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끊임없이 주덕이라 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

의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가본 일이 없으니 아버지의 유년은

여수에 있었다. 때로 그곳은 작은형이 창호지에 눈이 가린

채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곳이었고, 상사 계급장을 단 큰형

이 작은형을 구해낸 곳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여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의 입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여수를 보았지만 아버지의 여

수는 요절한 아버지의 핏덩이를 두고 떠난 어머니의 여수

일 뿐. 돌산 갓김치와 홍어의 알싸한 맛이 아버지의 입에서

오랫동안 씹히는 동안 내 사타구니에 검은 것이 돋았다.


  연좌제는 내 단어가 아니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내가 만

난 대부분의 어른은 군인이었다. 갱지 위에 부모의 학력만

을 메울 때 번번이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사실 나는 안다. 어

머니의 학력이 국졸이었다가 중졸로 정정되었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버지의 졸업장과 어머니의 졸

업장을 원망해본 일은 없으나. 나는 고백한다. 지우개로 지

운 빈칸에 '고졸'이란 어린 글씨를 남겼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유년을 누이의 앞뒤도 맞지 않는 무서운 얘기

나 들으며 엄마를 기다려본 이라면 알 수 있다. 공무원이나

교사를 아비로 둔 아이들의 틈에서 구멍가겟집 아들로 자

라본 이라면 고개를 주억거릴 수도 있다. 그들은 당연했고

나는 기특했다.


  여수에서 춘천으로 본적지가 바뀌었다는 걸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았다. 화천 촌놈은 그러는 동안 전라도 사

투리를 익히고 친구들에게 그랬다. '나가 여수 놈이여'라고.

학살이 광주에서 이뤄지는 동안. 전라도 것들이 정의를 외치

는 동안 보잘것없는 가족사가 여수를 통해 찬란해지길 나는

바랐다. 그러면서 가끔 고향 친구들의 얼굴도 잊혔다.


  2002년 가을 금강산에서 나는 비로소 정직해지길 원했

다 북녘 친구들이 아버지의 과거사를 물었을 때 난 그랬

다. 일제시대 수도 기술자였던 할아버지는 신의주로부터

여수까지 수도를 놓았다. 그것이 일제에 도움이 되었다면

울 할아버지는 친일파다. 라고 말해버렸다. 연좌제가 무서

워 본적까지 바꾼 아비가 비겁했다면 내 가족사는 유신의

편이었다. 고 말해버렸다.


  독립군이니, 친일파니 하는, 뼈대 있는 집안의 가족사가

신문지상을 온통 장식할 때 남은 사내들이 모여 이장을 했

다. 칠십 년이 넘는 동안 할아버지의 시신은 물에 잠겨 허

벅지의 뼈 한 뼘만 남아 있었다


  먼 길과 세월을 돌아 양지를 찾아왔다. 그냥 웃음만이 있

었다. 회다지를 흉내 내며 추을 추는 철없는 아들. 녀석의

미래에 나는 단지 근대사와 현대사에 집착했더 소심한 아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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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을 읽는다. 형식을 파괴하고 도전적이며 은유와 치장이 넘쳐나는 시가 아니라 할미의 비나리처럼 가락을 넣은 사설같은 시를 읽는다.

온통 부딪히며 끌어안다 던져버리는 시는 때론 과격하다 싶기도 하지만 달려와 부딪는 것이 크다면 튕겨져 나가는 것 또한 큰것이 당연하다.

 

"略曆' 이라는 시가 제일 첫머리에 있다.

<1975년 열한 살 봄, 수두를 앓다 >로 시작하여 <쓰다. 스무 살 적 절망을 다시 쓰다>로 끝나는 시.

'운동권 考古學' 을 지나면 나오는 '어머니의 이력서'.

<1955년 열네 살, 양친을 잃고 소녀 가장이 됨> 으로 시작하여<원풍모방과 YH에서 소녀 실절을 마감한 모든 어머니들의 이력서다> 라고 끝맺는 시.

시들은 어떤 포장도 없이 가난한 집 어미가 바지런한 손으로 장만해 채반에 올려 장독 위에 둔 무말랭이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시간을 입고 햇볕을 마주한채 순순히 꼬들꼬들해지는 무말랭이의 결연한 변신처럼 말이다.

아무리 말라비틀어져도 그것이 무였음을 기억하는 끈질긴 자기확인의 과정처럼...

시는 드러난 현대사이며 드러나지 않은 운동사에 가깝다.

반문과 확인, 고민과 사투가 극명했던 어떤 시기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분단의 현실을 정략적인 차원이 아닌 분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우고, 그 삶의 모양을 드러냄으로 얼마나 닮아있는가를 확인시킨다.

 

얼마 전 읽은 책 '밤의 눈' 탓인지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시 속에 밟히는 얼굴들은 내 할아버지와 닮았고, 내 아버지거나 어머니의 형제들과도 닮았고, "아빠 새누리당이 왜 나빠?"(사막촌 주막 중)라고 묻는 수학문제를 풀던 아들에게서 내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들으면 알음직한 이름들이 불쑥불쑥 나오는 시집은 자꾸만 시선을 붙잡는다.

시를 읽어내며 행간을 읽는다느니 독자의 상상을 끌어온다드니 하는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괜히 폼을 재는 일 따위를 애시당초 할 이유가 없다.

꼬들꼬들 말라가는 무말랭이를 보면서 무엇을 읽으며 무엇을 상상해야할까? 기껏해야 고추장을 넣고 물엿을 넣고 참기름도 좀 넣어 조물조물 무쳐내면 참 맛있겠다. 하는 것 외에..

그런 느낌으로 읽어낸다.

사실은 모두가 갖고 있는 상처를 모른척 하거나 아직 발견 못했을 뿐인데..안다친게 아니라고 굳이 지적해줄 이유도 없고 내 상처에 문지르던 된장을 조금 나누어 발라주면 되는거다. 상처가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같이 치유해가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창피해서, 혹은 겁이나서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신동호는 담담하게 적어낸다.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는 시인의 말.

< 삶은 자주 시와 엇박자를 냈다. 시로 모든 걸 말하려다가 시를 잃었다. 시가 멀어져가면서 꼭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십 수 년 동안 평양과 개성, 금강산과 중국을 다녔다. 그나마 시적 상상력이 허용되는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익숙한 낯섦. 그 의외의 곳에서 시가 돌아왔다.(후략)>

잡지의 광고란이 있을 법한 자리에, 대박 이벤트 쿠폰이 붙어있을 자리에 소박하게 쓰여진 시인의 말은 작은 위로처럼 읽혔다.

도대체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분단의 두려움에 떨지 않을 때, 그 때 위로가 될법한 냉면을 잘 끓여낸 육수에 말아주시려나..

근대사를 배우고 현대사를 살고 있는 미래를 걱정하는 소심한 아비와 어미들과 같이 찾아 나서봐야겠다.



 

회다지가 뭔가 싶어 찾아본다. 달구질이다. 이장을 잘 끝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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