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협동조합에세 기획한 스무명이 쓴 스무명의 독학자의 이야기다.
제도권 교육이 아닌 삶을 지탱할 무기를 틀어쥐고 스스로 배우며 살아낸 사람들.
부를 축적하고 명에와 권위를 갖는게 성공이라면 이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승리‘한 사람들이다.
제 삶의 주인이 되는것을 방해하는 온갖 위협과 타협의 유혹과 간단없이 싸워 이긴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알몸으로 던져진것 같은 삶에서도 무릎에 힘을주고 일어난 사람들이다.
2016년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묶었다고 한다.
낯익은 글이 있는 건 그 탓인가보다.
알라딘 1세대 리뷰어 물만두 홍윤님의 이야기는 너무나 반갑다.
스스로를 ‘변방의 야매독자‘라 칭하는 나로서는 어쩐지 동질감 같은것도 느껴진다.
물만두님처럼 추리소설을 파지는 않지만..그래서 야매지만..

어떻게 살것인가가 불분명하고 어느쪽으로 가야할지도 막막할 때..예전에 누구는 그랬대. 라고 이야기하며 위안과 안도를 느끼듯 읽어보면 생각보다 든든해지겠다.
그랬지 그랬어..하는 혼잣말도 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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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리뷰어의
역할은 비평가와 다르다. 북 리뷰어는 독자에게 자신의 독서 경험, 즉
사용자 경험UX(User Experience)을 공유한다. 이는 독자에게 손을 내밀고 지도를 제시하고, 길을 안내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북 리뷰어는 독서의즐거움이라는 ‘경험‘을 보편화한다. 이는 문학(책)의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이며, 근대 문학이 종언을 고한 이후에도 문학(책)을 읽는 일이 흥미로운 경험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어떤 지식도 지혜도 경험도 아닌 나 자신과의 소통, 내 과거와의 만남이다. 그로 인해 다시 내 미래와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홍윤의 리뷰 작업에는 두 가지 일관된 원칙이 존재했다. 하나, 직접 읽은 책에 대해서만 쓸 것. 둘, 솔직하게 쓸 것. 대단한 이론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홍윤의 리뷰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 두 원칙을 끝내 고수했기 때문이다. 홍윤은 성실한 리 뷰어로서 언제나 뚜렷한 주관을 견지한 채 책을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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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분신‘은 ‘돌이킬 수 없는 앎의 증언이다.

 전태일의 분신은 자신의 몸을 불태움으로써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에게그 어떤 자리도 허락하지 않았던 이 세상에 그가 새긴, 돌이킬 수 없는마지막 문장‘이자 노동자들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든 도화선이 된 ‘첫문장‘ 이었다. 

독학자는 불타오르는 사람이다. 체계적인 기록을 남길 수는 없을지라도 독학자는 불이 아닌 ‘타오름‘이라는 내재된 힘을 발명하는 이다.
독학자라는 이름에 소유권이 없다. 분할된 몫의 자리를 불태우며 ‘서로가용해되어 있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 독학자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일 수 있는 익명의 자리로 향한다. 전태일의 ‘인간 선언‘은 이름이 없는 이들의 익명성으로부터 발화한 것이었다. 

‘강성 노조‘니 ‘귀족 노조‘니 하는 비난이 많지만, 왜 그들이 강성‘이될 수밖에 없는지를 한번만 돌아보면 그런 말은 하기 어렵다. 그중 누가
‘귀족‘ 인가? 어느 나라 ‘귀족‘이 과로사로 죽을 만큼 초과노동하고, 정규직 잘렸다고 조끼 입고 한데서 자며 빨갱이‘ 누명을 쓰고, 그러다 자살하는가?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인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로는 부족하다.
이미 학벌과 부를 위한 기회가 불평등하게 체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정(=시험)의 공정함은 환상일 뿐이다. 결과의정의는 저절로 달성되지 않는다.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고교 등급화를폐지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또한 삶의 어느 단계에서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교육을 찾고 국가는 그것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김진숙의 독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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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옥의 독학은 의식과 무의식,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영화가의식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여성으로서의 삶은 무의식적 차원에해당하는 것이었다. 박남옥의 독학은 훌륭한 개념과 이론이 제공하는 확실한 지침 대신 공식적인 말과 글의 칸막이를 벗어난 예술적·육체적 모험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말과 글의 칸막이를 넘는 일이 가정이라는 규율적 공간의 울타리를 넘는 일과 동시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훌륭한 학자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어디 학자뿐이랴. 유능한 기술자 한 명의 가치 또한 그에 못지않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 이렇게 사라지는 기술자들의 경험지를 집적할 만한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구술사가 중요한 것처럼. 기술사에서 지역 기술자들의 경험지 역시 중요하다. 그들의 지식은 실전에서 찾아낸 심미적, 기술적 차원에서 가장 알맞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알맞음은 실패의 횟수와 비례해 얻어진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실패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도전을 찬양하면서도 실패를 경멸하고오로지 독학만이 창조적으로 실패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은 아닐까?

전태일의 분신이 한국 노동운동사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허락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노동 지리는 사실에 대한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시회에 알리고 호소하는 데 전력했던 ‘투사‘이기 이전에 이 사회기 은페하고 있던 구조를 노동 현장에서 예민하게 탐침하며 노동자의 인어로 구체화해갔던 유례없는 독학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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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란 무엇인가. 그건 사전적으로 스승이 없는 사람 혹은 학교에다니지 아니하고 혼자서 공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느 스승‘이나 학교는 어디까지나 제도적인 측면을 일컬을 따름이다. 진정한 독학자에게는 만인이 스승이고 학교는 도처에 있다. 그런 점에서독학자‘는 기성 제도로부터 탈주하거나 소외된 인간이지만 역설적으로그 탈주와 소외로부터 수많은 배움의 단서를 풍부하게 획득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학자‘는 언제나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제도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게끔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배층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고 통제했 던 예는 드물지 않다. 그건 앎과 배움이 협소한 지식의 문제를 넘어 정치 적 지배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 의는 단지 투표권의 획득에 불과한 것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앎과 배움의 평등을 통해 만인이 통치의 주체가 될 자격을 지니는 정치체제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와 같은 평등의 조건으로서의 삶과 배움이다. 현재 교육은 특정한 재화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합리적으로 구획하는 사회적 분할선으로 고착화되고있다. 

 개별적으로 동이하드 않든 홀로 공부한 사람은 배움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금껏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독학이 제도권 바깥에서 배운다는 말로 무학이 제도권에서의 배움이 없다는 말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제도권 바깥에서 배우는 것과 배움이 없다는 말이 그간 유사어처럼사용되어온 것이다.

 신불출은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웅변과 만담 이라는 글에서 만담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상세히 밝힌다. 그는 만담을 강연이나 연설 재담이나 장난과 구별하며 "해후성humour의 종횡무진함과 풍랄성irony의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인의 가슴을 찌를 만한 칼 같은 박력이 있는어떤 진실을 필요로 하는 불같고 칼 같은 말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어떤 독학은 그렇게 세상을 뒤틀어놓는다. 어쩌면 그 자신의 삶마저도, 그가 조선의 대중들에게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스스로 열지 못했던,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의 틈새를 비틀어 열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가 삶으로서 보여주었던 말이라는 독학의 한 양식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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