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이 없는 집 - 박소란>

 

방문 앞 수돗가에서 오줌을 싸요 엄마는

 밤낮 터질 듯 충혈된 가랑이를 내벌려요 병든 집들이 빽빽이 둘러멘 앞산 구릉처럼 어금니를 앙다물고, 하지만 웬걸요

 문드러진 잇새론 이내 흥건한 신음이 터져나와요


 나는 꾹 참았다 밤에만 싸요 아무도 몰래 치마 속을 비집고 든 높바람이 막무가내로 온몸을 휩쓸고 가면

 하수구 아린 구멍엔 우스꽝스러운 이끼만 돋아나요 우죽우죽 나는 자라나요


 비가 오는 날이면 지린내는 온 동네를 뒤덮어 세수를 하다가도 이를 닦다가도 우욱우욱 종일 헛구역질을 해대는 집

 담장 아래 웃자란 꽈리처럼 젖이 부푼


 스무살 언니는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요 들어와도 집에서 오줌 싸지 않아요 더이상 아무도 집으로 놀러 오지 않아요


 마스크를 쓴 구청 직원들 킬킬거리며 쓰러져가는 양철문을 두드릴 때마다 대책없이

 오줌소태를 앓는 집 대책 없이

 

 휘늘어지는 새벽이면 오줌줄기는 더욱 힘차고 억세 거짓말처럼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어요 싸늘한 머리맡이며 금 간 벽 틉으로 끝없이 넘쳐흐르는 오줌에 두둥실


 집이 떠내려가는 꿈은 얼마나 아룸다운지

 엄마와 언니와 내가 손을 맞잡고 그득히 출렁이는 오줌 위를 떠다니는 꿈 끝내 정박하지 못한




 


복효근 시인의 시 하나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목련꽃 브라자.

얼마나 이쁘고 순박한 이름인가..도대체 어디에서 성추행을 묘사하고 있으며 부끄러워야 하는건지..알 수 없다.

단지 브라자라는 말이 선정성의 시작이며 성희롱에 가까운 시어들이라고 분개(?) 하고 있다. 세상 순진한 척 하기는..

느닷없이 어떤 브라자 선전이 생각났다. 앞태 옆태 뒤태 옷태~라고 하며 어떤 모델이 타이트한 옷을 입고 제 몸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광고. 그런건 공개적으로 해도 되나?

지하철 도어에 쓰였다는 시. 지방 사는 사람들, 지하철 없는 동네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시. 하지만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광고. 그건 왜?

시니까..문학적인 창작물이니까..

감동과 교훈만 무성해야 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미친거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일떠서야 한다고 외치는 시는 왜 없는건가. 비겁한 자들을 일깨우는 일갈을 왜 없는건가.


소란스러운 아침..박소란을 읽는다.

시어들이 단편영화의 필름처럼 휘리릭 흐르며 세세한 표정과 장면을 연출하는 이 시를 좋아한다.

화장실조차 없는 하늘과 제일 가까운 동네겠지.

막연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겠지. 공동화장실까지 오래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겠지. 다행이 방문 앞에 수돗가가 있어 급하게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눌 수 있었겠지.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사람들.

수시로 찾아드는 요의를 해결할 지린내가 넘쳐나는 수돗가. 오줌소태가 걸린 듯 매양 긴장한 상태로 찌릿찌릿한 고통이 함께오는 거짓 요의에 매번 속고 바보같이 속은 댓가는 고통스럽다. 그래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스무살 언니는 더이상 수돗가에 쪼그려 앉지 않는다. 그 사정은 어떤것일까 짐작하는 그것일까. 짐작하는 것이든, 또 다른 것이든 상관없다. 시를 읽는 독자의 상상의 터가 만들어 낼 이야기의 터는 제 몫이다.

천박하게 읽어내거나, 안타깝게 읽어내거나, 어린 추억을 소환하거나, 같은 처지임을 확인하는 과정이거나..그건 시인의 몫도 책임도 아닐터..


오줌이 차고 넘쳐 둥둥 떠다니는 꿈. 정박하지 못하는 어차피 떠다닐 신세라지만, 평생 고쳐지지 않을 오줌소태와 평생 갖지 못할 화장실이지만 세상을 얻을지도 모를 희망을 들킨건지도 모른다. 보희의 꿈을 산 문희가 춘추의 부인이 되었듯..


박소란의 시를 읽으며 나는 또 이 시인의 계략(?)에 놀아난다.

위로와 희망이 아닌 체념을 먼저 들이미는 시인의 시들..혹여 희망일까 까치발을 하고 목을 빼는 순간 여지없이 무릎을 꿇리고 '희망이 왜 높은 데 있다고 생각해? 희망이 왜 담장 너머에 있다고 생각해? 거기 있는게 네 몫이 확실해?'라고 묻는다. 꿇은 김에 엎드려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살필 새도 없이 콧 속으로 파고 드는 지린내.

온 몸을 돌아 나온 투명한 지린내를 만난다. 네 희망을 위해 쪼그려 앉을 결심은 했는지..오줌소태를 견뎌낼 자신은 있는지..결코 무혈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낡은 빤쓰에 묻어나는 희미한 핏자욱으로 확인시켜주는 듯 하다.


어린 기억 언젠가..상도동 산 47번지에 모여 살 때, 화장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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