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네 집 - 파리 리볼리가 59번지, 유쾌한 무법자들의 아틀리에
장은아 지음 / 시공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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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무법자들의 아틀리에... 로베르네 집~
무법자, 불법 점거라하면 왠지 좋지 않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누군가가 빈 상점에 들어가 불법 점거를 하며, 어떤 일을 벌인다면 당장 경찰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칭 KGB라 불리는 세명의 아티스트들(칼랙스, 가스파르, 브루노)이 파리 리볼리가 59번지의 어느 빈 상점을 불법점거하여 그들만의 자유로운 예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곳의 이름은 ’로베르네 집, 자유로운 전자’이다. (로베르란 프랑스에서 흔하디 흔한 남자 이름으로 원래부터 건물의 간판에 그 이름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자유로운 전자는 말그대로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을 나타낸다. 

로베르네 집을 점거하고 있는 16명의 아티스트들은 모두 아마추어 예술가다. 예술을 전문적으로 배웠다기보단 스스로가 예술에 심취해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마 타고난 예술적 끼가 있는 사람들이란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각자가 모두 개성이 철철 넘친다. 예술가로서의 이야기와 그들이 표현한 작품 이야기도 재밌지만 한사람한사람의 독특함에 책 읽는 일이 즐거워졌다. 개중에는 미술을 시작한지 8개월밖에 안돼는 신참내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예술을 공유하며 함께 각자의 개성과 열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일반인들에게도 무료로 개방되어 그 자유로운 열정을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는 많았다. 우선 법적 건물주인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불법점거로 경찰에 신고를 했고,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이들 예술에 대한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언론, 일부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로베르네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유예기간이 길어졌고, 이들을 강제추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점차 둔화되어 갔다. 결정적으로 좌파 출신이 파리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이들의 유예기간은 한층 더 길어졌다. 로베르네 집은 년간 4만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모이는 파리에서 세번째로 많은 관람객을 가진 명소가 되었다.

일반 미술관을 떠올려봤다. 어느 곳이나 비슷한 조명에 은은히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예술 작품 속에 아무리 자유로운 감각이 표현되어 있을지라도 왠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간극이 느껴진다. 예술은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어떤 고귀한 가치가 있는 성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예술의 수준높은 가치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가 느껴져서는 쉽게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로베르네 집은 모든 규격화와 폐쇄성을 거부한다.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보며 내 작품을 구상하기도 한다. 작품을 만져볼 수도 있고 토론할 수도 있다. 창작과 전시, 관람과 소통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예술이고, 생활 속의 예술이며, 바로 내가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의 예술이다. 프랑스의 예술적 감각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일반인들과의 소통문제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예술은 어떻게 생각하면 무한한 자유와 열정의 표현이다. 규격화, 정형화된 틀 속에서는 그 자유의 표현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답답한 미술관... 자기만의 아틀리에에서 혼자 골몰하는 격리된 예술가.... 
 

우리나라도 열린 공간에서 자유로운 표현과 소통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 공간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책을 통해 난 진정한 자유와 열정을 느꼈다. 또 굉장히 통쾌했다. 여러 미술책들을 읽었지만, 이 책만큼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드는 책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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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 북유럽에서 만난 유쾌한 몽상가들
박수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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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오후 두시의 기억...제목이 왠지 낭만적이고 시적이다..
평일 오후 두시, 바로 지금쯤이면 한창 오후 업무가 바쁘게 돌아갈 때도 있지만 오늘 같이 식후 나른함으로 커피 한잔에 여유를 부릴 때도 있다. 특히 이런 봄날엔 그 나른함이 더욱 커진다. 또 창가로 햇빛이 짜릿하게 느껴질 때는 막 밖으로 뛰어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곳에서의 오후 두시는 햇살의 나른함과 충만함이 교차하는 한낮의 절정이다. 하지만 스톡홀름, 그 이름만으로도 꽤 이질적인 그곳은 오후 두시에 이미 해가 넘어가고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단다.  북극 바로 아래에 위치한 스칸디나비아라 부르는 그곳에선 한밤 중에도 환한 백야현상도 있는 나라니, 한낮에 컴컴해진다고 해서 그리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평생 경험해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우리나라와는 아주 많이 다른 곳, 더군다나 아는이 하나 없는 낯선 곳을 일부러 찾아 떠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 책의 작가인 박수영씨다. 철저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느끼고 싶었단다. 단순히 여행을 목적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새로운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더군다나 불혹의 사십을 넘긴 나이에... 

이 책은 작가가 그곳에서 겪은 삼년간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제목처럼 그리 낭만적인 이야기도 아니었고, 이국의 정취에 대한 감상을 적은 것도 없었다. 솔직히 이 책이 여타 다른 여행에세이처럼 이국적 정취만을 이야기한 책이었다면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상한 여행에세이는 이미 질릴만큼 읽었으니깐... 

이 책속엔 낯선 곳에서 각기 다른 국가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겪은 생생한 일상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들 일상의 이야기 속엔 그들의 사랑, 고민, 정체성 등에 대한 갈등 등 여러 소소한 것들도 많았지만, 그 일상 하나하나에서 스웨덴의 사회와 더 나아가 외국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 사회의 실상을 통찰력 있게 짚어내고 있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이런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와 관점이다. 어찌보면 일상 이야기만으로 자칫 가벼워질 수 있고, 사회, 역사 이야기로 자칫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끌어내고,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해볼 꺼리를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스웨덴 사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회적 약자나 이방인들을 대하는 그들의 '평등'이라는 정책 모토였다.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그저 형식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잘 실현되고 있었다. 외국인인 작가조차 스웨덴에 3년간 체류하면서 한번도 위축되거나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단다. 사회주의나 사회복지라는 그들의 정책이 살짝 부러운 생각이 든다. 말로만 민주주의에 평등 운운하면서 돈있는자, 권력있는자가 보호받고 약자는 철저히 짓밟히고 무시되는 우리나라 사회의 지금 현실이 너무 속쓰렸다.

또 작가가 역사학도인만큼 우리나라와 세계를 아우르는 역사적 통찰의 시각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근대화를 먼저 시작한 일본과 우리의 역사도 되짚어보기도 했고, 강의실에서 만난 독일과 일본 지식인의 시각을 통해 전쟁 후 그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과  관점의 차이, 그리고 아직도 끊임없이 불거저 나오는 인종 이데올로기 문제까지도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스웨덴 사회의 현실을 여러가지로 알게 되었다.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기에 더욱 생생하게 와닿았다.  또 단순히 스웨덴에 가고싶다, 스톡홀름을 여행하고 싶다는 차원을 넘어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더욱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오후 두시, 난 이 책과 함께 이런저런 잡생각으로 허튼 오후의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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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링 사이언스 - 언론은 과학기술을 어떻게 다루는가
도로시 넬킨 지음, 김명진 옮김 / 궁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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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까지 과학월간지를 정기적으로 구입해서 읽었었는데, 요즘은 다른 문학작품 속에 빠지다 보니 과학에 대한 전문 기사를 접한지 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잡지나 전문 칼럼을 보지 않더라도 과학계 뉴스를 접할 기회는 많다. 어떤 연구에서 세계 최초로 성과를 거두었다느니, 의학계에 어떤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었다느니 하는 소식들은 신문이나 티비 뉴스를 통해 종종 듣는다. 또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는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를테면 '지구 온난화는 사기??' 같은 것들....

이런 것들 이외에도 우린 뉴스에서 접한 과학지식을 갖고 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고민을 하기도 한다. 우유를 많이 마셔야 할까? 커피가 몸에 좋은 걸까?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할까? 수면은 몇시간이나 취해야 몸에 좋은 걸까? 등등 ... 생활 속 사소한 하나하나가 따지고 보면 과학적 사고의 발상이 된다. 하지만 그 과학적 고민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과학이란 학문 자체가 비전문가들에게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분야임은 사실이니깐....따라서 잘 모르는 분야 대한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객관적이다 하는 것이 꼭 장황한 이론적 설명이 필요하단 이야긴 아니다.)  좋지 못한 보도(?)는  대중을 오도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과학 정보나 지식을 얻는 곳은 교육이나 책이라기보다는 언론매체를 통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정확하고 편파적이지 않은 객관적 보도가 얼마나 중요함을 알 것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과학계 뉴스만의 이야긴 아니다. 이 책은 언론매체들이 갖는 자극적인 과학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지구온난화 사기' 같은 문구도 어떻게 보면 자극적인 문구로 대중을 현혹시킨다.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일반 대중들은 비판없이 '사기'라고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다.)

과학 분야에 대한 뉴스는 그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이미지 전달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향이 많다.  대부분 객관적이라기보단 과대홍보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치 그 과학기술 하나가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변하게 할 특정 어떤 것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일부 과학자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연구비를 끌어들일 목적인 경우도 있고, 일부 회사들은 과학관련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론을 이용한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과학자들은 개인이 연구한다는 차원을 넘어 기업의 연구지원이나 의회가 승인한 정부 자금에 의존하게 되었고, 언론을 통한 홍보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는 현실이다.

보도의 문구도 '가장 ~~ 한' 내지는 '세계 최초의~'  '한국 최초의~'라고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많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적을 바라는 어떤 획기적인 것으로 생각되게 한다. 예를들면 의학분야의 어떤 치료를 발견했을 때 언론은 그것을 '마법의 탄환' '생명의 청사진' 등의 자극적인 문구로 단번에 대중을 현혹시킨다. 하지만 그 예측이 실패했을 경우, 언론은 가차없이 환멸적인 이미지의 기사를 쏟아놓은다. 생명공학에 관한 보도의 경우 언론은 독자들을 생명공학의 기적에서 묵시록적 전망으로, 진보의 예찬에서 위험에 대한 경고로, 낙관주의에서 의구심으로 언론의 변덕스러운 경향을 엿보았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기자들의 기술 관련 홍보 열정과 대중의 유행에 반응하면서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는 흥분되는 뉴스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언론의 이해관계와 잘 부합한다. 또 과학이 스포츠 분야도 아닌데, 최초의 결과를 얻어내려는 경쟁에 초첨이 맞춰저 그것을 부축인다. 첨단 기술을 다루는 기사의 언어는 경쟁, 투쟁, 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신문이나 언론매체의 주 수입은 주로 광고이기 때문에 각 기업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고, 어떤 사실에 대한 기사를 낼 때 기업들로부터 압력을 받는다. 광고수입을 제공하는 기업의 이해관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이 기사에 반영될 수 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연구비 지원을 위해 성과를 과대포장하기 바쁘고, 기자들은 매일매일 시간에 쫓기듯 흥미기삿거릴 찾고...한마디로 과학도 이젠 잘팔리기 위해 대중의 주목을 받아야하는 상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되어간다는 현실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페단인 것 같다.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때는 한없이 인지도가 상승했다가 사소한 실수나 잘못을 드러나면 끊임없이 추락하게 되는 현실....그것을 조장하는 언론 ... 무섭다. 어쨌든 잘 팔리기 위해 경쟁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과대포장이란 행태가 만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태들을 공정해야 할 언론이 앞서 조장한다는 것이 참 안타깝기만 하다. 이 책이 과학계 뉴스를 초첨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지만, 예전부터 뉴스는 반만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내겐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의 책이었다. 또 우리나라 현정부를 생각하면 뉴스에서 지껄이고 있는 모든 내용들이 모두 정부의 시나리오에 의해 각색된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언론의 객관성과 공정성,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그런 언론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아둔한 국민들이 늘어가는 것도 한심스럽기도 하다. 누굴 탓하겠는가...

또 한가지, 이 책의 작가 도로시 넬킨은 사회학자로, 전에 <인체시장>이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도 느낀 것이지만, 과학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만 해석한 경향이 많다. 이 사람 이야기가 모두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소 편파적인 시각에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잘못된 언론을 비판한 책이었지만, 과학계 또한 싸잡아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페단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어쨌든 과학의 중요성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간과하지 않도록 대중의 이해를 돕는 바른 언론이 정립되는 풍토가 조성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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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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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위해, 아들을 위해 한평생 피를 팔아 살아가는 한 남자, 허삼관의 인생역정....이책 허삼관 매혈기의 내용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돼지간볶음 한 접시, 황주 두냥..'  허삼관이 피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 들러 습관처럼 행하는 일종의 몸보신 의식이다. 참, 한가지 의식이 더 있는데, 피를 팔기 전에 피를 묽혀 많이 늘리기 위해 여덟대접의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행위들이 매우 해학적이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돼지간볶음 한접시와 황주 두냥을 먹는 그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육체노동으로 몇날 며칠을 고생해야 벌어야 하는 돈을 피를 팔면 단숨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피를 팔면 근심걱정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한결 덜어 줄수 있다. 결국 허삼관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는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피를 팔아 위기를 넘긴다.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 세 아들에 대한 허삼관의 부성은 지극하다. 하지만 일락이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허삼관의 태도는 변한다. 자신의 피를 판 돈을 친자식이 아닌 일락이에게 쓰는 것이 아까워진 것이다. 일락이를 둘러싼 친부와 허삼관 주변의 이야기는 굉장히 우습게 느껴지면서도 결국은 가슴이 찡해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이 부분이다.

문화혁명기를 전후한 시기 온 가족이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던 때, 허삼관은 피를 팔아 가족들에게 국수를 사먹이기로 한다. 친자식이 아닌 일락이를 떼어놓고 온 식구들이 국수를 먹으러 가자, 일락이는 마음이 상해 자신의 친부를 찾아 집을 나가버린다. 하지만 친부에게서도 외면받은 일락이는 거리를 헤멘다. 늦은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 일락이가 걱정이 된 허삼관을 결국 그를 찾아 나선다. 거리 끝에서 일락이를 발견한 허삼관은 그를 업어들고 쉴 새 없이 욕을 퍼붓는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 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 거 아니냐. 널 십일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 그 개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일 원도 안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다.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하련다.... " 등에 업힌 일락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묻는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에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p.192>

겉으로는 욕을 퍼붓고, 차갑게 대해도 결국 부성이란 이런 것이다. 일락은 허삼관은 아들이었고, 허삼관의 아들들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그리고 그가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그의 부성은 후에 자신의 목숨을 빼앗길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피를 팔아 병든 일락이를 살려낸다.  

"내가 널 십삼 년 동안 키우면서 때리기도 했고, 욕도 했지만 마음에 담지는 말아라. 다 널 위해서였으니까. 십삼 년 동안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p.205>

읽을 땐 피식피식 웃으며 넘겼던 책장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또 우리 아버지가 계속 떠올랐다. 등에 늘 자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지금까지도 그 짐을 선뜻 내려놓지 못하시는 우리 아버지...허삼관은 평생 피를 팔아 자식을 먹여 살렸다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 아버지의 피를 빨아가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자식을 위해 평생을 일하셨는데, 정작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반이나 헤아릴런지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생각들을 더욱 뼈져리게 느끼게 했다. "양심은 개한테 갖다줬냐?" 라는 물음엔 나 자신 또한 가책을 느꼈다. 나의 가책을 두고두고 갚을 수 있을만큼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하는데...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내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란 생각이 든다.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아버지 모시고 가족들끼리 외식을 해야겠다. 돼지간볶음...은 아니구..돼지갈비에 소주나 한잔 사드려야겠다. 이 시대의 모든 자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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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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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흰머리가 생기고, 갈수록 얼굴에 주름이 느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모습으로 변해가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왠지 슬퍼진다. 늙는 것은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자식들 낳아 키우고 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십대 이십대 시절의 감성적인 사랑이나 상큼하고 들뜬 열정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나이도 아직까진 한창 때라 할만하지만, 슬슬 '요새 어린 것들'과의 거리감이 점점 더 많이 느껴진다. 옷입는 것, 먹는 것, 말하는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모든 관점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또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발끈하던 것들이 점점 더 무던해지는 것은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것일꺼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나이라는 테두리와 무게에서 오는 관념적인 구속일 수도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진정 사랑에 빠지면, 훨씬 무분별하고 용감하고 순수해진단다. 나이처럼 하찮은 것들은 사랑에 빠진 이들을 두렵게할 꺼리가 못된단다. 얼마 전 극장에서 본 영화의 내용도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40대 여자가 20대 남자가 사랑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도 그런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직 내가 그만큼 나이를 많이 먹지 않았고, 열정적 사랑에 대한 경험이 그다지(?) 없어서인지, 이런 사랑들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지만, 이 책은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굉장히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아마 이 책이 작가의 자전적 색체가 짙게 묻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내용은 작가의 어머니의 편지로 시작한다. 딸을 보러 오라는 사위의 초대를 거절하는 답장으로, 그 이유는 '자신이 기르고 있는 붉은 선인장이 곧 꽃을 피울 것 같아서'였다. 그런 순수한 열정은 어머니의 삶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결코 평탄한 삶은 못되었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작가는 비슷하게 이어간다. 두번의 이혼, 여러가지 부적절한 관계 등... 이제 오십이 넘은 작가는 과거 서투른 사랑의 실패를 회상하며, 이젠 모든 열정과 사랑에 초연해지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뒤늦게 다시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 흔들리고 설레인다.

상대 남자는 자신보다 열다섯살이나 어린 젊은 남자이다. 그녀는 나이는 겉치례에 불과한 하찮은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늙어버린 자신의 얼굴과 손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남들이 그들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 신경을 쓴다. 게다가 비알을 좋아하는 엘렌이란 젊고 예쁜 처녀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지우고 젊은 남녀를 엮어주려 애쓰기까지 한다. 그리고 비알을 엘렌에게 보낸다.

자신의 뒤늦게 온 사랑에 설레고 수줍어 하고, 자신의 열정에 괴로워하면서도 선뜻 남자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주인공의 심리가 너무도 섬세하게 그려졌다. 이성으로는 애써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지만, 감성적으로 남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친애하는 남자여, 영원히 안녕, 그러나 당신을 환영합니다. <p.30>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는 프랑스에서는 제법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그녀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이 소설이 자신의 모델이라고 표현하였지만, 그녀의 평탄하지 않았던 삶의 일부, 어린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추억, 사랑 등에 대한 그녀의 내면과 바람들이 고백하듯이 그려져 있었다. 솔직히 그녀가 겪은 사랑이 매우 아름답다거나 쉽게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치 시와 같은 감성적인 문체와 글귀에 금새 심취되었다. 그 글귀들은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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