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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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은 정정(政情)이 불안하여 비상조치, 긴급조치, 갑호을호 비상령 등 공권력이 동원되지 않는 날이 드물었을 정도였습니다. "설마 KCIA로 연행되는 건 아니겠지요?" 여기서 KCIA란 한국의 중앙정보를 가리키는 말인데, 5공 들어서 안기부로 이름이 바뀌고 싹 사라졌지만 미국의 CIA를 본떠 붙인 약칭이었습니다. 정권의 보위를 첫째 사명으로 삼던 기관의 장이 정작 대통령의 가슴을 총으로 쏘고 정권을 무너뜨렸으니 이만한 아이러니가 없겠는데, 일본에서는 자신들처럼 정치가 안정된 나라에서 한국 같은 곳을 보면 묘한 감정을 느낀 듯합니다. 이 저자처럼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낀 이들도 있었는데, 타자의 시선으로 기록한 당대 한국의 착잡한 현실을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 p101을 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발간된 잡지 <綠旗>가 언급됩니다. 한자 표기가 없기 때문에 제 리뷰를 좀 참조할 필요도 있겠네요.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을 보면 이 "녹기"라는 잡지가 자주 언급되며, 한반도에서 내선일체라든가 대동아전쟁(언필칭)의 당위성을 설파하던 인사들의 주장이 날것으로 담긴 저널이었으며, 주간이 모리타 요시오[森田 芳夫]였습니다. 이름은 예쁘지만(?) 그 하는 행동은 전혀 예쁘지 않았던 인물. 1970년대 강남의 깔끔한 신축 아파트에 여전히 거처를 마련하고 우유자적했다는 저자의 진술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다들 들겠습니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 들어서야 저작권 협약에 가입했으며 그전에는 책, 음반 등이 해적판으로 번역되거나 불법 복제되어 거리에 돌아다녔습니다. p63에서 저자가 회상하는 서울의 거리는 그야말로 요지경입니다. "도로는 넓어지다가 좁아지다가 하며..." 곳곳을 불법 점거하는 노점상이 좌판을 벌였으니 당연합니다. 불법 하꼬방도 짓고 장사를 태연히 합니다. 그걸 누구한테 팔아먹는 뻔뻔한 인간도 있습니다. 강남이 주거지로 각광받는 건 처음부터 계획 시가지였기에 보행이나 차량 통행 편의의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p111을 보면 한국의 잡지에 대한 저자의 총평이 나옵니다. 저도 책프에서 예전 한국 잡지를 리뷰해 왔기 때문에 이런 저자의 기술(記術)이 매우 반갑게 읽힙니다. 잠깐 인용해 보자면 "주간조선, 월간조선의 레이아웃은 주간아사이의 영향을 받았고, 선데이서울은 선데이마이니치를 모델로 삼았다. 한국문학은 분게이슌주를, 여성자신은 죠세이지신을 모방했다"라고 합니다. 뭐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저 여성자신이라는 잡지는 제목마저도 일본의 그것과 같습니다. 여성자신은 주부생활사라는 회사에서 발간했는데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삼아 꽤 오랫동안 나왔었습니다. 여튼 당시에는 정보에 목마른 독자들의 갈증을 꽤나 잘 해소해 주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 문화를 말로는 금기시한다면서 패션이나 건축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의 그것을 따라했다는 저자의 지적을 보며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책 후반부에는 하길종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옵니다. 하 감독이야 일찍 타계했으니 저자의 직접 회고가 될 수는 없고, 그 부인인 전채린씨에 대한 회고도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p243을 보면 전채린이 번역한 모리아크의 <Thérèse Desqueyroux>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무렵에는 프랑수아 모리악이 꽤 인기 있던 작가이긴 했었습니다. p190을 보면 "큰 문어"와 함께 다니던 중 기생관광에 대한 언급이 있어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1960년대 일본과 외교관계가 정상화되며 이 기생관광으로 벌어들인 돈도 무시못할 액수였겠습니다. 이처럼 고도성장기의 그늘에는 끔찍하고 개탄스러운 사정이 많았고 그래서 친일청산이 미진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은 거겠죠. p273을 보면 Terence Rattigan의 <Deep Blue Sea>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무대 공연 끝에 "이 공연을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바칩니다!"라고 외치는 후쿠다 쓰네아리의 외침은 처절한 반어로, 혹은 검열과 탄압의 총구 앞에서 지르는 필사적인 생존 비명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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