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끊임없이 주덕이라 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

의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가본 일이 없으니 아버지의 유년은

여수에 있었다. 때로 그곳은 작은형이 창호지에 눈이 가린

채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곳이었고, 상사 계급장을 단 큰형

이 작은형을 구해낸 곳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여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의 입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여수를 보았지만 아버지의 여

수는 요절한 아버지의 핏덩이를 두고 떠난 어머니의 여수

일 뿐. 돌산 갓김치와 홍어의 알싸한 맛이 아버지의 입에서

오랫동안 씹히는 동안 내 사타구니에 검은 것이 돋았다.


  연좌제는 내 단어가 아니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내가 만

난 대부분의 어른은 군인이었다. 갱지 위에 부모의 학력만

을 메울 때 번번이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사실 나는 안다. 어

머니의 학력이 국졸이었다가 중졸로 정정되었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버지의 졸업장과 어머니의 졸

업장을 원망해본 일은 없으나. 나는 고백한다. 지우개로 지

운 빈칸에 '고졸'이란 어린 글씨를 남겼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유년을 누이의 앞뒤도 맞지 않는 무서운 얘기

나 들으며 엄마를 기다려본 이라면 알 수 있다. 공무원이나

교사를 아비로 둔 아이들의 틈에서 구멍가겟집 아들로 자

라본 이라면 고개를 주억거릴 수도 있다. 그들은 당연했고

나는 기특했다.


  여수에서 춘천으로 본적지가 바뀌었다는 걸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았다. 화천 촌놈은 그러는 동안 전라도 사

투리를 익히고 친구들에게 그랬다. '나가 여수 놈이여'라고.

학살이 광주에서 이뤄지는 동안. 전라도 것들이 정의를 외치

는 동안 보잘것없는 가족사가 여수를 통해 찬란해지길 나는

바랐다. 그러면서 가끔 고향 친구들의 얼굴도 잊혔다.


  2002년 가을 금강산에서 나는 비로소 정직해지길 원했

다 북녘 친구들이 아버지의 과거사를 물었을 때 난 그랬

다. 일제시대 수도 기술자였던 할아버지는 신의주로부터

여수까지 수도를 놓았다. 그것이 일제에 도움이 되었다면

울 할아버지는 친일파다. 라고 말해버렸다. 연좌제가 무서

워 본적까지 바꾼 아비가 비겁했다면 내 가족사는 유신의

편이었다. 고 말해버렸다.


  독립군이니, 친일파니 하는, 뼈대 있는 집안의 가족사가

신문지상을 온통 장식할 때 남은 사내들이 모여 이장을 했

다. 칠십 년이 넘는 동안 할아버지의 시신은 물에 잠겨 허

벅지의 뼈 한 뼘만 남아 있었다


  먼 길과 세월을 돌아 양지를 찾아왔다. 그냥 웃음만이 있

었다. 회다지를 흉내 내며 추을 추는 철없는 아들. 녀석의

미래에 나는 단지 근대사와 현대사에 집착했더 소심한 아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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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을 읽는다. 형식을 파괴하고 도전적이며 은유와 치장이 넘쳐나는 시가 아니라 할미의 비나리처럼 가락을 넣은 사설같은 시를 읽는다.

온통 부딪히며 끌어안다 던져버리는 시는 때론 과격하다 싶기도 하지만 달려와 부딪는 것이 크다면 튕겨져 나가는 것 또한 큰것이 당연하다.

 

"略曆' 이라는 시가 제일 첫머리에 있다.

<1975년 열한 살 봄, 수두를 앓다 >로 시작하여 <쓰다. 스무 살 적 절망을 다시 쓰다>로 끝나는 시.

'운동권 考古學' 을 지나면 나오는 '어머니의 이력서'.

<1955년 열네 살, 양친을 잃고 소녀 가장이 됨> 으로 시작하여<원풍모방과 YH에서 소녀 실절을 마감한 모든 어머니들의 이력서다> 라고 끝맺는 시.

시들은 어떤 포장도 없이 가난한 집 어미가 바지런한 손으로 장만해 채반에 올려 장독 위에 둔 무말랭이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시간을 입고 햇볕을 마주한채 순순히 꼬들꼬들해지는 무말랭이의 결연한 변신처럼 말이다.

아무리 말라비틀어져도 그것이 무였음을 기억하는 끈질긴 자기확인의 과정처럼...

시는 드러난 현대사이며 드러나지 않은 운동사에 가깝다.

반문과 확인, 고민과 사투가 극명했던 어떤 시기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분단의 현실을 정략적인 차원이 아닌 분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우고, 그 삶의 모양을 드러냄으로 얼마나 닮아있는가를 확인시킨다.

 

얼마 전 읽은 책 '밤의 눈' 탓인지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시 속에 밟히는 얼굴들은 내 할아버지와 닮았고, 내 아버지거나 어머니의 형제들과도 닮았고, "아빠 새누리당이 왜 나빠?"(사막촌 주막 중)라고 묻는 수학문제를 풀던 아들에게서 내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들으면 알음직한 이름들이 불쑥불쑥 나오는 시집은 자꾸만 시선을 붙잡는다.

시를 읽어내며 행간을 읽는다느니 독자의 상상을 끌어온다드니 하는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괜히 폼을 재는 일 따위를 애시당초 할 이유가 없다.

꼬들꼬들 말라가는 무말랭이를 보면서 무엇을 읽으며 무엇을 상상해야할까? 기껏해야 고추장을 넣고 물엿을 넣고 참기름도 좀 넣어 조물조물 무쳐내면 참 맛있겠다. 하는 것 외에..

그런 느낌으로 읽어낸다.

사실은 모두가 갖고 있는 상처를 모른척 하거나 아직 발견 못했을 뿐인데..안다친게 아니라고 굳이 지적해줄 이유도 없고 내 상처에 문지르던 된장을 조금 나누어 발라주면 되는거다. 상처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같이 치유해가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창피해서, 혹은 겁이나서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신동호는 담담하게 적어낸다.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는 시인의 말.

< 삶은 자주 시와 엇박자를 냈다. 시로 모든 걸 말하려다가 시를 잃었다. 시가 멀어져가면서 꼭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십 수 년 동안 평양과 개성, 금강산과 중국을 다녔다. 그나마 시적 상상력이 허용되는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익숙한 낯섦. 그 의외의 곳에서 시가 돌아왔다.(후략)>

잡지의 광고란이 있을 법한 자리에, 대박 이벤트 쿠폰이 붙어있을 자리에 소박하게 쓰여진 시인의 말은 작은 위로처럼 읽혔다.

도대체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분단의 두려움에 떨지 않을 때, 그 때 위로가 될법한 냉면을 잘 끓여낸 육수에 말아주시려나..

근대사를 배우고 현대사를 살고 있는 미래를 걱정하는 소심한 아비와 어미들과 같이 찾아 나서봐야겠다.



 

회다지가 뭔가 싶어 찾아본다. 달구질이다. 이장을 잘 끝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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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

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

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 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본다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

물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거나


이 집엔 많은 신발이 걸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 있구나


-------------------------------------------------------------------------


<귀신>이란 제목의 시집이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노래한 것들은 많지만 대놓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귀신이라 제목 붙인 것이 흥미로웠다.

인간의 언어에 귀신의 온도를 준 것인가? 인간의 체온으로 그려낼 결들이 마뜩치않아 결국 귀신의 서늘함을 빌려온 것인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귀신이라 쓰인 책 제목 때문이었을까?


"지하철 환승 게이트로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눈먼 나귀처럼 걷다가


귀신을 보았다

저기 잠시 빗겨 서 있는자

허공에 조용히 숨은 자무릎이 해진 바지와 산발한 머리를 하고

어깨와 등과 다리를 잊고 마침내

얼굴마저 잊은 듯 표정이 없이 서 있는자..

(박연준 - 아침을 닮은 아침 중에서)"

박연준의 시를 잠시 떠올렸었다.


시인에게 귀신은 도대체 뭐였을까? 라는 물음은 여전히 물음표로 저장되었다.


그 후 2년. 다시 보게 된 강정의 시집은 '백치의 산수'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귀신보다는 경쾌하게 느껴지는 제목..

시집의 제목과 같은 시를 펼친다.

흰 신발과 검은 신발과 푸른 신발과 지난봄의 나비와 이 집에 살고 있는 없는 사람..신발이 걸어다니고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있다.

어쩐지 지난 시집과 닮았다. 강정은 아직도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에서 발을 빼지 못했나보다..라고 생각한다.

문을 열고 들어와 앉은 나는 얼마나 묘연한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라고 진술하는 시인. 들어옴과 나옴, 안과 밖의 경계를 묻는다.


"누가, 밖에서 벨을 누르고 나를 불러주면 좋겠네

이곳은 너무 어두워

이 얼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밤에 집 밖에서 누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세 번 부를 때까지 절대 나가선 안된다

(중략)

누가,

내 목숨 밖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얼른 일어나 뛰어나가겠네

단숨에 그림자를 끊는

새들의 비상처럼


힘차게

화려하게

(박지웅- 문. 중에서)


모호해진 위치와 모호해진 입술과 묘연해진 존재에 대한 막막함에 박지웅의 시를 빌어 부적처럼 붙여본다.

아, 이래서 백치의 산수인건가?

눈에 빤히 보이는 흰 신과 검은 신과 푸른 신을 셀 수 없고, 문 밖인건지 안인건지 구분할 수 없는, <말 하려다 턱이 빠지>고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보지만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 마침표처럼 <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스를 수 없는 상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풀어내야하는 산수는 고역이며 암담함이다. 틀릴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메도 혹시나 어쩌다 요행히 맞힐 수도 있다는 없느니만 못한 희망을 붙잡고 풀어내야만 한다. 그 문제를 왜 풀어야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삶은 그렇게 강요한다. 살아있다는 건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도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방정식을 풀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흰 신과 검은 신을 번갈아 신으며 문 안으로 나가고 문 밖으로 들어가는 짓을 해명도 없이 지속한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해보아도 수의 본질을 알 수 없는 백치에게 셈이란 막연한 것이리라.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고무줄 뛰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인은 아직 어느 쪽에서 노래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다. 이쪽과 저쪽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등식이라는 걸 눈치챘으니..어떻게 이항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된다.

끝내 그 해를 구하지 못한다할지라도..구하지 못하거나, 해가 없음이라고 또는 무수히 많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항등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의 안쪽 벽에는 문이 없다 어둠을 썰어 도열한 글자들은 실로 꿴 뼈다귀들처럼 흐물흐물 춤을 추고 (중략) 혹여, 어느 집 없는 자가 오래 떠돌며 부려 놓은 발자국들을 길게 꿰어 이어 붙인다 한들, 어떤 완전한 파국을 일목요연하게 액자처럼 걸어 놓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혀에서 떼어 내 말의 안쪽 벽에다 길게 그려 놓으려고만 할 뿐이다.(중략)하여, 말이라 하는 것이 꿈에서 저지른 불경不敬을 입에 물고 불을 뿜는 몸 안의 누룩이거나 몸이 가닿지 못한 천상을 인간의 두뇌 속에 욱여넣어 짓씹으려 하는 오욕의 되새김질 같은 거라 여기게도 되었다(중략) 나는 발가벗고 춤추고 싶었다 춤이란 게 실상, 몸이 불이 되거나 물이 되어 사그라지길 바라 스스로를 스스로로부터도 방임해 버리는 일일터인데, 그렇게 재가 되고 진물이 되어 바닥에 납작 엎으린 내 몸을 어릴 적 날 무등 태웠던 소에게 먹이거나 울음을 갉아먹던 독수리가 목 축일 물로 여기게 된다면 그제야 어떤 뚜렷한 말들이 흙 속이거나 바닷속이거나 누가 죽어 걸어 잠근 저 깊은 벽 속의 어둠 뒤에서 뼈다귀들에게 살을 입혀 뚜벅뚜벅 걸어나오게 되지 않을까 믿게 되었던 것이다(중략) 바람아, 너는 이미 만년토록 해독 안 된 너의 진심을 어둠의 낱알로 몸에 둘러 춤추고 있었음을 만년 뒤의 죽음에게 일러라 (죽음의 외경畏敬, 혹은 외경外經/중에서) >


어쩌면 그의 시가 품은 비밀을 담아 둔 시를 분절해본다. 귀신이 되건 백치가 되건 시의 본래성을 묻는 어떤 미련한 구도자의 수행기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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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눈 - 2013년 제28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2013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조갑상 지음 / 산지니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히 소개를 받아 읽게 된 책. 왜 이 책을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하긴, 출판되는 모든 책을 다 알고 있을 수는 없지않겠는가.

해방이후 패전국임에도 아직 조선을 떠나지 않았던 이들의 시퍼런 서슬과, 생과 사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던 순박한 이들이 일 순간 이데올로기의 표적이 되고 그 난장판에서 권력을 취하려하는 무리들에 의해 학살되는 이야기.

보도연맹사건으로 알려진 이승만정권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책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실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참담하다.

보도연맹, 6.25, 4.19, 5.16, 부마항쟁까지..현대사를 관통하는(관통하는 이라는 말이 이처럼 뼈아플지 몰랐다. 현대사는 그대로 개인의 심장을 관톻했다.)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허구이기를 간절히 바라게 한다.

대의라는 말과 애국이라는 말로 조여오는 숨통..어떤 변명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살생의 각본을 읽은 셈이다.

 

국가로부터 강요되는 희생. 민초들은 늘 짖눌리며 패배에 익숙해진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넘나드는 서사..참혹하고 분통터지고 이가 갈리는 것은 다만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했으리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된 까닭이다.

정말일까. 민중들은 결국 권력의 배를 불리기 위해 짖이겨지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단 한 번으로 끝났어야 한다.

더는 그 어떤 일어섬도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뒤를 이어 이어지는 항쟁..무고한 양민의 학살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일떠서는 그 힘. 어쩌면 민중의 힘은 거기에 있을거다. 울분을 삼키며 강인하게 일어서는 힘. 세상의 주인은 우리라고 처절하게 보여주는 몸부림.

책을 덮으며 " 울분.zip" 으로 저장하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서로를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차마 아름다웠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잔잔해질지언정 절대로 멈추지 않는 파도처럼 생명력을 지키고 키워내는 힘을 보았다면 책을 잘못 읽은걸까?

 

역사의 수레바퀴는 속절없이 돈다. 제 자리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돈다. 점점 더 깊게 패이고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게 되고..고임돌이 필요했을거다. 고임돌은 쉬이 부서지는 것이어선 안될것이다. 가장 단단하고 가장 잘 버티는 것이어야 했을거다. 그게 민중이고 그게 주인이었다. 국가는 통제하려 하지만 헛바퀴만 돌 뿐이다.

 

누구도 실패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장식장에 곱게 모셔진 수석이 아닌, 물살이 거센 개울에 징검다리 돌이 되기로 작정한 이들을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까?

 

조갑상의 건조한 듯한 문장들이 긴장을 더한다. 수식어나 화려한 문제의 난립이 없이도 간결한 문장들이 전하는 사실감과 긴장감은 길고 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지 못하게 했다.

긴 한숨을 쉬고 책을 덮는다.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이 자유로운 호흡을 보장받게 되가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들이 강요되었을까를 생각한다.

 

아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패배한 것은 아니다. 더 멀리 빠져나간 파도가 일시에 몰아쳐올 때를 기다린다.

지금은 울분.zip 으로 저장하겠지만..오래지 않아 희망.zip으로 명명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너와 나와, 우리와 이웃과 이 나라의 주인들은 이렇게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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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나비

김귀정 학생을 생각하며


나는 죽어

검은 관 속에

하얀 나비가 되어 누워 있다


통곡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너의

날개를 적시고....


전경들이 너의 죽은 원인을

확실히 가르쳐주겠다고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며

영안실로 쳐들어왔을 때도


너는 말없이

피 묻은 날갯죽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설움도 없이 무덤 사이를

나풀나풀

날아다닐 수 있는 날은

언제일 것인가


태극기와 영정을 든

너의 학우들의 노래를 들으며

백병원 영안실 앞 은행나무들도

입술을 깨물며 비에 젖는다.



-----------------------------------------------------


1992년 초판이 나온 시집. 2011년 2쇄가 만들어진 시집.

1991년 5월 25일 김귀정은 떠났다. 성균관대 4학년 김귀정.

많은 이들이 어처구니없이 떠나야했던 1991년..강경대도 그렇게 떠났었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은 세월 속에 더욱 간교하고 강고해져 매 해 데려가는 사람이 늘더니 급기야 수백의 어린 아이들도 한꺼번에 데려갔다.

그리고 숨쉬는 것만으로도 재앙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추모가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그의 그림자를 만들어가고 있다.

산다는 게 뭘까? 생물학적인 생명징후를 믿을만한건가?


시인은 의사다. '시립병원에서'라고 제목이 붙은 시 모음들에서 지난 달 떠나신 어머님이 자꾸 어른거렸다.

중환자실에서..대여섯개의 기계가 지속적으로 약물을 투입하고, 인공호흡기가 강제로 숨을 불어넣으며 신장투석기가 돌아가던 시간..

이 모든 처치가 진행되는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시는 어머님은 그 상황을 알고 계셨을까? 의식은 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면..중환자실에서 100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시간동안 어머님은 살아계셨던걸까..

'통곡의 댐'이라 이룸 붙은 시 모음 사이에서 김귀정의 이야기를 만났다. 열흘 뒤면 베어낼 옥수수를 시청직원들이 환경정화한다며 베어버리고 옥수숫단 위에서 농약을 먹고 죽어버린 농부의 이야기를 만났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수영미숙으로 인한 익사라던 이철규, 시위대에 눌린 압사라던 김귀정, 사격발사각도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던 한국원..

변명이라기보다 비열하기 짝이없는 그래서 소중한 이들을 두번, 세번 죽이는 세월을 살아냈지만..우리는 아직도 죽어가고 있다. 더 많이 더 어이없게 더 치떨리게..


거룩한 추모의 대열이 이어지고, 통곡하는 이들의 붉은 눈매가 TV 화면에 가득하다.

어이없이 떠난 딸년의 사진을 끌어안고 흐느낄 어미는 누가 가서 위로해주나.

부채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빼곡한 비극의 시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을 울고, 내일을 버틴 사람들은 25일을 기억하지도 알아채지도 못할게다.

하긴, 이렇게 떠난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다면..우리가 눈물을 멈추어도 좋을 날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다.


불 붙은 가시덩굴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제 몸을 던져 불을 끄고 동지의 손을 잡고 가시덩굴을 베어내며 '이쪽입니다' 외쳤던 사람들.

온몸으로 굴러 꺼 놓은 불 길을 조금씩 걸어나온 사람들..이젠 목소리를 내도 좋고, 이젠 남은 가시덩굴을 걷고 불구덩을 메워야하는데..오히려 제가 걸어온 길을 메운다.

이쪽으로 더 넘어오면 이 자유를 나눠야하지 않을까?

바보같은 욕심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자유는 여럿이 틀어쥘수록 더 커진다는 걸 모르는 탓이다.


5월 23일..

추모의 그림자가 너무 짙고 길어서 문득 가리워질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1991년 5월 25일 퇴계로.

쏟아지는 최루탄과 백골단의 토끼몰이의 현장에서 '학생이 죽었어요'라고 외친 목소리를 떠올린다.

잠시 멈추었던 시간. 그 사이 김귀정은..나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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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엔 멀쩡한 내 왼쪽 눈은

시력이 형편없다 있으나마나 한

왼쪽은 아예 맞보기 알을 넣고

오른쪽 시력에만 맞추어 안경을 끼고 산다

시력도 형편없는게 말썽은 많다

왼쪽 눈에 자주 핏발이 서고 따끔거린다

눈병도 오른쪽보다 꼭 먼저 옮는다

오른쪽에 맞추어 따라다니느라 깜냥에

힘이 부쳐서 그런다고 한다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렸더니

안경 너머로 건너다보며  간호사는

그나마 그 자리에 있는 게 얼마나 고맙냐고

외눈보다는 훨씬 낫다고 나를 타이른다

사실 나는 이제껏 외눈으로 살지 않았나

핏발 선 눈을 안대로 가리고 거리에 나선다

남은 눈알에 헛힘이 쏠리고

발이 헛디뎌지고 손잡이가 헛짚인다

시력이 형편없어도 무슨 구실은 했던지

외눈으로 세상을 가늠하기가 만만찮다

핏발 선 눈을 끝내 가리고

헛디디며 헛짚으며 갈 데까지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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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에서 나온 첫 시집이다. 주류(?) 출판사와 서울 중심의 한국문단에 문학의 다양성과 지역 출판의 지속성을 기치로 문인 20명이 십시일반 모아 만든 출판사다.

전주를 근거지로 하는..

태몽이 좋았고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새끼도 다 자라선 망나니가 되어버리기 일쑤지만..잘 자라라..기원을 보탠다. 어차피 아이는 동네가 키운다고 하지 않던가.


시들이 재밌다. 응답하라 1950이라 제목이 붙은 1부의 시를 읽으며 한참을 웃었다. 그려진 상황이 절묘해서이기도 하지만 순박함과 치기가 교차하던 시절을 기억해낸 까닭이다. 그런 때가 있었다. 2부의 맹장은 어디쯤인가로 넘어와 '이게 나라냐'를 읽으며 더욱 간교해진 샤일록이 잘 벼린 칼을 가져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살을 도려낸 느낌이었다. 도려내는 순간까지 피 한방울 나지 않을만큼 예리한..내 살점을 들고 저만치 떠난 후에야 울컥울컥 쏟아져내리는 피를 확인하는 것 같은 참담함이 거기 있었다. 순박함과 치기의 시간을 남겨두고 간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두 눈으로 보아야 수평이 맞고 거리가 맞고 사물의 형상이 제대로 투사되는거지만 어쩌면 시간은 하나의 눈만을 선택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하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찌그러진게 정상이야. 사실은 더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다고 믿어줬으면 해. 기울어 보이지만 착시야 모두가 공평하거든 조금 더 노력해 봐..라는 속임수가 통하려면 하나의 눈만이 선택되어야 한다. 수없이 헛디디며 헛짚어대며 제풀에 넘어지고 뒹굴어야 한다. 제 발 앞에 있을 장애물에 집중하게 해야한다. 저 멀리 서 있는 저격수를 찾지 못하게, 오직 발밑만을 주시하게..

매체들은 오른쪽을 선택할지 왼쪽을 선택할지 결정하라고 밤낮없이 주문한다. 채널을 돌리다보면 선택받지 못한 한쪽 눈의 상실감을 잊게 할 것들이 튀어나오곤 한다.

자꾸 헛짚으시죠? 눈이 문제가 아니라 걸음걸이에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요. 최저가. 더 이상 이런 구성은 없습니다. 구두를 사세요.

자꾸 헛디디시죠? 눈이 문제가 아니라 기운이 없는건지도 몰라요. 식약청 FDA가 인증한 건강보조제. 서두르세요.

선택된 한쪽 눈에는 자꾸만 헛힘이 실리는데, 아무리 구두를 바꾸고 보조제를 먹어대도 여전히 헛짚으며 헛딛는데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하다.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았을 아픈 눈의 효용을 깨닫는다. 잘 보아야 한다. 뿌옇게 보일지라도 그렇게라도 보아주는 눈이 있어야, 두 눈이 있어야 세상의 기울기를 알아챌 수 있다. 어차피 헛디디며 헛짚으며 사는 건, 눈의 문제가 아니라 헛다리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잘 보아도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고야마는 헛다리..그래도 미숙한대로 서툰대로 처음의 모습으로 살아내야 한다.


노안이 오셨네요.

안구건조증이 심하시네요.

최근들어 자주 드나들이를 하는 안과에선 조금 더 잘 보게 처방을 내려주지만 시력은 자꾸 나빠지고 눈은 더 빨리 핏발이 선다.

그래도 아직 보이긴 한다는데 안도한다.

얼마나 더 헛다리를 짚으며 살아가게 될 지 모르겠지만..보아야 할 것들을 보아내고 눈 감거나 회피하지 않도록 훈련해야겠다.

내 눈이 더는 앞을 못보게 되더라도 이 눈이 안보이는 눈이라는 걸 탐욕스런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지금처럼 여전히 헛디디며 헛짚으며 가끔 절룩이며 살아야겠다.


수더분하고 깊은 시들이 거친 질감의 종이 위에 빼곡하다.

마지막 시 '잉어 한마리'의 마지막 연.


<뭘 물으려다 그만두는 날더러

 너는 지금 거슬러가는 중이냐

 휩쓸리는 중이냐

 주인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되묻고 싶은 눈치다>


아름다운 잉어가 어떻게 잡혔는지 주인에게 물을까 말까 고민하는 내용이다.

거슬러가는 중일까 휩쓸리는 중일까..꽃이 지천인 길을 헛디디며 헛짚으며 걸어보아야겠다. 분명 한쪽만 깊어진 발자국이 찍히겠지만 휩쓸려 가는 것은 아니라고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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