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생각이 분명해짐에 따라 내 안에서 올라오는 조용하고 차분한 그 무엇에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잔인성과 처음으로 조우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잔인함이 내 안에서 뭉치는 것을, 계획을 세워감에 따라 점점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침대 위에 길게 누워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 분노의 정도가 그 원인에 비해 어찌나 과도했던지. 그날 오후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화가 났음에도 문이 밖에서 잠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두세 차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하다가 문이 열리지 않아 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프랑스어에서 ‘페르 라무르‘ 라는 말은 각 단어의 의미에서 떨어져 나오며, 지그히 음성언어적인, 그 자체의 매력을 띤다. 페르‘라는 물리적이고실증적인 단어가 ‘아무르‘라는 단어의 시적 추상성과 결합되어 나를 매혹했다.


2. faire l‘amour, ‘성행위를 하다‘ 라는 뜻의 관용구, ‘페르(faire)‘는 ‘하다‘, ‘아무르 (amour)‘는 ‘사랑‘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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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속에서,
하는 충실한 두 시간의 공부, 침묵 속의 노력, 잉크와 종이 냄새. 시월의 시험 합격, 아버지의 놀란 듯한 웃음소리, 안의 칭찬, 학사 학위. 나는 안처럼 이지적이고 교양 있고, 조금은 도도한 여자가 될 것이다. 내게도 어쩌면 지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존재를 간파하고 찾아내고 백일하에 드러낸 다음 명중시키는 즐거움, 과녁으로 삼을 누군가를 찾아헤맸고, 발견하자마자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즉각 방아쇠를 당겼다. 명중! 내가 모르던 경험이었다. 나는 언제나지나치게 충동적이었다. 그동안 내가 혹시 어떤 존재에게 영향을준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계획이 아니라 우연 덕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의 반사 반응이 지닌 멋진 메커니즘, 말의 힘 같은 것들을 일순간 엿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연극을 시작했다. 해야겠다는 의지에서라기 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려 무심하게. 때때로 내가 그 일을 증오와 격렬한 감정에서 의도적으로 한 거라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이라고생각한다. 그랬다면 게으름이나 태양, 시릴의 키스 때문이었다는핑계를 대기보다는 적어도 나 자신을 확실하게 비난할 수 있었을테니까.

안이 내 머리카락을, 이어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나면서 몸 아래에서 모래가 빠져나갈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완패당하고 싶다는 욕망, 애정을 향한갈망이 엄습했다. 분노든 욕망이든 어떤 감정이 나를 그 정도로 동요시킨 적이 없었다. 이쯤에서 연극을 그만두고 요즘 내 삶을 털어놓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녀의 손에 나를 맡기자. 그렇게 강하고빠르게 무력감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마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는 내 한쪽 팔을 붙잡더니 웃으면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몸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는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가 즉각 다시 나를 품에 안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생각했다.
이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었어. 어차피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고. 그것은 사랑의 원무였다. 두려움이 욕망에, 부드러움에, 이어 격한 감정에 손을 내어주더니 지독한 통증에 이어 찬란한 쾌감이 찾아왔 다. 첫날부터 바로 쾌감을 느끼다니 나는 운이 좋았다 ㅡ 시릴에게는 내게 필요한 부드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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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의 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그매번 그것은 찢어짐,
매번 그것은 죽음.
우리는 언제나 싸웠다.
싸움을 결심한 사람은
죽음을 맛보고,
핏속에 갖고 다닌다.
더이상 증오하지 않는
착한 적들처럼
우리는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고통을 갖고 있고,

(그 당시 비겁한 우리는)

그 당시 비겁한 우리는
속삭이는 저녁을
사랑했고, 집들,
강변의 오솔길들,
그곳의 빨갛고
더러운 불빛, 감미롭고
말없는 고통을 사랑했고,
살아 있는 사슬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침묵했지만, 가슴은
피로 튀어올랐고,
더이상 달콤함이 없었고,
강변의 오솔길에서
방황하지도 않았고,
더이상 하인이 아닌
우리는 홀로 살 줄 알았다.

아침이면 당신은 언제나 돌아온다.



새벽의 여명은
텅 빈 거리들 끝에서
당신의 입으로 호흡한다.
당신의 눈은 회색빛,
어두운 언덕 위
새벽의 달콤한 이슬방울.
당신의 걸음과 당신의 숨결은
새벽의 바람처럼
집들을 뒤덮는다.
도시는 진율하고,
돌들은 냄새를 풍긴다-
당신은 삶, 깨어남.

새벽의 빛 속에
사라진 별.
산들바람의 서걱거림,
따스함, 호흡-
밤은 끝났다.

당신은 빛, 당신은 아침.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죽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도 자지 않고 귀머거리처럼
우리와 함께 있다. 오래된 후회나
불합리한 악습처럼, 당신의 눈은
공허한 말, 소리 없는 함성,
침묵이 될 것이다.
당신 혼자 거울을 향해
몸을 숙일 때 매일 아침 당신은
그것들을 본다. 오, 사랑스런 희망이여,
그날 우리도 알게 되겠지.
당신은 삶이, 당신이 죽음이라는 것을.

당신의 가벼운 걸음은
고통을 다시 열었다.
초라한 하늘 아래
땅은 차가웠고,
무감각한 꿈속에
갇혀 움직이지 않았다.
깊은 가슴 속에서
추위도 달콤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희망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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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무덤들 위에, 언덕에, 낙엽과 진흙으로
누런 땅바닥에. 하지만 흙냄새 위에도,
물을 빨아들이던 꽃들의 고갈된 악취에도,
꽃들, 별장들 사이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다만 언덕의 다른 쪽에서
바람결에 포도밭의 냄새가 실려 왔다.

우리가 가진 덕성은 이것뿐이다. 매일매일
삶을 시작하면서—땅 앞에서, 침묵하는
하늘 아래에서 깨어남을 기다리는 것.
누군가는 놀란다, 새벽은 힘든 노고이기 때문에
깨어나고 깨어나는 동안 노동은 완성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전율 속에서 미래의 노동에
몸을 던지고 다시 흙을 깨우기 위해 산다.
때로는 깨어나고, 또다시 우리와 함께 침묵한다.

다른 때에는 새벽에 깨어남이
날카로운 고통, 빛의 후려침이었지만,
해방이 되기도 했다. 흙의 인색한 말은
잠깐 동안 행복했고, 죽는다는 것은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금 기다리는 육체는 
너무 많은 깨어남의 찌꺼기,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굳어버린 입술은 그런 말조차 하지 않는다.

노인은 새벽부터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젊어진 세상에서 한때 젊었던 그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노인의 헐벗고 야윈 육체가 어떤지,
청년과 여자가 지닌 육체의 활력을 잘 아는 그가
그걸 바라보면서 어떻게 아침을 보내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청년의 눈은
노인을 보지 않고 끊임없이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그들은 노인이 모르는 삶을 지니고 있다.

(당신도 사랑이다)


당신도 사랑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도
피와 흙으로 만들어졌다. 당신은
집의 문에서 멀어지지 못하는
사람처럼 걷는다.
기다리고 보지 않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당신은
괴로워하고 침묵하는 흙.
당신은 놀라고 피곤하고,
당신은 말한다- 기다리며
걷는다. 사랑은
당신의 피-그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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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내나이와 경험을 고려할 때 사랑은 충격적이기보다는 눈부신것이어야 했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보석 같은 경구를 일부러 읊조리고 했다. "과오란 현대 사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생한 색깔이다" 나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이 말을 금언으로 삼았다. 경험으 통해 깨달은 것 이상으로 그 말을 확신했던 것 같다. 나는 내 삶이 이 구절로 대변되고 이 구절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그구절로부터 도착적인 채색 판화처럼 솟아오를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삶에는 작동하지 않는 시간, 논리와 맥락이 닿지 않는 때, 일상적인 좋은 감정 같은 것들이 있음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저속하고 부도덕한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넌 사랑을 너무 단순한 걸로 생각해, 사람이란 하니하니 동떨어진 감각의 연속이 아니란다...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한 사랑은 모두 그런 것이 아니 있던가,
어떤 얼굴, 어떤 몸짓, 어떤 입맞춤 앞에서 문득 솟구친 감정..일관된 맥락 없는, 무르익은 순간들이 내가 사랑에 대해 가진 기억의전부였다.
"그건 다른 거야. 지속적인 애정, 다정함, 그리움이 있지....
 지금 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안이 말했다.

나 자신을 혐오하는것. 폭음의 밤을 보낸 대가로 움푹 팬 늑대 같은 내 얼굴을 증오하는 것은 재미있었다. 나는 폭음이라는 단어를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되뇌면서 거울 속의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순간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이지 대단한 폭음의 밤이었다. 

나는 스스로와 화해하지 못한 채 자기 성찰의 온갖 고통을 겪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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