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속에서,
하는 충실한 두 시간의 공부, 침묵 속의 노력, 잉크와 종이 냄새. 시월의 시험 합격, 아버지의 놀란 듯한 웃음소리, 안의 칭찬, 학사 학위. 나는 안처럼 이지적이고 교양 있고, 조금은 도도한 여자가 될 것이다. 내게도 어쩌면 지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존재를 간파하고 찾아내고 백일하에 드러낸 다음 명중시키는 즐거움, 과녁으로 삼을 누군가를 찾아헤맸고, 발견하자마자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즉각 방아쇠를 당겼다. 명중! 내가 모르던 경험이었다. 나는 언제나지나치게 충동적이었다. 그동안 내가 혹시 어떤 존재에게 영향을준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계획이 아니라 우연 덕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의 반사 반응이 지닌 멋진 메커니즘, 말의 힘 같은 것들을 일순간 엿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연극을 시작했다. 해야겠다는 의지에서라기 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려 무심하게. 때때로 내가 그 일을 증오와 격렬한 감정에서 의도적으로 한 거라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이라고생각한다. 그랬다면 게으름이나 태양, 시릴의 키스 때문이었다는핑계를 대기보다는 적어도 나 자신을 확실하게 비난할 수 있었을테니까.

안이 내 머리카락을, 이어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나면서 몸 아래에서 모래가 빠져나갈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완패당하고 싶다는 욕망, 애정을 향한갈망이 엄습했다. 분노든 욕망이든 어떤 감정이 나를 그 정도로 동요시킨 적이 없었다. 이쯤에서 연극을 그만두고 요즘 내 삶을 털어놓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녀의 손에 나를 맡기자. 그렇게 강하고빠르게 무력감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마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는 내 한쪽 팔을 붙잡더니 웃으면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몸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는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가 즉각 다시 나를 품에 안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생각했다.
이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었어. 어차피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고. 그것은 사랑의 원무였다. 두려움이 욕망에, 부드러움에, 이어 격한 감정에 손을 내어주더니 지독한 통증에 이어 찬란한 쾌감이 찾아왔 다. 첫날부터 바로 쾌감을 느끼다니 나는 운이 좋았다 ㅡ 시릴에게는 내게 필요한 부드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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