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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륙기 1 ㅣ 블랙 로맨스 클럽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1. 식물, 나무, 그리고 사람.
책을 받아들고 얼마전 읽은 간절히 나무가 되고 싶어한 여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살만한 나라가 여기일까? 나무대륙..
빨간 꿀이 있는 꽃 서미 꽃이지만 꽃이 아닌 무화. 여기서 출발하는 이야기는 작은 화단이나 동산의 이야기가 아닌 우주와 사람과 권력과 탐욕의 이야기로 번진다.
나무와 꽃의 이름을 빌려온 사람들. 그래서였을지 '거기 단풍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우직한 캐릭터 단풍과 함께 그의 그림자처럼 투영되는 빨간 잎새의 단풍나무를 같이 떠올리게 된다. 그림자를 품은 이름들..덕분에 입체감과 생동감이 더 풍성해졌다. 2D의 캐릭터들이 3D의 위치를 얻은것처럼..
은림이라는 작가도 낯설고, 소녀소녀한 일러스트도 낯설다. 하지만 읽기로 한다. 조금은 여성스러운 문체와 고전이 연상되는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현대적 시니컬함 같은 묘한 부조화가 오히려 매력적이다.
설핏, 몇 해 전에 보았던 화벽이라는 영화의 이미지를 자꾸만 덮어씌우며 읽어나가기도 한다. 그러자 우습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잔꾀를 끌어들여 읽어댈만큼 나쁘지 않았다.
자연이라고 통칭하여 이야기 할 때, 본래의 자리라고 이야기 할 때,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되는 식물들과 나무들과 꽃들..거기가 시작이었기에 낯섬은 이내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2.
반공주 서미와 호위무사이자 시녀인 무화. 궁중에서 쫓겨난 녹옥공주의 혼외자식 서미, 서미의 오랜 친구인 무화. 녹옥공주의 회궁길에 사창가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후 서미와 무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비밀을 공유한 관계. 이름없는 산에서 자란 두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여러번의 지레짐작을 무위로 돌리며 긴장감있게 진행된다.
반공주 서미의 신분회복을 위해 암투를 벌이는 이야기일까? 싶다가, 반하를 사이에 둔 로맨스일까? 싶다가 그녀들을 팔아넘기려했던 자들에 대한 복수일까? 했다가 신비한 어둔과 밤, 옥이 마주서는 어떤 우주적 기운의 대립인가?..끝없이 확장되는 이야기의 구조는 다소 어지럽기까지 하다.
다만 상황에 이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그 중심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단단한 축으로 서미와 무화가 흔들림 없이 서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나무의 대륙에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동물적인, 말 그댇로 너무나 동물적인 사고와 행위들이 이질감 없이 읽힌다는 건 식물계를 동경하는 동물계의 로망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외된 존재일 수 있는, 내몰린 지위의 사람들이 세상의 책무를 짊어지게 되는 태생적, 후생적 조건과 사건들이 결국은 우주의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의 반증이다. 그것이 다분히 감각적이거나 분석적인 서사가 아닌 신분과 사랑과 빛과 어둠, 선과 악같은 신비한 이야기와 맞물린 서사로 매력적인 가독성을 확보하게 된다.
길 가의 작은 들꽃조차 품고 있는 전설, 그런 전설들이 '세상'을 엮는 얼개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삶은 외부의 어떤 힘에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걸고 지켜내야 하는 자신의 서사이며 유일한 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가로막는 무수한 장애물들, 탐욕과 이기심이 빚어낸 단단한 바리케이트를 뚫고 나가는 힘은 결국 내 속에서, 나와 손 잡은 이에게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켜내야 마땅할 의미들..
슬픔과 상실은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은 해소되지 않는 천형의 흔적으로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혼란 속에서 요구되는 많은 선택들의 결과는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섬세한 문장들, 내면의 동요와 비열한 수작들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현재의 시간, 인간계의 한 부분인 내게 반감없이 읽힌다는 것이 한편 고맙고 한편 의아하다. 빠른 진행으로 숨가쁘게 읽어낸 후, 아..근데 아까 그건 뭐였지? 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숲을 보고 달리다 나무를 놓치는 셈이다. 조금 더 식물의 언어일 수는 없었을까? 조금 더 인간의 마음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어차피 사람이 읽을 글..대안이 없었겠지..라고 혼자 중얼거려본다.
환상문학..환상인데 실제 같다. 볼 수 있었던,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어딘가에서도 봤던, 그런 이야기들이 뒤엉켜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귀신 이야기가 어슷비슷 비슷한 것처럼..
표지의 일러스트때문인지 곱고 고운 여인 서미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이미지가 규정된 채 읽다보니 답답하기도 하다.
#3.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엿보는 건 재미있다. 환상문학이라 명명되는 작품들의 매력이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RPG게임의 스토리같기도 한 나무대륙기. 작가는 이 글을 써야만 했다고 했다.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그렇게 간절하게 써낸 이야기..풋풋한 호흡으로 읽어내는 것으로 예의를 다하고 싶었다. 나무의 잎새에 가려진 태양..풋풋함의 댓가로 감당해야 하는 그림자..
겪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성취감과 그 성취감을 갖기 까지 감내해야 하는 혼돈과 고통. 굴복하지 않는 신념. 비법하고 우람하고 잘생긴 남자가 아닌 세상에서 밀려난 꽃의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중심에 선 이야기.
책을 덮고 생각해본다. 내 어둔에게도 이름을 붙여줘야겠다고...숨을 오래 참고 무화에게 다녀와도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