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행정사
김석준 지음 / 부크크(bookk)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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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는 반도에서 단일 민족이 형성되고 오랜 연혁을 이어온 점도 놀랍지만 일찍부터 중앙집권국가가 만들어지고 체계적인 행정이 이뤄진 점도 크게 주목할 만합니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절을 겪으면서도 제대로 된 중앙권력 통치가 부재했으며 그저 지방 군웅이 할거하는 봉건 사회에 불과했습니다. 임란 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서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누렸으나 이 역시 고려, 조선 같은 체계적인 중앙집권식 정부는 아니어서 열도의 백성들은 동질적인 통치를 받은 게 아니었으며 일본이라는 국민의식 형성도 부재했습니다. 


역성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조선의 시스템은 전조인 고려의 그것을 대폭 계승했으며 이색이나 정몽주 등 충신들이 고려 왕실에 대한 절조를 끝내 버리지 않은 것도 그만큼 고려의 행정과 정치가 독자적인 장점, 미덕, 완성도를 갖추었다는 이유가 적지 않습니다. 신진 사대부가 구태여 역성 혁명의 길을 택한 건 북로남왜의 국난을 거치며 노정된 왕씨 왕실의 무능 노정이 한계에 달했으며 권문세가의 부정부패가 상상을 초월했고 마침 대륙에서도 정권 교체가 이뤄져 권력의 거대한 이동이 가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왕씨 조정과 권문세가는 이미 지는 해였던 원조(元朝)에 깊은 연줄을 대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 고려가 중세 동아시아사에서 전쟁의 1/4 이상의 분량을 담당하며 수행한 국제적 역할이 무척 컸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현종 연간에 벌어진 귀주 대첩이 특히 초점이 놓일 만한 대사건일 텐데 거란은 이후 한참 뒤 여진에 망하고 서쪽으로 쫓겨가 서요를 세운 후에도 중앙아시아 제 민족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거란을 그 전성기에 상대하여 대회전에서 궤멸을 시킨 고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란은 송 정벌에 앞서 후방을 편히 하려고 선제적으로 고려릎 침공한 건데 불의의 참패를 당함으로써 이후 대륙 정복은 꿈도 못 꾸게 되었습니다. 만약 병자호란 당시에도 조선이 이런 저력을 보였다면 동아시아사는 명-청-조선의 삼국 정립으로 아마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고려는 송, 요, 금에 대해 형식적으로 사대했으나 대내적으로는 엄연히 황제를 칭했으며 황제를 정점으로 한 세련된 관료제의 작동이 극치를 이룬 성공적인 행정을 만방에 과시헸습니다. 문종, 선종, 숙종 대에 이어진 번영은 이런 확고한 국가이념에 기반한 행정에 크게 힘입었으며 이는 인접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수준이었습니다. 저자는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동시성의 비동시성"을 논하며 같은 시대 존재했던 다른 국가 시스템과 비교하여 고려의 행정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작동했는지 치밀히 논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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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 몰랐던 일본 문화사 - 재미와 역사가 동시에 잡히는 세계 속 일본 읽기, 2022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조재면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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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큼이나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많은 부분이 오해일지도 모릅니다. 꼭 그들을 좋게 봐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게 장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도 않더라는 식의.... 여튼 중요한 건 어떤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볼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들 모습을 직시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 헌법에는 프라이버시권이 없다(p57)." 사실 명시적으로 프라이버시권이라 하지 않아도 어느 나라의 헌법이건 기본권을 보장하는 체제라면 당연히 해석상 권리 장전에 포함된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이 책에서도 "당연시되는 여러 권리를 전부 문장(문언. Wortsinn)으로 보장하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음 페이지(p58)에서 "이 권리는 인터넷에서 잊힐 권리로까지 발전하였다"는 비교적 최근의 사정도 덧붙입니다. 여튼,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일찍 근대화를 달성했다는 그들이, 정작 어느 나라에서도 보장하는 여러 권리들의 해석, 보장에 대해 이처럼이나 소극적이라는 건 의외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프라이버스권 관련해서, 재일동포 출신인 유미리 작가와 얽힌 소송도 소개합니다. 1980년대 중반 이분께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아쿠다가와 상을 받았다고 해서 당시 한일 양국엑서 큰 화제가 되었다고도 하죠. 우리가 유념해야 할 건, 2013년 아베 신조 내각이 도입한(p59) 마이넘버 제도에 대해 "프라이버시권 침해"라는 비판이 일었다는 점입니다. 한국은 이 비슷한 제도를 1969년에 도입했고, 지금도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이 당연하다는 듯 시행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거의 전혀 기본권 침해라는 비판이 일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적용 못 할 기준이라면, 이걸 갖고 남을 비판하는 건 어느 정도는 자기모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법부의 최고 기관을 "대법원", 여기 소속된 최고 법관을 "대법원장과 대법관"이라 부르지만 일본은 "재판소"라는 말을 쓰고 소속된 법관은 "재판관"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내각총리대신이 한 명의 장관을 임명하고 나머지 재판관은 내각에서 임명한다는 설명이 책 p39에 나옵니다. 얼핏 보면 삼권 분립의 원칙에 위배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한국도 헌법재판소의 경우 3인은 대통령, 3인은 국회, 3인은 대법원에서 뽑으니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책에서는 일본의 최고 재판소가 한국의 대법원+헌법재판소 격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대통령제를 채택한 미국도 마찬가지라서 정치성, 위헌성 심사 기관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제3공화국 시절 저런 체제였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이처럼 활성화한 건 6공화국 헌법(현행 헌법)이 들어선 후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국민 권익 구제 면에서 우리 시스템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책에는 오쓰 사건도 소개됩니다. 이 사건은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 사이에 터졌는데 한국은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아관파천 등으로 고생할 무렵이었죠. 이 사건은 나중에 러시아 활제에 즉위하는 황태자가 중상을 입은 걸로도 유명한데 책에서는 일본 사법부 독립의 계기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라면 사법부 독립의 진정한 계기가 무엇으로 기억될까요? 아니면, 21세기가 1/5 장도나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독립된 사법부를 갖긴 한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국의회라는 표현은 독일 통일(1871) 과정에서 처음 쓰였고 이를 당시 유럽을 열심히 모방하던 일본이 갖다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는 프랑스를 열심히 따라하던 그들이었으나 1871년 나폴레옹 3세가 전쟁에서 지고 유럽 대륙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상실함에 따라 일본도 롤모델을 급히 바꿨지요. 저자는 이런 일본의 의회 제도에 대해 "중의원 해산의 경우 우리 나라에는 없는 제도여서 신선했다(p30)"는 평가를 합니다. 한국의 의회는 4년마다 재구성되어 민의를 주기적으로 반영하지만 경우에 따라 의회 구성이 그 사이 크게 바뀐 정치적 지형이나 민심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해산 후 총선 실시가 답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의회의 반대를 못마땅해한 특정 지도자나 세력이 해산권을 남용할 수도 있겠죠. 해산을 당하면서(?) 만세 삼창을 외치는 전통이 약간은 코믹하기도 한데 책에서는 이 유래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일본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소위 정치 몀문가들 사이에 일종의 세습이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20여년 전 한국에서도 얼굴과 이름이 꽤 알려진 고이즈미 준이치로도 그런 유형이었고 지금은 그의 아들이 정치를 합니다(p79). 일본에서는 가업(라면집이라든가)의 오래된 승계가 큰 미덕으로 꼽히지만 정치에까지 그런 논리가 통할 수는 없죠. p75에는 일본이 1994년까지 중선거구제를 채택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우리도 유신 체제와 전두환 정부에서 1선거구 2인을 뽑는 시스템이었죠. 자민당은 거대한 정당이지만 여러 개의 파벌로 나뉘었는데 이 책에서는 알기쉽게 그들 파벌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따끔한 비판을 가합니다. 

 

일본 정치사는 두 명의 이치로로 요약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기시 노부시케, 사토 애이사쿠,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쟁쟁한 거물들이 각 시대를 주름잡았으나 이 책에서는 하토야마 이치로와 오자와 이치로를 듭니다. p79에는 아직 그가 총리를 지내지 못했다고 나오는데 그가 정계의 실권자로 등장한 게 그처럼이나 오래되었고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는데도 아직 가망이 안 보이는 건 아이러니입니다. 이 사람은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백범 김 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부동산 불패 신화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중입니다만 p106을 보면 일본이야말로 부동산이 죽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지속되어 온 곳입니다. 책에서는 또한 이런 신화를 조닌(町人) 전통과도 연결(p107)짓습니다. 더군다나 1970년대 정계 실력자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다름 아닌 토건 사업가로 일어서서 초졸 학력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이었죠(물론 부정부패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 경제의 전성기에는 부동산 불패 신화가 그야말로 확고부동이었으나 이후 소위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빈집투성이 거리가 속출하는 등 지금 보는 대로입니다. 한국은 현재 부동산 가격 폭등 때문에 힘들지만 앞으로는 과연 어떨지요. 

 

우리 나라도 세대간 갈등이 심각한 수준인데 일본은 각 시대마다 독특한 세대 규정을 하는 게 또 전통입니다. 이 책에도 p124 이하에서 각 세대별 특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한국의 베이비부머, X세대, MZ세대 등은 각각의 개성이 있으나 일본의 저런 세대 구분처럼 개성이 도드라지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대론만 재미있게 읽어도 일본 현대사를 다 꿴 느낌입니다. 


 

일본 민중은 한국과 달리 지배층이나 질서에 순응하는 민족성으로 잘 알려졌지만 이 책 p143 이하에서 잘 보듯 투쟁을 할 때 모든 것을 다 걸다시피하고 분연히 일어서는 모습도 없지 않습니다. 또 중세에는 이른바 잇큐라고 해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헌법에 있는 생존권은 구체적인 권리가 아니라 국가방침에 불과"할까요?(p165) 이 논의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 헌법학에서도 다루는 테마입니다. 이른바 프로그램 규정설, 구체적 권리설, 추상적 권리설 등이 대립하고 있죠. 현재 한국의 한법학계는 진보 성향이 주류라서 권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일본은 이 책에서 설명하듯 사정이 다릅니다. 

 

제국이란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일본은 한때 프랑스가 지배하던 인도차이나,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인도네시아, 미국 세력권인 필리핀, 영국 지배하의 버마(현 미얀마)까지 모두 침략하는 엄청난 세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한테 핵 두 방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본이기에 원자력을 대하는 태도는 남다른 게 당연합니다. 이걸 제대로 관리를 못 해서 십 년 전에 큰 재앙을 맞기도 했죠. 


 

이 책에도 나옵니다만 플라자 합의 때 일본은 국제경쟁력을 잃고 장기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대폭 오른 자국통화가치 덕에 해외 투자도 늘렸고 특히 해외 부동산 보유 면에서 일본은 독보적인 지위를 갖습니다. p200 이하에 자세히 나오지만 브라질과 일본은 특히 긴밀한 관계인데 비단 브라질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근 백 년 전부터 꾸준히 이민을 간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게 플라자 합의를 통해 환율이 대폭 오르자 일본인의 부동산 투자가 가속화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동일본 대진재 당시 방사능에 오염된 땅과 사람들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도하나의 차별 사유"가 생겼다며 원전 피해 자체보다 사회적 병폐를 우려했죠. 희한하게도 일본은 사회에 각종 차별이 존재하고 학교에서의 이지메도 몹시 심합니다. 이 책 p220 이하에도 부라쿠민 차별이 있는데 반면 한국은 천민 거주 구역 명칭이었던 "부곡"이 아직도 곳곳에 남았으며 아무 거부감 없이 통용되는 게 대조적입니다. 

 

동아시아인들은 대개 세속적입니다. 서양인이나 중동인, 인도인처럼 종교에 침잠하는 일이 적고 다른 걸로 싸웠으면 싸웠지 종교로 큰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일본도 불교를 한때 깊이 믿었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시대를 겪으며 불교의 기반이 많이 훼손되었고 세속화의 길을 급격히 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장례식만큼은 절에서 하는(p262)" 정도에 그치지만 여튼 오랜 종교 문화의 흔적은 그대로 남았으며 마치 한국 산 곳곳에 명찰이 남아 역사를 증언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일본은 이처럼 우리와 많은 모습이 닮기도 했으며 또 많은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문화사의 각종 개성은 그들 심성에 깊숙이 숨은 어떤 본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문화사는 확실히 재미도 있으며 동시에 뭔가 깊은 성찰의 소재를 우리에게 던져 주기도 합니다. 일관되면서도 비판적이고 그러면서도객관적이며 덜 감정적이고 덜 편향적인 저자의 시선이 특히 좋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기 힘든 태도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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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원은 유튜브
스가야 신이치.민진홍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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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유튜브가 새로운 수익원이 되어 가는 시대입니다. 유튜버를 전업으로 하는 이들도 있고, 이를 전업으로 삼을 수는 없어도 쏠쏠한 부업으로 잘 활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개인뿐 아니라 회사 역시 자사의 영업 활동에 인터넷을 적절히...라기보다 거의 필수 요소로 잘 적용하여 몇 배의 성과를 올리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에 원격 근무 정도를 말하는 줄 알았으나, 이 책에 소개되는 여러 일본 기업의 사례에서는 훨씬 넓은 범위까지 그 응용의 효과가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영업 활동의 주요 3가지 상황은 1) 고객 모집 2) 클로징 3) 고객 관리라고 합니다(p40). 그런데 많은 이들은, 1) 고객모잡 단계에서 영업이 끝나는 줄로 착각한다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모집은 어디까지나 모집일 뿐 "클로징"이 없으면 계약도 현금 거래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2)까지를 마친 고객이라 해도 이후 크게 실망하여 이탈하거나 재구매 등을 하지 않는다면 영업은 도로 원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아마 원점 재시작 정도가 아니라 이미 평판이 나빠졌으므로 훨씬 어려운 영업 단계를 거쳐야 할 것입니다. 


매출이란 무엇일까요? 책 p42에서 그 공식을 소개하는 대로, "고객수x객 단가x재구매(소개)"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떻게 하면 전년도 대비 매출을 2배로 올릴 수 있을까요? 책에서는 1) 밸런스형은 저 세 요소를 각각 1,26배로 올려서 달성하는 유형이라고 합니다. 1.26이라는 숫자는 아마 2에 √(루트) 말고 세제곱근 루트를 쳐서 구한 수치일 것입니다. 1.26을 세 번 곱하면 2에 가까워지는 거죠. 


2) 고객 의존형은 객단가와 재구매는 그대로 두고, (신규) 고객 수를 두 배로 늘려 목표를 달성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단한 능력자임에는 틀림 없으나, 책에서 말하는 대로 불경기에 닥치면 이런 식으로는 성장의 지속이 어려울 뿐 아니라, 모집한 고객을 만족 못 시킨다면 장기적으로는 매출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저자가 중시하는 유형은 3) 고객 유지형, 즉 고객수와 객단가에 변화를 안 줘도 재구매 팩터를 2배로 늘려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유튜브 등을 활용해 바로 이 세 번째 팩터를 어떻게 늘릴지를 중점적으로 설명합니다.


유튜브의 효과를 그렇게나 강조한다니, 아마 웹에 올려지는 영상 등은 기교를 많이 넣고 효과적인 편집을 통해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합니다. p65에서 이런 마케팅의 본질은 "고객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영상 테크닉보다는 "경영자가 카메라 앞에 서서 성실한 메시지를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합니다. 


p69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튜브 제목에 사용되는 키워드에 관한 표가 나옵니다. 눈물샘 자극, 충격적인 결말, 중대 발표... 그런데 저자는 이런 원칙은 조회수를 증가시켜 광고 수익을 높이려는 개인 유튜버들의 시청률 지상주의에나 쓰일 법한 것이며,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유튜브 마케팅과는 무관하다고 힘 주어 강조합니다. 영상 마케팅에는 1) 자사 관점 2) 고객 관점 3) 경쟁사 관점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앞서 "CEO가 카메라 앞에 서서 진실한 메시지..."란 대목이 있었으므로 아마 1)을 강조하는 내용 아닐까 하고 우리 독자들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그런 생각이었다면, 안타깝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고객들은 어떤 키워드를 검색창에 넣고 영상을 찾아옵니다. 이 키워드는, 경쟁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고객의 고민, 이 고민을 반영하는 키워드라야 한다는 거죠. 어떤 회사건 간에 자사 제품의 장점을 공격적으로 강조하고 해시태그로 띄웁니다. 그러나 그건 자사의 관점일 뿐입니다. 소비자는 "혹시..?"라며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이런저런 불안감을 갖습니다. 회사는 미처 이런 니즈를 캐치 못 했거나, 아니면 알았다 해도 어차피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자신이 없거나 해서 이를 키워드에서 빠뜨립니다. 이런 회사는 설령 아무리 서비스와 제품이 좋다 해도 사업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 저자는 앞으로 음성 검색이 늘어날 것이므로, 무조건 짧고 간단한 키워드만 염두에 둘 게 아니라 길이가 긴 어구도 유념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이 부분은 1) 고객 모집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무래도 인터넷은 공간의 제약을 극복했으므로, 개별 수요로는 크지 않은 자잘한 수요를 모으고 모아 큰 매출을 창출할 수 있는, 이른바 롱테일 마케팅에 강합니다. 1년에 몇 번 정도밖에 검색 안 되는(p76) 자잘한 키워드도 이를 잘 축적하면 결국 그런 게 모여 전체 매출의 80%까지도 차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줌(zoom) 등의 앱(프로그램, 혹은 솔루션)은 특히 영업의 두 번빼 상황인 2) 클로징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적절한 키워드 설정으로 1) 고객 모집에 효과를 봤다면, 이제는 2) 클로징에서 확실히 고객을 잡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강제 혹은 테크닉으로 클로징하기가 대세였다면, 요즘은 신뢰 관계를 구축하여 상대에게 결정권을 충분히 주는 방식이 훨씬 낫다는 겁니다. 저자는 "고객 입장에서는 일생에 한 번도 힘든 거액을 지출하는 순간인데, 어떤 강요라든가 말재주로 홀리는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안 통한다는 거죠. 


낡은 방식이긴 하나 저자가 예로 드는 과거의 테크닉이라는 것도 제법 재미있습니다. 고객이 어떤 단점을 걱정하면,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로 분위기를 전환하며 다른 장점으로 곧바로 치고들어가는 거죠. "무료, 긴급, 한정" 등의 문구를 쓰면 고객은 안 쓸 것도 쓰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어떤 서비스 연장할 때 모집인으로부터 "이 혜택은 오늘까지"라며 은근 압박하는 멘트를 들었는데, 이미 저는 다른 경로를 통해 그 정도의 혜택은 혜택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 모집인에 대해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방식이 다 낡았으므로 더 이상 활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보가 넘쳐나므로 고객도 알고 경쟁사도 알기 때문에 역효과나 안 나면 다행이라는 겁니다. 고객은 영업력이 강한 특정 에이전시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정보가 이제는 많으므로) 다양한 판매처를 거치며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이거다 저거다 결정하기가 힘들면 "더 신뢰가 가는 판매자"에게서 산다는 거죠.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안심한다(p108)"는 격언,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클로징 동영상은 첫째 자기소개와 자기만의 강점 설명, 둘째 자사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에의 호소, 셋째 불안과 의문의 해소라는 요소를 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게 유튜브 동영상에 의해 구현된다(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종전에는 개별 영엽사원이 맨투맨으로 하던 걸 이제 영상이 대신하는 거죠. 이 세 요소를 통해 고객의 마음에 심어지는 게 바로 "신뢰"입니다.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고객들로부터 "스가야 씨를 분명 처음 만나는데도 처음 만나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을 무척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게 영상을 실제로 만들어야 모든 게 완성되겠으므로 특히 p128 이하에 나오는 영상 스크립트 작성이나 촬영 연습 요령 같은 걸 잘 읽어 봐야 하겠습니다. 


공격적으로 모객을 하여 신규 구매자, 가입자를 대거 끌어들여도, 이쪽에만 회사 역량을 다 쏟아부어 기존 고객 관리가 소홀하면 결국 대거 해약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회사는 "일일이 기존 고객을 대면하여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면 결국 회사 자원이 한쪽에만 쏠리므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포인트에도 유튜브 영상을 잘 활용하여 비대면으로 가능하면 많은 고객을 응대하는 게 중요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일단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며, 재구매를 촉구하는 듯한 인상은 주지 말아야 합니다. "구매 감사 동영상"도 성의를 다해 제작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고객은 "한번 팔아먹었으니 끝"이 아니라 반대로 "이 업체는 지금부터 서비스가 시작(p151)"된다는 이미지를 받아 더욱 로열하게 된다는 겁니다. 또, 성의 있게 만들어진 FAQ 영상은 별도의 고객 응대 비용, 반복되는 서비스를 모두 대체하므로 더욱 효과가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은 고객 말고 직원 교육 동영상으로 활용될 수 있어서 여러모로 비용이 절감됩니다. 


p191에서는 부진한 영업력으로 고전하던 마가라 씨의 사례가 나오는데 이분 역시 부족한 부분을 영상 제작으로 돌파하여 직장인 경력의 대전환점을 마련한 경우입니다. 대면으로 실적 올리는 유형보다, 한 번에 수천 명도 만날 수 있는 웹상의 스타가 더 힘이 세어지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제5장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요령을 소개합니다. 검색에서 잘 노출되기, 썸네일 잘 만들어 클릭률 올리기, 브라우징 기능, 고객모집 동선 개선 등이 잘 설명되네요. 이를 통해 비용도 절감하고, 구글의 플랫폼을 대신 쓰니 자본 투자도 줄일 수 있습니다. 동영상이 함께 있는 컨텐츠가 대체로는 먼저 검색되는데, 유저(셀러) 중 동영상을 함께 올리는 비율은 불과 3%라고 합니다(p242). 이 마지막 장은 한국인 공저자 민진홍씨의 집필 부분이므로 "최근 네이버가 한국에서도 구글에 밀리는 이유" 같은 게 잘 설명되어서 한국의 환경 이해에 특히 도움을 줍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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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아리랑 - 항일독립전쟁 유적에서 외치는 광복 70주년의 함성
최범산 지음 / 주류성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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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을 벌인 애국자들에 대해 우리 후손들이 갖는 존경심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의견 같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국사 교과서에 무장 독립 투쟁을 다룸에 있어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등까지만 고작 다루곤 했었으나 최근에는 연구 결과가 확장되어 이후 시기의 다른 전투들도 널리 취급합니다. 이에는 중국과의 수교 후 이념적 장벽이 상당 정도 해소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추측도 해 봅니다. 


봉오동 청산리 양 전투는 1920년대 초의 일이며 이후 간도 참변 등 일제의 대대적 보복이 있었습니다. 특히 간도 참변은 민간인 학살의 성격이 크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입니다. 독립 운동의 지형은 자유시 참변 이후 큰 변화를 겪었는데, 더군다나 1926년 이후로는 대대적 각성이 일어 민족유일당 운동이 반도 내에서는 물론 만주 일대, 혹은 교민 사회에 널러 퍼졌습니다. 이 영향을 받아 기존의 3대 군정부가 통합 움직임을 겪고 혁신의회(책진회)와 국민회(협의회) 계열로 나뉘었다는 사실도 지난주차, 지지난주차 서평들에서 정리한 적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여튼 이런 민족 역량 결집의 효과로 성과가 제법 큰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중 몇 가지는 그 순서까지 잘 알아 두어야 한능검이나 공무원 시험 등에서 좋은 성과가 날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공리적으로 무슨 시험 등에서 성과를 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런 사항은 후손으로서 잘 알아 두어야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혁신의회-책진회 계열의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로는 쌍성보 전투, 경박호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대전자령 전투가 있고 지도자는 지청천입니다. 대체로 이 순서까지도 알아둘 필요가 있고, 각 전투의 경과나 장소까지 알면 더욱 좋겠죠. 인터넷에 떠도는 이런저런 자료에는 경박호 전투의 연도가 1932로 나온 것도 있으나 오류이며 저 다섯 전투 중 쌍성보 전투만 1932년의 일이고 나머지 넷은 모두 1933년도의 사실입니다. 


반면 국민회-협의회 계열의 조선혁명군이 주도한 전투는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가 있습니다. 또 이는 과거 참의부가 주관한 남만주 일대에서 벌어졌는데 참의부 주류가 혁신의회에 합류했음을 감안하면 다소 아이러니입니다. 조선혁명군은 양세봉 장군 계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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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가 기가 막혀! - 야구광도 몰랐던, 너무나도 재미있는 야구 이야기
기영노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저자 기영노씨는 야구뿐 아니라 스포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스포츠 전문가 중 한 사람입니다.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여 특유의 통찰을 보여 주곤 하죠. 


"괴물 투수들의 포스트시즌 징크스"가 나오는데 선동렬의 경우 과거 고질인 손가락 물집으로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 등판할 수 없었으나 위력 시위용으로 불펜에서 몸을 풀었는데 이를 보고 지레 겁을 먹은 상대팀 백전노장 가네히코... 아니 김영덕 감독과 선수들이 전의를 상실했다고도 하죠. 이런 일도 있지만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의 김용철(롯데에서 이적)에게 홈런을 맞고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슈퍼베이비" 박동희는 정규시즌에서 부진하다가도 포스트시즌에서는 그의 포텐이 다 발휘되는 위압적 피칭을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도 1990년대 초반에 했으나 책에는 "마누라 자식도 못 믿는다"는 재미있는 아티클이 나옵니다. 기영노 저자 특유의 입담이 돋보입니다. 


장호연은 마치 지금의 유희관처럼 구속이 느린 투수였으나 제구력이 일품이었고 타자들과의 수싸움에 능했습니다. 투수가 반드시 강속구로 승부 보는 건 아니라는 관점을 팬들에게 깊이 심어 준 선수였습니다. 다만 요즘은 야구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구속은 느리고 제구만 좋으면 빅리그에서 안 통한다는 상식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이번 도쿄 올림픽 때 우리 타자나 투수나 모두 해외의 선수들한테 고전했습니다. 


고 김동엽 씨는 김응룡 감독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야구 선배이고 경력도 화려한 인물이었습니다. 특유의 감정적인 반골 기질 때문에 지도자 생활을 오래하지 못한 게 그 자신에게나 팬들에게나 큰 아쉬움으로 남죠. 


책에서는 양준혁을 "원조 괴물"로 회상하는데 확실히 1993년 데뷔 당시 1년을 묵힌 대졸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쳤다하면 홈런, 빚맞으면 안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단한 실력, 장타력과 정교함을 겸비한 완성형 루키였음이 분명합니다. 윤동균과 장채근, 이대호를 비교하는 대목도 있는데 이 세 사람은 체구가 비슷할 뿐 활동시기도 다르며 포지션도 심지어 다릅니다. 장은 포수, 이는 내야수, 윤은 외야수로 주로 뛰었으니 말입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둔 최동원을 물리치고 시리즈 MVP를 받은 유두열을 두고 당대에는 사실 큰 논란이 일지는 않았습니다. 7차전에서 원체 전력도 열세였고 최동원 말고는 믿고 내세울 투수가 없던 롯데가 열세였는데 유두열의 3점 홈런 한 방 덕택에 게임의 향방이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최동원이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결국 그 한 방이 아니었으면 졌을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는데 요즘은 스탯을 중시하는 풍조이므로 시리즈나 정규리그에서나 극심한 부진을 보인 유두열이 최동원을 밀어낸 게 다들 말이 안 된다고 여겨서겠지요. 물론 당시에도 최동원이 최고 수훈자라는 대중의 여론은 지금과 다를 바 없었고 아마 기자들이 보기에 유두열의 임팩트가 더 강했던 듯합니다. 이 책이 쓰일 때에는 최동원 씨가 아직 생존하여 한화 코칭스탭으로 있었을 시절입니다. 


백인천 전 감독은 LG에서 기어이 우승을 일궜고 원년 그 전신인 MBC 청룡에서 그런대로 좋은 성적을 올린 지도자였고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타격 인스트럭터로 부임하여 이후 우용득 당시 감독을 대체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전병호 사건으로 기어이 하차하고 이때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백 감독은 선수들 타격 폼 지도를 너무 일률적으로 한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하나 잭팟이 터진 경우가 이승엽이었습니다. 백인천 본인이야 일본에서 타격왕을 했을 만큼 레전드였으나 지도자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성과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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