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채식주의자의 수상 이후 한강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묵묵히 쓰는 것을 이어온, 아니 견뎌온 작가에게 정당한 상이 주어지는건 당연한 일이다.

한강의 수상소식과 더불어 가난과 손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하얀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글쟁이가 가난한거야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출판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열정과 나름의 사명으로 견디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책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다. 손가락으로 꼽을만큼의 인원을 제외하면..

글로 생활이 유지되는 이들이 그나마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그들이 명성과 생활을 보장받기까지 넘겨주어야 했을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 와중에 여전히 쓰고 있을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생각을 하게 된다. 기본만이라도..최소한 배고픈 글쟁이를 면하게만이라도..


한강의 수상 이후 가장 빨리 나온 책일거다. 그 전에 기획이 되어 예판이 시작되었으니..

채식주의자가 큰 그림 세개를 나란히 세운 병풍이라면, 흰은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인 조각이불 같은 느낌이다.

시처럼 짧게 쓰여진 이야기들이 서로의 끝과 머리를 붙들고 이어지는 이야기.
어떤 이는 아프다고도 하고, 슬프다고도 하고, 눈부시다고도 하고 시리다고도 했다.


나는 투명한 멍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귀밑과 턱 사이에 생긴 작은 멍울.
턱을 괼때 손끝에 닿는 자리에 생긴 생경한 멍울 같은 글이다.
혹부리 할아버지의 노래주머니.
정말 거기서 노래가 나오는지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그래서 자꾸 만지작거리게되는 의심과 확신 사이의 묘연한 흰 이었다.
아프진 않지만 아플까봐 걱정이 되서 온 신경이 집중된다.

멍울같은 책을 읽었다.
짖지 않는 개처럼 읽었다.


한강의 글은 시에 가깝다. 시의 파동으로 움직인다. 하나의 이미지를 따라 나서 저만치 달려가야 실체가 보이는..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출간 되었을 때, 짧다. 하는 생각을 했다. 앨리시어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온전히 헤집어놓는 작가의 힘에 흔들렸었다.

흔들리며 쏟아지고 깨진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짧지 않았다.

흰은 그보다 더 얇다.

작가는 안간힘을 쓰며 썼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한 페이지의 절반쯤이거나 간혹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하는 이야기..짧다.

짧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 길어지며 변색되고 오염될 것이 뻔한 '흰'을 써내기란 이렇게 단촐한 삶의 사유여야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기대지 않고 살아내는. 하나씩 확인하고 디뎌내는 힘을 본다.

처연한 표정으로 하얗게 사위어가는 것이 아닌, 하얗게 딛고 일어서는 빛을 보는 것도 같다.


어쩌면, 글을 쓰는 것 이외에 더는 하고픈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한강의 삶 속에 하얗게 찍힌 흰 쉼표 같은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또 다시 삶 속으로..

흰 벌판에 떨어지는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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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시장에서 양미리 한 두름을 사왔다

스무 마리 한 묶음 노란 비닐끝에 묶여 왔다

사천 원의 생이 합동으로 엮여 늘어진.

그래도 생을 품을 땐 팔팔하게 바다를 거슬렀을 양미리

늙은 시인은 저녁밥상에 앉아

마리 당 일금 200원짜리 생을 이빨로 씹는다

난 얼마짜리의 생일까

뼈째 꼭꼭 씹어요 골다공증에 좋대요

마누라의 영양가 있는 말, 귓전으로흘리며

누가 내 생을 질기게 씹어줄 수 있을까를 시인은 곰곰 생각한다

마이너스 통장에 줄그어진 늙은 시인의 생

양미리 한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메마른 생을

누가 강한 턱으로 억세게 물어뜯어 줄 것인가를

시인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제 허명뿐인 그의 이름을 누군가가 꼭꼭 씹어주길 바라면서

틀니 잇새에 낀 가시 하나에 잇몸이 찔리운다

아뿔사 갈매기 울음소릴 듣고 만 것일까

끼우룩!

목이 메어

손에 든 소주잔이 맑게 흔들리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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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제목만으로 울컥했다. 사람이 먼저다. 라고 쓰인 현수막을 본 적이 있다. '여기 사람 있어요!'라고 외치는 어느 현장을 지나친 적이 있다.

사람은 피상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가치처럼, 내게 인식되어 있다. 그저 사람이라서..

그런 막연함은 사람에 대한 상처를 깊게 했다. 사람이 있다며, 먼저라며, 거기에 힘이 있다며?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무엇보다 크다. 비약하자면 같은 종족으로서의 존재성을 거부당한 것 같은 참담함이 들기도 한다.

또는 저 이와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닌가보다, 라며 예단하여 선을 그어버리기도 한다. 구분과 구분..그 속에서 사람이란 얼마나 외롭고 유약한가.


해 질 무렵, 까마귀가 저녁 하늘의 한 귀퉁이를 물고 떼로 날아가고 어느덧 이윽한 밤이 되었을 때, 자꾸만 작아지는 인간의 섬에 슬며시 팔을 끼며 먼 바다를 같이 보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 애인.

영양가 있는 말로 양념한 양미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

마이너스 생을 마주잡고 걸어 줄 사람.

바짝 말라버린 삶을 물어뜯어 줄 수 있는 사람. 수없이 많은 잇자욱으로 다만 외로운 생은 아니었다고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애인이겠다.


여백이 많은, 그림처럼 풍경처럼 쓰여진 최돈선의 시집을 읽다 문득 떠오른 정현종의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중에서)>


최돈선의 시는 흑백영화처럼 읽힌다. 아무도 대사를 말하지 않는다. 촌스럽지만 귀에 박히는 배경음악이 흐르고 한 장면이 지나면 자막이 화면 가득 쓰이고 다시 다음장면으로 넘어가고..무성영화처럼 ..그러니 정작 시는 읽은건지 본건지가 묘연해진다. 때때로 까마귀의 소리가, 갈매기의 소리가, 할렘가의 눅눅한 소리가, 섬에 파도가 부딪는 소리가 사람의 말을 대신해 소리의 여백을 채운다


사람이 정말 애인일까.

내 팔뚝을 물어 뜯듯, 내 이름을 물어 뜯어줄 믿음직한 그대를 아직도 기다리는 시인은 풋사랑에 몸서리치는 소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덧 먼 생의 길을 걸어버린 시인.

< 생


잠이 햇살처럼 쏟아지네요 늙어가는 생 (생/ 전문)>


어쩌면 꿈이었을까? 사람이 애인인 꿈.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고 오랜 기다림이라는 것을

처마 밑에서

비 맞는 푸른 산 바라보며 고양이가 운다. (새벽밥/ 중에서>


양미리처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랑. 기다리게 하는 이유. 그것은 사람이 애인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 물어뜯기기 위한 간절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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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

살림이란 게 설거지에서 완결된다지만

완결이라는 말이 아프다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집 안을 둘러본다

헝클어진 이불, 무릎께가 닳은 추리닝,

윗목에 돌돌 말린 양말짝

이 모든 게 살아왔다는 증거처럼 구구절절하다

설거지는 구구절절에 대한 즐거운 설명이다

 

젓가락 한 짝과 수저 하나로 남은 생

붉은 고춧가루 하나가 아프게 찍혀 있다

설명보다는 실명에 가까운 고적한 설거지

 

눈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전깃불을 끄고 나가야 하는데

설거지 하다가 나는 모른다

전등을 끌 손가락이 어디에 있는지

그게 내 손안에 있기는 있는지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설거지하는 나를 개관한다

젖은 손으로 이마를 짚어본다

차갑다는 느낌이 내 삶의 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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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지 않는 주말. 밀린 집안일을 하고 일주일간 먹을 반찬을 준비한다.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고, 끼니를 해결하고, 설거지를 하고, 다시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고...

 

창문이 덜컹대는 건 바람이 분다는 말이다. 아주 많이 분다는 말이다.

창문이 톡톡 튀는 건 비가 온다는 말이다. 젖는 줄도 모른 채 흠뻑 젖는 그런 비가 온다는 말이다.

창문이 밝은 건 해가 강하다는 말이다. 잔뜩 찌푸린 채로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나는 집 안에 있는게 맞다.

 

내 삶의 도돌이표가 끝나지 않는 곳. 그 곳에 한번씩 도돌이표에 다녀온 흔적이 남았다.

낡아가는 행주와 수세미, 조금씩 휘어지는 조리기구, 빛을 잃어가다 차츰 찌그러지기 시작하는 냄비며 프라이팬,

이제는 이가 헐거워 조금만 스쳐도 뚜껑을 떨구고 속엣 것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양념통까지..

구석구석 내가 매만진 흔적을 담고 있는 부엌은 나의 오케스트라이다.

 

아직까지는 아다지오를 더 자주 연주하고는 있으나, 미뉴엣을 연주할 날도 있긴 할게다.

왈츠도 좋고 탱고도 좋다. 탱고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쁘지 않다.

내 걱정은...

아다지오에서 레퀴엠으로 넘어가는 건 아닐지에 대한 걱정..

말끔하게 씻어서 엎어 둔 밥공기와 대접, 접시들..그리고 언제나처럼 함께 누워 마르고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

 

늘..잼을 하듯 즉흥곡이 연주되고, 규율도 원칙도 없이 제멋대로인 것을 단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온전한 내 공간.

시린 손이 오히려 익숙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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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안 한다

어떤 일도 안하고 '아니함'만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충 하지 않고 끝까지 철저하게 안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일 외에

다른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모욕을 당해도

내쫓겨도

감옥에 가

끝내 죽음에 이르러도

그는 온순하고 예의 바른 자세로

안 한다. 절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부탁하는, 일은

안 한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부분이 있다

앞뒤 꽉 막혀 답답한 부분


                        ◆


그러나 혁명은 이런

처절한 거부에서 온다


                     ◆


사람을 얼마든지 질식사시킬 수 있는

검은 비닐봉지*에

때로는 봄의, 화사한 페츄니아 화분을 담기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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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4월에서 7월 아프리카에 있는 르완다공화국에서 다수족인 '후투'가 소수족인 '투치'에 대해 집단학살을 자행하면서 실제로 검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켜 죽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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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다 만난 바틀비. 필경사 바틀비는 구멍이 숭숭 뚫린 엄마의 낡은 속곳을 보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거기 있었기에 낡아 버린, 아무것도 한 것은 없음에도 모든 것을 하고 있던 낡은 속곳같은..비약일까.

" I would prefer not to."

심지어 들뢰즈는 바틀비에 대해 은밀한 비문법성이 파괴적인 힘을 낳는다고도 했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선택과 의지..소심해보이지만 '안 하는'것을 '하는' 의지의 표현은 완고하다.  유연성, 혹은 융통성이라는 덫에 발목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조심스러움이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안 하는'것을 열심히 '하며' 살아내겠다는 결연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틀비는 정말 안했을까? 어쩌면 치열하게 하지 않았을까?


<모든 시스템은 무겁다. 시스템을 온전히 떠받치고 있는

바퀴는 무거워, 구르고 싶은거다 (중략)

이렇게라도 구르지 않으면 생업의 시스템을 견딜 수 없어요(중략)

제몸을 맹렬히 굴리지 않고서는 그나마 견딜 수 없는거다(중략)

시스템은 도깨비 빤쓰보다 찔기고도 튼튼하다,끄덕없다.

무겁다. 세상의 모든 바퀴는 구르고 싶은거다.- 세상의 모든 바퀴 /중에서>


간절히 구르고 싶지만, 이렇게 굴러야 생업의 시스템을 견딜 수 있지만 이는 구르고 싶지 않음의 절박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깨지고 사랑이 터지고 사람이 죽어도 죽은게 아닌 시스템을 견디는 건 치욕적이다. 그래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싶은거다.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숨통이 시스템 사이에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없는 시스템이 있다.

없다는 건, 없어야 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안 하려면 해야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해야만 한다.

있다는 건 없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해야 한다는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바틀비의 비문법성은 낱말과 사물, 행위들, 언어행위와 낱말들을 어긋나게 하며 그것은 언어를 모든 지시로부터 떼어놓는다고..들뢰즈가 말했을거다.


이것이 비단 낱말과 사물, 행위, 지시에 대한 구분뿐은 아닐거다. 그것은 혁명일지도 몰랐다. 당연하게 연결되고 당연하게 구속되고 당연하게 종속되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선언.

선언은 간단했다. '하지 않는 것을 하겠다'


노점 할머니의 채반에 수북하게 담긴 향 좋은 쑥을 담아주던 검은 비닐봉지가 학살의 도구가 되어지기도 하고, 학살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비닐봉지에서 쑥쑥 자라날 고추모종을 꺼내기도 한다. 어떻게? 라는 물음과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을 담고 끊임없이 뭔가 '하는', '해야만 하는' 일상, 그래야 한다고 믿게 하는 틀 속에서 살아남는 법은 깨고 나오는 일 밖에 없지 않을까?


소금 울음.

김진숙의 소금꽃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목덜미에 하얗게 돋아나던 소금꽃. 행복을 위해 희생하며 술 마신 어느 저녁 잠꼬대처럼 웅얼대던 아버지의 노래가 소금 울음이었다는 낮은 시는 고춧가루 하나도 없이 맵짰다.

태생이 바닷물이었던, 너른 염전에서 하염없이 말려지고 모아져 창고에 수북히 쌓였다가 어느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부엌 양념통에 들어찬 소금.

바다로 모여진 삶의 찌꺼기들이 다시 되돌아 와 삶에 간을 맞추는 이 순환은 절묘하다. 이 짠 맛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오래전 바다에 던져버린 내 사연의 일정부분이 포착될것도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진 살갑지 않은 아비의 말처럼, 철없는 아들녀석의 말처럼, 생각없는 남자의 말처럼 있는대로 쓰여진 시들.

아무리 포장을 달리해도 소금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리 투박해도 시일 수 밖에 없구나 싶어진다.


바틀비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은 깊어진다..'했네..했어..'라고 자꾸 중얼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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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녁 발걸음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오고생이 죽어지는

게 말년 늦복이렌 허영게 하이고 게메 느네 아방은 이미 글

러부러신게 경해도 귀는 트연 뭐센 고르믄 고개로 끄덕허

고 물 도렌도 허고 그것만도 어디라 더 아프지만 말앙 자는

듯이 죽어지믄 그것도 복이주 하루라도 나보다 먼저 죽어

주는 것만도 큰 복이고 말고

  게나저나 나 죽을 때랑 나냥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톡, 허

게 죽어져사 헐건디 경해서 느네덜이 덜 고생헐 건디, 게메

경 해지카.


< 제 발걸음으로 화장실 출입하다 조용하게 죽어지는 게

말년 늦복이라 하던데 아이고 글쎄다 네 아버지는 이미 틀

린 거 같아 그래도 귀는 트여서 뭐라 말하면 고개도 끄덕하

고 물 달라고도 하고 그것만도 어디냐 더 아프지만 말고 자

는 듯이 죽으면 그것도 복이지 하루라도 나보다 먼저 죽어

주는 것만도 큰 복이고 말고

  그러나저러나 나 죽을 땐 나대로 화장실 출입하다 가만

히 죽어야 할 텐데 그래야 너희들이 덜 고생할 텐데, 글쎄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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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국의 언어처럼 들린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언어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말은 늘 그렇게 들린다. 특별한 문법과 어투를 가진 어머니의 말은 세상의 분석으로 온전히 해석할 방도가 없다.

제주의 시인 김수열의 시에서는 사투리 중에서도 가장 고난도라고 하는 제주말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만나지는 돌담처럼 쌓여있다.

잘 마무리 된 반듯한 시멘트 담장이 아닌 얼기설기 쌓은 듯해도 견고하고 바람이 통할 길까지 갖춘 제주의 돌담. 티끌 하나도 넘지 못하게 시멘트를 바른 담장과는 다르다.

김수열의 시를 읽으면 통증이 온다. 온전히 해석이 안되는 단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동과 쌓아두며 쏟았을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통증이 시작된다.

가슴 어디께..혹은 정수리 근처가 따끔따끔해진다. 그런 통증이 시작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관절염에 휘어진 어미의 손가락처럼 못생기고 믿음직한 바람이 들어앉는다.

그 순간 극대화되는 안도감. 통증이 없었다면 밍숭맹숭했을 문법이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소망 뒤 쪽으로 이어지는 시에는 아버지의 투병과 아버지가 나온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이 이유가 ..


아이들과 아내와 어머니와 아버지와 친구와..

모든 사람들이 시인의 곁에서 함께 시를 일군다. 제주의 바람이, 제주의 바다가, 제주의 사람이 시를 짓는다.

일구어 지은 시는 순박하고 정갈하다. 바닷가 모래 속에 주먹 하나 넣어 토닥거리며 만든 두꺼비집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높이 선 타워팰리스보다 애틋한 이유와 닮았을것도 같다.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라고 다같이 부르는 노래와 마지막에 주먹을 뺄 때의 긴장. 딱 주먹만한 넓이로 지어지는 집. 만족은 딱 맞는 크기로 지어진다.

어쩌면 무덤을 닮은 두꺼비집. 딱 내 몸뚱이가 누울만큼의 땅만이 필요할 뿐인 무덤. 그 속에는 더 넣을 것도 더 뺄 것도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어머니가 그렇다. 더 넣을 것도 더 뺄것도 없이 만족한 존재..


시집의 끄트머리에 제주말을 다시 표준어로 적어둔 해석본(?)이 있다. 무슨 사연인줄은 읽어내겠지만 어머니의 음조는 읽히지 않는다. 그래도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다시 읽으니 더 선명해지는 어머니의 말. 우리 엄마도 그랬지.


어려서 가장이 되었던 엄마는 영민해서 미8군 타이피스트를 했었단다. 그러다 제주공항에서 일을 했었고, 거기서 꽤 오래 머물렀다고 했다.

내게 화가 나면 엄마는 제주말로 야단을 치곤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건지, 하나도 못알아들을 말을 왜 하는건지..참 별일이다 싶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어미가 되고나서 어느날엔가 엄마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대? 제주말 하나도 모르는 애한테..'

'홧김에 말을 하다보면 엄마도 사람인데 도를 넘을수도 있고, 그게 너한테는 상처가 되고 나한테는 후회가 되고 그럴게 분명하잖아. 근데 그게 조절이 되니? 나는 알아듣고 지나쳤다 싶으면 혼자 반성하고, 너는 못알아들으니 엄마가 화가 났구나 잘못했네..까지만 알고 넘어가면 되는거니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

'너도 애 키워보니 알잖니. 말이 씨가 된다고 좋은 말 해주고 싶어도 그게 맘대로 되니? 안하자니 홧병 나겠고, 하자니 못할짓이고..'


제주 말은 어미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모르겠는..그런 말..

어미의 말은 세상의 언어가 아니다. 할미에게서 배우는 딸에게 저절로 가르쳐지는 신내림처럼 어찌할 수 없이 이어지는 내림일지도..

나는 아직 배우지 못한 어미의 말..새벽 정화수라도 떠 놓고 배우고 싶은 어미의 말..


우리 엄마도 늘 그런다.

'자다가 조용히 불러가시라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한다. 내 걱정은 말아라...'

그럴 때 나는 철딱서니 없이 대꾸하곤 한다.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진짜 너무하네"

어미의 말은 끝끝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세상의 언어가 아닌 탓이다.


시를 읽으며 내가 뱉은 한마디도.."엄마는 도대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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