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기술, 지식만으로는 동물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몰리와 유대감을 쌓았던 것처럼 에뮤와도 유대감을 쌓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뿐만 아니라 가슴 깊은 곳까지 열어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는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사랑하도록 말이에요.
비록 그것이 음식물 쓰레기일지라도.

보더콜리는 독립적이고, 서정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영리하기로유명하다. 하워드도 예전부터 보더콜리를 기르고 싶어했다. 그런보더콜리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으니, 양이나 소가 없으면 대신 곤충을 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스쿨버스를 몰려고 했던 적 도 있었다. 그래서 보더콜리에게는 지속적인 자극이 필요하다.

우리 꿀꿀이 부처의 갈라진 발굽을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있노라 면 세상의 풍족함을 음미하고 즐기는 법이 절로 깨우쳐졌다. 피부에 내리쬐는 햇살의 따사로움과 아이들과 노는 즐거움도 배웠다.
거대한 몸만큼 드넓은 마음을 마주하고 있으면 내 슬픔이 상대적 으로 작게 느껴졌다. 

‘정글의 여왕‘, 샘은 우리가 찾는 거미 종을 이렇게 표현했다. 골리앗 버드이터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타란툴라다. 몸집이 큰 암컷은 무게가 113그램까지 나간다. 머리는 살구 크기만큼 자라고, 다리를 펼치면 사람 얼굴을 충분히 감쌀 정도로 길다. 샘이 이번에찾아낸 골리앗 버드이터가 거미굴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긴 다리로 내 얼굴 전체를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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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불을 껐다 켰다 하면서 ‘이제 그만 돌아오지 않겠니?‘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제안에 가까웠다.
아빠는 전등불이 신호등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멈추라는 ‘제안‘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몰리 역시 우리의 신호가 제안이라고 느껴질 경우에만 집으로 돌아왔다.
난 그런 몰리의 행동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몰리가 내게 복 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처럼 엄마는 내가 사랑스러운 소녀가 되길 바랐지만, 나는
‘개다움‘을 숭배했다. 특히 몰리의 초자연적인 힘에 도취되어 있었다. 몰리는 아빠 부하의 차가 대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오는 것을 알아챘고, 엄마가 강아지용 캔사료를 냉장고에서 꺼내드는 순 간 바로 냄새를 감지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숨을까 하다가 이런 태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았다. 제인 구달이 떠올랐다. 그녀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었다.
나는 일찍이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침팬지 연구를 읽고 어린시절부터 그녀를 내 영웅으로 삼았다. 제인 구달은 연구 대상을몰래 훔쳐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침팬지들이 그녀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겸허한 자세로 기다렸다.
그날 이후부터 나도 매일 똑같은 복장을 착용했다. 아빠의 낡은녹색 군용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빨간 스카프를 둘렀다. 나는 에뮤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여기에는 나밖에 없어. 나는 절대 너희를 해치지 않아

 에뮤는 알을 낳기 전까지 성별을 구분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경이로운 존재를 감히 ‘이것‘이라고 칭할 수는 없었다. 성별은 알 수 없었지만, 아직 다 자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알 수 있었다. 
다른 성조처럼 목에 청록색 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비를 떠난 지 몇 주 혹은 몇 달밖에 되지 않은형제들로 추정되었다(보통 아빠 에뮤가 푸르데데한 검은 알들을 직접 품어서 부화시키며, 거의 20마리가 되는 아기 에뮤들을 보살핀다). 이들도 나처럼 이제 막 세상을 탐험하기 시작한 셈이다.

가끔은 검은 머리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을 응시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거대하고 기묘한 새의 시선에 온몸이 정화되는듯했다. 아무리 더러운 옷을 걸치고 머리는 들개처럼 헝클어졌어 도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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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을 방송으로 보며 문득 세월호 아이들이 생각났다.
검찰이.
저렇게 순식간에 대규모로 특수부를 만들고 미심쩍다 싶으면 일단 영장신청하고 압수와 조사를 일사분란하게 할 수 있는 검찰이.
어째서 2014년 그 해에는 그러지 않았는가.
지금 검찰의 행태를 보며 누가 가장 어이없고 분할까를 생각했다. 조국씨 일가는 당사자니 그렇다쳐도 아이들을 잃고 그 이유도 책임자도 모른 채 가슴을 쳐야했던 세월호 유족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도 만나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던 그 해 여름을 지나고 벌써 1993일이나 지난 지금.
박근혜 탄핵을 벌이던 그 겨울에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꾸 사는게 마땅찮아서라는 변명을 앞세워 아이들을 잊어가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이정도 했으면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기억은 정도를 따질 수 없으며 충분함을 평가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들은 촛불사이로 내려왔다 갔을지도 모른다.
시퍼런 청년이 되어 아직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을 토닥이고 갔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많이 모였던 서초동 뿐 아니라 강남역에도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도 아이들이 노래하며 다녀갔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강력한 검찰이 있었단다 얘들아!
까르르~~아이들이 우스워 죽겠다고 웃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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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9-30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효.. 그러게요...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을 떠올리신 나타샤님의 글을 보며 전 또 한 번 부끄러워지네요~~

나타샤 2019-09-30 23:03   좋아요 1 | URL
부끄러운 시대를 사는 탓미죠..^^
 

기록이 기억을 지배합니다. 기억은 흐릿해지더라도 여러 계절 울며 말하고 울며 적은 이 기록이 우리의 기억을 초롱초롱하게 지켜서 별이 된, 우리 곁에 있어야 할 그들의 삶을 복원해 줄 것입니다. 기록을 곱씹어 읽다 보면 어느 때든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이 우리의 기억 속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달라진 우리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가난한 소작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도, 술을 안 마신 날도, 자식과 아내를 때렸다. 아무리 열심히 소꼴을 베어오고 나무를 해와도 트집이 잡혀 매를 맞아야했다. 그때마다 이모가 그를 ‘아가‘라 부르며 위로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두 아들만큼은 절대로 야단치지 않고 때리지 않고 키우겠노라 결심했고, 그렇게 살았다. 이모처럼, 두 아들을 부를 때면 이름 대신 꼭 ‘아가‘라 했고, 화가 나는 일이 생겨도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아가, 왜 그러냐?‘고 달랬다.

미쳤다는 말이 두뇌가 병들었다는 뜻이라면, 그는 결코 미친 게 아니다. 다만 가슴한쪽이 베어나갔을 뿐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속에 아가가 그대로 살아있다.
는 것뿐, 자신의 ‘아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밀란 쿤데라가 창조한 기억 투쟁‘이라는 말은 이제 보편적인 개념이이 개념이 되었다. 기억이 동물이기 때문이다.
투쟁은 지속적이고 집요해야만 효력을 가진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각은 대체로 생존을 위한 필연적 기술이다. 그러니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스러든 슬픔과 고통은 빠르게 잊혀져야 할 운명이다. 그러지 않고는 인간의 행복이 보기능하기에,
기억 투쟁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거슬러 오르는 ‘불편한 진실‘에의 고단한 여정일 수 밖에 없다.


세계가 무너지고 돈과 권력이 사람을 배반하는 세상일수록 꿈꾸어야 하고,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동화는 결코 낭만이 아니다. 잔혹한 삶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 모든 동화의 시작은 거기에 있었다. 약전 또한 그 길 한복판에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에는 416, 304 같은 숫자와 세월호라는 배 이름만 남을 테니까.
그러나 참사의 기억은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야만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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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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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 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공식적으로 말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말해지는 방식이 시민들로 하여금 일종의 기억상실에 빠져들도록 부추긴다. 경험이 지워지고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지평선도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불확실한 현재에만살게 하려는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망각 상태의 시민으로축소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이 설명했듯이 시간이 서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으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이 선은 전례가 없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일시적 탐욕에 의해 절단되고 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언어로 칭찬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일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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