분하면서 극을 주도하는데 글쎄요, 왜 켈리를 "나"로 세팅하지 않았는지는 여러 추측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 독자가 극중의 여성 경찰관을 (과거의) 자신과 행여 지나치게 동일시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일 수도 있고, 여튼 의도는 평범한 직장 여성, 엄마, 주부 들이 느끼거나 노출될 수 있는 가상 혹은 진짜 위험을 부각하는 쪽이기에 초점의 분산을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1인칭 화자가 공연히 여러 남성에게 불안한, 혹은 스테릭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갈팡질팡하기에, 독자는 읽으면서 살짝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불만은 결말을 다 보고서야 그 휘청거리는 진행에 납득하고서 어느 정도 잦아 듭니다.

중반 넘어가면 경찰들의 근무 패턴이나 구조, 내부 소통 등이 매우 상세히 묘사됩니다(그 훨씬 전에 주요 캐릭터로서 켈리가 선명한 인상을 남기지만). 아줌마들의 착각, 히스테리, 수다가 혹시 진상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걱정(설마 그럴리가)은 여기서부터 확실히 해소됩니다. 작가가 중년 여성들의 실체 없는 수다와 패러노이아로 소설을 다 메꾸지는 않을지 하는 불안은, 아 이런 디테일이 나오는 거 보니 진지하고 본격적인 스릴러 맞구나 하는, 좋은 전조와 느낌과 함께 해소되는 게 보통이니 말입니다.

서평 맨 위에, 인터넷에 무방비로 노출된 개인 신상 등에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온라인 프라이버시의 취약성 등에만 경각을 촉구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끔찍한 범죄의 발단은 오프라인에서의 변화 없고 빤한 반복적 행태가 예비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기계 부품처럼 일정 경로를 오가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자초하기 쉬운(물론 나쁜 X들의 범죄적 행각이 더 결정적이지만) 비극을, 이 스릴러는 잘 꼬집고 듭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언급 못 하지만, 일상에서 매번 만나고 교감하고 사소한 불만이나 고민, 행복감 등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소중한 관계가, 나의 부주의 혹은 상대의 악의나 우연한 불운의 개입으로 한순간에 망쳐질 수도 있음을, 섬뜩하게 소설은 지적합니다. 그리고 악(자기 입장에서는 이게 악이다, 범죄다 하는 인식이 없습니다. 언제나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일삼는, 범죄 DNA가 존재의 본체를 이루는 비천한 자들의 공통점이죠)은 제 악행의 대가를 신랄하게 치르고 파멸합니다.

남의 정보를 불법으로 사 가며 비천한 변태적 성욕을 채우는 자들의 섬뜩한 행태는 현대 정보화 사회의 신뢰 근간을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마지막에 범인이 제깐엔 변명이라며 지껄이는 헛소리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런 데 공감하며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인생도 똑같이 비천하고 한심한 겁니다). 한국에서라면 글쎄요 이런 사이트 영업이 과연 가능할지, 경찰들이 상당히 부지런히 움직이고, 입소문이 빨라 어느 순간부터는 건전한 네티즌의 시민 정신 발휘로 한순간에 적발될 것 같아, 비즈니스 모델(이 표현이 직접 나옵니다)로는 좀 곤란할 것 같군요(실정법 위반은 둘째치고). 서버에 청소부가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고 USB를 꽂아 한순간에 해킹 툴이 깔리고 지구대와 전철 CCTV 화면을 모두 가로챌 수 있었다는 대목은 좀 무리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그 정도 사고면 서장이 갈려야 합니다. 켈리의 재소자 폭행은 유가 아니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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