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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눈 - 2013년 제28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2013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조갑상 지음 / 산지니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히 소개를 받아 읽게 된 책. 왜 이 책을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하긴, 출판되는 모든 책을 다 알고 있을 수는 없지않겠는가.
해방이후 패전국임에도 아직 조선을 떠나지 않았던 이들의 시퍼런 서슬과, 생과 사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던 순박한 이들이 일 순간 이데올로기의 표적이 되고 그 난장판에서 권력을 취하려하는 무리들에 의해 학살되는 이야기.
보도연맹사건으로 알려진 이승만정권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책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실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참담하다.
보도연맹, 6.25, 4.19, 5.16, 부마항쟁까지..현대사를 관통하는(관통하는 이라는 말이 이처럼 뼈아플지 몰랐다. 현대사는 그대로 개인의 심장을 관톻했다.)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허구이기를 간절히 바라게 한다.
대의라는 말과 애국이라는 말로 조여오는 숨통..어떤 변명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살생의 각본을 읽은 셈이다.
국가로부터 강요되는 희생. 민초들은 늘 짖눌리며 패배에 익숙해진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넘나드는 서사..참혹하고 분통터지고 이가 갈리는 것은 다만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했으리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된 까닭이다.
정말일까. 민중들은 결국 권력의 배를 불리기 위해 짖이겨지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단 한 번으로 끝났어야 한다.
더는 그 어떤 일어섬도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뒤를 이어 이어지는 항쟁..무고한 양민의 학살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일떠서는 그 힘. 어쩌면 민중의 힘은 거기에 있을거다. 울분을 삼키며 강인하게 일어서는 힘. 세상의 주인은 우리라고 처절하게 보여주는 몸부림.
책을 덮으며 " 울분.zip" 으로 저장하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서로를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차마 아름다웠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잔잔해질지언정 절대로 멈추지 않는 파도처럼 생명력을 지키고 키워내는 힘을 보았다면 책을 잘못 읽은걸까?
역사의 수레바퀴는 속절없이 돈다. 제 자리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돈다. 점점 더 깊게 패이고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게 되고..고임돌이 필요했을거다. 고임돌은 쉬이 부서지는 것이어선 안될것이다. 가장 단단하고 가장 잘 버티는 것이어야 했을거다. 그게 민중이고 그게 주인이었다. 국가는 통제하려 하지만 헛바퀴만 돌 뿐이다.
누구도 실패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장식장에 곱게 모셔진 수석이 아닌, 물살이 거센 개울에 징검다리 돌이 되기로 작정한 이들을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까?
조갑상의 건조한 듯한 문장들이 긴장을 더한다. 수식어나 화려한 문제의 난립이 없이도 간결한 문장들이 전하는 사실감과 긴장감은 길고 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지 못하게 했다.
긴 한숨을 쉬고 책을 덮는다.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이 자유로운 호흡을 보장받게 되가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들이 강요되었을까를 생각한다.
아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패배한 것은 아니다. 더 멀리 빠져나간 파도가 일시에 몰아쳐올 때를 기다린다.
지금은 울분.zip 으로 저장하겠지만..오래지 않아 희망.zip으로 명명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너와 나와, 우리와 이웃과 이 나라의 주인들은 이렇게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