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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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안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랄지 불안의 책을 떠올릴 법한 제목이다. 레나타 살레츨의 시각에서 분석되고 이야기되는 불안은 어떤 색채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장마가 지고 홍수가 일고 강이 범람하거나,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고, 역병이 들고 하는 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살았던, 그래서 인간이 가늠할 수 없고 가늠해서도 안된다고 믿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불안과 날씨며 현상들을 예측할 수 있고 데이터로 분석할 수 있는 현재의 사람들이 갖는 불안은 어떤 밀도의 차이를 가질까?를 잠시 생각해본다.

그 밀도는 아마 현재의 것이 더 높지 않을까 싶어진다.

다양한 창구를 통해, 여러 분석된 자료들을 통해 진단이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한데도 더더욱 불안할 수 밖에 없는, 불안과 우울을 한없이 넘나드는 시지프스의 고행같은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가 다양화되고 기술적 발전을 이루어가고 sns를 통한 다각적 소통과 확인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감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 원인.

 

<주체에게 가장 불안을 유발하는 것은 여전히 주체와 대타자(타인과 사회의 상징적 관계망)의 관계라고 말하고자 한다. 대타자는 주체에게 늘 "불안을 유발하는데" 그것은 주체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특히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한편으로 주체는 여전히 대타자의 욕망에 대해 질문(즉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생각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제약들과 관계없이 자기 삶에 관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p266)>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기반을 둔 이 내용에서 다양하게 노출된 주체는 대타자에게 평가되는 자신을 염려함과 동시에 스스로 선택에 책임지는 자세를 요구받게 된다

쉽게 말해서, 멋진 사람으로 보이며 성공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자의적인 선택이겠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강요되어지는 중심가치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학습결과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대목에서 살레츨의 전작인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떠올린다.

<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p209~211)>

개인의 선택의 문제까지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게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선택의 주체가 되어 선택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결과적인 상실이 되어질 때 불안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주체에게 불안의 근원은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결여의 부재, 즉 결여라고 하는 곳에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p53)>이라고 규정한다.​

주체와 대타자의 관계의 대립.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불안들을 살레츨은 영화,문학,관계, 속에서 하나씩 들추어본다.

#2.​

다양한 이야기 중 하나에 주목한다.

<욕망의 법칙> 도착증자의 덫.​ 나름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였다. 독특한 관계와 이질적인 애정구도에 몰입할 수 있었던건, 그들이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모습들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욕망을 빗대어 본 경험. 상대에게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대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불안들. 확인의 과정과는 다르게 내가 관계속에서 원하는 것이 분명해질 즈음에 상대와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을 추구하던 모습에서 신경증의 조급함과 대타자의 의지가 배제되는 도착적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단순하지 않다.​

​게이인 파블로, 파블로가 사랑하는 후안, 파블로를 사랑하는 안토니오, 여성으로 성전환한 파블로의 누이 티나. 질투로 후안을 살해하는 안토니오, 누명을 쓰는 파블로, 그 사이 티나를 사랑하는 안토니오..

복잡하고 극단적으로 얽혀있는 이 관계에서 도착과 신경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파블로는 후안에게 편지를 한다. 사인을 해서 반송하라고 한다. ​어차피 후안은 파블로의 편지를 읽지 않으니 말이다.

파블로는 그 안에 자신이 후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 후안의 사인이 있는 편지는 이내 후안의 편지가 되어 파블로는 행복해한다.

여기서 파블로는 대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혹은 대타자에게 어떤 대상인지 묻지 않는다. 따라서 파블로는 신경증이 아닌 도착증에 가깝다.

신경증자는 끊임없이 욕망에 대해 묻지만 도착증자는 그 답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결핍이며 피로한 행위일 수도 있다.

라캉의 의견을 들어본다.

<사랑은, 결국 우리는 대타자 안에 있는,우리를 매혹하는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또 동시에 대타자도 자신 안에 있는 자신 이상의 대상, 즉 누군가를 자신에게 매혹시키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과 연관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랑의 필수 요소인 이 불안을 덜고자 애쓰는 것 같다. (p173)>​

#3.​

불안은 어쩌면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회전하는 바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욕망하는 것과 결여된 것이 존재하는 것이 밀고 당기며 동력이 되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주체가 불안을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의 안녕을 막는 무엇이기보다는 ,오히려 주체가 개인의 특징인 결여 및 사회의 특징인 적대와 특정한 방식으로 씨름하는 징후로 간주해야 한다. (p271)​>

어쩌면 불안해한다는 것은, ​결핍을 채우려는 자신의 의미와 관계의 건강성을 회복해보려는 기대와 욕망의 발현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발생하는 에너지가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는 부싯돌이 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불안해하지 않는 완벽한 사회란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단절된 상태. 개별화된 진공상태이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런 순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안이 창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불안은 조절, 통제 되어지며 제 기능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조절과 통제를 하고 있는가, 혹은 무엇이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지금으로선 대중매체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 대중매체는 불안이 주체의 안녕에 궁극적인 장애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며, 따라서 누구든 불안은 주체가 세상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것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특히 타인과의 제대로 된 관계 맺음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조건임을 당연시 하게 된다.(p261)>

​그럼으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며 무차별적 정보들을 쏟아낸다. 불안에 대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시도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해소되거나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과정에 국가와 권력이 개입하게 된다면?

국민의 불안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그러한 대의로 다양한 규제와 억압, 주체의지의 침탈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마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인양..

이는 대부분 분열과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서로 다른것을 인정하기 보다 이상한것으로 불안을 야기하는 것으로 적대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은 결여가 아니라 결여의 사라짐에서 온다. 주체에게 결여는 실체적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이므로 빈 곳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 빈 공간에서 무언가, 곧 실재가 등장할 때 불안이 발생한다. 불안은 결여의 결여이다. 요컨대 정신분석학에서 불안은 욕망하는 주체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피할 수 없는 근원적 정서이다. 프로이트나 라캉에게 불안은 병리적 현상인 동시에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본래적 현상이기도 하다. (p278)>​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쉽게 이해를 할 수도 있다. 얼마전 메르스가 전국을 휘감았다. 보건당국이 있으니 대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의료에서만큼은 선진국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의료기관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염병은 점점 확산이 되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기대의 빈자리를 뚫고 나온 거대민영의료의 실체는 실로 두려운 것이었다.권력의 비호아래 공개되지 않던 감염병원의 존재는 불안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기대하고 있던 것들의 결여. 그리고 뒤이어 나온 조치들은 불신과 불신을 낳으며 불안을 부채질한다. 여지없이 등장하는 미디어들은 불안해하지 말라며 호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안은 그렇게 사그러드는 것이 아니다.

욕망할 수 있는 결여가 필요하고 그것이 잡히지 않아도 존재하는 그 상태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희망이거나 목표라해도 좋겠다.

 

불안해 하자. 불안함을 겁내지 말자.

불안하게 하는 것이 거기 있을 때, 결여됨이 거기 있을 때, 변화의 동력은 구르기 시작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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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픈 날들이 연속이었다. 뭔가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사방에서 드글드글 끓어대는 분노와 알 수 없는 분풀이를 보고 있자니 피로하기까지 했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겠고, 어떤 방향인지도 알겠고,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겠는데..저마다 와글거리니 머리가 아팠다. 그말이 그말이고..그소리가 그소린데..내 말이 더 정확하다 소리를 높이는..그러다보니 이런일도 있었대. 저런일도 있었대..따위의 가십들이 첨가되고 급기야 "한국문학" 전체가 조롱당하는 요상한 지경에 이르렀다.

욕지기가 났다.

표절이고 나발이고 권력의 카르텔이고 뭐고 간에 다 필요없고..조롱당하는 '문학'이 가여워 죽겠는거다

제 영혼을 쪼개가며 글을 쓰는 이들이 가엾어서 죽겠는거다.

제값을 받지 못하는 순한 글들이 안타까워 죽겠는거다.

 

제안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비공개좌담이란다. 때려치워라.

문학권력이라는 것이 있다면..으로 시작되는 건방짐은 "함 해보자. 너,너,너,너..나와 봐..우린 꿀릴꺼 없으니까 문닫고 우리 꼬봉들 다 앉혀두고 허심탄회하게 풀어보자" 하는 오만함에 더함도 덜함도 아니다.

 

한 번에 휘리릭 바뀌어버릴 것 같으면 "권력"이라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고 "카르텔"이라 표현하지 않았을것이다.

오랜시간에 걸쳐 그 근본부터 물어야 할 일이다. 그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신예작가들을 포함한 작가들이 버텨주어야 할터인데..그 힘의 일부,혹은 대다수를 독자들이 보태야하지 않겠나?

어쩜 이 판을 깨지 못하는 이유는..독자들의 절대부족에 기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답답한것이다.

 

  답답해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친구가 보내준 책이다.

근대를 날짜로 풀어낸 안목이 대단하다. 지루하지 않고 쓸데없이 권위적이지 않으며 사건의 나열로 그치는게 아니라 그 배경과 전개, 그 속에서 국민들의 역할 혹은 희생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낸다.

 말 그대로 역사인문학이라 할 만하다.

 

 

 

 

 

 

 

 

 

  SNS에서 보게 된 책.

 전태일의 누이 전순옥이 창신동과 성수동 일대의 장인들을 만나 쓴 인터뷰형식의 책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그들. 때론 산업역군이라는 허명을 덮어쓰고 죽기살기로 일했지만 그 결과는 공유하거나 정당하게 분배받지 못한 이들이지만. 아직도 자신의 자리에서 미싱과 가죽을 다듬으며 기술을 키워가는 이들이다.

기술이 있어서 살아낼 수 있었던 사람들. 그것은 손기술이라기보다 삶의 기술이지 않았겠나 싶다.

눈물을 깁는 법..무시당함을 무두질하는 법..이런..

 

 

 

 

 

아!

 

  오츠와 작가들이 쓴 동화집이라고 무려 40인. 그 목록을 보니..존 업다이크도 있다. 우왕..

 얼마전 전량회수된 잔혹동시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삶은 잔혹하다. 그 삶을 기록하는 손들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어졌고..삶은 이어지며 잔혹함은 삶의 일부분이 되어진다. 그 누구도 조롱을 받아 마땅할 사람은 없으며 그 누구도 함부로 조롱의 입을 열어서도 안된다.

희망은 절망의 빈틈에 강하게 뿌리내린 씨앗에서 자라지 않겠는가.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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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의 세계사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마녀사냥들
정찬일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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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를 말 할 때, 특히나 인간의 역사를 말할 때 다양한 수식어들이 달라붙곤 한다.

문명의 세계사, 진보의 세계사, 계급투쟁의 역사, 권력의 역사, 기타등등

그만큼 역사라는 것은 다양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의 기록같은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보느냐에 따라서 공이 되기도 과가 되기도 하는 그런..

이 다양한 역사의 축은 무엇일까? 아마도 권력투쟁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사회와 걔층의 형성, 인간의 사회구조의 변화는 빠르고 단호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사회구조의 변화 속에 기폭제 역할을 하거나, 혹은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자행된 사건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지..

비이성의 세계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마녀사냥들. 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들여다 볼 만 하다.

 

#2.

 

1. 소크라테스 재판 - 마녀를 자처한 철학자

2.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인 박해 - 편견 때문에 누명을 쓴 사람들

3. 병자호란과 환향녀 - 살아 돌아온 죄

4. 중세 마녀사냥 -사회위기에서 탄생한 마녀들

5. 드레퓌스 사건 -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6.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조작된 유언비어가 낳은 집단 광기

7. 매카시즘 - 빨갱이 사냥에 눈먼 미국

8. 홍위병과 문화대혁명 - 권력자의 사냥개가 된 십대들

9. 캄보디아 킬링필드 - 야수가 된 이념의 노예들

10. 르완다 대학살 -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최악의 비극

 

열 개의 사건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희생되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리되어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며 여러 이야기에 인용되는 드레퓌스 사건과 매카시즘. 이 대목에 가장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가까운 과거에 우리는 이와 유사한 사건들을 실제로 보아왔으니 말이다.

사회가 혼란에 빠질 때 위정자들이 내미는 카드는 권력유지와 연관되어질 수 밖에 없다. 여론을 하나로 모아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리는 계략.

이성적으로 따지고 드는 것이 반역이 되어질만큼 광기와 선동으로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야만이 자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의 목표를 제압하고 나면 남는 것은 권력자들의 공고한 기반과 살아남은 자들의 자책과 자기 연민이지 않겠는가.

이런 과정들을 수없이 반복하며 재갈을 물리고 공동의 적을 만드는 과정은 더욱 교묘해지고 잔인해진다.

집단 히스테리.

강제된 彼我관계 속에 두려움은 타겟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선택하고, 점점 커지는 두려움은 분노로 왜곡되어 공동의 적이라 규정되어진 것에 강력한 거부를, 잔인한 댓가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정과 혼란으로 위기에 몰린 위정자가 택하기에 참 좋은 먹잇감이며 관심을 돌려 버리게 하는 좋은 묘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조작되어지는 사건들과 그 사건에 연루되는 희생자들은 시간이 지나 그 누명이 벗겨지기도 하지만, 이미 어디에도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의 소모품이 되어지는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은 이단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근현대에 와서는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발화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정치사회사를 잠시만 들추어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거나 불이익을 당했는지 알 수 있다. 분단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오랜 시간 숨죽여 살아온 습관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승리의 기억보다 패배의 기억, 굴욕과 침탈의 기억이 많은 사람들은 칼자루를 쥔 사람들 편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고..그런 사람들의 움직임을 활용한 이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틀을 들고 무고하거나 말거나 잡아들이고 조작하곤 했다.

수십년이 지나서 무죄가 되고, 석방이 되고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들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 이성을 이야기하고, 본질을 탐구했다.

이론과 기술이 발달하고 좀 더 편리한 세상, 좀 더 발달된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인류가 걸어온 그 길목마다 놓여진 공범의 역사, 비이성의 마녀사냥은 오욕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자행될 마녀사냥은 어쩌면 더 치밀하고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 대상이 사회로부터 점점 타자화되어지는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진행중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공동의 선. 공동의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허무한 메아리이거나 뜬구름같은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정의'라는 것이 힘을 믿고 싶다.

마녀사냥의 광풍에서 이웃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버리고 싶진 않다.

 

가장 가까이..우리는 세월호 가족들을 몰아세우는 광기를 본다.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거라는 신탁을 듣기도 했다.

위기의 시간을 살고 있는 분명한 증거일게다.

 

반복되어지는 역사.

온통 제자리 걸음인것 같은 역사는 그래도 발전중이라고..인간의 정의도 진화중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아직은 이성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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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2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이라면 조봉암 처형과 진보당 해산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이 사건 이외에도 부조리한 마녀사냥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도 정부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면 종북 소리를 듣잖습니까...

나타샤 2015-06-24 22:08   좋아요 0 | URL
많죠 동백림 사건도..장준하 사건도..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이 많은 비극들이 있죠. 규명해야할 숙제가 많다는 의미일텐데..이 과정이 건강하지 못하니 자꾸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지..안타깝습니다.^^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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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애소설

 

여덟개의 단편이 빨간 표지 뒤에 숨어있다.

표지를 찬찬히 뜯어보자니  붉은 이불을 덮어쓴 채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의 이야기. 누구나 한번 쯤은 상상해보거나 기대해 볼만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미친 사랑일 수도, 못된 사랑일 수도, 나쁘거나 아쉬운 사랑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한 여름 해변가에 누군가 차려놓은 화채가 그득한 식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박화채가 들어있는 붉고 둥근 그릇과 참외가 담겨있는 노란 그릇, 갈변이 시작되어버린 사과가 들어앉은 초록 그릇...

화채가 담긴 그릇이라는 공통점과 저마다 담고 있는 맛과 형태가 제각각인 다른점을 품은 달콤하고 시원한 한여름밤의 꿈같은 글들이다.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그녀의 등단작이라는 첫 작품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보다 오래 들여다 보았다.

치과의사의 자위장면을 글로 옮겨 적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 이 어이없는 사건을 들여다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랑이랄지, 애정이랄지, 욕망이랄지 하는 것의 근저에 깔린 것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오래 전, 그러니까 누구나 한번쯤 소설이라는 걸 써보고 싶어했을만큼 낭창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끄적거리던 소품 중에 키스하지 않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물론 아무데도 발표한 적 없고, 발표할만큼의 뭣도 안되는 말 그대로 소설나부랭이였다.

내 글에서 '나'는 수많은 남자들과 밤을 보낸다. 다양한 남자들과 다양한 관계들을 겁없이 갖지만 결정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키스는 하지 않는다.

숨을 섞는것 까지 허락할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그 때 허락하겠노라 나름의 규칙을 품은 것이다.

사랑이란 육체적인 자극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걸 처절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자신의 입술과 혀를 단속하는 머저리같은 여자의 쓸쓸한 연애이야기였다.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쩐지 그의 자위를 글로 써내야하는 그녀.

한시간에 원고지 10매. 그의 마스터베이션이 끝날 때 같이 끝나는 기록.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서로의 빈 눈동자를 확인하는 과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주시하는 것, 그의 동작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보고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싶었다.

암수 한쌍의 몸놀림같은 포르노동영상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들여다보고 묘사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실제로 해보진 않았지만 문득 해볼까? 싶은 생각도 든다)

눈 앞에 실제 이성이 있고 그의 마스터베이션을 본다. 눈도 깜짝이지 않고 글로 써낸다. 이 숨막히는 시간의 흐름과 절정으로 치닫는 남자를 바라보는 것에서 그녀는 어쩌면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지 되묻기도 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사랑의 개별성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의 본질을 마주볼 수 있느냐는 물음과 어쩌면 저마다의 사랑은 저마다의 마스터베이션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었다.

절절한 편지로 나누는 사랑, 상대를 따라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랑, 눈을 뜨고 감는 순간까지 뒤엉키는 사랑, 이 모든 것이 사랑이며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미쳐버려야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사실 오해였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사랑에 미쳐가고 중독되어가고 그렇게 쓸쓸한 마스터베이션을 공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마주하고 글로 적어내는 것. 거기에 연애소설의 씨앗이 있는지도 모를일이지 않는가.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어떤 형태로 활동을 하든, 사랑은 쓸쓸하다. 그래서 사랑을 한다.

내가 쓰다 버린 그 여자는 이제 키스를 나눌 상대를 찾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2. 한은형.

글을 잘 엮어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면 응당 글을 잘 엮어내야하겠다마는..그것이 현실과 ​욕망의 접점일 때, 어려움은 시작된다.

적당히 눙치며 넘어가는 글이 될 수도 있고, 너무나 적나라해서 때로 역겹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태에 뜨아해지기도 한다.

한은형은 적당히 눙치지 않으며 노골적인가 싶지만 사실 은밀하다. 이야기의 중간중간 고임돌처럼 괴어두는 농담같은 이야기가 적절한 환기, 혹은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배치와 순서에 능하구나. 먼저 나올 이야기와 나중 나올 이야기의 짜임이 억지스럽지 않게 연결되어진다. 심지어 서로 다른 작품 사이에 나온 이야기가 마치 하나였던 듯 주거니 받거니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애정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뒷표지의 말을 오래 들여다 보았다. 정말 그런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갖는 함의가 있을까? 말 그대로 세계의 움직임과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일까? 애정을 품는 순간 세계 밖으로 떨어져 나와 그 각박함과 파렴치함을 명확하게 보지 않게 된다는 말일까?

어쨌거나 상관없다. 기대야 할 무엇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무기이거나 욕심이 아닌 애정이라면 손해본들 아깝지만은 않을것도 같다.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도 저마다의 세계를 세우고 부수기에도 바쁘지 않겠는가..

​이 연애소설은..

어쩌면 끈적한 한여름의 사랑을 통과한 서늘한 가을같은 고독을 말하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3.밑줄과 ..

살려내면 뭐할까 싶은 게, 또 같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슬픈 일이지 않습니까? (p33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그래도 환자들은 소리를 질렀고, 그럴 때마다 움츠러 들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고통은 아주 잠시 동안만 정점에 머무른다는 것을. 물은 백도에서 끓지만 곧 식는다는 것을.(p60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개 같군' 이라는 말은 다르게 읽혀야 해. 그걸 '좆같다'라고 생각하는 건 시대착오적이야. 시간이 흘러도 남는 작품은 운이 좋아야 하는거야. 다음 시대 사람들이 어떤 작품들을 좋아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넌 알겠니?"

 기원은 현재의 행복과 평안을 믿는 쪽이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작품보다는 물건이었고, 평가보다는 시장이었다. (p73 그레이하운드의 기원.)-표절사태를 바라보는 한마디처럼도 읽혔다​.

하나씩. 그녀를 위해 가로등을 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싶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시차에 대해 생각한다. 세계지도를 아코디언처럼 접어 태평양을 단축시킨다. 샌프란시스코 만과 한국 사이에 있는 일본도 지도 안으로 접어 넣는다. 나는 그녀와 가까워진다. 나는 그녀의 지팡이를 녹여 먹는다. 먹고 싶다. 먹고 싶었다. 깨물지 않는다. 잃어버린 미래.(p.110 샌프란시스코 사우나)

사막을 운전하는 일은, 비행기를 몰거나 배를 모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어디에도 있었으므로 어디에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운전하는 사람의 손에서 길이 생겨났다. 내가 본 것은 바람이었다. 모래로 변한 바람이었다. 사막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경계를 알 수 없었고, 갈생이었다가 붉어졌다가 갈색이 되었다. (p134 붉은 펠트 모자)​

그녀는 사회의 언어를 벗어나는 게 좋았다. 그 자유로움과 무질서 속에서 그녀는 최소한의 중력만을 느끼며 걸어다녔다. 연인들은 완강한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 액체 같은 세계로 그녀를 데려가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언어는 남아 있었다. (p163. 연인형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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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22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타샤님. 글을 읽다가 한은형을 한윤형으로 읽을 뻔 했습니다. 요즘 한윤형 씨가 SNS과 인터넷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잖아요. ^^;;

나타샤 2015-06-2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처럼 곱게 빻이는 중이라죠? ^^
 

  타부키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바로 플라톤의 위염이었다.

 2년 전, 이 잔망스런 제목에 혹해서 집어든 책은 그 표지 때문인지 자꾸만 타부키의 신간을 기다리게 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아진 책들..

 

 

 

 

 

 

 

 

 

 

 

 

 

 

 

 

표지들이 참 멋지다는 생각을 품는다. 다음 표지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페르난두 페소아를 알림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아닐까? 또한 그 딱부러지는 야무진 문장은 어떻고..이 못난이 아저씨 때문에 훌렁훌렁 읽어제끼던 페소아의 글들을 좀 더 묵직하게 읽게 되었다. 만만치 않은 두께의 불안의 서..

 조금 얄팍한 불안의 글..       

 

 

 

 

 

 

 

 

 

 

 

 

 

이런 타부키에서 페소아로 넘어가는 과정에 좀 더 깊이를 외치게 되는건 어쩜 당연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이 작고 심플한 책은 얼마나 유용하며 합리적이기까지 한지..

 

 

 

 

 

 

 

 

 

 

 

 

 

작가의 얼굴로 이어지는 표지시리즈..맘에 든다. 책에 표지가 무슨 의미겠냐고 따지고 든다면 뭐 딱히 할 말은 없다.

저급 독자는 표지에도 유혹당하곤 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페렉도 시리즈였다.

 

 

 

 

 

 

 

 

 

 

 

 

 

 

 

주말에 타부키의 책을 한권 더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거다.

자랑질을 하고 싶은데 살짝 민망하고 뻘쭘해서 ...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잘 받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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