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든 역사학자 김승학 - 그의 삶과 사상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들의 역사관과 국가건설론 연구 11
김동환 지음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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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입니다. 본관은 배천인데 이곳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에 가깝습니다. 예전부터 고을 수령의 부임지로 선호된 고장 중 하나이며 그런 까닭에 백천(白川)이 아닌 "배천"으로 관용하여 읽는 방식을 모르면 무식하다는 평판이 나왔죠. 


김승학 선생은 이미 1962년에 건국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1964년 서거하기 2년 전의 일로, 이미 생전에 그 혁혁한 독립운동의 공적이 거의 온전히 평가 받았음을 뜻합니다. 반면 같은 참의부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심용준 선생은 1998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심 선생도 평북 희천군(현재 북한 행정 구역 기준으로 자강도 희천시) 출생이니 의주와 아주 멀지는 않습니다. 나이는 김승학 선생이 심 선생보다 15년 위입니다. 심 선생은 남북 어디로도 귀환하지 않고 1949년 길림성에서 운명했습니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를 전신으로 삼던 시절부터 활동하던 분들도 있었고, 김승학 선생처럼 임정과 연계하여 파견된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승학 선생의 독립운동 이력에는 "대한통의부" 관련 사항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심용준 선생은 문학빈, 양세봉 선생 등과 함께 원래 대한통의부의 주축이었던 분입니다. 


원래 참의부 주류는 촉성회, 혁신의회, 책진회 등에 합류하며, 참의부의 일부는 협의회, 국민부 등으로 가는데 저 일부가 바로 심용준 선생의 파벌입니다. 대개 혁신의회는 경상도 출신이 많았으며 원래 정의부의 수뇌였던 김동삼 선생이 국민부로 가지 않고 혁신의회로 합류한 건 경상도 안동 출신이었다는 이유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그냥 독자인 제 생각이지만). 반면 김승학 선생은 평북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의부의 주류를 따라 그대로 혁신의회에 속했습니다. 심용준 선생은 원래부터가 통의부 출신, 또 같은 평북 출신이자 심지어 나이까지 같은 양세봉 장군과 거의 일생을 두고 함께했습니다. 양세봉 장군이 일제 밀정의 하수인에 의해 암살되기 전까지 말입니다. 


김승학 선생은 일제에 의해 1929년 검거되었고 1934년에 출옥했습니다. 이때 즈음하여 양세봉 장군이 암살되었죠. 일제가 특히 조선인 수감인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뤘는지는 유명했고 특히 김 선생은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5년이란 긴 영어 생활을 마치고도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점까지도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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