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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
루스 호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4월
평점 :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는, 혹은 그렇다고 여기는 어떤 물건을 내 곁에 두면 그 상실감을 달랠 수 있을까요? 대체로 이런 분들의 경우, "내가 그(그녀)를 잃은 건 내 잘못이 있어서다." 같은 죄책감을 달래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내가 그(그녀)를 잃은 건 반대로 뒤집어보면 그(그녀)가 나를 잃은 것이기도 하고(한쪽의 죽음으로 인한 사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상실감을 힐링받아야 할 피해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이런 관계의 "상실"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을 가해자 위치에 놓습니다. 물건을 고이 간직하는 건, 어찌 보면 일종의 속죄 의식(儀式)과도 같습니다. 조상에 대해 올리는 제사를 끊이지 않고 후손에게 대신 재산처럼 상속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의식(意識)의 연장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처음에 대뜸 등장하며 이 모든 상실감(과 죄의식)을 우리 독자들에게 아련히, 잔잔하게 공유시키는 앤서니 퍼듀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문인입니다. 이분은 자신의 약혼녀가 남긴 물건들 뿐 아니라, 어느 때부터는 다른 이들이 "잃어버린" 물건까지 서재에 보관하며 누군가(그 물건을 잃은, 알지 못할 어떤 이)의 상처를 힐링해 줄 태세를 잔뜩 갖춥니다. 독특하게 보이지만, 자신의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스스로 다스리는 방법이,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는 남들의 상처를 달래 주는 데에서 찾은, 아주 이타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을 찾아낸 셈입니다. 퍼듀는 다만 자신의 생명이 이 과업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육 년 전 고용한 비서 로라에게 이 일이 이어지도록 뜻 깊은 부탁을 합니다.
소설의 1/5쯤 지난 지점에서 퍼듀 씨는 자는 듯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앞에서도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비서 로라가 벌여 나가는, 흘러버려 어느덧 자신의 존재 의의와 기억까지 저류에 쓸려버릴 것 같은, "모든, 잃어버려지기 직전의 안타까운 것들"을 붙들어 두려 안간힘을 쓰는, 다소는 우습기도 하고 다소는 좀 분하기도 한(특히 여성 독자들이 그리 여길 만한) 인생의 여러 국면을 조명합니다. 물론 로라 같은 여성에게 그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는 "국면"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관계입니다. 로라처럼 정 많고 미련 많고 약점 많고 정의감도 좀 괜히 많다 싶은 여성에게, 관계가 남긴 상처와 은근한 추억과 맹렬히 솟는 생에의 활력은, 다루기 어려우면서도 그녀를 언제나 살아 숨쉬는 존재로 만드는 동력이고 늪입니다.
LOST AND FOUND. 죽은 노 소설가 퍼듀가 자신의 "시설"에 붙인 간판입니다. 소설 제목도 그렇고 내용을 봐도, 어떤 집착이나 강박 관념 같은 게 느껴지는 "수집가"보다는, "키퍼" 즉 지킴이 정도가 사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퍼듀와 로라 모두에게), 로라는 이후 뜻하지 않게(그녀로서는 기대 못했을 일종의 행운이겠기에) "지키게 된" 이 커다란 집에서 망자의 뜻도 충실히 수행하고, 동시에 그 뜻을 지켜 주려면 먼저 자신의 인생에서 꼬이고 상처 받은 관계들부터 돌보고 해결해 나가야 함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이를 위해, 그녀의 직접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선샤인"과의 밀도 높은 관계(그 실상은 "돌봄")를 가꿔 나갑니다. 뭔가 형편이 피었나 싶어 빈대처럼 먼 곳에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못된 빈스에 대해서는 살충제를 뿌리듯 단호한 몸짓으로 멀리 퇴치하기도 합니다. 꼭 이런 망할 자식이 어디나 하나씩은 있어 남자 망신을 다 시키죠.
이웃집 정원사에서 멋진 동반자가 된 "연하남" 프레디, 성깔 있고 실력도 좋은 법정변호사(배리스터겠는데, 배경이 영국이라 이런 설정이 끼어듭니다. 하긴 이 소설은 이거 아니라도 여러 부분에서 물씬 영국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더군요) 사라, 또 유니스, 포샤, 캐럿 등이 번갈아가며 등장하여, 로라의 관계와 삶 그 안과 밖을 촘촘히 채웁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로라와 반대되는 듯 비슷한 듯 여러 주변 인물들이, 확장된 로라의 여러 성격을 대변하며 코믹하게, 때로는 살짝 슬퍼지게 그녀가 누구인지 독자에게 전달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들을 살피라고, 어쩌면 우리 독자들도 자신의 확대 버전으로 주변에 친구, 지인 관계를 구축하고 사는 지도 모릅니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캐릭터 중 특히 선샤인이 자꾸 눈 앞에 남아 아른거리는데, 저 역시 퍼듀 씨로부터 뭔가 애틋한 유산이나 미션을 넘겨 받은 것 같아 살짝 슬프면서도 흐뭇한 느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