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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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란 책으로 시작했던 알랭 드 보통과의 만남은 벌써 이 작품으로 다섯번째이다. 처음 그의 작품을 접했을 때 굉장히 어렵고 방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깊이 있는 지식체계에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쫓아갔었던 한두번의 경험(?)이 쌓이고 나니 이제 제법 그의 문체와 논리에 익숙해졌다. 사실 이 책 <공항에서의 일주일을>은 그의 작품 중에 가장 가볍게 읽혔다. 알랭 드 보통이 얼마나 공항에 대해 애틋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그의 전작 <동물원에 가기>나 <여행의 기술>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우울할 때면 공항에 가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는 그였다. 

난 우울할 때 단순히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해소될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저 비행기에 타고 내릴 사람들이 부러워서 마음이 더욱 공허해질 것 같다. 역시나 내가 꼭 비행기 안에 타고 있어야만 한다. 이륙과 착륙 직전의 그 설레임은 낯선 곳에 대한 기대와 함께 증폭된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가는 공항은 내게도 즐거운 곳이다. 수많은 여행자들 속에서 그리고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면세점과 게이트 속에서 이미 나의 여행은 시작된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공항의 상주작가란 명목으로 일주일간 히드로 공항에 머물면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을 기술한 것이다. 히드로 공항을 소개하기 위한 마케팅적 기획(?)의 일환으로 제안받은 일이겠지만, 공항을 특히나 좋아하는 알랭 드 보통에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일이었으리라. 그는 공항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생각과 사색들을 풀어놓았다. 이별을 안타까와 하는 연인, 만남의 기쁨에 감격한 가족, 여행에 들뜬 수많은 사람들, 각국 환전소, 각국 인종의 다양한 사람들이 교차하는 이 곳은 활기와 낭만이 넘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보통은 공항의 이런 낭만적 정취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지 않는다. 고급 라운지에서 그들만의 지위와 부를 즐기는 자산가와 그곳을 청소하는 외국인 노동자 사이의 이질감, 제 3세계 노동자들의 손을 거친 기내식이 만들어지는 과정 등에 대한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지만 조금은 슬픈 생각도 들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해야하는 긴장감 넘치는 보안 요원들의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공항이란 곳도 결국 세계 각국 다양한 계층,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될 만큼 치열하고 냉혹한 곳이었다. 엄청난 노동력이 흡수되고, 또 엄청난 소비가 이루어진다. 어느 누군가에겐 여행의 설레임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낭만적인 공간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치열한 생존이 달린 곳이다.

공항에서의 일주일이라... 나도 몇년 전 히드로 공항에 내렸던 적은 있었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규모도 시설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인천공항이 제일 좋다.) 그런 히드로 공항에서 알랭 드 보통은 일주일을 보내며,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낼지 사실 궁금했었다. 하지만 역시 '보통'답게 단순히 공항에 대한 이야기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공항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 경쟁사회에 대해 꼬집고 있었고, 이런 이야기들은 단순히 여행과 쇼핑, 먹는 것에만 들떴던 내게 좀 더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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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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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별로 와닿지 않는 이 책 제목이 단지 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눈길을 끌었다. 요즘은 제목만 보고 충동적으로 가져다 읽는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제목의 의미가 와닿지 않으면 '내가 지금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 것인가...' 그 중심이 흐트러진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암스트레담'처럼... (물론 책 제목이 책의 모든 내용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이 어떤 내용이겠거니 나름대로의 생각의 흐름을 잡을 수 있는 초석은 되지 않는가...;;) 결국 '암스테르담'도 다 읽은 후에야 어렴풋이 그 의미를 짐작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전혀 모르겠더라. 왜냐면 포스트맨이란 자체가 이 책과는 전혀 생뚱맞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제목이 생뚱맞은 것은 그렇다 치고...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의 뒷부분에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폭력과 성애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판매금지를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느와르소설'의 장르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요 두줄 문구에 너무 기대(?)를 했었나 보다. 어디가 폭력적이고 어디가 성애 장면인가? 그리고 느와르소설?? 어디가??  이거 내 눈높이가 너무 높은 것인지, 아님 왠만한 폭력과 성애 장면엔 감정이 무뎌진 것인지 그저 밍숭맹숭 싱거울 따름이었다. 

이 책은 오갈 데 없는 떠돌이 프랭크가 간이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돈이 없었던 프랭크는 능청스럽게 거짓말로 너스레를 떨게되고, 이를 눈치챈 마음씨 좋은 주인 닉은 그에게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젊고 매력적인 닉의 부인 코라에게 한눈에 반한 프랭크는 닉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그때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코라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닉과의 결혼 생활에 실증을 느끼기 시작하던 차에 젊고 매력적인 프랭크가 유혹해 오자 쉽게 그와의 밀회에 빠진다. 결국 그들은 닉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닉을 죽이려는 프랭크와 코라의 치밀함에 다소 기분이 나빠졌고, 문제는 내가 그들의 행위에 큰 감흥이 안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나쁜 행위에 감흥이 안든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연한 소리가 꼭 그렇지 만은 않았다. 책에 어느 정도 몰입하게 되면 설사 주인공이 나쁠지라고 나도 모르게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고 감흥을 느끼는 작품들은 많이 있었다. 이 책은 그냥 바람난 남녀가 짜고, 남편을 죽이는 그냥 시덥지 않은 통속소설 같았다. 이런 비슷한 내용은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본 것 같다.
지나친 욕망과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이 책의 결말은 딱 그렇게 되었다. 큰 반전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없었던...내겐 지극히 식상하고 싱거웠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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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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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왠지 소설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을 일주일이 넘게 징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나마도 한챕터씩 띄엄띄엄 읽었기에 내용의 맥락이라든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정한 속뜻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조차 모르겠다. '다시 읽을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내용을 바로 연이어 다시 반복한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냥 애매모호한  상태로의 내 느낌을 몇자 끄적여 보고자 한다.

'암스테르담'... 이 소설의 결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지루한 듯 띄엄띄엄 책을 읽다가 뒷부분에 벼락을 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났으니 말이다. 솔직히 이 소설을 다시 제대로 반복하여 읽고 싶었던 이유도 이 예기치 않은 결말 때문이었다. 또한 '암스테르담'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상징적인 의미도 소설을 다 읽고 난 이후에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왜 제목이 암스테르담인지...표지 속의 저 여잔 뭔지 등은 솔직히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몰리라는 여자의 장례식에 몰리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그녀를 사랑했던 네 남자가 모이게 된다. 그들은 그녀의 남편인 출판업계의 재벌 조지, 유명한 작곡가 클라이브, 신문사 편집국장 버넌, 그리고 현 외무장관 가머니이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친구 사이이다. 이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몰리가 찍은 외무장관 가머니의 은밀한 사진이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사진을 신문에 공개하려 판매부수를 늘이고 정치세계에서 자신과 다른 입장인 가머니를 끌어내리려는 버넌과 이를 반대하는 클라이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우정이 깨지고 파멸로 치닫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들이 파멸로 치닫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의 약점을 자신이 단죄할 수 있다는 생각과, 상대의 약점을 발판으로 자신의 위치를 끌어올리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어줍지 않은 도덕성으로 상대의 도덕성을 판단하고 처분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클라이브는 자신이 사랑했던 몰리를 위해 가머니와 몰리의 극히 개인적인 추억을 망치지 말자는 것이었다. 또한 한 정치인의 사생활을 까발려 끌어내리려는 것이 비도덕적이라 생각했다. 그런 친구를 경멸했고 비난했다. 하지만 클라이브는 자신의 음악적 영감을 위해 강간당하는 여성을 그냥 외면해버렸다. 그런 그가 누구의 도덕성을 문제삼는단 말인가? 자신이 판단하는 도덕적 정당성은 상대의 도덕성 앞에선 한순간에 위선이 되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모두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언론인으로서 사실을 공표하는 것은 어쩌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인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면 비도덕적인 것일까? 음악적 영감을 망치고 싶지 않아 산길에서 다투던 남녀를 그냥 지나쳤다고 그가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요즘 뉴스를 보면 정치계나 사회계에서 서로를 헐띁고 비난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관인 일들이 많다. 아니 굳이 정치나 사회적인 일이 아니고도 나의 사생활 속에서도 숱하게 일어난다. '뭐묻은 개가 뭐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듯이..어느 누가 상대의 도덕성을 판단할 자격을 갖추었을까? 신이라면 가능할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같은 갈등과 다툼은 끝이 없어보인다. 아니 반대로 무감각해져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란 것이, 인간의 도덕성이란 것이 차차 무뎌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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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의 일생 규장각 교양총서 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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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여 양반 쌍놈을 논하는 것은 참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되었다. 아니 요즘 시대엔 아무도 내가 양반 핏줄임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능력있는 사람, 재력있는 사람이 세상을 주름잡는 시대다. '이 양반이~xxxxxx'라고 말할 때보면 양반이란 말은 요즘시대에 그다지 좋은 어감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시대가 변하다 보니 용어의 의미 또한 변한다. 그런 현대 시대에 양반의 일생을 논하는 이 책이 한편으론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싶기도 하다. 또 개인적으로는 조선과 양반이란 족속들을 그다지 좋게보지 않는다. 조선이 이백년이나 길게 끌었던 것과  국가 발전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유교 성리학을 논하며 머리에 힘주고 다녔던 양반들이 이 나라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이유가 조선과 양반을 비판하려함은 아니다.

그동안 많은 역사서들을 쳐다보았지만, 굵직굵직한 사건을 계기로 그저 한 흐름을 익히고 있었을 뿐, 속속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냥 수박 겉핧기 식으로 역사를 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한 역사는 이렇게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살펴보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한 시대를 주름잡는 영웅이나 사건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꿀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네의 삶 속에 지금도 역사는 흐르고 있다. 또한 이런 생활상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흥미롭기도 하다.

우선 이 책은 양반의 의미를 동양문화권에 속한 중국 명,청 시대의 사대부와 일본 도쿠가와 시대의 무사와 비교하고 있다. 이들 세 계급 모두 그 시대의 지배계층이었기에 비교에 의미가 있다. 사대부와 양반은 과거를 통해 습득된 계층이고, 무사는 생득적인 지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대부와 양반의 차이점은 과거 자체의 개방성 문제도 있지만, 양반은 세습적 성격이 강하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다시 말하자면 관료의 자격을 가진 사람의 후손도 양반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무사도 세습적이긴 하지만 아들 중 한명에게만 세습된다는 것이 후손 모두에게 양반자격을 받는 조선과 다르다. 즉, 양반의 신분은 법적으로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인 관습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조선사회와 이후 한국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역은 책으로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실제 사료와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양반 자손이 태어나면서부터 과거공부, 관직진출, 관례, 혼인, 가족제도과 가계계승, 제례 등 양반의 생활의 전반적인 것들을 설명한다. 이 외에도 유배생활, 선물경제, 주거문화, 양반가의 여성들, 지방 자치조직 향약 등 다양한 양반 사회의 문화도 엿볼 수 있다. 실제 기록과 문헌, 풍속도들은 이 책의 내용을 넘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혼인과 과거, 조선 양반 여성들의 생활상으로, 우리가 가끔 텔레비전 사극에서 얼핏 보던 모습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또한 조선하면 유교 성리학에 입각한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떠올리기 쉬운데, 조선초기는 남녀가 평등했던 시대였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재산상속, 제례 등 남녀 모두가 평등하게 행하였지만 후기로 오면서 유교적 가족 질서에 따라 제사를 받들고, 가족의 대를 잇는 장자의 책임이 점차 무거워지면서 아들의 위치가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어렴풋이 알았던 양반의 생활 상에 대해 자세히 알았고, 또 그동안 몰랐던 여러 문헌 자료와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책을 처음 접하였을 땐, 양반문화에 대한 안좋은 선입관으로 그들의 정신세계와 삶을 속속들이 씹어줄테다!! 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이렇게 말하는 난 양반출신이 아닐까? ㅋ 전에 읽었던 모 역사서에 저자가 양반에 대해 이것저것 씹어대면서 자신은 그래도 양반출신이라 말했던 장면에서 배꼽빠지도록 웃었던 기억이 난다.ㅎㅎ)  이 책은 조선의 문화이며, 현재를 만든 양반문화를 비교적 긍정적이고 소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양반의 생활이라기보다 조선시대 우리의 일반적인 생활상을 엿본 느낌이다. 물론 양반의 생활이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을 보여준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또한 현재 우리 사회에는(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옛부터 내려 온 가치관과 습관들이 곳곳에 조금씩 남아 있다. 제사는 어떻게 지내야 하며, 혼례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등등 이 책을 통해 그와 같은 인식들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가에 대한 뿌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과거의 생활 상을 알아보고 현재의 뿌리를 찾는 과정도 역사를 배우는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옛날 옛적에~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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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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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가 된 소녀, 그 소녀를 가엾게 여겨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었던 남자, 불구인 딸을 지키고자 자존심마저 버린 아버지... 이 세 사람 모두에게 강한 연민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특히 책속의 인물을 통해 자주 남발하는 이 '연민'이란 감정이 얼마나 무섭고 이기적인 감정인지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연민'이란 감정의 의미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헷갈렸다. 그저 상대를 측은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 수준을 넘어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민'은 그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냥 쉽게 마구 표현할 감정이 아니었다. 이 책 '연민'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섣불게 베푼 연민의 감정이 상대의 인생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양심의 가책으로 평생을 고통받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 남자가 하반신 불구의 소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남자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과 불구의 소녀에 대한 연민으로 그 소녀에게 사과의 꽃다발을 보낸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남자는 소녀와 소녀의 가족과의 복잡하고 불편한 관계에 휘말리게 된다. 남자는 집 밖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소녀의 말벗이 되어주고, 그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다. 외로웠던 일상에 다정함으로 다가온 남자는 차츰 소녀의 전부가 되어 버린다. 소녀는 남자와의 만남을 더욱 기대하게 되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한편 소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딸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고통스럽다. 자기 자신도 병이들어 죽어가고 있었지만 딸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딸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남자가 소녀와의 관계를 끊지 않도록 매달리기도 한다. 소녀와 소녀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남자는 그들에게 소녀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왜곡된 희망을 심어준다. 이것이 나중에 더욱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게 된다. 

 
소녀의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당황스러워진 남자, 소녀에겐 남자가 유일한 삶의 희망이 되어버린 것을 알고 있기에 남자는 그녀를 확실히 거부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소녀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내몬다. 연민과 양심의 가책 속에 갈팡질팡하는 유약한 남자를 보며, 한낱 섣불리 품었던 '연민'의 감정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하는지 느끼게 한다.  결코 악의가 없었던 한 남자의 순수한 마음이 이런 결말을 초래했다는 사실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자신의 감정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대부분 그다지 계산적이지 못해서 너무나도 많은 실수를 범하지만, 그것이 악의 없는 실수였을지라도,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혹여 책임을 회피했을지라도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은 씻을 수가 없다. 사랑보다 더 지독한 감정, 그것은 바로 '연민'이었음을 느꼈다.

 
사소한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른다. 후진국을 여행하다 보면 아주 어린 아이들이 여행객들에게 모여든다. 동전 한닢 또는 먹을 거 하나라도 얻어 먹기 위해 벌떼같이 모여든다. 한참 밝은 모습으로 뛰어 놀아야 할 어린 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구걸을 하는 것이다. 불쌍한 마음에 달러 하나 쥐어주면 매우 기뻐하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면 내 마음도 즐거웠다. 하지만 가이드는 여행객들에게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깟 몇푼어치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내가 베푼 작은 동전 한닢이 그들이 스스로 일하려는 의욕을 짓밟고, 평생 앵버리의 삶으로 그들을 내몬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눈앞의 그들이 불쌍해 보여, 몇푼어치 선행을 인심쓰듯이 남발한다. 

 
내가 상대에게 갖는 '연민'의 감정이 진정 상대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보게 한다. '연민' 이란 감정 속엔 어쩌면 내가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것과, 나보다 못한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풀었다는 자기만족감이 대부분이 아닐지 생각한다. 설사 그것이 순수한 감정에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결국 남을 위한다는 것보다 자기를 위한 이기심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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