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신구문화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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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의 <달마상>은 요즘도 TV 등에서 자영업자들에게 행운을 불러오는 그림으로 꼽혀 인기가 높습니다. 과연 근거 있는 이야기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대담한 필치로 한 번에 이어내리며 멍한 듯 큰 지혜를 품은 눈매를 묘사한 그 솜씨가 문외한에게마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잘못 알기도 하는데 김명국의 활동 시기가 김홍도, 신윤복 등보다 더 이전입니다. 아마도 국사, 미술 교과서 등에서 두 분보다 소개가 뒤이거나 비중이 낮아서 착각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강희안은 사육신과도 활동 시기가 비슷한 문신이며 화공 같은 커리어가 아니라 과거 급제를 통해 출사한 문신이었습니다. <양화소록>등이 그의 저서로 잘 알려졌으며 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의 대표 걸작은 아무래도 <고사관수도>이겠는데 함축성 높은 구도와 한가로운 듯 (물[水]을 통해) 세상을 관(觀)조하는 고사(高士)의 시선이 또한 일품입니다. 


안견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강희안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예술가로서 화공 출신입니다. 안평대군 이용의 꿈을 모티브로 삼아 <몽유도원도>를 완성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엄청난 스케일이 인상적인 그림이며 명사들의 시와 필적이 남은 그림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처럼 명작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세종 연간이 확실히 문화적으로건 정치적으로건 안정된 시기였음이 또한 분명합니다. 


예전부터 오주석 저자는 윤두서의 자화상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해 왔습니다. 물론 오 저자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 그림에 큰 의의를 둡니다만 책을 읽어 보면 특히나 저자가 해당 그림에 대해 몰입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죠. 혹은 이 책에 윤두서의 그림이 두 편이나 실린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해당 작가의 화풍을 높이 평가하는 소치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설령 왕이라고 해도 실물을 과하게 미화하는 묘사를 하지 않는 게 화공은 물론 선비로서 증몀해야 하는 최소한의 필치 윤리이며 이를 지키지 않고 당사자에 아부하는 선택을 하며 당대와 후대로부터 두고두고 비난받는 이야기를 즐겨 자신의 책 속에서 합니다. 


정선 역시 신윤복, 김홍도 등보다 앞선 시기의 사람이며 전문 화공 출신이 아니라 문인이 취미로 그림을 그린 경우에 속합니다. 이번에 이건희 회장이 타계하며 그의 컬렉션이 사회에 환원되었는데 이 중에 인왕제색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왕제색도뿐 아니라 이건희 컬렉션은 실로 엄청난 세계적 걸작을 두루 포함하며 그 가격을 차마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기대 이하인 점은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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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서북 국경과 위화도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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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하에서 우리 역사가 많은 왜곡을 겪었음은 그간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 왔습니다. 이 책 역시 그런 관점을 전제로 삼으며, 이성계와 조민수가 요동 정벌군의 말머리를 돌려 회군한 위화도가 현재 우리가 아는 그 위치가 아닌, 요령성 포석하가 그 정확한 위치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위화도에서 이성계 등이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건 단순한 쿠데타가 아닙니다. 고려 초에 강조(康兆)가 쿠데타를 일으켜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운 일이 있었지만 강조 역시 거란의 침입에 닥쳐 그 애국적 충절을 감연히 떨쳐 적군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서도 알 수 있지만 설령 군사정변이 벌어지는 일이 있어도 그 주모자가 역성혁명으로 사태를 키워 자신이 옥좌에 앉기까지 하는 결과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입니다. 


드라마 <용의 눈물>등에서는 사세가 부득이해 이성계가 회군하여 기존 지배세력을 갈아치우긴 했으나 이백 년 전 최충헌처럼 집정자에 머물려 했을 뿐 본인이 왕이 되려는 마음까지는 먹지 않았고, 아들 방원이나 정도전 등 신진 사류의 추동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해석을 합니다. 요즘 드라마 <태종 이방원>은 정반대 해석입니다. 


이 책의 입장에 의해서도 위화도의 위치가 크게 바뀌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요동 반도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가 만주 쪽으로 더 확장되는 결론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는 명 태조 주원장이 설치를 통고한 철령위에 대해서도 그 더 정확한 위치를 비정합니다. 저자가 주장하듯 "역사지리"는 더 정확하고 더 본질에 접근하는 역사의 내용을 밝히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수단입니다. 또 일제 하에 만들어진 <조선사>에 대해서도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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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모빌리티 지금 올라타라 - 미래 이동 수단이 바꿀 인류의 삶
모빌리티 강국 보고서 팀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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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ately owned vehicle. 이게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마이카"의 정확한 영어 표현(p16)입니다. 사실 요즘은 마이카라는 말도 잘 쓰지 않고 심지어 자가용이란 말도 예전보다는 드물게 씁니다. 다들 차 한 대씩은 갖고 있는 게 보통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환경 오염 때문에 차량 운행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듣기는 하지만 내 차 없는 일상을 이제는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책에서는 인류 최고의 발명 중 하나를 "바퀴"로 들면서 자동차의 일상화를 그 맥락에 연결시킵니다. 사실 자동차는 내연 기관이나 기타 복잡한 장치 등이 복합적으로 집결된 고도의 기계이지만 말입니다.


 

이 책 저자들은 단적으로 주장하기를 앞으로는 UAM이 대세가 된다고 합니다. urban air mobility의 약자입니다. 1990년대 초 자가용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 도로 수용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도(p26) 출근시간대 차를 몰고 나와 혼자서만 타는 행태를 비판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서울 시내라고 해도 그간 도로망 확충이 이뤄지고 전철 노선도 많이 늘어서 그때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대 길이 붐비는 건 여전하며 특히 요즘은 배달 수요가 늘어서 이륜차의 주행이 커다란 위협 요소입니다. 이럴 때, 책에서 전망하는 대로 UAM이 늘어나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상상도 못하겠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실제로 이런 수요가 가장 절실한 동남아시아, 특히 베트남에서 UAM의 연구 도입이 우리보다 더 빠릅니다. 


 

미래 교통 수요는 특히 CASE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C는 connected, A는 automated deriving, S는 shared, E는 electrified의 약자입니다. 하이퍼루프는 특히 미국에서 일론 머스크(p19) 등이 구상했고 제가 7~8년 전에 이런저런 책을 읽을 때에도 본문 중에 등장하곤 했습니다. 작년 테슬라 주가의 급격한 상승 때문에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리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죠. 아무튼 하이퍼루프는 그때 미디어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아직도 의미있는 진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전기동력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공유플랫폼 기술과 융합하면(p44) 여전히 유망한 기술 중 하나로 봅니다. 하이러루프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도 출근시간대에 공항철도 같은 걸 타 보면 승객들이 그 빠른 속도에 새삼, 여전히 놀라곤 합니다. 


 

최근 전통 방식의 주유소(p55)가 폐업 준비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고 합니다. 내연차가 줄어들고 전기차로 바뀌면 이 업종도 설비를 다 바꿔야 하는데 전기차는 내연차와 연료 공급 방식이 완전히 다르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유휴 시간대에 충전하든지 하면 기존 주유소의 역할이 더욱 줄어들겠죠. 물론 아직은 전기차가 주행 거리가 짧기에 수시로 충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설비를 다 들어내고 완전히 바꾸어야 하므로 그 비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책에서는 공공기관에 절대적으로 의존 중인 이런 충전 인프라를 앞으로 어떻게 널리 보급해야 하는지가 사회적 과제라고 지적합니다. 


 

이제는 "드라이브"라는 말도 사전에만 남으리라고 저자는 예상합니다. 드라이브는 운전자 자신이 차를 몰며 교외 등을 돌아보는 행위인데(조수석 등에 타인을 태우기도 하죠), 이제는 자율주행이 그야말로 일상이 되면서 내가 운전대를 잡고 어디를 가는 행위가 과연 미래에 있겠냐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일반인 생각으로 예컨대 출퇴근 시간대 운행 같은 건 자율주행에 몸을 맡긴다고 하지만 나 혼자 한적한 곳을 차를 몰고 떠나는 것도 자율주행에 기대어야 하는가, 이런 건 아직도 나라별로 확정된 게 없고 더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미국 드라마 Knight Rider 같은 데서, 주인공 마이클이 시계에 입을 가까이하고 "키트, 빨리 와 주게"를 말하던 멋진 모습을 언급합니다. 



 

이렇게 촘촘하게 커넥티드니스를 실현시키려면 센서가 무엇보다 성능을 잘 발휘해야 합니다. 책에서는 p92 같은 곳에서 현재 이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를 짚습니다. V2X 기술은 그간 여러 논의(대중서 수준으로)가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C-V2X를 자세히 소개합니다(적어도 저는 이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여기서 C는 celluar의 약자인데 이동통신망을 적극 활용한다는 뜻입니다. 이동통신이 꽤나 발달한 한국에서 celluar라는 단어는 잘 안 쓰기 때문에 조금은 이질적인 언어감각이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그러나 이 분야가 여전히 극복 중인 이런저런 한계에 대해서도 p100 같은 곳에서 짚습니다. 


 

중국은 전기차, 자율주행, 그리고 스마트 모빌리티 개념이 처음 등장할 무렵부터 세계적으로 앞서 가는 경향성을 보여 왔습니다. 바이두는 우리에게 포털 사이트로 잘 알려진 회사인데 이곳의 개방형 자율주행 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일러 "아폴로"라 부릅니다. p139에 보면 자율주행과 중국 AI의 역사를 바이두가 이끌어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책에서는 중국이 다른 나라보다 개인정보 보호가 철저하지 않고 이를 AI 분야에 거의 제한없이 끌어올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유리하고 타 기업을 압도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옵니다.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이 또한 국내기업들(나아가 非 중국 출신들)이 밖에서 맞이하는 현실입니다. 


 

p151에는 현재 각국의 두드러진 산학 협동체들이 어디까지 자율주행 실증을 발전시켜 왔는지 잘 보여 주는 표가 있습니다. 유럽은 2030년을 완전 자율주행이 달성되는 해로 잡고 있는데 여러 사회 시민 계층의 동의를 일일이 얻어내어야 하므로 참 어려운 과제가 될 듯합니다. 


 

세상이 이처럼 급격히 바뀌는데 과연 한국은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지만 제6장에서는 우리의 대처 노력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서울은 상암을 중심으로 자율주행 시범 사업이 활발히 진척되는 편이며, 전남 영광, 세종, 판교 등에서도 미래 한국의 도로 교통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 그 청사진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p170 이하에는 그간 우리가 농업, 어업의 중심지로만 알았던 전남 영광이 어떻게 미래 전기차 중심지로 변모해 가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이 나옵니다. 

 

중국이 특히 선도하는 분야 중 DRT라는 게 있습니다. Demand Responsive Transport의 약자인데, 이게 어떤 고정적인 숫자를 예상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빅데이터에 기반하여 시시각으로 변동하는 교통 수요에 맞춰 탄력적으로 그 용량을 조절하는 시스템입니다. 이런 걸 두고 진정한 지능형, 혹은 스마트 체계라 부를 수 있겠죠. 또 이에는 스카이포트도 포함되기 때문에 미래에는 손이 자유로운 차 안에서의 공간, 시간 활용은 물론이며 도로 위에서 누구라도 오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생산성 높은 스케줄을 꾸리는 게 가능합니다. p212에는 "뮬류가 보이지 않는 도시"라는 말도 나오는데, 무엇이든 그 흐름이 경색 없이 원활하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이런 조건 하에 교통은 종래의 2차원에서 드디어 3차원 운용으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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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역사학자 김승학 - 그의 삶과 사상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들의 역사관과 국가건설론 연구 11
김동환 지음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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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입니다. 본관은 배천인데 이곳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에 가깝습니다. 예전부터 고을 수령의 부임지로 선호된 고장 중 하나이며 그런 까닭에 백천(白川)이 아닌 "배천"으로 관용하여 읽는 방식을 모르면 무식하다는 평판이 나왔죠. 


김승학 선생은 이미 1962년에 건국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1964년 서거하기 2년 전의 일로, 이미 생전에 그 혁혁한 독립운동의 공적이 거의 온전히 평가 받았음을 뜻합니다. 반면 같은 참의부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심용준 선생은 1998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심 선생도 평북 희천군(현재 북한 행정 구역 기준으로 자강도 희천시) 출생이니 의주와 아주 멀지는 않습니다. 나이는 김승학 선생이 심 선생보다 15년 위입니다. 심 선생은 남북 어디로도 귀환하지 않고 1949년 길림성에서 운명했습니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를 전신으로 삼던 시절부터 활동하던 분들도 있었고, 김승학 선생처럼 임정과 연계하여 파견된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승학 선생의 독립운동 이력에는 "대한통의부" 관련 사항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심용준 선생은 문학빈, 양세봉 선생 등과 함께 원래 대한통의부의 주축이었던 분입니다. 


원래 참의부 주류는 촉성회, 혁신의회, 책진회 등에 합류하며, 참의부의 일부는 협의회, 국민부 등으로 가는데 저 일부가 바로 심용준 선생의 파벌입니다. 대개 혁신의회는 경상도 출신이 많았으며 원래 정의부의 수뇌였던 김동삼 선생이 국민부로 가지 않고 혁신의회로 합류한 건 경상도 안동 출신이었다는 이유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그냥 독자인 제 생각이지만). 반면 김승학 선생은 평북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의부의 주류를 따라 그대로 혁신의회에 속했습니다. 심용준 선생은 원래부터가 통의부 출신, 또 같은 평북 출신이자 심지어 나이까지 같은 양세봉 장군과 거의 일생을 두고 함께했습니다. 양세봉 장군이 일제 밀정의 하수인에 의해 암살되기 전까지 말입니다. 


김승학 선생은 일제에 의해 1929년 검거되었고 1934년에 출옥했습니다. 이때 즈음하여 양세봉 장군이 암살되었죠. 일제가 특히 조선인 수감인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뤘는지는 유명했고 특히 김 선생은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5년이란 긴 영어 생활을 마치고도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점까지도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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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끝없는 이야기 특서 어린이문학 1
이상권 지음, 전명진 그림 / 특서주니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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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호랑이 한 마리의 일생에 얽힌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져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야기가 적절한 구간마다 예측 불허로 방향을 틀고 마지막까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서 놀랐습니다. 어린이용 책인데도 많이 슬프고 (알고 보면) 잔인한 면까지 있지만 말투가 워낙 구수하고 웃겨서 읽는 중에는 그런 줄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랬지만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 힘들게 목숨을 이어가는 그런 삶이 꼭 있습니다. 아기 백호도 엄마 "눈꽃이 피다"한테서 그렇게 태어났는데 "검은별" 등 늑대 무리가 정치적인 이유(?)로 백호를 죽이기로 마음 먹은 탓에 엄마도 결국 도망 다니다 죽고 자신은 어쩌다가 인간과 개의 손에 길러집니다. 가난한 농민 허절구는 이 백호를 아들 허강과 함께 사람처럼 키우며 이름도 허산이라고 붙여 주며,암캐 누렁이가 젖을 먹이며 양엄마 노릇을 합니다. 호랑이 중에서도 특별한 운명(뭘까요)으로 태어난 허산이 인간과 개의 보호 아래 자라나는 것입니다. 


마을에는 허절구처럼 착한 사람도 있지만 황천돌처럼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못된 꾀로 가득한 자도 있습니다. 허산을 죽이려 든 늑대들도 나쁘지만 인간 황천돌은 종족 전체를 위한 대의명분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자기 뱃속만 채우려는 아주 일차원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인간이므로 독자인 저로서는 여기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밉살스럽고 못된 성품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허산이 잘 본 대로) 근본은 마냥 나쁘지 않은 인간이라 자주 갈등하는데 저는 이게 더 짜증이 나더군요. 


허산은 스스로도 말하지만 사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저 마음만 착한 백호일 뿐이며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준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특징이 알고보니 최강의 초능력과 같아서 가장 악한 자의 마음조차도 바꾼다는 게 놀랍습니다. 마을 전체를 휩쓸 수 있는(실제로 나라 전체를 휩쓸었던) 권능을 지닌 역신(疫神)의 의도도 바꾸며, 황천돌 같은 대책 없는 인간도 허산 앞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잠시나마 착한 마음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결국 역신처럼 황천돌도 착해진다는 소린 줄 알았는데 (스포일러)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으로 여겨지는 건 알고 보면 초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책에서처럼 정보 네트워크의 도움인지도 모릅니다. 즉 닥터 둘리틀처럼 동물과 소통할 수 있어서 다가올 미래를 소식을 통해 미리 듣는 거죠. 쥐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미리 빠져나가는 것처럼. 백호도 이모(?)인 까마귀 세발이한테 각종 소식을 전해 듣고 몸을 피할 것을 권유받습니다. 


그런데 백호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게 또 독특한데 백호는 끝까지 사람의 선의를 믿습니다. 백 중에 99가 악하고 1만 선해도 그 1을 보고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거죠. 실제로 황천돌도 "내가 어려서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그렇지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요(p99)"라고 말하는 등 천성이 나쁘게 태어난 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악인들이 다 같습니다. 잘 살펴 보면 어려서 꼭 어떤 상처를 입거나 한 기억의 아픔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는 거죠. 그래서 백호 허산이 앞에 와서 잠시라도 본심이 회복하여 착해지는 건데... 


이 이야기의 리얼리티(?)는, 진짜 옛날 이야기처럼 악인이 결국 주인공의 덕에 의해 교회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나쁜 인간으로 남거나 더 악해지고, 어떤 인간은 멀쩡하던 게 끝에 가서 타락까지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허산이 같이 착한 사람이 끼치는 영향력보다 나쁜 인간들의 나쁜 영향력이 더 압도적이므로 세상은 구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둠이 빛을 이긴 적 없었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은 정말로 무력하며, 주인공 백호는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하는 거죠. 


백호가 그렇다고 1) 남의 답정너에 맞장구만 쳐 주는 재주 2) 발 넓은 세발이 이모가 미리 전해 주는 소식의 힘 이 둘만으로 때우는 건 아니고 어떨 때 보면 정말 초능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p73을 보면 백호는 분명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혼자서 황천돌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습니다. 이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워낙 마음이 착해서 태평양 속 1ppm 만큼만 있는 선의도 알아 보고 상대의 악의에도 분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알기 때문이 아닐지.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볼 줄 아는 허산이의 능력이야말로 궁극의 초능력인지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충고는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세요"뿐입니다. 


이 동화는 화자의 말투도 무척 재미있는데 허산이가 수성 대사와 전국을 주유하던 중 듣게 되는 억울한 사연 중에 p125에 보면 "맹인인 아버지를 고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았으나 사기를 당한 처녀, 사또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으나 그가 과거 급제한 후 배신하여 자결한 처녀" 등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캐릭터들(?)이 잠시 스쳐지나갑니다. 사실 저게 재미있는 사연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가 다 아는 어떤 원형의 패러디라서 화자의 유머가 느껴진다는 겁니다. p47을 보면 역신을 만나 "그래도 착한 이들도 많으니 그런 사람들은 좀 빼고 죽이시는 게..." 같은 어설픈 충고를 하지 않고 그저 "당신 마음이 가는 대로"라고 한 게 재앙을 막는 비결이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앞의 충고 같은 게, 평균적인 독자의 예상이자 상식인데 보기 좋게 그걸 비껴가는 거죠. 수성대사가 열 번 과거 장원하여 율곡의 기록을 깼다는 말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p122:1의 "천 대감한테는"은 문맥상 "윤백삼에게는"의 오타인 듯합니다. 


이 소설에 잠시이건 길게건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들은 못된 놈한테 걸려 신세를 망치거나 거지가 되거나 죽거나 하고, 나쁜 놈들은 어려서 무슨 아픈 상처를 입어서 그게 덧나서 남한테 못된 짓을 하니 그 역시 비극입니다. (스포일러) 읽으면서 제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OOOO의 타락과 배신입니다. 이 사람은 수련이나 재능 면에서 사람의 궁극을 초월한 위인인데 그 역시도 자신 마음에 숨겨진 열등감과 욕망을 극복 못 해 가장 처참하게 타락하고 영혼을 잃습니다. 그리고 끝내 회복 못 합니다. 


더 충격인 건 결말에 가서 만나는 OO입니다. 그는 몰골만 거지가 된 게 아니라 이미 진정한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습니다. OOOO은 세속적으로 엄청난 출세(?)라도 하고 그렇게 되었지만 OO은 그냥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망가졌으며 허산을 만나고도 끝내 손톱만큼도 구제가 안 됩니다. 천성도 착하고 그 부모님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들이었는데도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우리가 그 타락의 원인이라도 알 수 있었으나 OO은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영문도 모르기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세발이 이모도 허산이 자신의 운명을 잊지 않고 반드시 늑대들에게 복수할 것을 독촉하고, 우리 독자들도 그가 빨리 운명대로 산신령이 될 걸 기대하지만 그는 남들에게 평생을 조언하고 다닌 대로, 그 정해진 운명마저 거부한 채 자신의 내면이 들려 주는 소리에만 충실합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착한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의 소리가 내는 대로만 살면 세상 모든 갈등과 모순은 사라질 것이라는 결론이 감동적이었습니다. 해학적인 분위기이지만 사실 플롯만 놓고 보면 무척 슬픈 사연들뿐이며 어쩜 우리 사는 세상이 이처럼이나 힘들고 온갖 악으로 가득한지 그저 눈물만 납니다. 에휴.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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