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돌아오는 생일, 해마다 책을 받은지가 꽤 되었다. 잊지 않고 챙겨주는 친구 덕에 호사를 누린다.
이번 생일에도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달라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딱히 읽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그러다 몇 권의 책 목록을 주었고, 거기 옥봉이 있었다.
새빨간 표지, 문득 펑지차이의 '전족'이 생각났다. 어떤 프레임 때문일 것이다. 여성, 억압, 차별, 기타 등등의 억울함과 불공평함을 호소하는 프레임.
사실, 이옥봉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허난설헌일지 이매창일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살아가며 이렇게 저렇게 듣고 읽은 탓에 아는 것일 뿐, 관심 있게 들여다보진 않았던 게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궁금하고 호기심이 동한 건 사실 어이없다 싶은 계기가 있었다.
티브이 프로그램 중, 천일 야사(?)라는 것이 있다. 사흐라자드의 천일야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이다. 서프라이즈 국내판 같은 느낌?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르거나 익히 아는 이야기들이 자주 편성되는 데다 너무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는 내용들이 많지만 굳이 채널을 돌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무심히 그냥 본다. 어쩌다 얻어걸리는 소재들이 있어서다.
여하튼 어느 날엔가 이옥봉의 이야기를 했다. 온몸에 종이를 휘감은 여인이 절벽 위에 서 있는 장면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그녀는 어떤 글을 썼을까?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천형 같은 재능의 결과물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몇 개의 시들을 찾아 읽고 낮은 탄성을 내놓긴 했지만 이내 잊었다. 그 후 일요일의 루틴처럼 보게 되는 서프라이즈에서도 이옥봉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러다 옥봉(장정희 장편소설)을 알게 되고 급기야 단숨에 읽어냈다.
이물감이 없는 이야기.
이야기에 이물감이 없다는 건, 억지스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개연성 없이 감정을 충동질하는 글들이 없다는 말이다. 때때로 역사 속 여성들에 관련된 도서들을 읽다 보면 그 억울함과 참담함을 드러내기 위해 과하게 감정을 찔러대는 서사들을 만나곤 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차라리 더 냉정하게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래 준비하고 써냈음이 분명한 글. 이렇게 자분자분하게 써내리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오래 옥봉을 앓았을까? 싶다. 서두름 없이 담담하게 내어놓는 이야기가 때로는 더 수긍이 되고 더 저릿하게 공명된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자신의 이름도, 사랑도, 죽음까지도 스스로 선택한 옥봉은 시대의 희생양(?)이 아닌 시대를 뚫고 나온 오롯한 봉우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녀였던 옥봉은 의붓어머니 장 씨의 타박을 견뎠다. 아버지의 자애로움과 시에 기대어. 어찌 되었든 출가를 시켜 집에서 내보내려 하자 스스로 선택한 사람의 첩실이 되기로 한다. 그곳에서도 정처 이 씨의 질투와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을 아껴주는 남편에 기대어 버텨낸다. 시는 남편이 원할 때, 허락할 때만 가능하다. 시를 반쯤 빼앗기고 얻은 사랑일지도 모를 일이다.
당파의 정쟁이 치열했던 시기, 외직으로만 돌다 결국 멈춰버린 사내는 언제 어떻게 누명이 씌워진 채 처참한 말로를 맞이할지 전전긍긍했고 뾰족해질 대로 뾰족해진, 더는 여유도 낙관도 없는 두려움만 남은 사내에게서 옥봉은 내쳐진다.
이 대목에서 나는 혼자 울컥했다. 기구한 삶의 여인이어서일지도 모르지만 팍팍한 삶에 가슴 한편 연필 한 자루 꽂을 여유도 없던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제일 먼저 책 읽기를 놓았다. 시를 놓았고, 소설을 놓았다. 내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면 원 없이 읽을 거야!라고 다짐은 했지만 그 다짐을 실행할 수 있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버려진 옥봉을 부축한 이들은 천민들이었다. 부월이, 두만이, 두만 엄마 그리고 맹아. 옥봉의 시를 읽을 수 있는 이들은 옥봉을 내쳤지만, 그 시를 읽을 수 없었던 이들은 옥봉의 곁에 머물렀다. 고통 속에서 고통을 뚫고 맑게 솟는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시의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는 고관대작들의 술놀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바스러지는 뼈 마디마디를 모아 글자를 짓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녀로 태어나 첩실로 살다 마지막 숨까지 시로 적어 온몸을 휘감은 채, 삶의 마지막 결정을 내린 옥봉. 스스로 시에게 몸을 내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소멸로 시를 지켜낸 건가? 모진 처지를 타고 났고 처절하게 살았기에 옥봉의 시는 애절한 사랑의 노래마저 생기가 있다. 마치 장애가 있는 여성비정규직노동자의 순한 미소조차 강단이 있어보이는 것처럼.
나는 옥봉을 읽으며 어떤 인물에 집중하기 보다 옥봉이라는 이름 대신 '시' 혹은 '문학'등을 대치시키며 읽었다. 비슷비슷한 구조 속에 담아두고 애닲아만 하는 건 어쩐지 무례일것 같아서. .
살기 위해 시를 쓴다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는 요즘, 죽음으로 시를 지켜내고 살려내려는 숭고함은 좀체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시기에 읽은 '옥봉'
이제 한 물 가고 있는 밈으로 이 느낌을 치환해본다면.
진심으로 가슴이 웅장해진다고...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