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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1. 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집이다. 다큐멘터리작가로도 잘 알려져있던 그가 니시니폰 신문에 동명의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중심으로 엮어낸 책이다.
간혹 케이블 TV에서 일본영화를 해 줄 때가 있다. 딱히 특정 나라의 영화를 즐겨하는 편은 아닌지라 별 거부감없이 보게 되곤한다.
그렇게 만나는 일본영화들은 대부분 운이 좋게도 청소년영화이거나 가족영화였다. 피가 튀고 영웅이 나오고 진한 로맨스가 아닌 아이들이 웃고 가족들이 서로를 부등켜 안게 되는 엔딩을 품은 영화들은 때론 말도 안되게 유치한 장면에서조차 웃음을 빼물게 했다.
아..내가 이런 영화를 좋아하나보다..생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만난,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이야기는 그런 영화와 닮았다. 사실 닮지 않는게 이상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길지 않은 글들..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어머니와 주변의 사물. 그리고 영화와 배우들의 이야기, 그리고 "3월 11일, 지금부터"라는 제목을 단 챕터에서는 예상했던 지진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낡은 앨범을 펼치고 '이건 말야..', '이 영화에서는..' ,' 이 배우의 진정한 가치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네 전파사 아저씨가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했다.
편안하게 세상을 읽어내는 것은 세상을 가볍게 보기 때문이 아니라 애정을 품고 보기 때문이겠다 싶어졌다.
조금은 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어야만 보이게 되는 작고 미세한 먼지..엄마는 언제나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 옷깃의 얼룩을 찾아내곤 하셨다.
어느것 하나 건성으로 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게다. 감독의 시선은 그런식이다. 유심히 애정을 갖고 들여다 보는 것..그리고 그것의 본질을 자신의 시선이 닿은 자리부터 하나씩 진술(?)하는 것이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풍경을 이야기하고 그 속을 걷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걷는 듯 천천히 말이다.
#2. 호기심
그의 영화들이 궁금해졌다. 결국은 찾아보게 되었는데..이런, 내가 본 영화들이 꽤 된다. 이 감독의 영화였구나..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나 제목은 대충 넘겨버리는 사람이다보니 유난히 길고 조용한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은 제목도 어영부영 알고있고, 감독이 누구인지따위이 관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들이었다. 어쩐지 여기서 그만두면 안될것 같은..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들..그 결말이 짐작이 되면서도 확인하게 하는 영화들..
그런면에선 참 흥미로운 영화들이다.

아마 최근작일게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스틸컷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없다. "그렇게 영화가 된다"라고 엔딩을 보며 읊조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스틸컷이다. 책에서 감독의 어린시절 수영장에 다니던 기억이 스며든 장면이라고 했다.
전차의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던것을 연출하려했으나 모든 전차의 창문이 열 수 없게되어있어 버스를 썼다고..
어린 배우의 짧은 머리카락이 낮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이런 표정이었구나..

"걸어도 걸어도" 다양한 포스터들 중에 (개봉된 나라마다 다른) 어쩌면 이 책의 표지여도 좋았겠다 싶은 포스터를 찾았다.
#3. 산다는 건.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p59)"
요시노 히로시씨의 <생명은>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공기인형 시사회장에서 받은 편지에 적혀있던 구절이었다.
시의 주제와 영화의 주제가 멋지게 닮아있었다(p59)고 감독은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노력으로 메우려 한다. 그러한 노력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미덕으로 그려진다. 꽤 오래전부터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극복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일까? 이 시는 이렇게 우리의 가치관을 되묻는 것 같았다(p59)" 라고 했다.
그리고 "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p60)" 고 마무리 한다.
일정부분 수긍하고 일정부분 수긍하지 못한다. 노력을 당연스레 강요하는 현실, 결핍을 인정하지 않고, 그 결핍을 같이 메꿔갈 타자로서의 지위는 망각한 채 어느 일방의 희생과 노력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인것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의 '노오력'이라는 자조가 떠오른 대목이다.
그러나 결핍은 결점이 아니라는 것과 등신대의 인간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꿈꾸는 감독의 시선에 동의한다.
그것이 '산다는 것'의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이다.
위로가 된다는건..들어주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것이 큰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자신의 삶을 되짚어가는 것도 큰 위로가 된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가씨가 많이 울었다. 울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었다.
아빠가 그랬잖아..라고 시작하는 말들을 하나씩 들으며 나도 그런 말씀을 들었었지, 그때의 아버님은..
뒤죽박죽 섞여버린 기억들을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지런히 정돈하게 된다. 이 말과 이 일은 이 때였어!
책을 읽으며 위로가 되었다.
아..나도 그래. 여기 잠깐 앉아서 들어볼까? 라고 자꾸 대답하게 된다.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책장을 덮으며 친구의 벽장 속에서 꺼낸 앨범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마친 느낌이었다. 살짝 퀴퀴하기도 하고 눅눅하기도 했던 냄새까지 나쁘지 않았던 그런 느낌..
음.. 이런 느낌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