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끝없는 이야기 특서 어린이문학 1
이상권 지음, 전명진 그림 / 특서주니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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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호랑이 한 마리의 일생에 얽힌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져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야기가 적절한 구간마다 예측 불허로 방향을 틀고 마지막까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서 놀랐습니다. 어린이용 책인데도 많이 슬프고 (알고 보면) 잔인한 면까지 있지만 말투가 워낙 구수하고 웃겨서 읽는 중에는 그런 줄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랬지만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 힘들게 목숨을 이어가는 그런 삶이 꼭 있습니다. 아기 백호도 엄마 "눈꽃이 피다"한테서 그렇게 태어났는데 "검은별" 등 늑대 무리가 정치적인 이유(?)로 백호를 죽이기로 마음 먹은 탓에 엄마도 결국 도망 다니다 죽고 자신은 어쩌다가 인간과 개의 손에 길러집니다. 가난한 농민 허절구는 이 백호를 아들 허강과 함께 사람처럼 키우며 이름도 허산이라고 붙여 주며,암캐 누렁이가 젖을 먹이며 양엄마 노릇을 합니다. 호랑이 중에서도 특별한 운명(뭘까요)으로 태어난 허산이 인간과 개의 보호 아래 자라나는 것입니다. 


마을에는 허절구처럼 착한 사람도 있지만 황천돌처럼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못된 꾀로 가득한 자도 있습니다. 허산을 죽이려 든 늑대들도 나쁘지만 인간 황천돌은 종족 전체를 위한 대의명분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자기 뱃속만 채우려는 아주 일차원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인간이므로 독자인 저로서는 여기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밉살스럽고 못된 성품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허산이 잘 본 대로) 근본은 마냥 나쁘지 않은 인간이라 자주 갈등하는데 저는 이게 더 짜증이 나더군요. 


허산은 스스로도 말하지만 사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저 마음만 착한 백호일 뿐이며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준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특징이 알고보니 최강의 초능력과 같아서 가장 악한 자의 마음조차도 바꾼다는 게 놀랍습니다. 마을 전체를 휩쓸 수 있는(실제로 나라 전체를 휩쓸었던) 권능을 지닌 역신(疫神)의 의도도 바꾸며, 황천돌 같은 대책 없는 인간도 허산 앞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잠시나마 착한 마음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결국 역신처럼 황천돌도 착해진다는 소린 줄 알았는데 (스포일러)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으로 여겨지는 건 알고 보면 초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책에서처럼 정보 네트워크의 도움인지도 모릅니다. 즉 닥터 둘리틀처럼 동물과 소통할 수 있어서 다가올 미래를 소식을 통해 미리 듣는 거죠. 쥐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미리 빠져나가는 것처럼. 백호도 이모(?)인 까마귀 세발이한테 각종 소식을 전해 듣고 몸을 피할 것을 권유받습니다. 


그런데 백호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게 또 독특한데 백호는 끝까지 사람의 선의를 믿습니다. 백 중에 99가 악하고 1만 선해도 그 1을 보고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거죠. 실제로 황천돌도 "내가 어려서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그렇지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요(p99)"라고 말하는 등 천성이 나쁘게 태어난 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악인들이 다 같습니다. 잘 살펴 보면 어려서 꼭 어떤 상처를 입거나 한 기억의 아픔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는 거죠. 그래서 백호 허산이 앞에 와서 잠시라도 본심이 회복하여 착해지는 건데... 


이 이야기의 리얼리티(?)는, 진짜 옛날 이야기처럼 악인이 결국 주인공의 덕에 의해 교회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나쁜 인간으로 남거나 더 악해지고, 어떤 인간은 멀쩡하던 게 끝에 가서 타락까지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허산이 같이 착한 사람이 끼치는 영향력보다 나쁜 인간들의 나쁜 영향력이 더 압도적이므로 세상은 구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둠이 빛을 이긴 적 없었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은 정말로 무력하며, 주인공 백호는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하는 거죠. 


백호가 그렇다고 1) 남의 답정너에 맞장구만 쳐 주는 재주 2) 발 넓은 세발이 이모가 미리 전해 주는 소식의 힘 이 둘만으로 때우는 건 아니고 어떨 때 보면 정말 초능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p73을 보면 백호는 분명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혼자서 황천돌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습니다. 이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워낙 마음이 착해서 태평양 속 1ppm 만큼만 있는 선의도 알아 보고 상대의 악의에도 분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알기 때문이 아닐지.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볼 줄 아는 허산이의 능력이야말로 궁극의 초능력인지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충고는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세요"뿐입니다. 


이 동화는 화자의 말투도 무척 재미있는데 허산이가 수성 대사와 전국을 주유하던 중 듣게 되는 억울한 사연 중에 p125에 보면 "맹인인 아버지를 고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았으나 사기를 당한 처녀, 사또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으나 그가 과거 급제한 후 배신하여 자결한 처녀" 등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캐릭터들(?)이 잠시 스쳐지나갑니다. 사실 저게 재미있는 사연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가 다 아는 어떤 원형의 패러디라서 화자의 유머가 느껴진다는 겁니다. p47을 보면 역신을 만나 "그래도 착한 이들도 많으니 그런 사람들은 좀 빼고 죽이시는 게..." 같은 어설픈 충고를 하지 않고 그저 "당신 마음이 가는 대로"라고 한 게 재앙을 막는 비결이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앞의 충고 같은 게, 평균적인 독자의 예상이자 상식인데 보기 좋게 그걸 비껴가는 거죠. 수성대사가 열 번 과거 장원하여 율곡의 기록을 깼다는 말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p122:1의 "천 대감한테는"은 문맥상 "윤백삼에게는"의 오타인 듯합니다. 


이 소설에 잠시이건 길게건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들은 못된 놈한테 걸려 신세를 망치거나 거지가 되거나 죽거나 하고, 나쁜 놈들은 어려서 무슨 아픈 상처를 입어서 그게 덧나서 남한테 못된 짓을 하니 그 역시 비극입니다. (스포일러) 읽으면서 제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OOOO의 타락과 배신입니다. 이 사람은 수련이나 재능 면에서 사람의 궁극을 초월한 위인인데 그 역시도 자신 마음에 숨겨진 열등감과 욕망을 극복 못 해 가장 처참하게 타락하고 영혼을 잃습니다. 그리고 끝내 회복 못 합니다. 


더 충격인 건 결말에 가서 만나는 OO입니다. 그는 몰골만 거지가 된 게 아니라 이미 진정한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습니다. OOOO은 세속적으로 엄청난 출세(?)라도 하고 그렇게 되었지만 OO은 그냥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망가졌으며 허산을 만나고도 끝내 손톱만큼도 구제가 안 됩니다. 천성도 착하고 그 부모님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들이었는데도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우리가 그 타락의 원인이라도 알 수 있었으나 OO은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영문도 모르기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세발이 이모도 허산이 자신의 운명을 잊지 않고 반드시 늑대들에게 복수할 것을 독촉하고, 우리 독자들도 그가 빨리 운명대로 산신령이 될 걸 기대하지만 그는 남들에게 평생을 조언하고 다닌 대로, 그 정해진 운명마저 거부한 채 자신의 내면이 들려 주는 소리에만 충실합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착한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의 소리가 내는 대로만 살면 세상 모든 갈등과 모순은 사라질 것이라는 결론이 감동적이었습니다. 해학적인 분위기이지만 사실 플롯만 놓고 보면 무척 슬픈 사연들뿐이며 어쩜 우리 사는 세상이 이처럼이나 힘들고 온갖 악으로 가득한지 그저 눈물만 납니다. 에휴.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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