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대륙기 1 블랙 로맨스 클럽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식물, 나무, 그리고 사람.


책을 받아들고 얼마전 읽은 간절히 나무가 되고 싶어한 여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살만한 나라가 여기일까? 나무대륙..

빨간 꿀이 있는 꽃 서미 꽃이지만 꽃이 아닌 무화. 여기서 출발하는 이야기는 작은 화단이나 동산의 이야기가 아닌 우주와 사람과 권력과 탐욕의 이야기로 번진다.

나무와 꽃의 이름을 빌려온 사람들. 그래서였을지 '거기 단풍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우직한 캐릭터 단풍과 함께 그의 그림자처럼 투영되는 빨간 잎새의 단풍나무를 같이 떠올리게 된다. 그림자를 품은 이름들..덕분에 입체감과 생동감이 더 풍성해졌다. 2D의 캐릭터들이 3D의 위치를 얻은것처럼..

은림이라는 작가도 낯설고, 소녀소녀한 일러스트도 낯설다. 하지만 읽기로 한다. 조금은 여성스러운 문체와 고전이 연상되는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현대적 시니컬함 같은 묘한 부조화가 오히려 매력적이다.

설핏, 몇 해 전에 보았던 화벽이라는 영화의 이미지를 자꾸만 덮어씌우며 읽어나가기도 한다. 그러자 우습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잔꾀를 끌어들여 읽어댈만큼 나쁘지 않았다.

자연이라고 통칭하여 이야기 할 때, 본래의 자리라고 이야기 할 때,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되는 식물들과 나무들과 꽃들..거기가 시작이었기에 낯섬은 이내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2.

반공주 서미와 호위무사이자 시녀인 무화. 궁중에서 쫓겨난 녹옥공주의 혼외자식 서미, 서미의 오랜 친구인 무화. 녹옥공주의 회궁길에 사창가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후 서미와 무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비밀을 공유한 관계. 이름없는 산에서 자란 두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여러번의 지레짐작을 무위로 돌리며 긴장감있게 진행된다.

반공주 서미의 신분회복을 위해 암투를 벌이는 이야기일까? 싶다가, 반하를 사이에 둔 로맨스일까? 싶다가 그녀들을 팔아넘기려했던 자들에 대한 복수일까? 했다가 신비한 어둔과 밤, 옥이 마주서는 어떤 우주적 기운의 대립인가?..끝없이 확장되는 이야기의 구조는 다소 어지럽기까지 하다.

다만 상황에 이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그 중심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단단한 축으로 서미와 무화가 흔들림 없이 서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나무의 대륙에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동물적인, 말 그댇로 너무나 동물적인 사고와 행위들이 이질감 없이 읽힌다는 건 식물계를 동경하는 동물계의 로망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외된 존재일 수 있는, 내몰린 지위의 사람들이 세상의 책무를 짊어지게 되는 태생적, 후생적 조건과 사건들이 결국은 우주의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의 반증이다. 그것이 다분히 감각적이거나 분석적인 서사가 아닌 신분과 사랑과 빛과 어둠, 선과 악같은 신비한 이야기와 맞물린 서사로 매력적인 가독성을 확보하게 된다.

길 가의 작은 들꽃조차 품고 있는 전설, 그런 전설들이 '세상'을 엮는 얼개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삶은 외부의 어떤 힘에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걸고 지켜내야 하는 자신의 서사이며 유일한 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가로막는 무수한 장애물들, 탐욕과 이기심이 빚어낸 단단한 바리케이트를 뚫고 나가는 힘은 결국 내 속에서, 나와 손 잡은 이에게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켜내야 마땅할 의미들..

슬픔과 상실은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은 해소되지 않는 천형의 흔적으로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혼란 속에서 요구되는 많은 선택들의 결과는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섬세한 문장들, 내면의 동요와 비열한 수작들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현재의 시간, 인간계의 한 부분인 내게 반감없이 읽힌다는 것이 한편 고맙고 한편 의아하다. 빠른 진행으로 숨가쁘게 읽어낸 후, 아..근데 아까 그건 뭐였지? 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숲을 보고 달리다 나무를 놓치는 셈이다. 조금 더 식물의 언어일 수는 없었을까? 조금 더 인간의 마음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어차피 사람이 읽을 글..대안이 없었겠지..라고 혼자 중얼거려본다.


환상문학..환상인데 실제 같다. 볼 수 있었던,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어딘가에서도 봤던, 그런 이야기들이 뒤엉켜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귀신 이야기가 어슷비슷 비슷한 것처럼..

표지의 일러스트때문인지 곱고 고운 여인 서미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이미지가 규정된 채 읽다보니 답답하기도 하다.


#3.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엿보는 건 재미있다. 환상문학이라 명명되는 작품들의 매력이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RPG게임의 스토리같기도 한 나무대륙기. 작가는 이 글을 써야만 했다고 했다.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그렇게 간절하게 써낸 이야기..풋풋한 호흡으로 읽어내는 것으로 예의를 다하고 싶었다. 나무의 잎새에 가려진 태양..풋풋함의 댓가로 감당해야 하는 그림자..

겪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성취감과 그 성취감을 갖기 까지 감내해야 하는 혼돈과 고통. 굴복하지 않는 신념. 비법하고 우람하고 잘생긴 남자가 아닌 세상에서 밀려난 꽃의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중심에 선 이야기.

책을 덮고 생각해본다. 내 어둔에게도 이름을 붙여줘야겠다고...숨을 오래 참고 무화에게 다녀와도 좋겠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어떤 기사.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외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본다. 정유정도, 황정은도..소위 러브콜이라는 것이 생겼다고 한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들이라는 게 흥미롭다. 신경숙의 사태(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후로 보여 준 태도며 그녀의 흑기사들의 모습으로 보더라도)를 겪으며 좀처럼 동의하기 힘든 그녀의 작품성의 배경에 해외진출이라는 현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것은 때로 외국에서도 공감이 갈만한 이야기였던거야? 난 도대체 뭘 읽은거야? 하는 일종의 자책같은 느낌도 갖게 했다. 그리 오래가지 않은 자책. 작가와 나의 진동수가 맞지 않는구나로 자의적 결론을 내려버렸다. 마치 열광하는 하루키에 열광하지 못하는게 취향이겠거니 하듯..

어쨌든 한강의 기사를 읽고 트라우마처럼 신경숙을 떠올렸다. 책장에 꽂혀있을거라 생각했던 책이 찾아지지 않고 책상 귀퉁이에 뜬금없이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가 눈에 뜨였다. 왜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시집을 읽은 후 나는 한강은 오히려 시가 더 좋네. 라고 평가했었다.

기사를 읽고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 뭔지 궁금해졌다. 바깥세상에서 보내는 환호에 같이 환호할 수 있을까 싶은 어떤 기대도 실려있었다.


#2. 이야기


처음 책을 펼치던 몇 해 전에도 참 재밌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각각의 단편으로도 서사는 충분했고 그것이 하나로 엮여서 조금 더 큰 그림을 보여주는 구성이라니..참신하다고 말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서로 다른 화자가 끌어가는 이야기.

나와 나의 아내 영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꿈을 꾼 이후 처절하게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해하지 못하는것이 차라리 나을까? 일정부분 이해가 되어지는 것이 혼란스럽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 손목을 긋는 영혜. 채식주의자를 벗어나 스스로 식물이 되려한다.

나의 처제 영혜. 그녀에게 남았다는 몽고반점. 그것이 궁금했다. 작업에서 손을 놓은 오랜 시간 머릿속을 스쳐가 강렬한 영감은 처제를 불러낸다. 세상에서 한 발쯤 벗어난 처제는 본래의 모습을 지녔다. 몽고반점. 그 순수함이 남은 처제는 식물일지도 모른다. 가장 동물적인 욕구를 가장 식물적으로 이루어가는 그 순간. 어쩌면 태고의 시간을 만나는 희열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 장면을 처제의 언니이자 아내인 인혜에게 들키기 전에는..

나의 동생 영혜. 살아가는 일이 간단치 않지만 열심히 살았다. 조금 더 부지런히 살면 조금 더 행복할 거라고 누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동생 영혜와 남편의 비디오를 보기 전까지는..가장 가까운 두 사람의 가장 용서할 수 없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영혜의 상태는 날로 악화되고, 새가 된건지 나비가 된건지 남편은 날아가버렸다.


집착을 읽는다. 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채 영악한 뱀처럼 맹독을 품고 또아리를 틀고 있다. 거기 가만히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으니 그것이 이미 진정된 기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묵히고 묵힌 치명적인 맹독을 만들고 있다고는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두려움은 시작된다. 낫지 않은 상처. 낫지 않는 상처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은 얼마나 위태로울까? 생명이 빠져나가는 순간을 마주한 순간의 두려움이 그 상처의 시작이라면 얼마나 두려울까를 생각해본다.

빠져나가고 말 생명, 폭력적으로 빼앗긴 생명. 저항하지 못하는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을 집어삼키는 사람. 서로의 생명을 탐하는 생존에 대한 집착.

영혜는 스스로 식물이 되고자 한다.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얼마나 이기적인가. 이기적인 삶에의 집착이 거기에 있는건 아닌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변의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며 순수로의 회귀, 평온으로 들어가는 길은 과연 아름다운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완곡한 폭력은 영혜에게서 시작되고 발현되었다고 읽는다. 오독이라도 할 수 없다.


#3. 관계


관계의 서사는 치밀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속내를 짚어내는 예리함. 영혜의 행동을 일정부분 이해하는 남편. 동생과 남편의 부적절한 행동을 어느 한켠 이해하는 인혜.

어쩌면 이렇게 거룩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다. 고도의 지적존재들일까? 이런 반응을 품는 건 심술이다. 고독과 자기부정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삶을 엿본 댓가라면 감수해야할 일말의 부러움이다. 속속들의 읽혀지고 해석되어지고 오해하지만 그 오해의 적절한 변이가 기대되는 인물간의 호흡이 대단했다.

도대체 어디에 가면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거냐고 묻고 싶을만큼 ..소설이니까, 그게 다만 허구는 아닌거잖아..창조된 인물일 뿐이야..그래도 허구라고는 하지마.

이런 부대낌이 내내 속에서 들끓었다. 상처를 품고 상처를 주고 살아가지만 끝없이 서로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 사람들. 무서운 말이다. 끝.없.이..

만약 내가 어느 날 고기 없는 밥상을 차렸다고 치자.

"고기 안먹기로 했어?" 라고 식구가 물을거다. "응"

"왜?" 라고 물어올게다. 그 때 "꿈을 꿨어" 라고 답을 준다. 그 답을 하고 난 후의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거나 "뭔 소리야?"하는 질책일게 분명하다.

그것이 아쉽거나 속상하기보다 그것이 재밌고 흐뭇하다. 저마다의 삶의 방식, 이해의 방식, 근원을 찾는 방식이 다르다.

이 지점에서 오래 전 읽었던 이 책 '채식주의자'에 대한 높지 않았던 공감의 이유를 찾아냈다.



#4.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특히나 개인주의에 익숙한 나라들에서는 좀 더 매력적일 수 도 있겠다.

살아가는 일에 늘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으려 한다. 본질 혹은 그 근원에 대한 고민은 사치스러울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하고, 그 난망함에 때로 세살 아이 떼쓰듯 버둥대기도 한다.

문득 생각했다. 그게 중요해?

누군가의 외로움, 집착, 관계, 슬픔, 두려움과 분노, 설움..그것은 그 자체로 있는게 낫다. 어느 것 하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다만 지나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온 마음으로 거부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분명한 건, 나와 어떻게든 연결된 타자는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한 반문이다.

고르게 서로에게 카타르시스가 전이된다면 다행이지만 누군가의 희생이 강요되거나 암묵적 이해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삶의 본질로의 회귀 혹은 위로의 몸짓은 이기적인 노래일 수 있지 않을까?

서러웠다.

어느 한 때, 내가 살며 지나온 젊은 어느 때였다면 고개가 떨어질만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며 읽어냈을 이야기.

계산이 빨라진 지금..나는 손해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몸에 좋은 채소가 있지만, 근기가 있어야겠다며 고기를 집는 것이다.


산다는 건 채식주의자나, 육식주의자나, 기혼이나, 미혼이나, 남은 자나, 떠난 자나, 확인이 되는 자나, 불명확한 자나 모두에게 고르게 녹록치 않다.

그래서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한국인이다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송경동이다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나는 피룬이며 파비며 폭이며 세론이며

파르빈 악타르다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치욕이며 구격ㅇ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투쟁이며 항쟁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마지막연>

 

문득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라는 제목을 듣고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와 비슷하려나? 하는 짐작을 했다. 하지만 송경동은 뼛 속까지 한국인이며 노동자이며 시인이며 노래이다. 캄보디아에 입주한 한국업체들이 한국 노동자들에게 하듯 그들의 시위를 진압하고 억압하였다. 기업의 편에 선 한국 정부가 캄보디아 정부를 압박했고, 아니 경제적 손실 운운하며 겁박했고 총기가 발사되고 유혈사태가 일어난다. 언론은 귀에 딱지가 앉고 저절로 결말까지 그려지는 빤하고 뻔한 일부 외부세력..어쩌구 저쩌구..

캄보디아의 노동자들이 소리친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송경동의 시는 현장이다. 기륭이고, 쌍용이고,가리봉이고, 캄보디아며 방글라데시이고 베트남이며 세월호이고 경찰서이다.

송경동의 시는 사람이다. 동료이고, 동지이고, 사랑하는 아내이며 어머니이고 청년이며 결국 노동자다.

현장의 한 가운데서 울려나오는 외침이 주변의 어줍잖은 진동보다 힘이 있는 까닭은 여기 있다.

김지하와 김남주의 차이 같은 것.

텍스트화 된 화석같은 노동에 억지로 끼워 넣은 감상의 나열이 아닌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울분과 살아내겠다는 결기가 그려내는 파동. 그것이 힘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신념이다.

꿈이다.

꿈이란 것이 어떤 직업을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겠다는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 이것은 송경동의 꿈이다.

도저히 포기가 안되는 현장의 사람들, 그들과 더불어 사람답게 살겠다고 몸부림치며 연대하고 투쟁하는 삶.

그 삶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아직은..아직도.

 

그래서 그가 필요하다.

내가 사서 읽는 시집 한 권이 그 어떤 연대의 흔적이 되겠는가마는..그의 시를 읽는다.

그를 기억하며 건강한 노동의 현장을 기억한다. 불의와 가장 첨예하게 모든 것을 내어두고 싸우는 참 싸움.

적당히 재고 따지는 소리만 거창한 싸움이 아닌 진심의 투쟁과 연대를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이었다는 징표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이다.

 

 

<문장강화>

 

트럭을 아랫말에 세워두고

어두운 눈길 오리를 헤쳐 올라온 옆방 사내는

 

오늘도 날일로 하우스 아치 세우는 일 마치고 돌아와

아랫목에 언 몸을 젖은 김 굽듯 뒤집으며 끙끙 앓는 옆방 사내는

 

며칠 전엔 고구마밭에 숨은 붉은 말들을 캐내고

배추밭에 남겨둔 얼갈이 말들도 마저 솎아낸 옆방 사내는

 

콩대를 탈탈 털어 한해의 마침표들을 찍고

하루는 볕에 덜 익은 고추표들을 바짝 널어 말린 옆방 사내는

 

쉴 틈이면 처마 아래 줄줄이 곶감 문단을 걸고

일 없으면 뒷마당 빨랫둘에 장문의 무시래기를 널던 옆방 사내는

 

그렇게 날마다 세상의 빈칸 하나씩을 야무지게 쓰고 들어와

밤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자는 옆방 사내는

 

얼마나 단단한 문장인지

얼마나 싱싱하고 유려한 문체인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02-25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봤습니다..그의 시집을 들면 떨리더군요....

나타샤 2016-02-25 19:17   좋아요 1 | URL
살아있는 시,현장의 울림이어서일까요?^^ ˝나는 아픔이며 고통이며 투쟁이며 연대다˝라고 말해 줄 시인이 또 어디 있을까요..
 
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 유품정리


살아있는 동안 남기는 찌꺼기 같은 흔적은 얼마나 될까?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해도 분명히 남겨지는 육체의 흔적과 삶의 흔적들..비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분명한 형상을 갖는 물질로 남는 것들을 정리한다. 살았던 죽은 이의 흔적은 어떻게든 남는다. 기억은 신화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부패하기 시작하고 분절되며 분해된다. 아무도 손대지 않으려는 '현장'을 정리하는 것을 업으로 갖는다. 죽은 이의 흔적을 정리하는 이..책 소개에서 가장 분명하게 눈에 들어 온 부분이었다. 김중혁의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 문득 떠올랐다. 디지털공간 혹은 텍스트화 되어있는 기록을 지우는 것과 물질적 흔적을 지우는 것..지운다는 것에서 비슷한 질감을 느낀것도 같다.

사람이 죽으면 영안실로 가고 장례식을 치르는 것으로 단순하게 도식화시켜 인지하고 있던 것의 틈새를 파고 든다. 영안실로 가기 전, 체액과 혈흔으로 얼룩진 현장의 모습. 살아있지 않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이 공존하는 유일한 순간. 죽는다는 건 어떤 도식이 아니라 현실이겠구나. 적당히 혹은 과하게 지저분하고 추하며 비위상하는 현장일 수 있겠구나 싶어졌다.


# 2. 해미


해미는 지창씨의 딸이다. 고물상집 딸.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지는 떠나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먹고사는 부녀의 공간.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미 쓰임이 다하거나 기억에서 쫓겨난 물건들이 모이는 곳이다. 내가 아는 어떤 남자의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이 해미였다. 내가 그 남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40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해미는 여고생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지독했고 남자는 이혼을 했다. 해미를 위해. 그래서였는지 내게 해미는 지독한 사랑을 하는 어린 여자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단지 사람의 이름뿐인데도 말이다. 마치 일회용밴드는 대일밴드라하고 굴삭기를 포크레인이라 하듯 해미는 지독한 이름으로 기억에 남았다.

살고 있지만 삶으로부터 자꾸 밀려나는 해미. 어수룩한 지창씨와 해미가 마주하는 더 어수룩해서 밀려나는 사람들. 그들에게 다가갈 수 밖에 없는, 그것을 업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해미는 간절히 삶을 살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를일이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도 추한 몰골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비밀을 알아채버렸다해도 간절히 살아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 3. 지창씨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는 걸 조심해야했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찬 바람. 바람이 그득해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죽어버릴건데 그래도 한 번 들어온 바람은 다시 빠져나가지 않을테니 그득히 담은 채 살아간다. 그이가 마지막 눈을 감고 나서야 그것이 바람이 아니라 물이었음이 밝혀지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 허파에 뭔가가 들어왔다는 것, 숨통에 숨이 아닌 이물질이 들어앉았다는 것이 문제인것이다. 살아있음의 가장 근본이 되는 숨. 그것을 방해받는다는 것은 위협이다. 삶은 늘 그렇게 친절한 표정으로 위협을 가하곤 한다. 그런 위협이 가해지는 공간이 고물상이라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 모인 모든 것들이 생존을 위협받다 생을 마감하고 모여든 것들이 아닌가.

버려진 것들에서 새로움을 찾으려는 시도. 이트륨을 분리,합성하는 기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고물상에 버려진 것들이 그 뼈대가 되는..

이미 버려진 것들 속에서 소용가치가 있는 것을 재합성 해내는 기계를 만드는데 전념하는 지창씨. 애절하다. 버려진다는 것. 버림받았다는 것.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품은 어떤 것으로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헤겔의 양질전환같은 것이었을까? 비약이다.


# 4. 도시 그리고 이야기.


도시는 점점 더 정글화되어간다. 약육강식은 기본 원리가 되었고 살아남음의 개념이 전염병처럼 창궐해있다. 살아남음의 개념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맞추어 적절히 구분되어있고 더 올라오지 못하는 한계선이 그어져있다. 침몰하는 순간에도 더는 올라오면 안되는 선. 그 선을 넘어선 안된다는 암묵이 자리하고 있다. 침몰하지 않아도 가장 높은 곳에서 안전한 이들과 더는 올라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이들. 그것을 정의라하고 그것을 분배라하고 그것을 생활이라 한다.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 그들이 처음부터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때론 시작이었고 중심이었으나 소용이 끝난 폐기물이 되는 건 그들의 의지는 아니었다. 도시 속에 정글처럼, 섬처럼, 모든 죽은 것들의 묘지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고물상.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도 그곳에서 사는 이들도 위로의 꽃다발이나 때때로 삶이 내어준다는 아름다운 선물따위는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삶. 온 몸으로 부딪는, 결과를 알면서도 부서질때까지 부딪고 받아내는 삶들이 치명적인 균열과 상처를 갖고 살아내고 있다. 아직은 더 살아도 좋다고, 아직은 더 살만하다고, 아직은 묻지 말라고...

조금은 나른했다.

이렇게 치열한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나른해도 될까? 의심했다.

결국 인정하기로 한다. 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문장의 길이나 복선에 휘말리지 말고 의도를 보아야 한다. 내가 구해야할 것과 조건, 조건을 분해해서 얻게 되는 단서, 이 모든것을 준비해놓아야 한다. 문제가 길면 길수록, 단서는 많아진다. 대부분 문장이 길어지면 포기하거나 의도를 놓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구해야할지 놓치 않고 끌고 가는 것. 조건을 분해해서 단서를 찾아내는 것. 구해놓은 식과 풀이가 맞는지 점검하고 풀어낸 답을 믿어야 풀린다.

작가는 수학과를 나왔다고 했다. 그 후 문예창작을 다시 공부했다고..삶과 죽음의 일반적인 규칙들을 변형시켜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해법을 내놓은 것은 분명하다. 미지수에 집중하기보다 문제와 과정 속에서 미지수의 의미와 그것을 풀도록 도와주는 다른 수식기호와 체계에 집중했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소각의 여왕.

소각하여 흔적을 없애는 존재가 아니라 소각하며 살았던 이를 끄집어내는 제사장은 아니었을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깔끔하지 못한 일인지 묻는것도 같았다.


#5. 책 속에서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아니?"

열심히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아니 몰라'

'모르는게 당연해. 태어나고 죽는 데는 이유가 없거든'

해미는 냉소적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다.자기가 세상에 보내는 냉소와 조롱과 야유. 그것이 실은 위로의 말이라는 걸 해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죽고 사는 데 아무런 이유가 없다....해미는 손에서 힘을 빼고 물러섰다. 괜찮아. 이유가 없다잖아. (p62)



"고통과 죽음은 다르다. 죽을만큼 병들어서, 죽을만큼 피를 흘려서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다른 곳에서 온다. 훨씬 다른 차원의 일이다. (....)


죽음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안 된다. 여러명의 의지가 하나의 죽음을 이끌어낸다. 누군가의 의지와 누군가의 동의와 누군가의 암묵. (p63)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엄마가 결국 자신이 꿈꾸던 세상으로 갔을 때 해미는 기뻤다. 진심으로 그녀를 생각하면 기뻐할 일있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지창씨는 해미에게 소리내 울지 못하게 했다.

 "죽어서도 청각은 열려 있대. " (p206)


#.

결국 살아낼 것이고 분해되기 위해 조금씩 단순하고 단촐해질 것이다. 삶에 고정된 시선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으로 조금씩 경도되는 과정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끝끝내 청각은 살아있어서 화르륵화르륵 불타는 소리만 남고 아무도 울지않는 현장을 듣게 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몰락경전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0
김수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잊혀진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숭고한 영혼들의

용감한 몰락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시와 삶에 빚지는 일, 더 뻔뻔해져도 될까.>

 

시집의 제일 첫 장. 보통은 시인의 말, 혹은 들어가며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부분이다.

"들어가는 길"이라고 되어있다.

참으로 적절하다. 김수우의 시집 답다. 생각하게 되었다. 떠나고 떠났으나 돌아오고 돌아온 그 이의 발걸음은 완성을 찾는 여정이 아닌 참 몰락을 찾는 길일 수도 있었겠다 싶어진다.

 

김수우를 처음 읽게 된 것은 "붉은 사하라"를 통해서였다.

젊은 어느 날, 한사코 떠나자는 사내를 친구나 하자며 홀로 보냈다. 그는 타클라마칸으로 발길을 잡았고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 간간히 들리는 모랫바람에 사막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어느 사막의 여인과 결혼하여 오래 전 대상들처럼 실크로드를 넘나드는 장사치가 되었다고도 했고, 모래 폭풍이 거세던 날 모래 속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도 했다.

타클라마칸..말 그대로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붉은 모래의 세계.

사막은, 떠남의 의미라기 보다 떠나버림의 의미로 늘 기억을 버석거리게 했다. 그 즈음 붉은 사하라를 보았다.

김수우. 이름이 수우니까, 최소한 미양가는 아니니까. 잘 쓰였겠지. 이런 사리분별조차 안되는 그리움과 혼란 속에 시집을 선택했다. 붉은 사하라. 내겐 온전히 붉은 타클라마칸으로 읽힌 그 시집.

 

어찌되었든 김수우의 시는 부메랑처럼 유영한다. 나에게서 시작해서 멀리, 갈 수 있는데까지 멀리 날아갔다가 제자리처럼 보이는 시간이 스쳐간 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혹은 어떤 풍경을 찍어놓은 사진처럼, 샌드아트처럼 무던히 바라보게 한다.

 

몰락 경전. 그 흔한 조사 '의'마저도 떨구어 내고 단촐하게 적어 낸 시집의 이름 몰락 경전.

완전한 몰락은 가능한가를 묻게 한다. 지극히 살고 싶은, 간절히 돌아오겠지만 떠나게 되는 그 호기심과 열정의 중심을 보게 한다.

한창훈의 발문도 거칠지만 좋았다. 비단처럼 유려한 발문이었다면 ..뭐..그래..그렇다고 치자. 했을지도 모른다.

갯내에 절은 사내가 투박하게 쏟아낸 김수우의 이야기가 좋았다.

 

 

사라진 詩

 

눈을 뜨는

순간, 송사리 떼처럼 화악 글자가 흩어졌다

'완벽한'이라는 수식어와 '는' '과'라는 토씨만이

속눈썹에 걸려 달각거렸다

열이 많았고, 꿈의 철물점에서 시를 쓰던 중

 

흩어진 자음과 모음의 흰 알갱이들은 천정으로 스며들고

그물에 걸린 가시복어처럼

새벽안개에 끌려나온 몇 낱 국어들이 떨떠름해 한다

미안했다

 

밤나무 숲을 걸어 다니는 고슴도치나

앞발로 흙을 파고 뒷발로 흙을 밀어내는 두더지

물뱀과 싸우는 땃쥐를 닮았을

동사와 명사들, 그물을 빠져나간

꿈속 어휘들

배고픈 소년 가슴팍에 싹을 틔우겠지

 

시는 언제나 환생의 그늘

매일 흰 양말을 쌍봉낙타에게 신기는 것

 

차라리 존엄해라 당당해라

결코 문장이 되지 않는 고통이여

혀끝으로 외워지지 않는 강이여 산이여 혁명의 공식이여

뽑지 않은 진검이여 몰락이여

 

망각의 변방에서

애벌레 한 마리, 첨탑을, 첨탑의 하늘을 밀고 있다.

 

 

어디쯤에서였을까? 무엇때문이었을까?

이 시를 읽다가 울컥했다. 잘 못했어요. 사과를 해야할 것 같았다.

이렇게 제멋대로 제 감정에 취해 읽어선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저 혼자 제 감정에 취해 읽어낸 뒤 끝이 찜찜했다.

제대로 자살하지 못한 것 처럼. 상처만 남은 흉한 몰골의 패배자가 된것 같았다.

다시 읽어야겠다.

몰락의 신성한 경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도자처럼, 혹은 점자를 읽어내는 것처럼 온신경을 모아 몰락을 기원하며 읽어야겠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닐것이다.

또 다른 새로운 흔적을 남겨도 좋다는 허락같은 것은 아닐까? 거기, 몰락의 충동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부산에 있다는 김수우의 공간이 궁금해졌다.

언제 한 번 가봐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