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으로서의 책

우리가 알고 있는 묵독이 자리 잡으려면 읽기의 맥락과 글의 형식이 달라져야 했다. 읽기는 더 사적인 경험이 되어야 했는데, 이는 읽고 쓰기가 엘리트와 수도원 공동체 너머로 확장되어야 했다는 뜻이다. 글도 더 읽기 쉬워져야 했다. 중얼거리며읽는 관행은 6세기까지도 통용되었는데, 이 관행이 사라지려면구두법이 표준화되고 띄어쓰기가 도입되어야 했다. 그런 뒤에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읽기를 위해 설계된 도서관이 발전하여이 새로운 읽기 형태인 묵독을 뒷받침했다.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코덱스는 서로 멀리 떨어진 사상가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데 필수적이었으며,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두려워한 바로 그 비동기적 사유 발달이 가능해졌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연결된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듯 글쓰기는 인간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징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쇄‘다. 코덱스가 수도원 담장을 넘어서자 저자의 개념도 조금씩 달라졌다. 수도원 필경사들은 (자신이 책에 담는) 사상의 창작자가 아니라문화적 지식을 글로 옮기는 직공 취급을 받았다. 대학이 떠오르고 라틴 그리스 문학과 수사학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가 활발해지면서 저자를 창작자로 보는 관점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기계화와 더불어 찾아온 이 변화는 책을 사물이 아니라내용으로 재해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책의 형식은 그「안에 담긴 정보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이용한 기술 중 상당수는 그가 인쇄소를 차릴 때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이 기술들을 조합하고 완성하고 자신의 꿈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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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토는 결이 가로인 안쪽이자 글을 쓰는 면이며 베르소 폴리움‘ (verso folium)은 뒤집은 잎이라는 뜻으로,
두루마리 뒷면을 가리킨다. 코덱스의 펼침면 에서는 언제나 왼쪽이 베르소, 오른쪽이 렉토다.

 책이 사치재이던 시절에는 채프먼(chapman)이라는 도붓장수가 장터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소책자를 팔았다. 이것이 챕북(chapbook)으로, 분량은 4~24페이지이며 오늘날에도 얇고 값싼 시집을 인쇄하는 소규모 출판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하지만 코덱스가 보급된 가장 큰 이유는 코덱스에느 없는 특징에 있다. 그것은 두루마리가 히브리어 성서인 토라와 이교도 경전을 기록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이다. 

 읽기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구두 행위였으며 이는 쓰기에도 반영되었다. 그리스의 두루마리본은 단어 사이에 공백이없을뿐더러 격 변화도 하지 않고 구두점은 전혀 쓰지 않는 스크립티오 콘티누아(scriptio continua, 붙여쓰기) 방식이었다. 그러니 소리 내어 읽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야 제대로 읽을 수있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글쓰기를 불신했다. 글쓰기라는 기술이 구술 토론의 기예를 망치고 세상과,철학과,시간과,공간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는 스토리텔링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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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로마의 두루마리는 이집트 파피루스와 마찬가지로 단을 나눴는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파기나 (pagina)라고 불렀다. 파기나는 페이지를 일컫는 기본 용어가 되었으며, 정보과학자 보니 맥 말마따나 책의 "인지적 구조를 확립했다.

 공교롭게도 ‘冊‘의 모양은종이의 섬유가 놓인 방향을 뜻하는 결‘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죽간의 폭이 좁은 것은 것은 글자를 쓰는 방향 뿐 아니라 글자 자체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좁은 죽간에 쉽게 쓸 수 있도록 한자는 가로로 눕지 않고 세로로 선 형태를 취했다. 류궈중은 말과 돼지를 뜻하는 글자를 예로 드는데, 뜻밖에도 둘 다 네다리로 디디지 않고 앞다리를 든 채 뒷다리로 서 있다.사람과 짐승을 가리키는 글자들은 편하게 서 있을 뿐 아니라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읽고 쓰는 방향과 같다. 

 그녀의 「창카니 키푸 (2012)는 서른두 점이 제작되었는데, 이 매듭책은 (작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안데스의 구전 우주와 서구의 인쇄 세계라는 두 문화와 세계관의 충돌에 대한 은유다. 

공교롭게도 ‘역할‘을 뜻하는 영어 단어 롤(role)의 어원은 르네상스 시대에 배역을 적어둔 두루마리 (roll)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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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로서의 책

 책의 발전은 "사회의 증가 일로에 있는 정보 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일련의 단속 평형이다.

 쐐기 모양을 조합하여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그림문자 시대가 저물고 음절문자 시대가 열렸다. 형태로 단어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기호로소리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정보 전달에 필요한 글자의 수도 줄었다. 언어는 그림을 물체나 개념과 일대일로 대응시기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는 사물로부터 추상화되었다. 

콜로폰은 마무리 획을 일컫는 그리스어로, 마지막 장에 문서의 제작 관련 정보를 펜과 잉크로 적음으로써 책을 끝맺는다는뜻이다. 잉키피트는 여기에서 시작한다를 일컫는 라틴어로, 첫마디 어구를 책 제목으로 삼는 필경사 전통에서 유래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코덱스 형태에 하도익숙해져서 우리가 기대하는 독서 경험에 어긋나는 것은 책이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고 말없이 눈으로 글을 훑고 표지에 제목과 저자 이름을 쓰는 것은 모두 학습된 행동일 뿐이다

양피지 두루마리를 일컫는 라틴어 볼루멘(volumen)은권수를 가리키는 책 용어인 ‘볼륨(volume)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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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으레 책을하나의 사물로 여긴다. 그것은 코덱스(codex)로, 나무줄기를일컫는 라틴어에서 왔으며 이름에 걸맞게 그 이미지는 서구정신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다.

이 책의 목표는 책이라는 기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논쟁, 쟁점, 개념의 기본적 윤곽을 독자에게 제시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책에 매혹되면서도그 미래를 우려하는 지금의 역사적 순간을 규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덜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읽을 뿐이다. 인간이 언어와, 또한 글과 교류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휴대용 독서 수단이 필요하다. 책이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변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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