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출간된 책이다. 근간이라면 근간이지만 책의 절판주기가 짧아진 것을 고려하면 그리 근간도 아닌셈이다.그럼에도 아직 구매할 수 있다니..책이 출간되고 얼마되지 않아 읽고 리뷰를 썼었다.다시 책을 펼친건 도로공사 노동자들 때문이다.톨게이트에서 근무하는 고충이 미루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비인간적이며 비인격적이다. 심지어 그들은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나 하루아침에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직접고용하라는 법원의 판결도 무시한채 아무 관련없는 직무를 맡기거나 회유하며 정규직으로 고용요구를 포기하게 하려한다.이미 갖고있던 지위를 빼앗고 시혜를 베풀듯 뻗대며 돌려주지 않고 있다.도로교통부산하 공기업이다.크게 이야기하면 국가에 책임이 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해야하는 국가의 의무를 방기한 채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태도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구사대(참..언제적 구사대인지)가 동원되었고 여성 노동자들은 상의탈의로 저항하기도 했다. 여전히 전기와 물이 끊어진 곳에서 경찰들과 대치중이다.전기와 물을 끊다니..심지어 보건의료단체연합 소속 의료인들의 진료조차 막고 있다고 했다.법무장관 후보자를 호위(?)하던 정의(?)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갔을까?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민주적이지 않다.노동자. 특히나 여성 노동자, 거기다 장애가 있는 여성노동자의 경우는 더 참혹하다.태풍이 거센 날.김천의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강남역 CCTV 철탑 위의 김용희씨가 걱정된다.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국민‘ 으로 보장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유를 묻고 싶다.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다시 읽는다.우리가 옳다!우리가 제일 앞에 서겠다!라던 도로공사 여성노동자들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인다.
도로공사는 하이패스에서 돈을 안 내고 도주하는 고객들 요금까지여성노동자들에게 받아오라고 요구한다. 도로공사 직원들이 직접 고객을 만나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거쳐 경영 평가가 좋으면 성과급은 도로공사 직원들 몫이다. 책임지는사람 따로, 성과급 가져가는 사람 따로인 것이다.
사람들은 판검사, 의사, 변호들에게는 ‘웃지 않느냐고 반말로 따져 묻지 않는다. 그렇듯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도 인사와 웃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중략)세상에 귀하지 않은 노동은 없으니까
칠순의 시인의 시집.책 욕심이 많아 닥치는대로 (그래봐야 조족지혈이겠지만) 읽는 편이지만 이 시집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급해 서둘러 읽었다.시인은 손글씨로 적어 몇부만 만들겠다고 했고 지인들이 말려서(?)재생지로 삼백부를 만들었다고 했다.삼백부. 삼백명의 독자 안에 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했다.부론,그곳에서 읊다.제대로 읊은 시집이다.눈에 마(魔)가 끼었는지 이상하게 띄어쓰기나 오탈자가 눈에 잘들어 온다.정작 나는 어법이며 띄어쓰기 다 무시하지만..습관처럼(?) 시를 읽는데 뭔가 달랐다.뭐지? 다시 읽는다. 뭐지?이 시집은 읽을 수 없다. 읊어야 한다.‘단풍잎에 스민 마음새벽비에도 씻기지 않고찬 물결소리에 눈뜬 바람쌓인 낙엽 괜히 빗질하며떨어져 길을 덮은가을볕과 시비질이네‘라고 읽으면 안된다.‘단풍잎에 스민마음새벽비에도 씻기지않고찬물결소리에 눈뜬바람쌓인낙엽 괜히 빗질하며떨어져 길을덮은가을볕과 시비질이네‘-풍경 1연라고 ‘읊어‘야 한다.노래하듯 장단 맞춰 띄어쓰기에 따라 읽는게 아니라 가락에 맞춰 읊어야 한다.사진과 시가 마주한 시집은 바랜 초록색이다.아직도 시퍼런 청년의 마음이신가보다.시간이 색을 바래게 했겠지만..그래도 초록이다.태풍이 온다고 비바람이 거센 창앞에 앉아 나즈막히 소리내어 ‘부론. 그곳에서 읊‘은 시를 읊는다.잠투정이 심한 나를 재우느라 ‘자장~자장~ 우리 손지 하늘보다 귀한손지, 땅보다 너른손지. 금을준들 너를줄까,~‘한참을 읊어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1/300 의 확률로 시집을 구했다.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인문학협동조합에세 기획한 스무명이 쓴 스무명의 독학자의 이야기다.제도권 교육이 아닌 삶을 지탱할 무기를 틀어쥐고 스스로 배우며 살아낸 사람들.부를 축적하고 명에와 권위를 갖는게 성공이라면 이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다.하지만 이들은 ‘승리‘한 사람들이다.제 삶의 주인이 되는것을 방해하는 온갖 위협과 타협의 유혹과 간단없이 싸워 이긴 사람들이다.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알몸으로 던져진것 같은 삶에서도 무릎에 힘을주고 일어난 사람들이다.2016년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묶었다고 한다.낯익은 글이 있는 건 그 탓인가보다.알라딘 1세대 리뷰어 물만두 홍윤님의 이야기는 너무나 반갑다.스스로를 ‘변방의 야매독자‘라 칭하는 나로서는 어쩐지 동질감 같은것도 느껴진다.물만두님처럼 추리소설을 파지는 않지만..그래서 야매지만..어떻게 살것인가가 불분명하고 어느쪽으로 가야할지도 막막할 때..예전에 누구는 그랬대. 라고 이야기하며 위안과 안도를 느끼듯 읽어보면 생각보다 든든해지겠다.그랬지 그랬어..하는 혼잣말도 해보면서..
북리뷰어의역할은 비평가와 다르다. 북 리뷰어는 독자에게 자신의 독서 경험, 즉사용자 경험UX(User Experience)을 공유한다. 이는 독자에게 손을 내밀고 지도를 제시하고, 길을 안내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북 리뷰어는 독서의즐거움이라는 ‘경험‘을 보편화한다. 이는 문학(책)의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이며, 근대 문학이 종언을 고한 이후에도 문학(책)을 읽는 일이 흥미로운 경험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어떤 지식도 지혜도 경험도 아닌 나 자신과의 소통, 내 과거와의 만남이다. 그로 인해 다시 내 미래와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홍윤의 리뷰 작업에는 두 가지 일관된 원칙이 존재했다. 하나, 직접 읽은 책에 대해서만 쓸 것. 둘, 솔직하게 쓸 것. 대단한 이론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홍윤의 리뷰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 두 원칙을 끝내 고수했기 때문이다. 홍윤은 성실한 리 뷰어로서 언제나 뚜렷한 주관을 견지한 채 책을 대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돌이킬 수 없는 앎의 증언이다.
전태일의 분신은 자신의 몸을 불태움으로써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에게그 어떤 자리도 허락하지 않았던 이 세상에 그가 새긴, 돌이킬 수 없는마지막 문장‘이자 노동자들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든 도화선이 된 ‘첫문장‘ 이었다.
독학자는 불타오르는 사람이다. 체계적인 기록을 남길 수는 없을지라도 독학자는 불이 아닌 ‘타오름‘이라는 내재된 힘을 발명하는 이다.독학자라는 이름에 소유권이 없다. 분할된 몫의 자리를 불태우며 ‘서로가용해되어 있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 독학자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일 수 있는 익명의 자리로 향한다. 전태일의 ‘인간 선언‘은 이름이 없는 이들의 익명성으로부터 발화한 것이었다.
‘강성 노조‘니 ‘귀족 노조‘니 하는 비난이 많지만, 왜 그들이 강성‘이될 수밖에 없는지를 한번만 돌아보면 그런 말은 하기 어렵다. 그중 누가‘귀족‘ 인가? 어느 나라 ‘귀족‘이 과로사로 죽을 만큼 초과노동하고, 정규직 잘렸다고 조끼 입고 한데서 자며 빨갱이‘ 누명을 쓰고, 그러다 자살하는가?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인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로는 부족하다.이미 학벌과 부를 위한 기회가 불평등하게 체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정(=시험)의 공정함은 환상일 뿐이다. 결과의정의는 저절로 달성되지 않는다.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고교 등급화를폐지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또한 삶의 어느 단계에서는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교육을 찾고 국가는 그것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김진숙의 독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