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이 없는 집 - 박소란>

 

방문 앞 수돗가에서 오줌을 싸요 엄마는

 밤낮 터질 듯 충혈된 가랑이를 내벌려요 병든 집들이 빽빽이 둘러멘 앞산 구릉처럼 어금니를 앙다물고, 하지만 웬걸요

 문드러진 잇새론 이내 흥건한 신음이 터져나와요


 나는 꾹 참았다 밤에만 싸요 아무도 몰래 치마 속을 비집고 든 높바람이 막무가내로 온몸을 휩쓸고 가면

 하수구 아린 구멍엔 우스꽝스러운 이끼만 돋아나요 우죽우죽 나는 자라나요


 비가 오는 날이면 지린내는 온 동네를 뒤덮어 세수를 하다가도 이를 닦다가도 우욱우욱 종일 헛구역질을 해대는 집

 담장 아래 웃자란 꽈리처럼 젖이 부푼


 스무살 언니는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요 들어와도 집에서 오줌 싸지 않아요 더이상 아무도 집으로 놀러 오지 않아요


 마스크를 쓴 구청 직원들 킬킬거리며 쓰러져가는 양철문을 두드릴 때마다 대책없이

 오줌소태를 앓는 집 대책 없이

 

 휘늘어지는 새벽이면 오줌줄기는 더욱 힘차고 억세 거짓말처럼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어요 싸늘한 머리맡이며 금 간 벽 틉으로 끝없이 넘쳐흐르는 오줌에 두둥실


 집이 떠내려가는 꿈은 얼마나 아룸다운지

 엄마와 언니와 내가 손을 맞잡고 그득히 출렁이는 오줌 위를 떠다니는 꿈 끝내 정박하지 못한




 


복효근 시인의 시 하나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목련꽃 브라자.

얼마나 이쁘고 순박한 이름인가..도대체 어디에서 성추행을 묘사하고 있으며 부끄러워야 하는건지..알 수 없다.

단지 브라자라는 말이 선정성의 시작이며 성희롱에 가까운 시어들이라고 분개(?) 하고 있다. 세상 순진한 척 하기는..

느닷없이 어떤 브라자 선전이 생각났다. 앞태 옆태 뒤태 옷태~라고 하며 어떤 모델이 타이트한 옷을 입고 제 몸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광고. 그런건 공개적으로 해도 되나?

지하철 도어에 쓰였다는 시. 지방 사는 사람들, 지하철 없는 동네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시. 하지만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광고. 그건 왜?

시니까..문학적인 창작물이니까..

감동과 교훈만 무성해야 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미친거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일떠서야 한다고 외치는 시는 왜 없는건가. 비겁한 자들을 일깨우는 일갈을 왜 없는건가.


소란스러운 아침..박소란을 읽는다.

시어들이 단편영화의 필름처럼 휘리릭 흐르며 세세한 표정과 장면을 연출하는 이 시를 좋아한다.

화장실조차 없는 하늘과 제일 가까운 동네겠지.

막연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겠지. 공동화장실까지 오래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겠지. 다행이 방문 앞에 수돗가가 있어 급하게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눌 수 있었겠지.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사람들.

수시로 찾아드는 요의를 해결할 지린내가 넘쳐나는 수돗가. 오줌소태가 걸린 듯 매양 긴장한 상태로 찌릿찌릿한 고통이 함께오는 거짓 요의에 매번 속고 바보같이 속은 댓가는 고통스럽다. 그래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스무살 언니는 더이상 수돗가에 쪼그려 앉지 않는다. 그 사정은 어떤것일까 짐작하는 그것일까. 짐작하는 것이든, 또 다른 것이든 상관없다. 시를 읽는 독자의 상상의 터가 만들어 낼 이야기의 터는 제 몫이다.

천박하게 읽어내거나, 안타깝게 읽어내거나, 어린 추억을 소환하거나, 같은 처지임을 확인하는 과정이거나..그건 시인의 몫도 책임도 아닐터..


오줌이 차고 넘쳐 둥둥 떠다니는 꿈. 정박하지 못하는 어차피 떠다닐 신세라지만, 평생 고쳐지지 않을 오줌소태와 평생 갖지 못할 화장실이지만 세상을 얻을지도 모를 희망을 들킨건지도 모른다. 보희의 꿈을 산 문희가 춘추의 부인이 되었듯..


박소란의 시를 읽으며 나는 또 이 시인의 계략(?)에 놀아난다.

위로와 희망이 아닌 체념을 먼저 들이미는 시인의 시들..혹여 희망일까 까치발을 하고 목을 빼는 순간 여지없이 무릎을 꿇리고 '희망이 왜 높은 데 있다고 생각해? 희망이 왜 담장 너머에 있다고 생각해? 거기 있는게 네 몫이 확실해?'라고 묻는다. 꿇은 김에 엎드려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살필 새도 없이 콧 속으로 파고 드는 지린내.

온 몸을 돌아 나온 투명한 지린내를 만난다. 네 희망을 위해 쪼그려 앉을 결심은 했는지..오줌소태를 견뎌낼 자신은 있는지..결코 무혈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낡은 빤쓰에 묻어나는 희미한 핏자욱으로 확인시켜주는 듯 하다.


어린 기억 언젠가..상도동 산 47번지에 모여 살 때, 화장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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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성(小年性)


  가는 팔목은 흰 이마와 잘 맞아 떨어졌다. 엎드려 있는

나를 울고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 사실 몸을 숙이는 건 쉬

운 일이었다. 평면을 벗어나는 몸의 마지막 표정. 그래프는

날뛰고, 달력은 단호하며 날씨는 마음과 나란해지기 쉬운

기울기였다. 가내수공업이 끝날 줄 모르던 밤. 졸면서 만든

규격이 나를 엉성하게 만들었다. 근사한 걸작이 곧 태어날

거라고 장담하면서, 나는 맨 처음으로 수치심을 길렀다. 잠

든 나를 깨워 계집애 같은 사내아이를 어쩐지 실수라고 여

기면 나는 나의 목격자가 되었다. 증언이 필요한 꿈결과 이

름에 써 버린 행운과 주입된 슬픔으로 살아갈 온 마음은

시험판이었다. 치명적인 오류지만 결코 멈춰 버리진 않는

그 방 안에 나는 설계된 적 없는 자세로 처음 나를 감지한

다. 엎드려 있으나 잠이 비껴가고 슬픔으로 젖지 않는 주

소로 나는 배달되었다. 나는 멸종 위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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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목소리를 듣는다.  '소년'과 '소녀'의 정의가 단지 어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아니라면 소년은 아마 이런 규정들을 갖지 않을까? 싶은 시집이다.

여리고 여린 희망이 간절하게 배어든 단어들..일어서자고 안간힘을 쓰지만 어린 동생, 소년인 동생은 아직도 평면의 결계를 벗어내지 못했다.

시집을 읽으며 여린 풀 한 포기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좋니..라고 자꾸만 되뇌인다. 마치 소년인 동생을 보듯..

평행과 도형과 기울기와 집합..수학 용어들이 가끔씩 놓여진 시집은 어쩌면 고차방정식인지도 몰랐다. ~이고 ~일 때, 방정식 ~~이 해를 구하여라.

난해하고 입체적인 문제 앞에 머릿속에 넣어둔 개념들을 차곡차곡 되짚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소년.

개념은 이미 왜곡되어지고 활용이라는 이름으로 훼손중인걸 모르는 것 같다. 아니, 몰라야 한다고 순하게 다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걸 알아채는 순간

소년성은 희미해질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계산이 가능한 소년은 소년인가? 묻게 된다.

시집의 제목에서 보여지는 충돌. 어떤과 모든은 상충개념이다.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란히 두고 해맑게 웃는 것. 거기 소년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며 바람이 몹시 분다. 거절 당한 여인처럼 흐느끼고 있지만 사실은 미친년처럼 발광중인 '어느 누구의 모든 실연' 같은 날이다.

향도 짙고 맛도 짙은 차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건네진 맑기만 한 맹물, 아무 맛이 없는 맛이라는 묘한 경험을 건네는 시들이다.

요즘의 시들은 친절하다. 구구절절 사용된 은유를 친절하게 설명하며 쓰여진다. 산문인가?

요즘의 시들은 불친절하다. 세상 어려운 시어들이 완전 무장하고 실전을 하듯 쓰여진다. 민간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전술과 전략.

요즘의 시들은 모호하다. 그래서 서윤후의 스무살은 야무지다. 당돌한 소년성이다.


<스무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끝나는 폭죽을 샀다.


작품해설을 한 이는 서윤후의 소년성에 주목한 듯 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아줌마의 내심을 드러내 보자면..어서 듬직한 사내가 되었으면 싶다.

소년이 살아내기에 세상은 아직 위험하다. 팔뚝에 힘줄이 펄떡이는 사내가 되어 친절하지 않은 시로 보게 되면 좋겠다.

비가 와서,

비 오던 어떤 날 순진무구한 얼굴로 "누나, 비도 오는데 떡볶이 먹으러 갈래요?" 하던 되바라졌던 동생 하나가 떠올라 서윤후를 읽었다.

뒷심이 있는 사내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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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조동범>

 

당신은 갑자기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저물녘

의 황혼이고 해변이며, 역전에는 아름다운 소녀들의 처녀들

이 서성인다. 거리는 비현실적이고 소녀들의 젖가슴은 충분

히 부풀어 오른다.  그래, 당신은 지금을 오래도록 기록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탐미의 순간이고, 그렇게 지금은


  시작된다. 당신은 역전의 광장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월

요일 오후의 찬송을 바라보고 있다.  성도들의 음역이 한 옥

타브 올라갈 때마다 더러운 한 떼의 비둘기는 날아오른다.

오늘 밤은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고, 소녀들의 가랑이진 저

녁으로부터 불온한 소문은 비롯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갑

자기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소녀들의 처녀들이 눈을 감았다 뜰 때, 오래전

에 잊힌 폭설이 침묵을 거듭할 때, 소녀들이 서성이는 아름

다운 저녁은 군더더기 없이 저물기 시작한다. 그것은 지금

이고, 매혹적인 담배 연기와 함께 오래전에 실종된 아이들

의 전단지만이 역전 광장을 홀로 서성인다. 지금은 저물녘

의 황혼이고 해변이며, 역전에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소

녀들의 처녀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지금이고, 누군가는 열차를 향해 투신을 거듭한

다. 편의점을 나온 회사원이 소녀들을 지나칠 때,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맨살은 눈부시게 오늘 밤을 탐문하다.  당신

은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소녀인가 해변인가

아니면 황혼의 해안선인가. 지금 막 승강장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열차는 멈추지 못한다.


  승무원의 눈동자는 무엇을 맞닥뜨리며 경악을 거듭하는

가. 황혼이며 해변이며, 아름다운 소녀들의 젖가슴은 이윽

고 오늘 밤에 당도하는가. 당신은 갑자기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저묵녘의 황혼이고 해변이며, 그리하여

소녀들은 집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다.


(시집. 금욕적인 사창가. 중에서)


 

어쩌면 이 시는 이 시집을 들여다 보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해질녘, 저물녘의 시간들과 떠나지도 돌아오지도 못하는, 아니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참담한 서성거림이 빼곡히 들어찬 시집은 그래서 금욕적이다. 연작시 대륙횡단 특급 다섯편과 행성횡단 특급 다섯편을 낳게 되는 사정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오전 11시를 거쳐 오후 3시를 형식적으로 건너 시인이 머무는 시간은 늦은 낮인 이른 저녁무렵이다. 경계의 시간 경계의 공간에서 오히려 적나라해지는 욕망과 상실을 보인다. 이렇게 쓰니 뭔가 시를 읽은 티를 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아니다. 단지 오늘이 월요일이고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진"것 뿐이다.

사창가라는 말에 떠올렸던 588이며 미아리 텍사스, 화양리, 동두천을 떠올렸다. 지금은 전설처럼 남은 그곳..갈보들과 양공주들이 머물던 자리는 늘 비릿했다.

정욕의 냄새라고 믿었던 그것이 사실은 죽은 자의 몸에서 흐르는 체액의 냄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살았지만, 살아있음을 확인 받지 못한 사람들..그 가운데 혹여 살아있다고 아우성치는 존재가 있다 할지라도 환영 취급을 받아야했던 사람들의 인정되지 않은 냄새였을지도 모른다.

월요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시작인 그 날이 누군가에게는 일주일간 벌렸던 몸을 닫고 탈출을 꿈꾸는 날일 수도 있었을거다.

떠나기 위해 수없이 서성이던 역전 광장은 언제나 실종된 어린 시간들로 넘쳐날 뿐 아무도 개찰구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철로에 투신하지 않으면 건너지 못할 역전 저편의 세상. 떠돌다 들어왔건, 태생부터 사창가의 한구석의 지표가 되었든 어차피 우리는 무수히 몸을 파는 삶을 살아낸다.

내 몸은 이익을 창출하는 생산수단이며 착취하기 좋은 밭이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몸은 비릿하게 역전에 눕는다. 열차가 파도처럼 빠져나가는 해변에 엎드린 사체다. 지금은 세일기간은 아니지만 언제나 나는 세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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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 라마 왕자의 모험과 사랑 이야기 어린이와 고전 2
김남일 지음, 사히브딘.마노하르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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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인연.


실천문학사라는 출판주체가 있다. 굳이 출판사라고 지칭하고 싶지 않은 안타까움이 앞서서 이리 부르기로 한다. 1986년 황색예수전이라는 연작시집을 냈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막혀있던 그 시절에 이렇게 뜨거운 시집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시기, 시에 취하지 않으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자신의 분노에 취하지 않으면 비겁한 욕망에 취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그런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누렇게 바래버린 황색예수전을 버리지도 주지도 못한 채 끌어안고 산 시간이 벌써 30년이다.

 

 


그 후 다양한 책들을 읽었고 좋구나~하는 책들 중 실천문학사의 것들이 제법 되었었다. 내게 나름 신뢰해도 좋을 출판사였던 곳이 지난 3월 내홍을 겪었다.

적자의 문제와 실천문학사 본질의 문제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 얼핏 보는 것이 얼마나 오해와 편견을 끌어들이는 짓인지 잘 알기에 그저 "올바른" "실천 문학"이기를 바라며  응원이랄것도 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탰다.


그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김남일 선생의 라마야나.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저앉지는 않는구나.

더 이상 사람 같지도 않아서, 어쩜 악마일지도 모를 존재들과 버둥버둥 살아가려다 보니..어쩌면 우리 편이 되어줄 막강한 존재 하나쯤 떠올려 보게 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삽화가 너무 이쁜 책을 편다.



#2. 라마야나. 사람으로 태어난 비슈누


라마야나는 인도의 신화이자 대서사이다. 마하바라따와 함께..마하바라따를 오래 전 읽었었다. 인도의 신화에 딱히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 일리아드 오딧세이, 길가메시, 바가바드 기타, 티벳 사자의 서..등을 읽어내릴 때였다. 뜬금없이 신화와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젊은 어느 시절엔 누구나 그럴거라고 우겨보자. 오쇼 라즈니쉬에 심취 한 적 있죠? 라고 ..

장중한 대 서사를 쉽지만 섬세하게 그려냈다.

일곱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사지만 이 책에서는 일곱번째 장을 생략했다고 했다. 저자가 마지막에 써 놓은 '라마야나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마지막 이야기를 알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곱개를 다 본 셈이다.

머리가 열개인 악의 화신 라바나에게 잡혀가 버린 아름다운 아내 시타를 찾기 위한 라마왕자의 고군분투가 그려진 이야기다. 짐작하듯 너그럽고 세상 모든 것이 나서서 도와주는 이야기. 그리고 최후에 아내를 구하고 악을 벌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단순하게 누구라도 딱딱 짚어낼 이 이야기는 인도사람들이 -비단 인도 뿐 아니라 힌두교가 뿌리내린 모든 곳- 가장 좋아하는 신화라고 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뮤지컬,연극..등으로 만들어졌다고..시청률이 90%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역마다 조금씩 이야기의 틀이 바뀌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를 생각 해 본다. 악의 화신 라바나는 설산에서의 고행으로 신의 은총을 받게 된다. 신은 그에게 선물을 주기로 하고 라바나는 "신과 악마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요구했다. 신의 약속은 지켜져야만 했다.

그런 능력을 받은 라바나는 곧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하지만 신이든 악마든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었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건 기독교에서도 보여진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온 신의 아들.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대신 죽는 사랑과 용서.

그런 이야기는 죄책감을 갖게 했다.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은 누군가라니..내가 어떻게 살든 이미 짓고 만 원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신 앞에 빚을 진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것은 불편했다. 감사하지 못하는 나는 나쁜 인간인지도 모른다.

라마는 악마를 제압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온다. 나약한 인간이 아닌 신도 악마도 어쩌지 못하는 악의 화신을 제압하려고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것과 맞설 수 있는 가장 약한 존재. 여기에 그 매력이 있지 않을까?

반지의 제왕에서도 악의 화신 나즈굴을 제압했던 건 그 어떤 용사도 전사도 아닌 공주였지 않은가.

가장 인간다운 신, 어쩌면 인간의 삶에 복무하는 신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모두가 서로를 위한 한 곁을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는 삼라만상들, 모든 것이 신이고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와도 닮았다.


결국 시타를 되찾지만 라마는 시타에게 말한다.

"고생이 많았소. 우리가 이겼소. 당신 또한 자유로운 몸으로 해방되었소. 이제 당신은 갈 길을 가시오." (p138)

라고 한다.상심한 시타는 장작에 불을 붙이게 하고 망설임없이 불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불의 신은 시타를 구해내고 라마에게 되돌려 놓는다.

그제야 라마는 시타를 반긴다.


어떤 상황일까? 라마는 시타를 되찾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없었다. 다만, "크샤트리아로서 사랑에 눈이 멀어 수많은 생명쯤 아무것도 아닌 양 희생시켜 가며"(p142) 시타를 구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하므로써 희생된 모든 생명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치적이지 않은가? 대의를 위해 명분을 위해 사소한 것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천박한 정치가 아닌, 함께 하나의 목표를 향해 스스로 징검다리가 되어 눕는 자발적 희생과 강력한 지도력. 그것으로 획득되는 시타(평화, 혹은 빼앗겼던 것). 힘은 어디에서 나오며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쉬운 해법같기도 하다. 물론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오류로 점철된 망한 정치를 다양하게 목격했던 우리들 아니겠는가.


결국 사람이어야 했다. 피조물이거나 지배받는 대상이 아닌 다르마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3. 신화.


가끔 현실이 답답할 때 신화를 읽기도 한다. 흔하디 흔한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북유럽신화, 아프리카 신화, 중동신화, 동아시아신화...

세련된 귀족풍의 신들도 있고, 무슨 신이 이래?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신의 이야기도 있다. 우리도 단군신화로부터 수많은 전설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더는 버틸 힘이 없을 때, 그곳에 강력하게 나타나 줄 어떤 힘을 기대할 때 간절히 신화를 읽고 싶어진다.

한낱 미물인 곰의 소생이 된다고 해도, 흙수저도 아닌 동굴 속에서 맨 손으로 마늘을 까먹었을 짐승의 후예라 해도 상관없다.

피폐해진 가슴 한켠을 위로 받고 싶을 때, 덧없다고 미뤄두었던 희망을 다시 품어보고 싶을 때, 나는 신화를 읽는다.


어떤 역경이 있어도, 자신의 것을 (시타) 되찾아 올 라마 왕자와 권력의 유혹 앞에서도 다르마를 거스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착한 사람(동생과 원숭이와 곰과 독수리와..)들이 순한 마음으로 나누는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 가사로 불리울지라도 결국 하나의 노래일 것이다.

사람의 노래.

신화는...사람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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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4-22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연이겠지요. 저 낡은 <황색예수>를 5시간도 안되어 두번이나 대하다니... 괜히 오싹!!!

나타샤 2016-04-22 09:56   좋아요 0 | URL
신기하네요^^ 잘 보이지 않는 책인데..좋은 일이 있으시려나봐요..ㅋ
 

며칠 전 선물을 하나 받았다. 이래 저래 부딪고 살다 알게 된 분께서 보내주신..책..

 

 

 

간혹 뜬금없이 책들이 날아들곤 한다. 전부터 책을 좀 주시겠다고는 했는데..설마 신화일줄이야.

이래저래 뒷조사(?)를 해보니 신화에, 동아시아 신화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시다. 사실 낯선 책은 아니지만 뭔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마 감사한 마음이었지 싶다.

길가메시를 읽고 마하바라따를 읽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신화에게 포섭(?) 당했던 시기.

현실이 암담할 때 종종 어떤 신화적 이야기에 기대기도 한다. 그 때는 도피처로서 황당하기까지 한 신화를 읽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되짚어 보니..신화는 어떤 시기 어떤 지역의 특수성을 품은 소망의 노래였다.

때론 어떤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신화를 읽을 때이다. 형이상학과 관념이 아닌 신의 모습을 한 민초들의 바람을 읽을 때는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권의 책을 더 주문했다.

 

 별로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각 대륙의 신화는 어떻게 달라지게 되고 변형되기 시작했는지..그 정치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토양들을 되짚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거대한 단절을 구입했다. 벽돌책의 부류이다. 무겁고 두껍다.

다행이다..이 간단치 않은 이야기들을 허투루 써냈다면 아마 많이 화를 낼 것도 같으니 말이다. 지도들로부터 시작하는 책..기대가 된다.

세계 신화여행과 함께 읽으면 조금 더 큰 그림으로 신화를 만날 것도 같다.

 

 

 

 

 

선거가 난리 북새통 속에 끝나고..니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난리도 아니다.

명확한 건..국민들의 힘이다. 참 절묘했다. 어느 한 당도 과반을 주지 않다니..게다가 호남에게 목숨줄을 내어주고 만 형국..

이 국민들의 정치감각이 녹슬지 않았구나 싶었다. 해결해야할 여러 과제들..

 

그 첫번째를 민생이라고 한다. 민생은 말 그대로 국민들의 삶의 양태이다.

해결의 과정은 그 삶의 고통을 들여다 보는 것에서 시작해 존엄성을 확인 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원론적이지만..

그렇다면 가장 큰 상처 세월호의 문제..깊은 상처 위안부문제를 짚지 않을 수 없다.

먹고사니즘이 급하니 잠시 뒤로 미루자? 사실 세월호와 위안부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건 국민의 가치와 국가의 위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아닐까?

먹고 살기 위해 존엄을 내려두고, 먹고 살기 위해 위상을 축소한다는 건..아닌것이다.

 

제국의 위안부 재판이 있었다고 들었다. 최근.

이것에 대해 찬반 여론이 들끓지만(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반대한다.

학술적으로 구구절절 비판할 역량은 안된다. 다만, 그 속에 빠진 식민지지배 하에서의 자율성의 보장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다행히 그 문제에 대한 사이다 같은 책을 하나 발견한다.

 

 인터뷰와 칼럼, 기사들로 빼곡히 채워진 이야기가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일본의 양식 있는 지식인이라 칭해지는 이들까지 포함된 책의 내용은 감정적이지도 과격하지도 않다.

다만..

중요한 핵심들 드러내고 교묘히 비껴가는 저들의 술수를 간파해낸다.

 

 

 

 

 

 

 

 

 

신화는..현실을 덮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둔 이상의 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혁명을 넘어선 신화..

우리 국민들이 쓰는 위대한 신화같은 걸 꿈꾸게 된다.

 

오늘은 일단..라마야나부터 시작한다. 동아시아의 매력적인 신화 속으로 들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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