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교수는 1970년대~80년대 인기 작가였으며 소설, 시 두루 창작했고 특히 소설은 고전적 정제미가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열 아홉 편의 소설과 시들이 실렸으며 <흙덩이와 금불상>, <처형의 땅> 등이 유명한 단편입니다. 그의 본령은 시(詩)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쪽은 그의 소설들입니다. 


이 책에 실린 중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인형의 교실>입니다. 중의적인 제목이며 어떻게 보면 제목 속에 스포일러가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네요. 향토색도 짙게 배어나고 휴머니즘, 참된 스승의 자세 등을 강조한 작품이긴 하나 읽기에 따라서 이 작품을 미스테리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5기 13주차에 서영은의 <뱁새의 꿈>을 리뷰했었습니다. 그 작품도 젊은 여선생이 벽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답답하고 발전 없는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이 단편에도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여선생이 시골에 부임하며 겪는 사연이 나옵니다. 물론 <뱁새의 꿈>은 아주 가난한 도시 빈민 가정 태생의 여선생이었다는 점이 다르며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도 생판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서영은 작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당대의 문호 김시종 선생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도 한 분인데 저 <뱁새의 꿈> 여주인공도 작품 속에서 돈 많은 재일교포 사업가와 연을 맺을 뻔한 게 어떤 연상을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큰 차이도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고인들께 실례가 될 수 있어 여기서 언급을 줄이겠습니다. 


여선생은 깡촌 어느 학교에 부임하여 그 나름 의욕적으로 교사의 직분을 수행하려 듭니다. 이상한 건 부임 첫날 수업 중 옆 책상에 벗어 걸어 둔 자켓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학생이건 뭐건 손버릇이 나쁜 애를 잡아 교정하는 건 교사의 임무이기도 하니 절도범을 색출할 만도 하겠건만 여선생은 그러지 않습니다. 옷 욕심이 많을 젊은 여성인데도 엄청 대범하고 어른스럽게 굽니다. "아이들을 범죄자로 몰고 의심하며 난리를 치기보다,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물건을 돌려놓길 기다리자." 구태여 저렇게까지 안 해도 선생답지 않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자켓은 돌아오지 않고 다음에는 모자가 사라집니다. 이제 선생은 어디 어쩌나 보자는 생각으로, 이것도 한번 가져가 보라는 식으로 스카프를 창틀에 걸어 놓습니다만 기대는 배반당하고 나중에는 펜, 반지 등 귀중품들도 사라집니다. 선생 본인의 입장에서나 작품 밖의 독자가 보기로나 이제는 구제불능의 악질 도둑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선생 물건을, 어쩌다 한둘도 아니고 아예 가산을 들어먹을 만큼(?) 가져가는 애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이 학급에는 선배 여교사(시골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촌아낙인지 교사인지도 모를 외양입니다)의 어린 딸도 속해 있습니다. 이 아이만큼은 거짓말을 안 하겠지 하는 기대로 선생은 조용히 따로 불러 물어 봅니다. 그러나 얘마저도 "몰라요!"라 소리치며 도망갑니다. 이 장치는 치밀한 복선입니다. 이런 아이는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설령 악질 급우의 위협, 친분 같은 게 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선생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눈치빠른 독자는 여기서 사태의 진상이 무엇일지, 적어도 어떤 방향성을 띨지 감을 잡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한편 주변 인물들은 선생 주위에서 "이제 떠날 때가 되었나?"라며 계속 독자를 향해 암시를 줍니다. 물론 독자는 결말을 다 읽고 나서야 이런 대목들이 암시요 복선인 줄 깨닫습니다.


이 단편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1980년대 중반에 제작 방영되었는데 시나리오 각색자가 장선우 감독입니다. 아주 젊었을 시절의 솜씨이겠으며 원작과는 차별화되는 여러 기법도 눈에 띕니다. 가령 끝까지 교사의 직분을 다하며 아이들과 한마음이 되고 싶었으나 좌절하는 대목에서, 선생은 마음 속으로 전학급이 자신의 모습을 화폭(초등용 스케치북)에 담아 선물하며 여태 가져간 옷, 물품 들을 모두 돌려 주는 감동적인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내 그녀 마음 속의 환상인 게 드러납니다. 또 당시로서는 드물었을 장거리 전화가 서울 본가 모친으로부터 걸려와서 대기업 취직 자리, 혼처 등을 권하는 말을 들을 때 선생은 교직을 단념하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며 아이들 앞에서 교사인 자신이 거꾸로 벌을 서는 환각을 떠올립니다. 이런 장면은 교사로서의 좌절, 낙담을 하나의 시퀀스(일종의 극중 극이라고 할까)로 은유한 것인데 역시 원작에는 없는, 감독 장선우만의 이지적인 창의입니다(단막극 연출자는 다른 분이며, 장선우씨는 이 작품에서 각색만 했습니다). 아무튼 젊은날의 장선우 감독의 한 흔적을 이런 드라마에서 발견한다는 게 재미있는 체험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여주인공역은 젊었을 때의 김혜수씨가 나오는데, 1970년생이라고 되어 있는 김혜수씨가 드라마 제작연도인 1986년이라면 고작 열 여섯 살때입니다. 그런데도 교대를 갓 졸업하고(물론 2년제 졸업자 교사도 당시에는 많이 뽑을 때였으므로 더 어린 나이일 수 있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역을 맡았던 것입니다. 어리긴 확실히 어린 모습이나 16세로 보기엔 또 숙성한 외모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는 주인공이 거울을 보며 "참 예쁘긴 하지만 어리석게도 생겼구나" 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 역시 원작 소설에는 없습니다. 아마 장선우 각색자가 신인배우 김혜수씨를 보며 느낀 바 그대로를 대사 안에 담은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김혜수씨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오히려 커버가 되지만) 10대때는 물론 20대, 30대 내내 특유의 얇은 목소리 때문에 뭘 말해도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서도 대사연기만큼은 솔직히 국어책입니다. 그러나 그녀만의 엄청난 매력이 있어서, 극에 몰입하는 데에, 더군다나 여교사의 거의 1인극에 가까운 이 드라마에 집중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