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 낯선 경험으로 힘차게 향하는 지금 이 순간
조승리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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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점점 잃어가다 이제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된 작가 조승리의 세상을 읽는 법. 작가가 감각하는 세상은 직관의 결과보다 풍성하고 입체적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남긴다. 그 순간을 기록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기록을 넘어서는 건 '감각'의 힘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을 온전히 온 몸 구석구석에 새겨두면 내 감각 하나가 사라진대도 그 감각은 고스란히 남을거니까.
작가의 일상과 여행을 담은 글이다. 전작(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이 워낙 화제였어서 사실 조금 김이 빠지긴 했다. 뭐랄까..김동식 작가에 대한 초반 화제성이 너무나 대단했던 것처럼. 누구든 그럴거다. 반감기의 기간이 얼마나 긴가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도 작가의 '보이지 않아 보이는' 것은 다채롭고 따끈하다. 우리나라에서 장애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거절 당하는 일'이라고 인터뷰했던 내용도 생각났다
매립되는 동물들을 보았던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고 구체적이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읽어대던 책들, 그 마음도 짚어진다. 최근 읽었던 베토벤을 읽다에서도 결핍과 그 결핍 건너의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어쩌면 작가는 어머니의 호쾌함과 당당함, 부지런한 책임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도 같다.
어쩌면 작가는 이 더러운 세상 굳이 봐서 눈 고생시키지 말고 보이는 것 뒤의 의미와 삶의 근거를 감각하라는 축복을 받은것일지도..
우리나라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절박하다. 마사지숍에서 마사지를 하는,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당연시여겨지는 일을 하며 글을 쓰고 세상을 읽는다.
나는 못한다...마음 한 켠이 무너질 때 멍하게 읽기 좋다. 읽다보면 시선이 돌아오고 감각이 깨어난다. 좋다.

[ 학살은 붉은 생채기처럼 부르튼 흔적을 남기고 종결됐다. 산 자의 긴 그림자가 도망치듯 일제히 빠져나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방금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으로 천천히 향했다. 단단하게 다져진 흙더미 위로 중장비의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밭에서는 석유냄새가 강하게 났다. 그 냄새 사이로 숨어 있었던 듯 돼지 분뇨 냄새가 산발적으로 새어 나왔다. 가을 바람이 잠자리 떼처럼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나는 생목숨이 묻힌 둔덕으로 걸어 올라가 바닥에 손을 대보았다. 차가울 거라 생각했는데 손바닥 밑에서 미열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흙바닥에 한쪽 귀를 댔다. 땅속에서는 죽어가는 비명 대신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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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사람들 - 문래동 야간 택시 운행 일지
이송우 지음 / 빨간소금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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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사람들-문래동 야간 택시 운행일지, 이송우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형수인 아버지와 옥바라지와 삼남매 육아를 해낸 어머니의 슬하에서 그가 보고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다.
계엄령이 떨어지기 이전부터 이 정부는 탐욕스러운 금광업자처럼 온 나라를 부수고 흔들어 금주머니를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국토가 도륙이 나는건 알 바가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 역시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기어이. 그 밤 더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다 빨아먹으려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어찌되었건 이 정부는 생존의 터와 도구를 몰수하는데 도가 텄다. 작가 역시 경기 악화로 법인택시 운전을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도의 일상을 살고 있었고 조금 더 지나서는 투잡이니 쓰리잡이니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쟁기 하나로는 해결 될 생존이 더 이상 없다는 반증일거다. 부지깽이도 낫도 호미도 부엌의 주걱까지 손에 들고 나서도 겨우 살아지는 생존의 현실이다.
그의 택시에서 만나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 비추어지는 작가의 삶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온 몸으로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얼굴에서 제일 앞에 나와있는 티를 낸다고 코끝이 먼저 반응한다.

문득 남민전의 전사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선생이 떠올랐다. [선생은 자주 '몸 자리'에 관해 말하고는 했다. " 내 삶이란 내 몸 자리의 궤적이다" 이렇게도 말했다. " 사람은 모든 삶의 궤적은 처지에 의해 수동적으로 '놓이는' 몸 자리와 의지에 의해 스스로 '놓는' 몸 자리의 연속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한겨레 21. 2024.4]
고 했다.

작가는 수동적으로 '놓이는' 몸 자리에 자신의 의지와 역사와 시대의 과제를 고민하는 '놓는' 몸 자리로 만들어가는 변환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고된 운전으로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을 때 " 내 몸이 아픈 직업은 나와 맞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208쪽 라고 누군가 조언을 했고 몸의 신호와 함께 운전을 그만두게 되었다.
문득, 몸이 아프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보았다. 모든 노동은 노동자의 삶과 몸을 갉아 이윤을 내는 것 아닌가?라고..잔뜩 뾰루퉁해진 시선을 던져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막에 던져진 고립무원의 노동자, 소수자, 농민, 여성, 장애인,.이 더는 아니다..그 벽을 허무는 경험을 우리는 한겨울 내내 겪었다.

택시 운전을 하며 작가가 느낀 세상으로의 확장. 개인의 시선과 개인사가 아닌 저마다 조금씩은 교집합이 생기는 부분을 모아가다 보면, 너의 세상이 나의 세상이자 우리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이 올 것도 같다.

어머나 세상에~라고 할 만큼 문학적이고 감정적인 부분도 있고, 어쩜 좋아, 싶은 이야기도 있다. 말 그대로 택시 운전사들만의 특권일 수 있는 정보와 사연의 최종도착지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사실, 택시비가 만만치 않아서 택시를 탄 지 좀 오래된 것 같다. 택시는 공공 고해성사의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도 되는..
허기가 몹시 심한 날, 갓 지은 밥에 올려 먹는 고들빼기 같은 글이다. 입맛이 도는 쌉사름한 맛. 달고 짜고 맵고..그렇지만 끝까지 제 일을 다 하는 쓴 맛의 고군분투. 그 진심이 허기를 잠재우듯...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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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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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보안관이자 다민족국가, 민주주의의 표본인것 처럼 인식되던,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 그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고, 사회적 생존적 위협을 당하지 않으며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국민으로서의 삶은 이상 속의 삶으로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고, 통치행위를 하지만 군림하지 않는 지도자와 국가 시스템을 갖는 민주주의가 이상적 이론이 아닌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갖는 유사한 통치 시스템으로 선택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양되는 시기는 모든 국가에서 혹독한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부정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닮아버리는 자식처럼 소위 '기득권'이라 칭해지는 사람들은 결국 같은 자리에 이름표만 바꾼 채 존재하고 있었다.
책에서 예를 든 초기 미국의 권력이양의 모습, 태국의 경우, 1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2.6 폭동의 모습. 모든 예시들이 낯설지 않다. 그 혼란 속에서도 '민주주의'는 조금씩 모양을 잡아가고 있었던가보다.

정당정치의 시작과 동시에 기득권을 쥔 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더 확장시키려 한다. 그들은 정치적 권력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그 때마다 사회는 혼돈속에 빠져든다.
이것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적 원칙을 벗어나는 일이다.
평화적 정권교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는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가능하다. 그들이 패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앞으로 승리할 기회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을 때 가능하다.
12.3 계엄 이후 계엄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내란우두머리를 끝끝내 포기 할 수 없었던 정당의 모습에서 그들이 느끼는 '정권을 내어 놓은 후의 재앙'에 대한 공포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의 필사적 저항의 근간은 두려움임에 분명하다.
정치적 수단을 틀어쥔 소수에 의해 민주주의는 자주 훼손되고 이용당한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에 헌신적인 정치인들도 있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라고 칭해지는 이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하며 반 민주세력과 타협없이 관계를 끊는 자세를 갖는 사람들. 물론 그 안에 모양만 그럴듯한 이들도 있다.
국민들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 않고 다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올려놓으며 상을 차리던 사람 중에 바르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내부분열을 일으키는 자들. 그런 자들이 인질로 잡힌 민주주의의 목에 기어코 칼을 꽂는 자들이며 결과적으로 권력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세력과 공범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제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하여 다수를 지배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저항하게 된다. 저항은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 발 더 나아간다.
민주주의는 이제 겨우 눈을 뜬 신생아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 생이 그 격변의 과정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민주정으로 조금씩 좌표를 이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시작은 더욱 확장되고 복잡해지고 있다. 어쩌면 본격적인 민주주의는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종교도, 인종도, 성별도, 무엇도 '정치적인 인간'의 행보를 막을 수 없는 까닭이다.

책을 읽는 내내 12.3 친위쿠데타와 시민들이 연대하는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 여성들이, 노동자가, 농민들이,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지역들이 움직이고 있다. 민주주의적 사회질서가 사라질 때의 두려움은 '연대'라는 힘을 끌어왔다. 끝없이 드러나는 불법과 그들만의 철옹성. 그것을 무너뜨리는 길은 어쩌면 공고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승리와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이라는 믿음으로 쉼없이 성을 돌 때 그 성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그렇게 탄생되지 않을까? 반 민주세력과 철저하게 단절하며 무너진 성의 벽돌을 다시 쌓는 일. 미래세대의 민주주의의 시작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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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우울증 - 죽을 만큼 힘든데 난 오늘도 웃고 있었다
훙페이윈 지음, 강초아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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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많은 것을 말해주는 책이다. 제목만으로 어느 정도의 수긍과 동의가 이루어진다는 건 양면성을 갖는다. 그만큼 공감할 준비가 된 독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수많은 미디어의 정보와 넓고 얕은 지식들을 기반으로 속칭 '뻔 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 대신 미리 형광처리 된 밑줄을 그어 놓은 편집은 내 경우는 달갑지 않았다. 독자들의 처지나 취향이나 시각에 따라 밑줄은 다르게 그어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조금 성가셨다.


미소우울증을 정의하길 '우울증 문제가 있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감추고 있는 사람의 심리'라고 한다.

사회와 가정과 자신이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원하는 모습.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편적'이라고 배우며 살았다. 배려와 감사가 넘치는..아주 어릴 때 형제끼리 싸워도 엄마는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둘의 손을 꼭 잡고 마주 쥐어주며 언니한테 잘못했다고 해. 동생한테 미안하다고 해. 사이좋게 지내자 악수 하고. 사랑해 안아줘야지. 를 주문했다. 내 안에 나의 주장과 요구 그리고 화해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납득 없이 내가 아닌 상대에게 너그럽고 친절해야 한다고 우격다짐으로 배워왔던 것이다.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고 개천에서 용은 더이상 나오지 못하고 한 번 쯤 실패할 수도 없는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안'은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기반.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 좋지 않은 직장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가능성을 제시해야 살아남는 직장에서 기꺼이 해내야 하는 역할은 힘겹기만 하다. 

하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은 없다. 세상은 '나'를 제외하고 화려하고 신나게 돌아가고 있다. 여유로운 삶, 즐거운 삶, 그런 삶의 표정들이 온갖 매체 속에서 보여진다. 나의 서러움과 불안함이 세상에게 들켜서는 안된다는 강박은 방어기제처럼 저절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럴리가 없어.' '그렇게 밝은 사람이?'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떠난 이는 누구에게도 우울증을 들키지 않았다. 애도하는 이들은 떠난 이의 우울을 들으며 자신의 우울이 아직 들키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이제 너무나 흔하게 말해지는 우울, 마음의 감기라고 친근한 표현도 있는 우울. 하지만 자신의 우울만큼은 들켜서는 안된다.


가르치는 아이 중에 '해피 바이러스'라고 불리웠던 아이가 있다. 아버지와 자매가 산다. 어머니는 아이가 꼬마였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아이는 저보다 더 어린 동생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돌보며 자랐다.

아이는 늘 웃었고 아이의 가방엔 늘 과자며 젤리가 그득했다.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가도 1/n 보다 조금 더 내는 아량도 보였고 수업시간에도 열심이었다. 학급 임원도 했고 댄스동아리도 했고 한국사연구동아리도 했고 캘리그라피를 배워 엽서를 만들기도 했고 쿠키를 구워오기도 했다. 매 순간 열심인 아이가 신기했다. 사춘기도 없나? 저 아이 정말 대단해. 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좋아했다. 늘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나 역시 칭찬을 이어갔다. 어느 날 그 아이가 종일토록 엎드려 울기 전까지 말이다. 아이가 스스로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렸다. 힘들었던 거다. 아무리 괜찮다고 다짐을 해도 더이상은 감출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다 잘하고 사니? 여태까지 잘 해왔는데 그것만으로도 대단해' '때때로 울어, 울어야 사람이지 울어봐야 우는 사람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거지' '다 잘하려고 하지만 젤 잘하는 거 하나만 잘 해도 돼.' 따위의 말을 늘어놓았고 안정을 찾기 까지 1년도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아버지와 상담을 다녔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나의 옆지기는 공황장애 3년차이다. 딸아이의 친구는 항우울제를 먹고 있다고 했다.

우울은 더이상 특정 계층이나 특정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코로나 시국이 길어지며 자포자기의 심정들도 늘어가고 있다. 

책에서는 행복을 부르는 열가지 생각을 말한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우울증 처방을 말해보라고 하고 하나씩 적으면 이 열가지 방법을 다 적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연하기도 하고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한 방법. 

하지만 잘 안된다. 그만큼 우리는 우울과 가까이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으며 뚱딴지 같은 생각을 했다. 

우울이 바이러스로 전염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호흡기 정도야 참아줄 수 있는데 우울이 창궐하면 방도가 없을텐데? 

마스크에 스마일을 그리고 다닐까?


오랫동안 웃는 법을 잊은 것 같다. 소소한 행복. 너무나 소소해서 있었는지도 모를 만족과 어려운 현실에 우리는 조금씩 미소우울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미소우울증을 앓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를일이다.

나는 약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고 요구할 수 있다면..

당신도 내게 기대시겠습니까? 라고 제안할 수 있다면..

우울증은 조금 더 쉽게 걷혀질 수 있을까? 를 생각한다.

" 우울증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이런 노력이 전부 사후에 이뤄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증거를 수집한다. 예를 들면 자살한 사람의 가까운 친구를 만나서 그가 우울증을 앓았던 흔적을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 P28

"세상 사람들은 미소를 ‘힘들지 않다‘,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다‘,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미소를 전부 이렇게 이해하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과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더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미소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마음 속 고통을 완벽하게 감추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한 표정을 들켰을 때, 연약함과 우울함이 밖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슬퍼한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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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 - 장정희 장편소설, 2020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장정희 지음 / 강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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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돌아오는 생일, 해마다 책을 받은지가 꽤 되었다. 잊지 않고 챙겨주는 친구 덕에 호사를 누린다.

이번 생일에도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달라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딱히 읽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그러다 몇 권의 책 목록을 주었고, 거기 옥봉이 있었다.

새빨간 표지, 문득 펑지차이의 '전족'이 생각났다. 어떤 프레임 때문일 것이다. 여성, 억압, 차별, 기타 등등의 억울함과 불공평함을 호소하는 프레임.

사실, 이옥봉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허난설헌일지 이매창일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살아가며 이렇게 저렇게 듣고 읽은 탓에 아는 것일 뿐, 관심 있게 들여다보진 않았던 게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궁금하고 호기심이 동한 건 사실 어이없다 싶은 계기가 있었다.

티브이 프로그램 중, 천일 야사(?)라는 것이 있다. 사흐라자드의 천일야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이다. 서프라이즈 국내판 같은 느낌?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르거나 익히 아는 이야기들이 자주 편성되는 데다 너무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는 내용들이 많지만 굳이 채널을 돌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무심히 그냥 본다. 어쩌다 얻어걸리는 소재들이 있어서다.

여하튼 어느 날엔가 이옥봉의 이야기를 했다. 온몸에 종이를 휘감은 여인이 절벽 위에 서 있는 장면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그녀는 어떤 글을 썼을까?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천형 같은 재능의 결과물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몇 개의 시들을 찾아 읽고 낮은 탄성을 내놓긴 했지만 이내 잊었다. 그 후 일요일의 루틴처럼 보게 되는 서프라이즈에서도 이옥봉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러다 옥봉(장정희 장편소설)을 알게 되고 급기야 단숨에 읽어냈다.

이물감이 없는 이야기.

이야기에 이물감이 없다는 건, 억지스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개연성 없이 감정을 충동질하는 글들이 없다는 말이다. 때때로 역사 속 여성들에 관련된 도서들을 읽다 보면 그 억울함과 참담함을 드러내기 위해 과하게 감정을 찔러대는 서사들을 만나곤 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차라리 더 냉정하게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래 준비하고 써냈음이 분명한 글. 이렇게 자분자분하게 써내리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오래 옥봉을 앓았을까? 싶다. 서두름 없이 담담하게 내어놓는 이야기가 때로는 더 수긍이 되고 더 저릿하게 공명된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자신의 이름도, 사랑도, 죽음까지도 스스로 선택한 옥봉은 시대의 희생양(?)이 아닌 시대를 뚫고 나온 오롯한 봉우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녀였던 옥봉은 의붓어머니 장 씨의 타박을 견뎠다. 아버지의 자애로움과 시에 기대어. 어찌 되었든 출가를 시켜 집에서 내보내려 하자 스스로 선택한 사람의 첩실이 되기로 한다. 그곳에서도 정처 이 씨의 질투와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을 아껴주는 남편에 기대어 버텨낸다. 시는 남편이 원할 때, 허락할 때만 가능하다. 시를 반쯤 빼앗기고 얻은 사랑일지도 모를 일이다.

당파의 정쟁이 치열했던 시기, 외직으로만 돌다 결국 멈춰버린 사내는 언제 어떻게 누명이 씌워진 채 처참한 말로를 맞이할지 전전긍긍했고 뾰족해질 대로 뾰족해진, 더는 여유도 낙관도 없는 두려움만 남은 사내에게서 옥봉은 내쳐진다.

이 대목에서 나는 혼자 울컥했다. 기구한 삶의 여인이어서일지도 모르지만 팍팍한 삶에 가슴 한편 연필 한 자루 꽂을 여유도 없던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제일 먼저 책 읽기를 놓았다. 시를 놓았고, 소설을 놓았다. 내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면 원 없이 읽을 거야!라고 다짐은 했지만 그 다짐을 실행할 수 있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버려진 옥봉을 부축한 이들은 천민들이었다. 부월이, 두만이, 두만 엄마 그리고 맹아. 옥봉의 시를 읽을 수 있는 이들은 옥봉을 내쳤지만, 그 시를 읽을 수 없었던 이들은 옥봉의 곁에 머물렀다. 고통 속에서 고통을 뚫고 맑게 솟는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시의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는 고관대작들의 술놀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바스러지는 뼈 마디마디를 모아 글자를 짓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녀로 태어나 첩실로 살다 마지막 숨까지 시로 적어 온몸을 휘감은 채, 삶의 마지막 결정을 내린 옥봉. 스스로 시에게 몸을 내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소멸로 시를 지켜낸 건가? 모진 처지를 타고 났고 처절하게 살았기에 옥봉의 시는 애절한 사랑의 노래마저 생기가 있다. 마치 장애가 있는 여성비정규직노동자의 순한 미소조차 강단이 있어보이는 것처럼.

나는 옥봉을 읽으며 어떤 인물에 집중하기 보다 옥봉이라는 이름 대신 '시' 혹은 '문학'등을 대치시키며 읽었다. 비슷비슷한 구조 속에 담아두고 애닲아만 하는 건 어쩐지 무례일것 같아서. .

살기 위해 시를 쓴다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는 요즘, 죽음으로 시를 지켜내고 살려내려는 숭고함은 좀체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시기에 읽은 '옥봉'

이제 한 물 가고 있는 밈으로 이 느낌을 치환해본다면.

진심으로 가슴이 웅장해진다고...말할 수 있겠다.

애당초 생에 만약, 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너도, 나도, 아무도 생의 뒷모습을 모르는 것 아닌가. 너와 나의 생이

그런것 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굴레에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살아가는 것, 그게 생(生)인 것이다.

옥봉 307쪽

당신들은 내게 시를 '재앙'이라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내게 시는 오로지 나의 존재 증명이자 여자로서, 서녀로서, 소실로서 살아야 했던 내 생의 전부를 내건 발언이고 항변이고 싸움이었던 거지요.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그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지요.

옥봉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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