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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1.
불안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랄지
불안의 책을 떠올릴 법한 제목이다. 레나타 살레츨의 시각에서 분석되고 이야기되는 불안은 어떤 색채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장마가 지고 홍수가 일고 강이
범람하거나,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고, 역병이 들고 하는 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살았던, 그래서 인간이 가늠할 수 없고 가늠해서도
안된다고 믿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불안과 날씨며 현상들을 예측할 수 있고 데이터로 분석할 수 있는 현재의 사람들이 갖는 불안은 어떤 밀도의
차이를 가질까?를 잠시 생각해본다.
그 밀도는 아마 현재의 것이 더
높지 않을까 싶어진다.
다양한 창구를 통해, 여러
분석된 자료들을 통해 진단이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한데도 더더욱 불안할 수 밖에 없는, 불안과 우울을 한없이 넘나드는 시지프스의 고행같은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가 다양화되고 기술적 발전을
이루어가고 sns를 통한 다각적 소통과 확인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감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 원인.
<주체에게 가장 불안을 유발하는
것은 여전히 주체와 대타자(타인과 사회의 상징적 관계망)의 관계라고 말하고자 한다. 대타자는 주체에게 늘 "불안을 유발하는데" 그것은 주체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특히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한편으로 주체는 여전히
대타자의 욕망에 대해 질문(즉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생각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제약들과 관계없이 자기 삶에 관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p266)>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기반을
둔 이 내용에서 다양하게 노출된 주체는 대타자에게 평가되는 자신을 염려함과 동시에 스스로 선택에 책임지는 자세를 요구받게
된다
쉽게 말해서, 멋진 사람으로
보이며 성공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자의적인 선택이겠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강요되어지는 중심가치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학습결과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대목에서 살레츨의 전작인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떠올린다.
<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p209~211)>
개인의
선택의 문제까지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게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선택의 주체가 되어 선택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결과적인 상실이
되어질 때 불안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주체에게 불안의 근원은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결여의 부재, 즉 결여라고 하는 곳에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p53)>이라고
규정한다.
주체와
대타자의 관계의 대립.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불안들을 살레츨은 영화,문학,관계, 속에서 하나씩 들추어본다.
#2.
다양한
이야기 중 하나에 주목한다.
<욕망의
법칙> 도착증자의 덫. 나름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였다. 독특한 관계와 이질적인 애정구도에 몰입할 수 있었던건, 그들이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모습들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욕망을 빗대어 본 경험. 상대에게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대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불안들. 확인의 과정과는 다르게 내가 관계속에서 원하는 것이 분명해질 즈음에 상대와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을 추구하던 모습에서 신경증의 조급함과 대타자의 의지가 배제되는 도착적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단순하지 않다.

게이인
파블로, 파블로가 사랑하는 후안, 파블로를 사랑하는 안토니오, 여성으로 성전환한 파블로의 누이 티나. 질투로 후안을 살해하는 안토니오, 누명을
쓰는 파블로, 그 사이 티나를 사랑하는 안토니오..
복잡하고
극단적으로 얽혀있는 이 관계에서 도착과 신경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파블로는 후안에게 편지를 한다. 사인을 해서 반송하라고 한다. 어차피 후안은 파블로의 편지를 읽지 않으니 말이다.
파블로는
그 안에 자신이 후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 후안의 사인이 있는 편지는 이내 후안의 편지가 되어 파블로는 행복해한다.
여기서
파블로는 대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혹은 대타자에게 어떤 대상인지 묻지 않는다. 따라서 파블로는 신경증이 아닌 도착증에 가깝다.
신경증자는
끊임없이 욕망에 대해 묻지만 도착증자는 그 답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결핍이며 피로한 행위일 수도 있다.
라캉의
의견을 들어본다.
<사랑은,
결국 우리는 대타자 안에 있는,우리를 매혹하는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또 동시에 대타자도 자신 안에 있는 자신 이상의 대상, 즉
누군가를 자신에게 매혹시키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과 연관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랑의 필수 요소인 이 불안을 덜고자 애쓰는 것
같다. (p173)>
#3.
불안은
어쩌면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회전하는 바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욕망하는 것과 결여된 것이 존재하는
것이 밀고 당기며 동력이 되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주체가
불안을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의 안녕을 막는 무엇이기보다는 ,오히려 주체가 개인의 특징인 결여 및 사회의 특징인 적대와 특정한 방식으로 씨름하는
징후로 간주해야 한다. (p271)>
어쩌면
불안해한다는 것은, 결핍을 채우려는 자신의 의미와 관계의 건강성을 회복해보려는 기대와 욕망의 발현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발생하는 에너지가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는 부싯돌이 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불안해하지 않는 완벽한 사회란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단절된 상태. 개별화된 진공상태이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런 순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안이 창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불안은 조절, 통제 되어지며 제 기능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조절과 통제를 하고 있는가, 혹은 무엇이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지금으로선
대중매체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 대중매체는 불안이 주체의 안녕에 궁극적인 장애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며, 따라서 누구든 불안은
주체가 세상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것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특히 타인과의 제대로 된 관계 맺음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조건임을 당연시 하게
된다.(p261)>
그럼으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며 무차별적 정보들을 쏟아낸다. 불안에 대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시도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해소되거나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과정에 국가와 권력이 개입하게 된다면?
국민의 불안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그러한 대의로 다양한 규제와 억압, 주체의지의 침탈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마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인양..
이는 대부분 분열과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서로 다른것을 인정하기 보다 이상한것으로 불안을
야기하는 것으로 적대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은 결여가 아니라 결여의 사라짐에서 온다. 주체에게 결여는 실체적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이므로 빈 곳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 빈 공간에서 무언가, 곧 실재가 등장할 때 불안이 발생한다. 불안은 결여의 결여이다. 요컨대
정신분석학에서 불안은 욕망하는 주체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피할 수 없는 근원적 정서이다. 프로이트나 라캉에게 불안은 병리적 현상인 동시에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본래적 현상이기도 하다. (p278)>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쉽게 이해를 할 수도 있다. 얼마전 메르스가 전국을 휘감았다. 보건당국이 있으니
대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의료에서만큼은 선진국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의료기관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염병은 점점 확산이 되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기대의 빈자리를 뚫고 나온 거대민영의료의 실체는 실로 두려운 것이었다.권력의 비호아래 공개되지 않던 감염병원의 존재는 불안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기대하고 있던 것들의 결여. 그리고 뒤이어 나온 조치들은 불신과 불신을 낳으며 불안을 부채질한다. 여지없이 등장하는 미디어들은
불안해하지 말라며 호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안은 그렇게 사그러드는 것이 아니다.
욕망할 수 있는 결여가 필요하고 그것이 잡히지 않아도 존재하는 그 상태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희망이거나 목표라해도 좋겠다.
불안해 하자. 불안함을 겁내지 말자.
불안하게 하는 것이 거기 있을 때, 결여됨이 거기 있을 때, 변화의 동력은 구르기 시작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