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세개의 시들을 깜도 안되는 감상과 함께 쓰기 시작한 5월.

어쩌면 5월은 시를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애도와 애도로 이어지는 참담한 하루하루를 살아남은 자로 버티는 건 아무래도 힘겨웠을거다.

공동묘지 위에 지어진 집처럼 밤이면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서럽게 울어대는 곳.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존재들 사이에 살았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는 비명을 질러대는 것 외엔 더 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노래가 필요했고 쓰다듬어 줄 손이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시읽기는 5월이면 족했다.

 

개인적인..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은 때론 공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매일처럼 적어내며 나는 나의 습관 같은 것을 본다.

단 한번도 깨닫지 못했던 습관. 말투, 혹은 생각의 흐름. 또는 넋두리..

자신의 어느 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겠다.

 

더불어..별 것도 없는 감상을 같이 읽어주시며 격려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소리없는 격려 혹은 공감의 표시들이 힘이 되었다.

시집 한 권을 읽고 나면 진이 빠지곤 한다. 마치 CD 한 장에 수록된 모든 트랙을 따라 하루 종일 춤을 춘 것 같은 느낌이다.

생경한 리듬도 있었고, 익숙한 가락도 있었다.

어쨌든 마지막까지 읽어내고 낯익은 행간을 발견하는 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시를 일게 했다.

 

앞으로도 또 이런 무모한 일을 더 할지는 미지수다.

별 것도 아닌 것이 제법 힘이 들었다고..

 

관심을 보여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하며 이 연재의 공동저자라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전한다.

본격 혼잣말 리그였으나 대답이 없었다면 공허했을 일이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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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31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묵묵히 글을 열심히 쓰는 분의 서재를 좋아해요. 사람 흔적 없는 서재의 썰렁한 분위기에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너무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좋지 않아요. 사실 서재 친구 아닌 이상 다른 분의 서재 글을 보는 기회가 별로 없어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친구로 맺은 분들의 서재만 들러봅니다. 친구 아닌 분들의 서재도 찾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첫인사를 하면서 댓글을 남겨할지 망설입니다. 용기 있게 댓글을 남겼는데, 답글이 없으면 허무한 느낌이 들어요. 아무튼 연재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타샤님 덕분에 하루에 좋은 시들을 매일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나타샤 2016-05-31 23:54   좋아요 0 | URL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가 좀 읽히면 좋겠다는 작은 속닥거림이었습니다.
소통이 낯선 사람인지라 거의 혼잣말에 가깝지만요..고마워요^^
 

그러면 다시 말해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詩여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詩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 잠가도, 새어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나오는 물처럼.


내 삶의 썩은 즙,

한잔 드시겠습니까?

(극소량의 詩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속에서 살고 있다.)



--------------------------------------------

최승자의 세번째 시집.

로트레아몽과 보들레르에 매혹되었던, 매혹되는 한 시기를 홍역처럼 거쳤던 때, 최승자는 달콤했다.

나는 어쩌면 설익은 염세주의자였는지도 몰랐다. 스물이 안되었던 나이부터 세상은 언제나 고함을 질러대는 검고 추악한 덩어리였고 그 속에서 한껏 맞은 뒤 제 상처를 핥으며 내는 어린 강아지의 신음처럼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드러내는 시들에 탐닉했다.

사춘기여서 그랬을까? 늦은 사춘기를 겪었다. 중학교 무렵부터 엄마는 딸년의 사춘기를 대비했다. 언제고 뻗어나올 그 시기에 상처없이 지나쳐갈 방도를 준비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딸년의 사춘기는 오지 않았고, 엄마는 이미 지났나? 의아해하다 지났나보다. 확신하고 사춘기대비책을 모두 폐기했다. 그 때, 모든 방비들이 무력화되었을 때 사춘기는 시작되었다. 애써 준비한 방책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감당해야했던 딸년의 사춘기..엄마의 고생은 차마 말하기도 어려울만큼 ...

'딱 같이 죽었으면 좋겠더라.' '진짜 내가 낳은 게 맞나 싶더라' '자고 있을 때 얘를 데리고 세상을 떠나는게 죄를 덜 짓는 길일까 싶더라..' 라고 엄마는 그 한 때를 이야기하곤 했다.

그 때는 그랬다. 분명하고 선명하고 노골적이며 파괴적인 에너지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뛰어들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괴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것이 분명하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싸워봐야 이겨내지 못할거라면 제 상처라도 핥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상처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아물고 있는 살집 사이로 삐집고 나오는 선홍빛의 피의 움직임에 그 비릿한 맛에 중독이 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최승자를 읽고 상처를 읽고 분홍빛으로 꿀렁대는 내 속의 모든 상처받기 위해 준비중인 것들을 상상했다.

이 처절한 여인을 통해서..

시를 쓰고 짓고 만드는 이가 아니라 시를 토해내는 이 여인을 통해서 말이다.


빛나는 눈동자를 연인의 눈 속에서 찾기보다 제 눈알을 뽑아 들여다보며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듯..최승자의 시는 본래적이다.

태초에 그 시어들은 그렇게 맞추어 쓰여지기로 약속한 설명서가 있었고, 최승자는 그 설명서를 엿본게 분명했다. 그 댓가로 시를 앓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완벽하게 말해지는 시들..그 사이에 빨갛게 배어나는 선홍빛 피처럼 배어 나오는 그 녀의 신음.


<그리하여 이제 휘황한

고통의 춤은 시작되고,

슬픔이여 보라,

네 리듬에 맞추어

내가 춤을 추느니

이 유연한 팔과 다리,

평생토록 내 몸이

얼마나 잘

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 (고통의 춤/ 중에서)>


<촛불이 타고 있는 동안은

심장이 타고 있는 동안은

결코 결코 기도하지 않으리라. (기도하지 않으리라/중에서)>


이 결연하고 영민함. 시를 토해내기 위해 시의 비밀을 엿본 댓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말은 차라리 시리다.


최승자는 무녀일지도 모른다. 시와 사람의 경계에 서서 시의 신탁을 전하는, 온 몸으로 시를 받아내고 사람의 말로 풀어내는 고단함을 기꺼이 수행하는 무녀.

참혹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잔혹하리만큼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쏟아놓는 시.

이것봐요 내 심장은 이렇게 뛰어요. 이..것..좀 ..보..세..요..

여기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는 내 것이예요. 이렇게 맑은 피를 보셨나요?

자신의 심장을 꺼내들고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그녀가 최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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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타샤 2016-05-31 09:5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신탁을 받는 중이시겠죠? 2010년 기사로 본 야윈 근황이 전부라서 궁금합니다..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채식주의자의 수상 이후 한강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묵묵히 쓰는 것을 이어온, 아니 견뎌온 작가에게 정당한 상이 주어지는건 당연한 일이다.

한강의 수상소식과 더불어 가난과 손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하얀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글쟁이가 가난한거야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출판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열정과 나름의 사명으로 견디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책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다. 손가락으로 꼽을만큼의 인원을 제외하면..

글로 생활이 유지되는 이들이 그나마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그들이 명성과 생활을 보장받기까지 넘겨주어야 했을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 와중에 여전히 쓰고 있을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생각을 하게 된다. 기본만이라도..최소한 배고픈 글쟁이를 면하게만이라도..


한강의 수상 이후 가장 빨리 나온 책일거다. 그 전에 기획이 되어 예판이 시작되었으니..

채식주의자가 큰 그림 세개를 나란히 세운 병풍이라면, 흰은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인 조각이불 같은 느낌이다.

시처럼 짧게 쓰여진 이야기들이 서로의 끝과 머리를 붙들고 이어지는 이야기.
어떤 이는 아프다고도 하고, 슬프다고도 하고, 눈부시다고도 하고 시리다고도 했다.


나는 투명한 멍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귀밑과 턱 사이에 생긴 작은 멍울.
턱을 괼때 손끝에 닿는 자리에 생긴 생경한 멍울 같은 글이다.
혹부리 할아버지의 노래주머니.
정말 거기서 노래가 나오는지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그래서 자꾸 만지작거리게되는 의심과 확신 사이의 묘연한 흰 이었다.
아프진 않지만 아플까봐 걱정이 되서 온 신경이 집중된다.

멍울같은 책을 읽었다.
짖지 않는 개처럼 읽었다.


한강의 글은 시에 가깝다. 시의 파동으로 움직인다. 하나의 이미지를 따라 나서 저만치 달려가야 실체가 보이는..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출간 되었을 때, 짧다. 하는 생각을 했다. 앨리시어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온전히 헤집어놓는 작가의 힘에 흔들렸었다.

흔들리며 쏟아지고 깨진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짧지 않았다.

흰은 그보다 더 얇다.

작가는 안간힘을 쓰며 썼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한 페이지의 절반쯤이거나 간혹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하는 이야기..짧다.

짧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 길어지며 변색되고 오염될 것이 뻔한 '흰'을 써내기란 이렇게 단촐한 삶의 사유여야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기대지 않고 살아내는. 하나씩 확인하고 디뎌내는 힘을 본다.

처연한 표정으로 하얗게 사위어가는 것이 아닌, 하얗게 딛고 일어서는 빛을 보는 것도 같다.


어쩌면, 글을 쓰는 것 이외에 더는 하고픈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한강의 삶 속에 하얗게 찍힌 흰 쉼표 같은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또 다시 삶 속으로..

흰 벌판에 떨어지는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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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시장에서 양미리 한 두름을 사왔다

스무 마리 한 묶음 노란 비닐끝에 묶여 왔다

사천 원의 생이 합동으로 엮여 늘어진.

그래도 생을 품을 땐 팔팔하게 바다를 거슬렀을 양미리

늙은 시인은 저녁밥상에 앉아

마리 당 일금 200원짜리 생을 이빨로 씹는다

난 얼마짜리의 생일까

뼈째 꼭꼭 씹어요 골다공증에 좋대요

마누라의 영양가 있는 말, 귓전으로흘리며

누가 내 생을 질기게 씹어줄 수 있을까를 시인은 곰곰 생각한다

마이너스 통장에 줄그어진 늙은 시인의 생

양미리 한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메마른 생을

누가 강한 턱으로 억세게 물어뜯어 줄 것인가를

시인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제 허명뿐인 그의 이름을 누군가가 꼭꼭 씹어주길 바라면서

틀니 잇새에 낀 가시 하나에 잇몸이 찔리운다

아뿔사 갈매기 울음소릴 듣고 만 것일까

끼우룩!

목이 메어

손에 든 소주잔이 맑게 흔들리는 저녁



-----------------------------------------------------------------

 

시집의 제목만으로 울컥했다. 사람이 먼저다. 라고 쓰인 현수막을 본 적이 있다. '여기 사람 있어요!'라고 외치는 어느 현장을 지나친 적이 있다.

사람은 피상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가치처럼, 내게 인식되어 있다. 그저 사람이라서..

그런 막연함은 사람에 대한 상처를 깊게 했다. 사람이 있다며, 먼저라며, 거기에 힘이 있다며?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무엇보다 크다. 비약하자면 같은 종족으로서의 존재성을 거부당한 것 같은 참담함이 들기도 한다.

또는 저 이와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닌가보다, 라며 예단하여 선을 그어버리기도 한다. 구분과 구분..그 속에서 사람이란 얼마나 외롭고 유약한가.


해 질 무렵, 까마귀가 저녁 하늘의 한 귀퉁이를 물고 떼로 날아가고 어느덧 이윽한 밤이 되었을 때, 자꾸만 작아지는 인간의 섬에 슬며시 팔을 끼며 먼 바다를 같이 보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 애인.

영양가 있는 말로 양념한 양미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

마이너스 생을 마주잡고 걸어 줄 사람.

바짝 말라버린 삶을 물어뜯어 줄 수 있는 사람. 수없이 많은 잇자욱으로 다만 외로운 생은 아니었다고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애인이겠다.


여백이 많은, 그림처럼 풍경처럼 쓰여진 최돈선의 시집을 읽다 문득 떠오른 정현종의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중에서)>


최돈선의 시는 흑백영화처럼 읽힌다. 아무도 대사를 말하지 않는다. 촌스럽지만 귀에 박히는 배경음악이 흐르고 한 장면이 지나면 자막이 화면 가득 쓰이고 다시 다음장면으로 넘어가고..무성영화처럼 ..그러니 정작 시는 읽은건지 본건지가 묘연해진다. 때때로 까마귀의 소리가, 갈매기의 소리가, 할렘가의 눅눅한 소리가, 섬에 파도가 부딪는 소리가 사람의 말을 대신해 소리의 여백을 채운다


사람이 정말 애인일까.

내 팔뚝을 물어 뜯듯, 내 이름을 물어 뜯어줄 믿음직한 그대를 아직도 기다리는 시인은 풋사랑에 몸서리치는 소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덧 먼 생의 길을 걸어버린 시인.

< 생


잠이 햇살처럼 쏟아지네요 늙어가는 생 (생/ 전문)>


어쩌면 꿈이었을까? 사람이 애인인 꿈.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고 오랜 기다림이라는 것을

처마 밑에서

비 맞는 푸른 산 바라보며 고양이가 운다. (새벽밥/ 중에서>


양미리처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랑. 기다리게 하는 이유. 그것은 사람이 애인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 물어뜯기기 위한 간절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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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

살림이란 게 설거지에서 완결된다지만

완결이라는 말이 아프다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집 안을 둘러본다

헝클어진 이불, 무릎께가 닳은 추리닝,

윗목에 돌돌 말린 양말짝

이 모든 게 살아왔다는 증거처럼 구구절절하다

설거지는 구구절절에 대한 즐거운 설명이다

 

젓가락 한 짝과 수저 하나로 남은 생

붉은 고춧가루 하나가 아프게 찍혀 있다

설명보다는 실명에 가까운 고적한 설거지

 

눈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전깃불을 끄고 나가야 하는데

설거지 하다가 나는 모른다

전등을 끌 손가락이 어디에 있는지

그게 내 손안에 있기는 있는지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설거지하는 나를 개관한다

젖은 손으로 이마를 짚어본다

차갑다는 느낌이 내 삶의 온도다

​----------------------------------------------------

출근하지 않는 주말. 밀린 집안일을 하고 일주일간 먹을 반찬을 준비한다.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고, 끼니를 해결하고, 설거지를 하고, 다시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고...

 

창문이 덜컹대는 건 바람이 분다는 말이다. 아주 많이 분다는 말이다.

창문이 톡톡 튀는 건 비가 온다는 말이다. 젖는 줄도 모른 채 흠뻑 젖는 그런 비가 온다는 말이다.

창문이 밝은 건 해가 강하다는 말이다. 잔뜩 찌푸린 채로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나는 집 안에 있는게 맞다.

 

내 삶의 도돌이표가 끝나지 않는 곳. 그 곳에 한번씩 도돌이표에 다녀온 흔적이 남았다.

낡아가는 행주와 수세미, 조금씩 휘어지는 조리기구, 빛을 잃어가다 차츰 찌그러지기 시작하는 냄비며 프라이팬,

이제는 이가 헐거워 조금만 스쳐도 뚜껑을 떨구고 속엣 것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양념통까지..

구석구석 내가 매만진 흔적을 담고 있는 부엌은 나의 오케스트라이다.

 

아직까지는 아다지오를 더 자주 연주하고는 있으나, 미뉴엣을 연주할 날도 있긴 할게다.

왈츠도 좋고 탱고도 좋다. 탱고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쁘지 않다.

내 걱정은...

아다지오에서 레퀴엠으로 넘어가는 건 아닐지에 대한 걱정..

말끔하게 씻어서 엎어 둔 밥공기와 대접, 접시들..그리고 언제나처럼 함께 누워 마르고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

 

늘..잼을 하듯 즉흥곡이 연주되고, 규율도 원칙도 없이 제멋대로인 것을 단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온전한 내 공간.

시린 손이 오히려 익숙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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