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가 되면 개인의 목숨 그까짓 것이 뭐냐, 먼저 국가를 지켜야한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한 형태로 전시를 평상시의 사회로 끌고들어오는 것이 군국주의의 근간이다. 이러한 구실이 대규모로 유효하게 작용한 것이 일본이 전쟁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과정이었다.

그럼 전쟁주의는 무엇인가. 물론 전쟁은 좋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평화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무력행사가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확대될 수 있는데, 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전쟁주의라고 부른다. 


‘델로스 동맹‘은 원래 페르시아와 같은 그리스 세계 밖에 있는
‘적‘에 대한 군사동맹이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유사한에게해 조약기구라고 부르면 알기 쉽다고 제안하는 학자도 있다.
(나도 찬성인데, NATO에 대해서, ‘에게해의 영어철자를 사용해 말하면 ATO가 될까). 이 군사동맹의 중심에 있으면서 페르시아와 싸운 것이 아테네였지만, 승리 후 아테네는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강화, 확대해서 지배와 군림을 더욱더 확실하게 했다.

‘거대한 ‘야만인‘ 페르시아의 침입을 격퇴한 후, ‘아테네 민주주의제국‘에 대한 야만인‘은 이유를 불문하고 아테네에 대항해오는 ‘약소국이었는데, 현대의 미국 민주주의 제국‘에 대한 야만인‘은 미국 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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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마코토는 아마도 20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평화 및 민주주의 사상가 활동가 중 한사람으로 기억될 생애를 살이온 지식인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러한그의 저술과 사회적 실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늘그가 사물을 대할 때 권력을 가진 자, 권위를 누리고 있는 자, 즉높은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아무런 특권을 갖고 있지 않은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려는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해왔다는 점이다. 

‘일본의 전후 역사는, 이것도 대범하게 말하면, ‘죽이고, 태우고빼앗는 역사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지고, 빼앗기는 역사를 가졌던 과거를 직시하여 그 과거를 두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전후의 역사를 만들려고 한 그리고 실제 만들어온 일본인과, 그 과거를 무시하고 전후의 역사를 움직여온 일본인 사이의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전자의 일본인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현재의 사태에 불을 붙인 것은 2001년 9월 11일의 ‘동시다발 테러‘라고 말해지고 있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를 빼앗아 자폭공격을 한 ‘이슬람 과격파‘(이 말은 지금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실행자에 대한 총칭으로서 가장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의 군사행동이다. 그러나 그 사태를 ‘보복전쟁‘이란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끌고 들어가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해서 세계 속에 유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실은, 저 최초의 자폭공격이라는 유사를 대규모 유사로 만들지않고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쟁이라는 대규모 유사로 변경, 확대했다. 따라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유사‘ 이다. 이 미국이 만들어낸 유사에 대해 지금 세계가 갈팡질팡 따라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세계 상황이다.

 이것으로 헌법은 완전히 무시된다. 원래 군대를 가져서는 안되는데도 예산 규모로는 세계 3-4위에 해당하는 대군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이미 헌법은 ‘평화헌법이 아니다. ‘전쟁헌법‘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미국의 전쟁헌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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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의 영향에 대해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현명하게도, 기억이라는 자산을 당연시하지는 말라고 경고했다.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 환기를 위한 재료를 제공함으로써 사고에 망각을 심어놓는 도구에 대한 예언은 웹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관심을 끌고 있다. 이 예언은 그저 시기상조였을 뿐 틀린 것은 아님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인터넷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면서 우리 사고 속에서 일어나는 풍부한 연관 짓기를 희생하는 위협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와이젠바움은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는, 우리가 지닌것 중 가장 기계화하기 어려운 바로 그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즉 우리의 사고와 신체와의 연결, 우리의 기억과 사고를 형성하는 경험, 감정과 공감을 위한 능력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우리가 컴퓨터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즉 우리가 삶의 많은 부분을 모니터상에서 깜빡이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상징을 통해 경험하면서 우리 앞에 당면한큰 위협은 우리가 우리를 기계와 차별화시키는 바로 그 특성들을 희생시키면서 우리의 인간성을 잃어 가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도구와 맺는 긴밀한 관계는 쌍방향적이다. 기술이 우리 자아의 확장인 것처럼 우리 역시 기술의 확장이 된다. 목수가 망치를손으로 집을 때 그는 손을 이용해 망치가 할 수 있는 작업만 할 수있다. 손은 못을 박거나 뽑는 도구가 된다. 군인이 쌍안경을 눈에 가져다 댈 때 그는 렌즈가 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상만 볼 수 있다.
그의 시야는 넓어지지만 가까이 있는 것은 볼 수 없게 된다.

기술의 힘을 지니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소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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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7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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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뮈스는 단지 암기를 위한 암기나 사실 관계를 잊어버리지 않기 의궤무턱대고 외우는 식의 암기를 추천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암기란 단순한 저장의 의미 이상이었다. 종합의 과정을 위한 첫 번째 단계였고, 독서에 대한 더 깊고 개인적인 이해로 이끄는 과정이다. 그는 고전 역사학자인 에리카 럼멜Erika Rummel이 설명했듯이 사람은 "배우고 곰곰이 생각한 대상에 대해 스스로 요약하거나 내면화해야지, 모델로 삼은 작가의 바람직한 면을 무조건 재생산해서는 안 된다"고믿었다.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암기는 기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과정과는 거리가 멀며, 완전하게 사고를 이용하는 것이다. 

에빙하우스의 실험 결과는 1890년 윌리어제임스로 하여금 기억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했다.
이 두 가지란 영감을 가져다준 사건 직후 마음속에서 증발해버리는
‘주 기억 Primary Memory‘과 뇌가 무기한으로 저장할 수 있는 보조 기억Secondary Memory‘ 이다. 

이 회로들은 심리학자들이 ‘암묵 기억Implicit Memory‘ 이라고 부르는 저장과 관련이 있는데, 암묵 기억이란학습한 기술을 반복하거나 반사적인 행동을 행할 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과거의 경험에 대한 무의식적 기억을 말한다. 달팽이는 아가미를 수축할 때 이 암묵 기억에 의존한다. 

우리의 뇌는 망각에 익숙해지고 기억에는 미숙해진다. 웹의 정보저장에 대한 높아지는 의존도는 사실 저절로 계속되고, 저절로 증폭되는 순환 고리의 산물이다. 인터넷 사용으로 생물학적인 기억 장치에 정보를 저장하는 일이 더 어려워지면서 우리는 피상적으로 사고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광활하고, 쉽게 검색 가능한 인공지능에 더더욱 의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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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7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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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기계식 시계에 대한 이야기가 보여주듯 지적 기술은 보편적으로 사용될 경우 새로운 사고의 방식을 만들어내거나 소수의엘리트 그룹에만 국한되어 있던 사고방식을 대중에게 확산시킨다.
달리 말해, 모든 지적 기술은 지적 윤리, 인간의 사고가 어떤 식으로작용하고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구현하고 있다. 지도와 시계는 비슷한 윤리를 공유하고 있다. 양쪽 다 측정과 추상적 개념, 인식과 정의하는 방식, 명백한 감각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과정 등을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읽기와 쓰기가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되면서 우리는 쉽게 이 같은 기술을 타고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그렇지 않다. 읽기와 쓰기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며, 의도적인아파벤의 개발과 다른 많은 기술들로 인해 가능해졌다. 우리의 사고는 이 상징적인 문자를 이해 가능한 언어로 변환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읽기와 쓰기는 가르침과 연습, 계획적인 뇌의 성형을 필요로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사고의 과정을 연습해야을 의미했고 하나의 정적인 대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방해받지 않는집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독자들은 엘리엇.S. Eliot이 「4개의 4중주Four Quartets」에서 말한 "변하는 세상 속 정적인 지점"이라 부르는 곳에 이르러야 했다. 독자들은 뇌로 하여금 모든 주변 상황을 무시하고 하나의 감각 신호에서 다른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려는 욕구를 물리치도록 해야 했다. 또한 본능적인 산만함에 대항하기 위해 더 강력한 "위에서 아래로의 통제 방식을 적용하면서 필요한 신경 연결망을 구축하거나 강화해야 했다. 

 책을 읽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행위지 마음을 비우는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을 채우고 보충하는 행위였다. 독자들은 글과 생각, 내부적인 감각 흐름에 더 깊이 빠져들기 위해 주변에 산재한 자극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는 깊이 읽기가 지닌 독특한 정신적 과정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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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7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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