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암의 단편 소설 11편이 실렸습니다. 오래 전 소설들이라서 솔직히 뭔가 깝깝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예전 소설가들은 이런 소재를 즐겨 작품에 형상화했나 보다 하고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서양에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이야기가 오랜 동안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누구나 남한테 사랑을 받는 건 좋아해도 남에게 뭘 베풀 줄은 모르는데 책 중 처음에 나오는 단편 <갯바람>을 보면 아 이런 삶도 있구나 하며 새삼 고개가 숙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과거에는 다들 빈곤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위생 상태도 좋지 못했으므로 배우자를 여러 이유를 통해 일찍 잃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럴 때 며느리, 혹은 사위였던 이가 시부모, 혹은 장인장모와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지가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겠습니다. 저무렵에는 또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배우자 사별시 동일 생계를 이루고 사는 그 관계부터 쉽사리 청산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책프 25기 22주차에 안장환의 <안개강>을 리뷰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내를 잃고 자신은 월남전 참전 부상으로 다리를 저는 상태인데 장모와의 관계가 애매해집니다. 물론 장모나 사위 모두 나쁜 사람들은 아니며 작품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그저 가난이 원수인 셈인데 세상에 아무리 가난한 세상이었다고는 하지만 한강에서 잉어 낚시를 통해 생계를 이어간다는 설정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나마 공업화가 진척되면서부터는 강이 오염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아무튼 저 시아버지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잘 되고, 개인적으로는 OOO이 저 상황에서 꼭 그래야 했나 싶기도 합니다. 다른 단편들에도 1970년대 서울의 빈곤층(이라고는 하나 당시 기준으로는 평균적인 서민들)의 삶이 잘 드러나는, 마음이 좀 답답해지는 그런 작품집이었습니다. 가난할 때 오히려 훈훈하고 따뜻한 인간성이 공유되고 표현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판단은 독자들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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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교수는 1970년대~80년대 인기 작가였으며 소설, 시 두루 창작했고 특히 소설은 고전적 정제미가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열 아홉 편의 소설과 시들이 실렸으며 <흙덩이와 금불상>, <처형의 땅> 등이 유명한 단편입니다. 그의 본령은 시(詩)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쪽은 그의 소설들입니다. 


이 책에 실린 중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인형의 교실>입니다. 중의적인 제목이며 어떻게 보면 제목 속에 스포일러가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네요. 향토색도 짙게 배어나고 휴머니즘, 참된 스승의 자세 등을 강조한 작품이긴 하나 읽기에 따라서 이 작품을 미스테리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5기 13주차에 서영은의 <뱁새의 꿈>을 리뷰했었습니다. 그 작품도 젊은 여선생이 벽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답답하고 발전 없는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이 단편에도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여선생이 시골에 부임하며 겪는 사연이 나옵니다. 물론 <뱁새의 꿈>은 아주 가난한 도시 빈민 가정 태생의 여선생이었다는 점이 다르며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도 생판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서영은 작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당대의 문호 김시종 선생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도 한 분인데 저 <뱁새의 꿈> 여주인공도 작품 속에서 돈 많은 재일교포 사업가와 연을 맺을 뻔한 게 어떤 연상을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큰 차이도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고인들께 실례가 될 수 있어 여기서 언급을 줄이겠습니다. 


여선생은 깡촌 어느 학교에 부임하여 그 나름 의욕적으로 교사의 직분을 수행하려 듭니다. 이상한 건 부임 첫날 수업 중 옆 책상에 벗어 걸어 둔 자켓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학생이건 뭐건 손버릇이 나쁜 애를 잡아 교정하는 건 교사의 임무이기도 하니 절도범을 색출할 만도 하겠건만 여선생은 그러지 않습니다. 옷 욕심이 많을 젊은 여성인데도 엄청 대범하고 어른스럽게 굽니다. "아이들을 범죄자로 몰고 의심하며 난리를 치기보다,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물건을 돌려놓길 기다리자." 구태여 저렇게까지 안 해도 선생답지 않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자켓은 돌아오지 않고 다음에는 모자가 사라집니다. 이제 선생은 어디 어쩌나 보자는 생각으로, 이것도 한번 가져가 보라는 식으로 스카프를 창틀에 걸어 놓습니다만 기대는 배반당하고 나중에는 펜, 반지 등 귀중품들도 사라집니다. 선생 본인의 입장에서나 작품 밖의 독자가 보기로나 이제는 구제불능의 악질 도둑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선생 물건을, 어쩌다 한둘도 아니고 아예 가산을 들어먹을 만큼(?) 가져가는 애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이 학급에는 선배 여교사(시골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촌아낙인지 교사인지도 모를 외양입니다)의 어린 딸도 속해 있습니다. 이 아이만큼은 거짓말을 안 하겠지 하는 기대로 선생은 조용히 따로 불러 물어 봅니다. 그러나 얘마저도 "몰라요!"라 소리치며 도망갑니다. 이 장치는 치밀한 복선입니다. 이런 아이는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설령 악질 급우의 위협, 친분 같은 게 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선생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눈치빠른 독자는 여기서 사태의 진상이 무엇일지, 적어도 어떤 방향성을 띨지 감을 잡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한편 주변 인물들은 선생 주위에서 "이제 떠날 때가 되었나?"라며 계속 독자를 향해 암시를 줍니다. 물론 독자는 결말을 다 읽고 나서야 이런 대목들이 암시요 복선인 줄 깨닫습니다.


이 단편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1980년대 중반에 제작 방영되었는데 시나리오 각색자가 장선우 감독입니다. 아주 젊었을 시절의 솜씨이겠으며 원작과는 차별화되는 여러 기법도 눈에 띕니다. 가령 끝까지 교사의 직분을 다하며 아이들과 한마음이 되고 싶었으나 좌절하는 대목에서, 선생은 마음 속으로 전학급이 자신의 모습을 화폭(초등용 스케치북)에 담아 선물하며 여태 가져간 옷, 물품 들을 모두 돌려 주는 감동적인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내 그녀 마음 속의 환상인 게 드러납니다. 또 당시로서는 드물었을 장거리 전화가 서울 본가 모친으로부터 걸려와서 대기업 취직 자리, 혼처 등을 권하는 말을 들을 때 선생은 교직을 단념하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며 아이들 앞에서 교사인 자신이 거꾸로 벌을 서는 환각을 떠올립니다. 이런 장면은 교사로서의 좌절, 낙담을 하나의 시퀀스(일종의 극중 극이라고 할까)로 은유한 것인데 역시 원작에는 없는, 감독 장선우만의 이지적인 창의입니다(단막극 연출자는 다른 분이며, 장선우씨는 이 작품에서 각색만 했습니다). 아무튼 젊은날의 장선우 감독의 한 흔적을 이런 드라마에서 발견한다는 게 재미있는 체험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여주인공역은 젊었을 때의 김혜수씨가 나오는데, 1970년생이라고 되어 있는 김혜수씨가 드라마 제작연도인 1986년이라면 고작 열 여섯 살때입니다. 그런데도 교대를 갓 졸업하고(물론 2년제 졸업자 교사도 당시에는 많이 뽑을 때였으므로 더 어린 나이일 수 있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역을 맡았던 것입니다. 어리긴 확실히 어린 모습이나 16세로 보기엔 또 숙성한 외모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는 주인공이 거울을 보며 "참 예쁘긴 하지만 어리석게도 생겼구나" 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 역시 원작 소설에는 없습니다. 아마 장선우 각색자가 신인배우 김혜수씨를 보며 느낀 바 그대로를 대사 안에 담은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김혜수씨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오히려 커버가 되지만) 10대때는 물론 20대, 30대 내내 특유의 얇은 목소리 때문에 뭘 말해도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서도 대사연기만큼은 솔직히 국어책입니다. 그러나 그녀만의 엄청난 매력이 있어서, 극에 몰입하는 데에, 더군다나 여교사의 거의 1인극에 가까운 이 드라마에 집중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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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 청 제국의 건설자
천제셴 지음, 홍순도 옮김 / 돌베개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여태 책프에 참여하면서 누르하치를 중점으로 다룬 여러 책을 리뷰했으나 그 제목이 정면으로 "누르하치"라 붙은 이 책을 아직 안 읽고 있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중학교 국사,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고 그 특유하게 게슴츠레한 눈매라든가 느끼하고 음흉한 입매가 인상적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교과서에 그 얼굴을 묘사한 당대 혹은 근시대 초상 도판이 실림). 저자는 개인적으로 누구인지 잘 몰랐던 분이고 역자는 중국 전문가로 유명한 홍순도 기자입니다.


애신각라는 제가 배웠던 중학교 교과서에서 각주로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라"는 설이 있다고 나왔을 만큼 (이상하면서도) 우리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문구(?)입니다. 물론 청 제실의 성씨이죠. 많은 학자들이 "아이진-궈러" 단위로 떼어 읽어야 옳으며 따라서 저런 해석은 근거 없다고 주장하며 또 그것이 타당하겠습니다만 여튼 한국인에게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구성임에 틀림 없습니다. 과거 거란이나 여진의 금은 불교를 공식적으로 숭상했습니다만 청 황실은 티벳을 중시했을망정 불교를 떠받들지는 않았는데 여튼 그들의 발상지에 "만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청조가 망하고 나서, 또 일제가 최종적으로 패망한 후에, 이 "만주"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다른 이유 때문에) 아주 금기시됩니다.


테무진이 몽골(몽고) 부족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에 거대 제국 초석을 세웠을 때 경제 문제에도 잘 대처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아예 이 분야에 대해 무지했다고 평해도 무방할 테며, 뭐 그저 약탈에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데 누르하치는 그 사나운 여진 부족을 통일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었으나 이후 무엇으로 이 대단위 국가가 먹을거리를 유지할지에 대해 일정 부분 해답을 내놓은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또 통일 과정에서의 살상이 테무진보다는 덜했다고 봐야겠는데 그만큼 정치술이 뛰어나서이기도 합니다. 몽골과는 달리 여진은 근거지가 다르므로 남방에 위치한 탄탄한 나라 조선과의 관계를 결코 등한시할 수 없었는데 누르하치는 그 점에서도 탁월했습니다. 우리는 서인 정권의 잘못된 대처로 겪은 치욕인 병자호란의 결과만 갖고 조선 정부 전체의 무능을 짐작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누르하치는 그야말로 "도광양회" 스탠스로 나아가다 드디어 역량이 충분해졌다 판단하고 "칠대한"을 선포하는데 마치 마오쩌둥이 자주 입에 올린 "애병불패"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대단한 역량을 갖춘 지도자였고 신기하게도 그 후계자들 역시 범상치 않은 능력자들로 대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만 건국 과정에 깃든 여러 행운도 참 보기 드문 정도의 것입니다. 이래서 천하는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있지 않나 싶지만, 그런 행운 역시 다 능력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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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도 하면서 참여하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막연한 감(感)이라든가, 분위기에 휩쓸려 투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로 감이 좋은 분들은 명시적으로 이론화하지는 못해도 어떤 성공하는 패턴 같은 걸 정확히 감지하여 투자를 하기에 성과가 좋습니다. 그러나 99%의 투자자들에게는 이런 방식의 투자가 불가능하기에, 함부로 따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결국은 원칙과 룰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다음에 개별 기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종목 투자가 이뤄져야겠습니다.


어제(금)도 시간외 거래에서 하한가에 가까운 시세를 보인 종목이 나왔는데, 오후 3시 30분 이후에 공시가 이뤄져서 그리 되었습니다. 시간외 거래에서는 이른바 동시호가 매매 방식으로 거래가 이뤄지는데요. 정규 시간대에는 누가 매도 주문을 내면 그 가격에 사겠다는 이가 나타날 때 바로 체결이 됩니다. 또 누가 매수 주문을 낼 때 팔겠다는 이가 보이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호가창을 보면 해당 주문이 매수형인지 매도형인지가 빨간색, 파란색으로 다르게 표시됩니다. 또, 전체적으로 매도, 매수 중 어떤 게 많은지에 따라 체결강도라는 게 정해지죠. 100이 넘으면 그만큼 매수 주문이 많다는 뜻으로서, 인구통계에서 "성비"의 개념과도 비슷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원칙적으로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주식은 다 액면이 있으나, 미국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미국 주식을 직접 거래하는 분들이 많아서 이 사실도 널리 상식처럼 알려져 있죠. 우리는 증권시장에서 특정 회사의 주식이 높은 가격을 이룰 때, 보유하는 주주인 우리는 좋지만(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으므로), 회사에는 무슨 도움이 되는지 간혹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시총이 높다는 게 회사에 직접적으로는 어떤 도움이 되는가? 내가 가진 주식이 아무리 가격이 올라도, 결국은 "팔아야" 이익이 실현되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은 이 책의 pp.21~25에 잘 나옵니다.


2023년부터는 주식 양도소득세도 일정 이상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에 한해 낼 의무가 생기지만 현재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식 거래를 할 때 보면 1주씩 1주씩 별 의미도 없는 매매가 호가창을 주루룩 채우는 걸 구경할 때가 있는데, 이런 단주매매는 자전거래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왜 자전거래가 이뤄지는지 이 책에 쉽게 잘 설명되어 있네요.


서킷브레이커와 사이드카를 혼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선 서킷브레이커가, 그 이름처럼 사이드카보다 훨씬 강력한 조치라는 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이드카는 프로그램 매매만 중단되며 시간도 5분 동안이지만, 서킷브레이커는 20분 동안 모든 매매가 중단됩니다. 또 사이드카는 하강시뿐 아니라 급격한 상승시에도 발동되지만, 서킷브레이커는 하강시에만 내려집니다.


왜 PER이 낮은 종목을 사야 하나? 이 책뿐 아니라 모든 교과서에서는 "현재 저평가된 주식을 사야 이후 주가 상승이 더 큰 폭으로 이뤄질 걸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PER이 낮게 책정된 섹터나 종목은, 시장에서 인기가 없는 어떤 구조적 요인이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피해야 한다는 실전 전문가들의 주장도 있으니 어떤 절대적 원칙처럼 여길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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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0년대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소설가 백용운의 단편집입니다. 모두 열 네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제가 재미있게 읽은 건 "고가(古家)"입니다. 이 "고가"는 1986년 행림출판사에서 나온 <우수단편모음>에도 다른 작가들의 단편들과 함께 수록되었습니다. 후자는 지금 당연히 절판되었고 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이 든 노인들에게는 그저 자식들이 유일한 희망이요 보람입니다. 주인공 노인은 시골에 제법 큰 집을 짓고 사는데 전통적인 한옥입니다. 그렇다고 아흔아홉 간 기와집 같은 건 못 되며 다만 정원의 조경이 서양식을 약간 닮은 듯 넓고 아름답습니다. 시골이다 보니 여러 가지가 불편한데 예를 들어 안테나를 단단히 설치하지 않으면 TV 수신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마 도시라면, 비록 지상파밖에 안 나온다고 해도 케이블을 설치해 더 안정적으로 방송을 시청했을 것입니다. 


"채널이 하나밖에 안 나오잖아?" 


영감님과 그 마나님은 험한 말로 자주 싸우지만 마음에까지 그리 날이 선 건 아닙니다. 속으로는 늙어가는 배우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소포가 도착했는데 영감님은 연신 불평입니다. 


"코쟁이 돈은 뭐하러 보냈대?"

"좀 있으면 한여름인데 세타(스웨터)는 또 뭐여? 제 부모가 돈이 없어 굶나, 추위에 떨기라도 하나?"


이것은 불평이 아니라, 먼 이국 땅에서 한번 찾아오지도 않고 선물만 보내는 아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지들 살림에나 보태지 이런 건 뭐하러 부담되게 보내냐는, 뭐 지금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 없는 부모님들의 한결 같은 마음씀입니다. 참고로 시대 배경은 1980년대 중반쯤으로 보입니다. 


저 즈음에 북미 대륙으로 이민을 간 중산층도 많지만 소설을 더 읽어 보면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 놀랍게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첫째 아들의 사정인 듯합니다. 당시 외무고시는 몇 명 뽑지도 않았는데 이런 시험에 합격했다면 대단한 수재였겠고, 나중에 나오듯이 영감님은 그런 아들 자랑이 자자합니다. 


이처럼 자녀들이 잘 풀린 노인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자녀들이 옹색한 삶을 사는 데다, 그들로부터 대접도 제대로 못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침부터 까치가 울어대기에 혹시 아들이나 딸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손님이 오기는 왔습니다. 노인의 오랜 동년배 친구입니다. 행색도 그렇고 왠지 느낌이 좋지 못합니다. 


이런 친구를 향해 주인공은 마치 상대방 속을 뒤집어 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자식 자랑을 시작합니다. 

"첫째놈은 뭘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가 혼자 공부해서 젊은 나이에 외시에 덜컥 붙었지."

"그건 마나님이 머리가 좋아서야. 자식 머리는 원래 모친을 닮는다잖아?"

"둘째는 대쪽 같은 성미라서(이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가 원하는 상대 아니면 시집 안 간다고 사흘을 굶었지. 딸 하나 없는 셈치고 그냥 시집 보냈는데, 그 집안이 그렇게 일어날 줄 누가 알았나? 셋째는 부잣집에 시집을 갔고, 넷째는..." 

----(중략)---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나?" "자네가 입만 벌리면 떠드는 자랑질인데 이 동네 사람 중 모르는 놈이 있나 어디?"


반면 친구 노인은 자기 신세를 축구공과 같다며 한탄합니다. 자식들이 모시지 않으려고 서로 미룬다는 뜻이겠습니다. 친구 노인은 서럽게 주인공 고가의 대들보를 치며 웁니다. "쥑이소, 쥑이소..." " 이 사람아 죽이긴 누굴 죽이란 말이여?"


친구 노인은 알고보니 자식들로부터 가출 신고가 되어 있었습니다. 행방을 안 그 막내아들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밤늦게 고가를 찾아옵니다. 그런 아들이라도 친구 노인은 막상 얼굴을 보니 좋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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