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

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

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 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본다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

물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거나


이 집엔 많은 신발이 걸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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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란 제목의 시집이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노래한 것들은 많지만 대놓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귀신이라 제목 붙인 것이 흥미로웠다.

인간의 언어에 귀신의 온도를 준 것인가? 인간의 체온으로 그려낼 결들이 마뜩치않아 결국 귀신의 서늘함을 빌려온 것인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귀신이라 쓰인 책 제목 때문이었을까?


"지하철 환승 게이트로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눈먼 나귀처럼 걷다가


귀신을 보았다

저기 잠시 빗겨 서 있는자

허공에 조용히 숨은 자무릎이 해진 바지와 산발한 머리를 하고

어깨와 등과 다리를 잊고 마침내

얼굴마저 잊은 듯 표정이 없이 서 있는자..

(박연준 - 아침을 닮은 아침 중에서)"

박연준의 시를 잠시 떠올렸었다.


시인에게 귀신은 도대체 뭐였을까? 라는 물음은 여전히 물음표로 저장되었다.


그 후 2년. 다시 보게 된 강정의 시집은 '백치의 산수'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귀신보다는 경쾌하게 느껴지는 제목..

시집의 제목과 같은 시를 펼친다.

흰 신발과 검은 신발과 푸른 신발과 지난봄의 나비와 이 집에 살고 있는 없는 사람..신발이 걸어다니고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있다.

어쩐지 지난 시집과 닮았다. 강정은 아직도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에서 발을 빼지 못했나보다..라고 생각한다.

문을 열고 들어와 앉은 나는 얼마나 묘연한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라고 진술하는 시인. 들어옴과 나옴, 안과 밖의 경계를 묻는다.


"누가, 밖에서 벨을 누르고 나를 불러주면 좋겠네

이곳은 너무 어두워

이 얼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밤에 집 밖에서 누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세 번 부를 때까지 절대 나가선 안된다

(중략)

누가,

내 목숨 밖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얼른 일어나 뛰어나가겠네

단숨에 그림자를 끊는

새들의 비상처럼


힘차게

화려하게

(박지웅- 문. 중에서)


모호해진 위치와 모호해진 입술과 묘연해진 존재에 대한 막막함에 박지웅의 시를 빌어 부적처럼 붙여본다.

아, 이래서 백치의 산수인건가?

눈에 빤히 보이는 흰 신과 검은 신과 푸른 신을 셀 수 없고, 문 밖인건지 안인건지 구분할 수 없는, <말 하려다 턱이 빠지>고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보지만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 마침표처럼 <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스를 수 없는 상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풀어내야하는 산수는 고역이며 암담함이다. 틀릴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메도 혹시나 어쩌다 요행히 맞힐 수도 있다는 없느니만 못한 희망을 붙잡고 풀어내야만 한다. 그 문제를 왜 풀어야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삶은 그렇게 강요한다. 살아있다는 건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도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방정식을 풀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흰 신과 검은 신을 번갈아 신으며 문 안으로 나가고 문 밖으로 들어가는 짓을 해명도 없이 지속한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해보아도 수의 본질을 알 수 없는 백치에게 셈이란 막연한 것이리라.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고무줄 뛰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인은 아직 어느 쪽에서 노래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다. 이쪽과 저쪽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등식이라는 걸 눈치챘으니..어떻게 이항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된다.

끝내 그 해를 구하지 못한다할지라도..구하지 못하거나, 해가 없음이라고 또는 무수히 많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항등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의 안쪽 벽에는 문이 없다 어둠을 썰어 도열한 글자들은 실로 꿴 뼈다귀들처럼 흐물흐물 춤을 추고 (중략) 혹여, 어느 집 없는 자가 오래 떠돌며 부려 놓은 발자국들을 길게 꿰어 이어 붙인다 한들, 어떤 완전한 파국을 일목요연하게 액자처럼 걸어 놓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혀에서 떼어 내 말의 안쪽 벽에다 길게 그려 놓으려고만 할 뿐이다.(중략)하여, 말이라 하는 것이 꿈에서 저지른 불경不敬을 입에 물고 불을 뿜는 몸 안의 누룩이거나 몸이 가닿지 못한 천상을 인간의 두뇌 속에 욱여넣어 짓씹으려 하는 오욕의 되새김질 같은 거라 여기게도 되었다(중략) 나는 발가벗고 춤추고 싶었다 춤이란 게 실상, 몸이 불이 되거나 물이 되어 사그라지길 바라 스스로를 스스로로부터도 방임해 버리는 일일터인데, 그렇게 재가 되고 진물이 되어 바닥에 납작 엎으린 내 몸을 어릴 적 날 무등 태웠던 소에게 먹이거나 울음을 갉아먹던 독수리가 목 축일 물로 여기게 된다면 그제야 어떤 뚜렷한 말들이 흙 속이거나 바닷속이거나 누가 죽어 걸어 잠근 저 깊은 벽 속의 어둠 뒤에서 뼈다귀들에게 살을 입혀 뚜벅뚜벅 걸어나오게 되지 않을까 믿게 되었던 것이다(중략) 바람아, 너는 이미 만년토록 해독 안 된 너의 진심을 어둠의 낱알로 몸에 둘러 춤추고 있었음을 만년 뒤의 죽음에게 일러라 (죽음의 외경畏敬, 혹은 외경外經/중에서) >


어쩌면 그의 시가 품은 비밀을 담아 둔 시를 분절해본다. 귀신이 되건 백치가 되건 시의 본래성을 묻는 어떤 미련한 구도자의 수행기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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