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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0년대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소설가 백용운의 단편집입니다. 모두 열 네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제가 재미있게 읽은 건 "고가(古家)"입니다. 이 "고가"는 1986년 행림출판사에서 나온 <우수단편모음>에도 다른 작가들의 단편들과 함께 수록되었습니다. 후자는 지금 당연히 절판되었고 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이 든 노인들에게는 그저 자식들이 유일한 희망이요 보람입니다. 주인공 노인은 시골에 제법 큰 집을 짓고 사는데 전통적인 한옥입니다. 그렇다고 아흔아홉 간 기와집 같은 건 못 되며 다만 정원의 조경이 서양식을 약간 닮은 듯 넓고 아름답습니다. 시골이다 보니 여러 가지가 불편한데 예를 들어 안테나를 단단히 설치하지 않으면 TV 수신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마 도시라면, 비록 지상파밖에 안 나온다고 해도 케이블을 설치해 더 안정적으로 방송을 시청했을 것입니다. 


"채널이 하나밖에 안 나오잖아?" 


영감님과 그 마나님은 험한 말로 자주 싸우지만 마음에까지 그리 날이 선 건 아닙니다. 속으로는 늙어가는 배우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소포가 도착했는데 영감님은 연신 불평입니다. 


"코쟁이 돈은 뭐하러 보냈대?"

"좀 있으면 한여름인데 세타(스웨터)는 또 뭐여? 제 부모가 돈이 없어 굶나, 추위에 떨기라도 하나?"


이것은 불평이 아니라, 먼 이국 땅에서 한번 찾아오지도 않고 선물만 보내는 아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지들 살림에나 보태지 이런 건 뭐하러 부담되게 보내냐는, 뭐 지금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 없는 부모님들의 한결 같은 마음씀입니다. 참고로 시대 배경은 1980년대 중반쯤으로 보입니다. 


저 즈음에 북미 대륙으로 이민을 간 중산층도 많지만 소설을 더 읽어 보면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 놀랍게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첫째 아들의 사정인 듯합니다. 당시 외무고시는 몇 명 뽑지도 않았는데 이런 시험에 합격했다면 대단한 수재였겠고, 나중에 나오듯이 영감님은 그런 아들 자랑이 자자합니다. 


이처럼 자녀들이 잘 풀린 노인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자녀들이 옹색한 삶을 사는 데다, 그들로부터 대접도 제대로 못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침부터 까치가 울어대기에 혹시 아들이나 딸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손님이 오기는 왔습니다. 노인의 오랜 동년배 친구입니다. 행색도 그렇고 왠지 느낌이 좋지 못합니다. 


이런 친구를 향해 주인공은 마치 상대방 속을 뒤집어 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자식 자랑을 시작합니다. 

"첫째놈은 뭘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가 혼자 공부해서 젊은 나이에 외시에 덜컥 붙었지."

"그건 마나님이 머리가 좋아서야. 자식 머리는 원래 모친을 닮는다잖아?"

"둘째는 대쪽 같은 성미라서(이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가 원하는 상대 아니면 시집 안 간다고 사흘을 굶었지. 딸 하나 없는 셈치고 그냥 시집 보냈는데, 그 집안이 그렇게 일어날 줄 누가 알았나? 셋째는 부잣집에 시집을 갔고, 넷째는..." 

----(중략)---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나?" "자네가 입만 벌리면 떠드는 자랑질인데 이 동네 사람 중 모르는 놈이 있나 어디?"


반면 친구 노인은 자기 신세를 축구공과 같다며 한탄합니다. 자식들이 모시지 않으려고 서로 미룬다는 뜻이겠습니다. 친구 노인은 서럽게 주인공 고가의 대들보를 치며 웁니다. "쥑이소, 쥑이소..." " 이 사람아 죽이긴 누굴 죽이란 말이여?"


친구 노인은 알고보니 자식들로부터 가출 신고가 되어 있었습니다. 행방을 안 그 막내아들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밤늦게 고가를 찾아옵니다. 그런 아들이라도 친구 노인은 막상 얼굴을 보니 좋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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